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②] |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전운 감도는 1950년 초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
1950년 초 고요한 한반도는 폭풍의 핵이나 다름없었다. 남과 북은 첩보전에 혈안이 되었고 변절자와 이중첩자가 속출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몰락한 남로당을 살리기 위해 평양에서 안간힘을 쓴 이승엽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북로당 직속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남한 총선에 적극 개입하려 한 성시백이다. 두 사람이 각기 평양과 서울에서 서로의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겨누는 사이, 미군은 본국의 군사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때때로 적의 적인 남로당과 손잡고 북의 동향을 파악했다. |
1950년3월14일, 서울 종로5가. 시각은 이미 오후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수사관들은 허름한 골목길 끝에 위치한 한 주택으로 소리를 죽이고 접근했다.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저 집에 김삼룡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골수 좌익이었던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로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이다. 김임전 주임이 신호를 하자 앞선 수사관이 몸을 날리며 담을 뛰어넘었다. 그가 문을 열자 나머지 수사관들이 일제히 들이닥쳐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삼룡이 이미 도주한 것이다. 정황으로 봐서 급히 달아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김임전 주임은 즉시 일대를 봉쇄하고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지시했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길을 막고 행인을 검문하자 조용하던 동네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주민 대부분은 순순히 수사에 응했지만 더러는 집을 뒤지는 경찰에게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다. 가가호호 철저히 수색했지만 별 소득이 없자 김임전 주임은 초조해졌다.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하면 김삼룡은 검거하기 힘들다.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특기인 변장술로 벌써 포위망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경찰은 주민들 중에 김삼룡과 연령이나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모조리 시경으로 연행했다.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오면서 시경 취조실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한강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눈을 흘긴다고, 취조실을 메운 무리 중에는 경찰관에게 항의하다 괘씸죄로 끌려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김삼룡을 놓친 데 따른 분풀이를 주민들에게 해댄 셈이다. 그런데 그런 분풀이성 마구잡이 연행 덕분에 김삼룡을 놓친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뜻밖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꼴이다.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잘못한 게 없는 데도 괜히 겁을 먹고 있는 사람, 생사람을 왜 잡아왔느냐며 대드는 사람,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고 꼼짝도 않고 있는 사람들로 시경 사찰과가 난장판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중에 유독 수사관의 신경을 거슬리는 영감이 있었다. “아니, 이 영감이!” 수사관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예지동에서 연행해온 영감이 아까부터 계속 취조실 바닥에 가래를 뱉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이 호통을 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이 영감은 달랐다. 침도 마음대로 뱉지 못하느냐며 오히려 핏대를 올리고 나섰다. “대체 저런 골치 아픈 영감을 왜 잡아온 거야?” 수사관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오, 김 주임.” 김임전 주임이 어찌 처리할까 고심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김창룡 소령이 서 있었다. 김창룡. 나중에 특무대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암살을 당하는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공산당 색출에 남다른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이다. 김창룡은 광복이 되자 군에 입대해 특무대의 전신인 육군 정보국 방첩대에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색출에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1949년이 되면서 뿌리가 거의 뽑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부는 살아남아 암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좌익 색출에 공조하고 있었는데, 일선 수사는 시경 사찰과에서 관장하고 군은 시경 사찰과에서 이첩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육군 방첩대장으로 군검경합동수사본부 국장을 겸하고 있던 김창룡 소령은 뒤치다꺼리보다 일선에서 뛰는 게 생리에 맞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시로 시경 사찰과를 기웃거리며 이래라저래라 수사에 참견을 했다. 그런 김창룡의 눈에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이 걸려든 것이다. 왠지 억지를 부리는 듯한 자세가 그의 동물적 감각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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