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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④ 세자 교체와 양위

구름위 2013. 12. 1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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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④ 세자 교체와 양위

태종은 재위 5년(1405) 세자 이제(이제·양녕대군)에게 고대 은(殷)나라의 걸(桀)과 주(周)나라의 주(紂)왕이 백성에게 버림받은 독부(獨夫)가 된 이유를 물었다. 세자가 “인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나와 네가 인심을 잃으면 하루아침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고 훈계했다. 피의 숙청으로 태종은 공신의 원망은 샀지만 태종우 고사가 말해 주듯 백성의 인심을 얻었다. 권력은 칼로 창출하지만 유지는 책으로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독서가였다.

『태종실록』2년(1402) 6월조는 “상이 매일 청심정(淸心亭·개경 수창궁 후원)에 나가서 독서하는데, 덥거나 비가 오거나 그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고, 3년 9월조는 “상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독서하는 엄한 과정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은 특히 역사서와 경서(經書)를 열독했다. 역사서에는 현실에 응용 가능한 사례들이, 경서에는 유교국가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왕(嗣王·후계 임금)도 독서가여야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재위 2년(1402) 아홉 살의 원자 이제를 교육시키는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다. 그러나 성현(成俔)이『용재총화(용齋叢話)』에서 “세자는 성색(聲色·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고 쓴 것이 정확했다.

태종은 재위 7년(1407) 열네 살의 세자를 숙빈(淑嬪) 김씨와 혼인시키며 그 장인 김한로(金漢老)에게 “경(卿)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閔氏)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면서 “나는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것처럼 세자를 엄하게 키우려 한다”고 경계했다. 태종은 재위 3년 시강(侍講) 김첨(金瞻)이 수(隋) 양제가 망한 원인이 성색 때문이었다고 하자 “그렇다! 성색은 실로 천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동조했다.

태종도 후궁을 두었지만 말년에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친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 수뢰 혐의로 수사를 받자 “탐오(貪汚)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면서 출궁시킨 후 다시는 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재위 15년(1415) 세자와 어울리는 기생 초궁장(楚宮粧)이 상왕 정종의 옛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쫓았다. 그러나 세자는 그후에도 구종수(具宗秀)의 사가까지 쫓아다니며 초궁장과 어울렸다. 세자 시강원의 깐깐한 스승 이래(李來)가 사냥용 매(鷹)나 악공(樂工·악사) 때문에 세자와 다툰 일화는 숱하다. 태종은 재위 15년 세자전(世子殿)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세자의 사부 이래와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경 등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래는 세자에게 가서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인 줄 압니까”(『태종실록』 15년 1월 28일)라며 흐느꼈다. 세자는 몰랐지만 이래는 태종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라도 적성(積城·순창)현에 살던 어리는 친족을 보러 상경해 곽선의 양자인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의 집에 머물렀다. 악공 이오방(李五方)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빼어나다고 들은 세자는 어리를 세자궁으로 납치했다. 축첩(蓄妾)이 합법인 조선에서 어리는 유부녀였다. 양부의 첩을 빼앗긴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세자는 사람을 보내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라고 힐난했다. 권력남용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과 사적 관계까지 맺었다. 민무구 형제를 옹호하다 사형당한 이무(李茂)의 인친(姻親) 구종수의 집에 가 박혁인(博奕人:바둑·장기 명인) 방복생(方福生), 악공 이오방, 기생 초궁장·승목단(勝牧丹) 등과 어울려 놀았다. 이때 구종수 형제 등이 “저하께서 저희를 길이 사반(私伴·사적 수하)으로 삼아 달라”고 청하자 허락의 증표로 옷까지 벗어주었다. 한마디로 공사 구분이 안 됐다. 태종이 구종수 등을 귀양 보낸 후 다시 목을 벴어도 세자는 변하지 않았다. 태종이 출궁시킨 어리를 장모 전씨를 시켜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18년(1418) 5월 10일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세자는 보름 후에 되레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 태종실록』18년 5월 30일)

세자는 조사의 난 때 태조를 동북면까지 모셔갔던 신효창(申孝昌)은 죽이지 않으면서 장인 김한로는 왜 처벌하느냐고도 따졌다. 외척까지 옹호하는 것을 본 태종은 세자 교체를 결심하고 정승들에게 수서를 보여 주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했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오직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이제 도리어 원망하며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태종이 폐위 의사를 밝히자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는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세자의 비행은 ‘매와 개[鷹犬]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던 황희(黃喜) 등 소수 신하만이 반대였다. 신료 사이에는 양녕의 아들을 대신 세워서도 안 된다는 공감대까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효령과 충녕 중에서 누가 적당한지를 묻자 “아랫사람이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양했고 태종은 “충녕(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도 밤새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 독서를 금지했으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태종실록』18년 6월 3일)며 충녕을 선택했다.

영의정 유정현 등은 “신 등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례했다. 충녕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뜻밖에도 충녕이 술을 조금 할 줄 알아 명 사신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明) 성조(成祖)는 1406년(태종 6) 안남(安南·베트남)을 침략해 호 꾸이 리(胡季이) 부자를 납치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명은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조선에 알렸다. 명과의 우호관계는 국체 보존의 핵심 과제였으므로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효령(孝寧)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두 달 후인 8월 8일 태종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양위의 변에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거부할 때 ‘필마(匹馬) 한 필만 거느리고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를 모심)하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왕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형제와 싸우며 임금이 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신하들이 말리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며 강행했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삼켜 먹힐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살아생전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 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온 것으로 태종은 악역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권력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