1936년 12월 12일 새벽 3시.
장학량, 양호성의 명령을 받은 동북군 1개 중대 200명이 서안 외곽 16km 떨어진 임동의 온천휴양지인 화청지의 호텔을 급습합니다. 그곳에는 장개석이 머물고 있었죠. 동시에 동북군 1개 사단과 서북군 1개 연대가 서안시내에 진입해 섬서성정부를 비롯한 관공서, 경찰서, 남의사본부, 서안비행장등 주요 거점을 모조리 점령합니다. 장개석 참모들의 숙소였던 영빈관도 급습해 모두 포로로 합니다.
장개석은 취침중이었는데 정문의 보초들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곧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태평하게 방심하고 있던 장개석의 경호대는 대부분 잠에 빠져 있었고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 무장해제됩니다만, 그 소란중에도 장개석이 튈 시간만큼은 벌죠. 그는 비서 한명만 대동한채 잠옷차림으로 허둥지둥 뒷산으로 튀었습니다. 그러나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그는 엄동설한에 멀리 튀지는 못한채 금새 계곡의 바위사이에서 발견됩니다.
"쏴라!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내라."
장개석이 외치자 반란군의 대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각하가 우리를 이끌고 일본과 대항하기를 요청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루밤의 소동으로 끝난 서안사변은 중국 전체를 흔들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개석과 장학량, 또 모택동과 홍군의 운명 또한 바꾸어 놓았습니다.
<쿠테타 다음날 신문 첫면을 장식한 서안일보>
출처 : http://www.tnngo.com/History/12/12/Xian_Incident.html
장학량의 빠더이자, 봉천군벌의 거두 장작림은 원래 두메 산골의 쥐뿔도 없는 농민 출신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생활력도 없는 한량주제에 도박까지 했다가 있는거까지 쫄딱 말아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소시적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도박, 삥뜯기, 앵벌이 등 주로 남들 뜯어먹는 생건달) 청일전쟁때는 졸병으로 복무했고 제대후에는 만주에서 도적이 되었습니다. 장남인 장학량도 다른 조직한테 쫓겨 도망다니는 와중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시작부터 기구한 인생이죠.
< 장작림 증명사진찍은거 >
러일전쟁때는 일본군한테 붙잡혀 총살당할 뻔하다가 일본군의 스파이가 되어 살아남았고, 당대 실세였던 원세개의 충복이 됩니다. 출세 가도를 달리며 마적주제에 봉천성장까지 되지만, 그 과정에서 "자이언트"의 정보석 빰칠 정도로 온갖 비열한 짓거리는 다하죠. 나중에는 보스인 원세개의 뒷통수까지 까줍니다. 원세개가 화병으로 죽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해 주기도 하죠.
일본군과 결탁해 막대한 원조를 받은 그는 그 돈을 배경으로 비겁한 음모를 꾸며 길림성과 흑룡강성까지 장악합니다. 그리고는 원세개 없는 산에서 토끼가 왕이라고 자기도 천하를 노립니다. 북경을 장악하고 있던 직군과 손을 잡고 환계군을 격파하기도 하지만 다시 직군과 패권을 놓고 싸웁니다. 처음에는 쓰라린 패전을 당하지만 심기일전하여 제2차 봉직전쟁에서는 최대 라이벌이자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던 오패부를 아작내 "천하인"이 됩니다. 이때 봉천군의 세력은 북으로는 만주에서 남으로 상해, 남경까지 장악하여 거의 천하의 반을 차지합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절정기였죠.
< 붉은 선 윗쪽이 한때는 잘나갔던 장작림제국의 최대 판도 >
그러나, 우리의 매직장(장개석)께서 동남쪽 광동의 쪼그만 땅덩어리를 기반으로 북벌을 시작합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장개석은 상해 재벌들의 후원속에 손전방, 오패부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승승장구하며 당대 최강의 군벌이었던 장작림까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줍니다. 장작림은 완전히 박살나서 쓰라린 속을 달래며 만주땅으로 돌아가던 중 객사하죠.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관동군이 폭탄으로 열차와 함께 황천길로 보내드린 것입니다.
이당시 장학량은 아빠 장작림의 부하장수로서 봉천군의 일선 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장작림은 설마 자기가 그렇게 세상하직할 줄 꿈에도 몰랐기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장학량이 장남이기는 하지만, 북조선의 김씨왕조처럼 반드시 장자상속하라는 법이 없었죠.
< 장학량 증명사진 >
※ 사진출처 : http://blog.chosun.com/njkorean/1973179
장작림의 후계자를 놓고 장작상, 장경혜, 탕옥린, 만복린 등 쟁쟁한 인물들이 싸움을 벌입니다. 이들은 풋내나는 장학량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아버지를 닮아 정치적 수완과 베짱, 결단력이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소시적에는 하도 제멋대로 살아서 "멍청이 아들"라고 불리기도 했지만(왠지 오다 노부나가?) 그것은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는 온갖 책략과 음모를 통해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잽싸게 봉천군벌의 새수장이 됩니다. 그리고 장개석의 편을 들어 "동북역치"를 선언하고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이라는 거창한 직위를 얻게 됩니다. 한마디로 장개석 다음의 No.2가 된 것이죠. 여기서부터 봉천군은 중앙군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동북변방군", 즉 동북군으로 개칭됩니다.
뒤이어 벌어진 중원대전에서 장개석은 일대 위기에 처하지만, 장학량의 지원은 승패의 결정적인 것이 됩니다. 장개석과 팽팽하게 대치하던 염석산, 풍옥상, 석우삼의 후방을 뒷치기하자 반장세력은 순식간에 붕괴되었죠. 그 여세를 몰아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산해관 너머 북경-천진과 산동등 화북 일대를 장악합니다. 이때가 장학량 인생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잘나가던 상승 곡선도 여기까지였습니다.
장학량의 목적은 남들한테 아무 간섭받지 않고 만주와 화북을 통치함으로서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이었는데. 장개석한테 거부당하고 또 그가 주도한 "화북치안회의"에서도 화북일대의 군벌들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여기다 염석산이 산서에서 다시 재기하여 장학량을 위협합니다. 또한 31년 7월 19일에는 중원대전중에 자신에게 항복했던 석우삼이 "화북왕"이 되겠다며 다시 반란을 일으킵니다. 군벌시대 제일의 "카멜레온"이라 불리는 이 사내는 큰소리친지 2주일도 못버티고 박살납니다. 그런데 동북군과 연합했던 중앙군, 산서군이 석우삼의 영토(원래는 장학량의 영토였던)를 잠식함으로서 장학량의 영토도 그만큼 쪼그라들게 되죠. 그는 평진(북경-천진)지역만 간신히 확보합니다. 이 도움 안되는 카멜레온은 일단은 튀지만, 결국 멍석말이 당해서 황하강물에서 물고기 식사가 됩니다.
장학량은 북경을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휘하 병력을 계속 증파하여 최대 15만명이상을 투입하지만, 이때가 바로 일본군의 위협이 점점 높아지고 있을때였죠. 부하 장작상이 "관동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욕심 버리고 만주로 돌아오라"라고 건의하지만, 장학량은 눈앞의 떡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장학량은 거부하고 "일본과 부딪쳐 쓸데없는 일을 만들지 말라"라는 지시만 내립니다.(송한용교수 "장학량의 부저항정책")
일반적으로 장학량은 항일의식이 넘치는데 장개석때문에 싸울 수 없었다, 라고 알려져 있지만 전적으로 역사 왜곡에 불과합니다. 장작림이든, 장학량이든 그들의 기반자체가 일본의 지원과 협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학량은 영내에서 국민들의 반일시위를 탄압하고 우리 독립군을 비롯한 항일세력들을 토벌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 그들과의 충돌을 피합니다.
그럼에도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만주를 침공합니다. 당시 북경에 있던 장학량은 마땅히 전력으로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함에도 "저항능력이 없다"라는 이유로 "저항 금지"를 명령했고 전의를 상실한 북대영을 비롯한 남만주의 동북군은 별저항없이 퇴각하거나 탈영하고 일본군에 투항합니다. 북만주에서 마점산과 정초의 부대만이 잠깐 저항했을뿐이죠. 때릴때 가만히 있으면 덜 맞을거라고 생각했던 장학량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멈추지 않고 만주 전역과 열하까지 공격해 산해관 동쪽 전체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천진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바짓사장으로 내세워 장춘을 수도로 하는 만주국을 건국하죠.
계속되는 일본군의 공격에도 장학량은 싸우는 시늉조차 제대로 못했고 열하마저 빼앗기자 모든 것을 버리고 유럽으로 수행을 떠납니다. 1년뒤에 다시 돌아와서 앞장서서 장개석을 찬양하며 스스로 그의 꼬붕이 되겠다고 하고 "사유학회"라는 팬클럽도 조직합니다. 당시 그의 처지로서는 장개석의 바지저고리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장개석은 그런 그를 외면합니다.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본 것이죠. 하북성장인 우학충을 비롯해 동북계 우두머리들을 하나씩 밀어내어 장학량의 손발부터 끊어나가죠. 그리고 한창 모택동이 2만5천리의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던 1935년 여름 장학량을 "서북초비부사령관"으로 임명해 섬서성의 서안으로 보내버립니다. 그기서 공산당을 무찌르고 명예를 회복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죠.
그는 남은 10만의 부하들을 데리고 서안으로 가서 곧장 홍군 제15군단과의 전투에 투입됩니다. 처음에는 이판사판인 그로서는 적극적으로 싸웠죠. 그러나 상대가 상대다 보니 숫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했음에도 결과는 6화에서 언급했다시피입니다.
노산과 직라진전투에서 2개 사단이 전멸하고(109사단, 110사단) 2명의 사단장이 전사, 1명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장개석은 "자신을 실망시켰다"라며 원조와 보급까지 중단시킵니다. 한때는 천하를 노렸는 그가 이제는 근거지도 잃고 뜨네기 신세가 된데다, 남은 것마저 다 잃을 판이었죠. 그런데 이런 장학량과 똑같이 처량한 신세인 친구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같이 초공에 투입된 양호성의 제17로군이었죠.
양호성도 장작림과 같이 섬서성의 마적출신이었습니다. 서북군의 우두머리인 풍옥상의 밑으로 들어갔다가 중원대전중에 배신때리고 장개석 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섬서성 주석이 되죠. 이때는 참 기분좋았겠지만 풍옥상이 멸망하자 그도 장개석에게 배신당합니다. 섬서성 주석에서도 쫓겨나고 홍군과의 싸움에 총알받이로 투입시키죠. 그리고 장학량의 동북군과 함께 싸우게 되죠.
이방인에 대한 텃세를 부리는 등, 둘은 처음에는 사이가 매우 나빴지만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죠. 둘다 "장개석한테 버림받은 마누라"같은 신세로서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이해하며 애정으로 어루만져주는 그런 야시꾸리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양호성은 섬서성 주석에서 쫓겨나 홍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었을때부터 "장개석의 소모품이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홍군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변환경에서 장개석과 일본, 홍군의 사이에 끼여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장학량이 어떤 길로 빠질지는 뻔한 것이었죠.
한편,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화북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죠. 열하성서쪽의 찰합이성과 북경, 천진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경제적으로도 예속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미 30년대 초반에 상해와 만리장성에서 쓰라린 패전을 경험한 장개석은 전쟁 대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국민들에게 "매국노"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무조건 당장의 홍군 토벌에만 눈이 멀어 이완용처럼 일본의 모든 요구를 무턱대로 받아들이고 주권을 팔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이 화북 군벌들을 매수한후 소위 "화북5성 자치운동"을 꾸며 화북 5성을 독립시키려 하자 송철원 등을 파견해 일본군의 음모를 분쇄하는 등 전쟁이외의 방법으로는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또한 홍콩을 통해 독일로부터 막대한의 무기를 수입하죠. 분명 장개석은 일본과의 전쟁 자체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가 문제였죠.
솔직히 당시 가장 강경한 지도자들조차도 공공연히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고, 더욱이 중국이 분열되고 총력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무턱대고 여론에 휘둘려 즉흥적으로 국가를 전쟁으로 끌고 갈수 없다는 것은 지도자로서는 당연하고 냉철한 판단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는 장개석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행정적 재능은 대단한 것으로 그 전임자들과 군벌들이 멋대로 질러놓은 막대한 외채의 거의 대부분을 그 짧은 기간동안 갚아 재정을 상당부분 안정시킨데다 관세자주권도 되찾았습니다. 그는 중국을 완전히 통일시키고 계획대로 무기 수입을 해서 군을 현대화시킨다면 그 다음에 얼마든지 일본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레이황의 "장개석의 일기")
민중은 원래 보이는 것만 보는 법이지만, 문제는 장개석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생각일뿐 국민의 공감대를 얻은 것은 아닌데다 설득보다는 탄압을 하는 쪽을 택하다보니 모두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히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은 것이죠.
장개석은 서안으로 보낸 장학량과 양호성의 실적이 영 시원찮고 다음해인 36년부터는 이것들이 아예 싸우는 시늉도 제대로 하지 않자 10월 직접 서안을 방문해 두 사람을 볶아댄후 돌아갑니다. 장학량은 초공 대신 항일을 주장하지만 장개석한테 묵살되죠.
12월 4일 그는 다시 서안으로 옵니다. 양귀비가 몸을 담궜다고 유명해진 온천관광지 화청지에 머물면서 장학량과 양호성에게 "한달내로 공산비적들을 무찌르던가, 아니면 우리가 나설테니 니들은 남쪽의 복건성으로 갈래?" 양자택일 하라고 최후 통첩을 합니다. 한때는 의형제를 나누었던 장개석, 장학량 두사람의 관계는 이것으로 갈때까지 간 것이죠. 여기다 12월 9일에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일 시위까지 열리는데 장개석은 "기관총은 뒀다 어디 쓰냐?"라며 초강경 진압을 강요합니다. 결국 사면초가에 몰린 장학량과 양호성은 쿠테타를 결심하게 된 것이죠.
※ 서안사변의 원인과 경과 : http://blog.naver.com/atena02/100118014557
포로아닌 포로가 되어 목숨까지 간당간당했던 장개석은 다행히 2주후 성탄절특사로 방면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그 어떤 약속도 문서로 남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이 했던 "초공중단"과 "항일" 약속만은 지키죠.(다른 약속들-민주화, 언론의 자유, 장학량과 양호성 "우리를 미워하지 마세요" -등은 안 지킴)
장학량, 양호성은 특별히 공산당 살리자고 한 것이 아니라 발등에 불 떨어진 자신들이 살기 위해 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은 XX되고 공산당만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장학량은 올드보이의 최민식 마냥 평생동안 집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감금 신세가 되고, 양호성은 외국을 전진하다가 국공내전 말기에 살해당하죠. 그래도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역사에 남았으니 그것대로 된 것인지도....
어쨌든 서안사변은 위의 두 인간은 몰라도 공산당에게는 그야말로 "할렐루야"였습니다. 초공은 전면 중단되고, 1937년 2월 국민당 전당대회를 통해 공산당은 합법화됩니다. 그들은 인구 200만에 12만㎢ 의 자그마한 영지도 인정받죠. 연안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방면군(제18집단군), 약칭 "제8로군"으로 재편성되었고 총지휘는 주덕이 맡죠.(모택동은 공산당 주석) 총병력은 3개사단(115, 120, 129사단) 6개여단 2만명이었죠. 이와는 별도로 호남, 강소등 남쪽 동네에도 얼마간의 생존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편 제4군, 약칭 "신4군"으로 편성됩니다.(군사령관 : 엽군) 병력은 4개지대 약 1만에서 1만3천정도였습니다.(자료마다 차이 있음) 이렇게 해서 근 10년간의 제1차 국공내전은 막을 내리고 서로 손을 잡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서안사변이 없었다면? 홍군은 멸망하고 일본과의 전쟁은 없었을 것인가.
저는 서안사변이 중국 근대사에 중대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없었다 해도 역사에 별다른 영향은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개석은 공산당을 여전히 이기지 못했을 것이고 일본과도 마찬가지로 싸웠을 것입니다.
장개석은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해 홍군을 그정도로 몰아붙였음에도 끝까지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새롭게 또아리를 튼 섬서성일대는 훨씬 공격하기 불리하고 병참과 보급도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홍군은 여전히 그곳을 기반으로 신도들을 모아서 그 끈덕진 생명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또, 장개석이 아무리 일본에 대해 인내를 보여도 37년 7월에 일어나는 노구교사건까지 오면 더이상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옵니다. 여기에서도 또 양보를 하는 것은 중국이 망하는 것이고 장개석도 자기 자리를 내놔야 할 판이었죠. 장학량과 양호성의 진심어린 "간청"에 감동해서 그가 일본과 싸우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까지 국내외 사정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약속은 안 지키더라도 "항일" 약속은 지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다음편에는 드디어 노구교사변과 중일전쟁 개전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장개석이 머물렀던 화청지의 호텔이랍니다.(전혀 호텔스럽지 않지만. 2성급?) 지금은 관광지라는군요.
'역사 ,세계사 > 중국사,,국공 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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