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 대당의 배신
783년 육월, 청수맹약(淸水盟約)이라는 변방합의를 이룬 후, 당나라와 토번 양국은 마침내 오랜만의 평화를 맞이한다. 그러나 겨우 두 달이 지나, 평화맹약의 먼지가 막 가라앉으려 할 때, 당나라 내부에서는 "주자지란(朱泚之亂)"이 일어나서 많은 당나라군대가 반란에 가담하여 장안으로 쳐들어와 함락시킨다. 자신의 위기에 처한 통치를 만회하기 위하여, 당덕종(唐德宗)은 낭패하여 봉천을 도망친 후, 다시 서역의 북정(北庭)과 이서(伊西)(지금의 신강성 북부)이 두 중요한 영토를 할양하는 것을 댓가로 하고, 또한 매년 토번에 채견(彩絹) 1만필을 세폐(歲幣)로 주기로 약속하고, 출병을 하여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전당문> 권464중 <위문사진북정장사칙서>의 기재를 보면, 당덕종과 토번은 북정과 이서를 할양하는 조약에 서명한 후, 심방(沈房), 한조채(韓朝彩)등 중신을 서역으로 보내어 영토할양사무를 처리하게 파견보내도록 결정한 바 있다. 그리고 서역에 주둔하던 장병, 관리와 백성을 내지로 불러들인다. 그들의 고항을 토번에 두 손으로 들어서 바친 것이다. 당덕종은 서역의 장병과 백성에게 "체상위면(逮相慰勉), 엽력동심(葉力同心), 호상제적(互相提摘), 속도근로(速圖近路), 복귀향정(復歸鄕井), 중견향친(重見鄕親)", "여유자산이성(如有資産已成), 불원귀차(不願歸此), 역임편주(亦任便住), 각진소안(各進所安)". 이들 기록은 대당이 북정과 이서의 두 영토를 할양했다는 철증이다.
토번인은 원래 몇 달 전에 청수화맹을 맺어 성의가 있었다. 그리고 대당으로부터 영토를 할양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으니 즉시 병력을 출동시켜 구원해준다. 784년 사,오월에 토번은 2만의 일부군대를 파견하여, 당군과 연합하여 반군의 주력을 무공(武功)에서 격파한다. 그러나 물과 흙이 맞지 않고, 섬서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토번의 군대내에서는 질병이 발생하여 급히 설원고원으로 회군한다. 무공에서 반군을 대파한 후, 토번군의 총사령관은 대국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고, 남은 반군의 잔여부대는 당군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가볍게 소탕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미 당나라조정을 도와서 국면을 전환시켰고, 약속한 사항을 해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급히 군대를 이끌고 토번으로 돌아간다. 당덕종은 원래 "토번에 의지하여 경성을 수복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아주 우려했다."(<자치통감> 권231) 그러나 반군은 이미 무공회전에서 크게 피해를 입어서 실력이 예전같지 못했다. 게다가 당나라장수 이성(李晟)이 아주 잘 싸워주었다. 그리하여 육월에는 장안을 이미 수복했고, 그후 몇 달동안 반군의 잔여부대를 소탕할 수 있었다.
토번군이 참전하기 이전에 반군은 파죽지세였고, 당나라조정의 군대는 일궤천리(一潰千里)였다. 수도 장안조차도 지켜내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군대도 견고한 장안성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 전투력과 전투의지가 형편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토번군이 참전한 이후, 국세는 즉시 근본적으로 바뀐다. 무공대첩후, 반군은 돌연 연전연승하다가 갑자기 기세를 잃고 계속 패퇴한다. 이를 보면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무공전투는 겉으로 보기에는 당나라군대와 토번군대가 연합작전을 펼친 것이지만 토번군이야말로 이번 전투의 주력이었다는 것을.
이전의 약정에 따르면, 당나라조정은 이때 토번에 영토를 나눠주어 공로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신의도 없는 당나라의 군신은 위기를 넘기게 되자, 바로 후회하고 말을 뒤집는다. 토번군이 반란평정의 전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핑계로 하여, 북정과 이서의 땅을 할양하는 것을 거절한다. <자치통감> 권231의 기재에 따르면, "처음에 황상은 토번에게 주자를 토벌하면 성공한 후 이서, 북정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주차를 주살하고, 토번이 와서 땅을 내놓으라고 하자, 황상은 양진절도사 곽흔(郭昕), 이원충(李元忠)을 불러들이고 그 땅을 주려고 했다.....황상은 마침내 그 땅을 주지 않는다." 공정하게 말해서, 토번이 이번에 출병하여 당나라를 도운 것은 전체과정에서 확실히 관망, 약탈등의 일도 있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반란을 평정하기 전에 떠난 것도 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즉, 토번군의 참전이야말로 당나라조정이 반군에게 승리를 얻은 관건적인 요소였다. 토번군이 전쟁의 흐름을 뒤집어 놓았다.
토번군이 당군을 도와서 전투를 한 것은 반군에게 거대한 압력을 주었고, 상대방의 당나라조정에 대한 공세를 제제하였다. 더더욱 무공에서 그 주력을 섬멸한다. 당군의 이후 승리에 기초를 닦아준 것이다. 그러니 부인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당나라조정이 토번군이 장안을 수복하기 전에 떠난 것을 따진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약속한 댓가를 약간 줄이는 정도(예를 들면 북정과 이서중 한 곳만 할양한다든지)일 것이지 하나도 주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당나라조정은 일을 이렇게 처리했다. 토번에 조그만치의 댓가도 주지 않았다. 두 눈을 멀거니 뜨고 양아치짓을 한 것이다. 상대방을 완전히 바보취급한 것이다. 당당한 대국이 이렇게 신의없는 짓을 하다니, 정말 남부끄러운 짓이다. 이 일 하나만 하더라도, 대당은 신용을 지키지 않고, 용인조전(用人朝前), 부용인고후(不用人靠後)(사람의 면전에서는 좋은 소리를 하고 사람의 뒤에서 못된 짓을 한다는 의미)했다. 급할 때는 아무나 발목을 붙잡고 사정하고, 일이 지나가면 안면을 홱 바꿔 버리고, 비열한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 사실상 당나라 3백년동안, 이런 배신기의(背信棄義)의 행동이 계속 되었다. 명확하게 사서에 기록된 것만도 적지 않다. 기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당나라의 고위층중에는 대량의 선비족 귀족이 있다. 당왕조는 반야만족정권이고 오랑캐풍속이 성행했다. "신의"라는 두 글자에 대하여는 자연히 중시하지 않았다.
기실, 당나라조정의 이번 운명은 토번의 손에 달려 있었다. 만일 토번이 당나라조정이 위기에 빠졌을 때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당나라조정이 이전에 했던 행동을 보면, 자신의 역량만으로는 반군의 진격을 견뎌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조정을 위하여 용감하게 싸운 장수들도 아마 딴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관망하고 앞으로 전진하지 않거나 심지어 창끝을 거꾸로 돌릴 수도 있다. 그러면 당나라조정은 연쇄반응식으로 붕괴되었을 것이다. 만일 토번인이 반군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출병했다면, 원래 열세에 처해있던 당나라조정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왕조는 분명히 이때 끝장났을 것이다. 기실 토번인이 당나라조정을 도우기로 결정한 것은 주로 막 체결한 청수맹약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쪽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공고한 후방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당나라조정의 크나큰 행운이다.
2. 토번겁맹(吐藩劫盟)
당나라가 약속을 파기한 후, 토번 대상(大相) 상결찬(尙結贊)은 당나라의 사신에게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말한다: "무공의 대첩은 모두 우리의 힘이다. 경주(涇州), 영주(靈州)를 주어서 보답하겠다고 해놓고 모조리 식언했다. 우리를 깊이 배신했다. 온 나라가 분노한다."(<구당서>권208). 이 말은 측면에서 무공대첩에서 토번군이 주력이었음을 보여준다. 토번이 힘들게 병력을 보내주었고, 사람도 죽으면서, 대당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대당으로부터 보답을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결과는 결국 배신이었다. 상결찬은 원래, 대당이 예의지국이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니 말한 것은 지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당나라가 북정과 이서를 할양해주기 전에 미리 출병을 한 것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당당한 대국의 신용이 자신과 같은 오랑캐에게는 미치지 않을 줄이야. 놀라는 한편, 당나라조정의 식언과 배신에 대하여 깊이 불만을 품게 되고 보복하겠다는 결심만 굳힌다.
786년, 토번은 <청수맹약>을 파기한다. 그리고 경서의 여러 진을 공격하고, 적극적으로 변방의 충돌을 일으킨다. 비록 토번은 이때 하농지구에 주둔군이 만지는 않았다. 그중에는 노약자도 많았다. 그저 토번국의 2류병사들로 채워놓았다. 다만 당나라의 군사역량은 더욱 약소했다. 토번군은 파죽지세로 신속히 경(涇), 농(隴), 빈(邠), 녕(寧)등 여러 주를 돌파한다. 병력은 봉상(鳳翔)을 직접 겨냥한다. 봉상의 서쪽에 있는 광대한 지구는 모조리 빼앗겼다. 봉상은 장안에서 겨우 100여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만일 토번군의 정예기병이 돌진하였다면 2,3일이면 함락시킬 수 있었다. 대당의 경기지구는 적의 칼끝아래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경성의 백성들은 불안감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구당서> 권196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개양의 적 군영은 봉상에서 사십리 떨어져 있다. 경사는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서대부와 서민이 놀라서 도망쳤다."
그러나 이 토번군은 너무 약했다. 봉상에 이른 후, 전선이 길어지자, 창끝이 무뎌졌다. 여러 로로 진격했으나 모두 당군에 막힌다. 장안까지 함락시킬 힘은 없었다. 상결찬은 공격이 좌절되자 책략을 바꾼다. 한편으로 계속 사신을 보내어 평화회담을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하여, 다시 대당의 염(鹽, 영하성 염지현 북쪽), 하(夏, 지금의 섬서성 횡산현 서쪽)의 2주를 점령한다. 현지의 백성을 모조리 약탈해가서 자신들의 노예로 삼는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두 개 주를 철저히 불태워 훼멸시킨다. 그들의 행위에서는 보복의 뜻이 명백히 드러났다. 이번 토번인은 한편으로 평화회담을 하면서 한편으로 공격하였다. 행위는 아주 기괴했다. 아마도 이전에 당나라조정에 놀림을 당한데 대한 불만때문에 이번에 이런 황당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행위를 통하여 분노를 푼 것일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군사행동과 평화회담을 동시에 진행하는 수단으로 당나라조정에 더 많은 이익을 내놓게 압박하여, 이전에 당나라조정이 제공하지 않은 이익을 보완해서 챙기려는 목적도 있다.
토번인의 행위가 괴이하기는 했지만, 당나라는 이전에 스스로 미안한 짓을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부족했다. 당덕종은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다고 여기고, 토번과 장기적으로 적이 되고싶지 않았다. 그리고, 토번과 연합하여 회흘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래서 토번과 다시 평화맹약을 맺기를 주장한다. 상결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는 억울함을 참고 이렇게 말한다: "사진북악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일은 상의할 수 있다. 말이 통한다면, 서로 의심하고 가볍게 병력을 일으켜 경계를 넘어서서는 안될 일이다. 맹세의 말을 이렇게 가볍게 버린다면 천지신명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리고 듣기로 병마를 풀어서 벼의 싹을 짓밟고, 변방의 사람들을 대거 약탈해갔다고 하는데....여러가지 일들은 상의할 수 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토번이 맹약을 파기하고 자신을 공격한 것에 대하여 책망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명확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토번은 이때 아직 자신이 만족할만한 영토이익을 얻지 못했다. 가슴속의 울분을 아직 다 풀지 못한 것이다. 자연히 이렇게 평화회담을 진행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번은 당나라에 한번 속은 후, 간사함을 배웠다. 직접 거절하지 않고 거짓으로 평화맹약을 응락한다.
787년 오월, 당나라와 토번은 다시 평량에서 회맹을 맺는다. 맹약체결기간에, 토번군은 돌연 맹약을 하러 온 2만의 당나라군대를 공격한다.1500명을 섬멸하고 그 후에 인근의 여러 주,현을 약탈한다. 이것이 저명한 "평량겁맹(平諒劫盟)"사건이다. 당덕종은 토번군이 빈주로 쇄도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졸지에 가슴과 담이 다 떨어질 정도였다. 다시 한번 장안을 도망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신하들이 말린다. 일부 사람들은 토번인이 소위 '겁맹'의 행위를 벌인 주요 원인은 이전에 대당에 속았기 때문에 화가 난 나머지 우리가 했던 방식 그대로 우리에게 갚아준 것이다. 똑같은 비열한 수단을 써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보복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겁맹사건은 토번이 정교하게 계획한 행동이다. 화를 풀겠다는 것은 그저 부대적인 동기에 불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실 이를 핑계로 당나라의 서북지구를 지키는 3대장수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구당서> 권137의 기재를 보면, 토번의 대상 상결찬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나라의 명장은 이성(李晟)과 마수(馬燧), 혼감(渾瑊)뿐이다. 세 명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이를 보면 이 3명이 당시 당나라 변경을 지키는 중요장수임을 알 수 있다. 토번은 당나라에 속임을 당한 후, 이미 더 이상 당나라와 평화맹약을 맺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므로, 이어진 것은 당나라와 어떻게 싸우느냐는 문제이다. 자연히 이 세 명의 장수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토번에 잘 보이기 위하여, 평량회맹이전에, 당덕종은 이미 가장 토번인들이 꺼리는 이성의 병권을 빼앗는다. 상결찬은 겁맹때 혼감을 생포하고, 맹약파기의 책임을 마수에게 떠넘기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결맹을 맺자는 것을 미끼로 하여, 당나라조정이 그에게 징벌을 가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하면 3명의 장수를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당나라의 사신단의 인원수가 2만명이 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평량회맹때 당나라군대도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도로 경계태세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토번인들은 혼감을 체포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마수는 사후에 당나라조정에 의하여 병권을 빼앗긴다. 상결찬의 음모는 2/3만 성공한다.
겁맹이후, 당나라, 토번의 두 나라는 다시 전쟁상태에 접어든다. 기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번이 다시 당나라경내를 속속 침입해 들어와서, 불태우고 죽이고 노략질하고 약탈한 것이다. 바로 그 해(787년) 구월, 토번의 부대가 다시 개양, 오산, 화정의 3개현을 대거 약탈하고, 노약자를 죽이고, 수만의 청장년 남녀를 노략질해간다. 토번인들은 이들 포로로 잡은 대당의 백성을 강(羌)과 토곡혼(吐谷渾)의 여러 부족에 보내어 노예로 삼계할 생각이었다.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동쪽을 향하여 곡을 하고, 고국과 이별하도록 허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처참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통곡실성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천여명이 절벽에 몸을 던져 죽으니 그 정상이 참혹해서 차마 보기 힘들 정도였다. 788년 오월, 토번은 다시 경주, 빈주등 5개 주부를 대거 약탈하고, 수만명의 백성을 노략질해간다. <구당서>권13의 기재를 보면, "그 달에, 토번이 경주, 빈주, 녕주, 경주, 녹주등의 주에 침입하고, 팽원성을 불태운다. 변방의 장수들은 성을 닫고 스스로 지켰다. 적이 데려간 사람과 가축은 3만에 이른다. 2순(旬)만에 물러난다." 그후 수십년간 토번은 매년 당나라국경을 침입한다. 파괴가 아주 심했다. 대당의 서부에 있는 천만백성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참혹한 상황은 813년까지도 계쏙되었다. <임경성비>의 기재에 따르면, "지금(813년) 매년 가을이면 오랑캐가 새외에서 쳐들어와 경주를 공격한다. 부자와 우마가축을 가져가고 쌓아놓은 곡식을 불태우며, 집을 무너뜨리다. 변방의 사람이 모조리 사라졌다."
비록 대당의 백성들은 토번인의 방화살인약탈에 도망을 가고 고통이 심했지만, 토번인들은 더 이상 계속 동으로 확장하려 하지는 않았다. 매번 침입해서는 그저 사람과 재물을 노략질하고 대거 방화,파괴를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대당의 서부변경은 빈 곳을 남기게 된다.매번 토번인들이 대거 약탈하고 물러날 때, 당나라군대는 끌려가는 백성들의 뒤를 따르며 묵묵히 '호송'한다. 그들이 토번군대에 의해 국경선을 넘어간 후, 당나라군대는 조정에 승리를 보고하고 자신이 대첩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이미 성공적으로 적군을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당나라역사에서 보이는 소위 "승지(勝之, 이겼다)", "격패(擊敗)"는 기실 모두 이렇게 얻은 것이다.
3. 이미 체결되었던 평화
청수화맹에 달성된지 얼마되지 않아, 당,토번의 양국은 분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성질이 악랄한 '겁맹'사건도 벌어진다. 그후 수십년간 서로 적대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청수지맹>이라는 이미 달성되고, 쌍방에 장기간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었던 중요한 맹약을 가볍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마치 양국은 당시에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고자 했고, 이 맹약에도 전혀 성의가 없었다는 듯이. 청수맹약의 정통성과 유효성을 극력 감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더더욱 혼란을 부추기는 자들은 그후 당나라가 배신함으로 인하여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을 근거로 하여, 당나라가 맹약때 영토를 할양하면서까지 화평을 구하려고 했던 심리상태를 곡해하여 이를 권의지계(權宜之計)였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허게 하여 당나라가 영토할양의 매국적인 조약을 맺었다는 역사적 죄책을 약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사실상, 청수화맹을 진행할 때, 쌍방은 모두 성의가 있었다. 한때 양쪽 모두 장기간 지킬 맹약으로 여겼다. 만일 경원병변이 아니었다면, 당나라, 토번은 아마도 정말로 수십년간 평화롭게 지냈을 것이다. 심지어 한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쟁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라조정은 내란이 발발한 후, 앞장서서 생각한 것이 바로 토번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맹약에 신뢰가 있었다는 것이다. 청수지맹의 실제효과에 대하여 낙관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몇몇 정사에 기술된 반란평정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원병변의 대규모 내란이 발발한 후, 당나라조정의 통치는 한 때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특히 대장군 이회광이 이끄는 오만의 군대가 거꾸로 반란군의 편에 선 후로, 더더욱 누란의 위기였고, 곧 무너질 지경이었다. 만일 토번이 이때 맹약을 파기하고 반군을 돕는 것을 선택했더라면, 대당은 아미 이 해에 끝장났을 것이다. 사실상 토번군이 중립만 지켰더라도, 당나라조정과 바군의 승산은 5대 5정도이다. 만일 토번이 정말 마음 속에 나쁜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심지어 직접 출병하여 당나라를 칠 필요도 없다. 그저 반군과 당나라조정의 중간에서 양쪽을 부차기며 양쪽으로 협상할 수도 있었다. 혹은 시종 약세의 일방을 도와주면서 내전의 장기화를 도모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중원은 더욱 빨리 오대십국시의 분리상태가 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번은 당나라의 위기를 이용하지 않았고, 낙정하석(落井下石,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던지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력을 다하여 당나라조정을 도와 반군을 물리친다. 이것은 청수맹약에 성의를 지니고 있었다는 철증이다. 토번은 당왕조의 수중에서 서역을 빼앗아온 후,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곤경에 처한다. 이때 대식과 회흘의 강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동진의 욕망은 이미 약해져 있었고, 그저 동쪽이 안정된 후방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므로, 당나라제국이 철저히 붕괴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어쨌든 어지러운 중원이 출현하게 되면, 약소한 당왕조처럼 토번의 동쪽국경에 아무런 압력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강자가 난세에 우뚝 서서 강대한 신왕조를 건립한다면, 더더욱 토번인들에게는 재난이 되었을 것이다.
4. 양패구상
이대 당, 토번의 양국내부는 모두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 기타 세력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피차간에 토지를 빼앗으려는 마음은 이미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평화공존은 쌍방에게 모두 가장 유리한 선택이었다. 이것은 양국이 이전에 평화맹약을 맺게 된 기초이다. 그러나, 대당은 이전의 일백여년동안, 경낙과신(輕諾寡信, 약속을 가볍게 하고, 신의가 없는 것)이 이미 습관화되었다. 단기적인 안목으로 약속을 어기고 배신하는 짓거리를 자주 해왔다. 그리고 천진하게도 그 후에라도 몇 마디 좋은 말로 달래고, 책임을 여기저기 떠넘기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철저히 분노하게 만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결과 토번은 양선작전을 벌인다. 국력을 대거 소모하면서까지 대당을 공격하여 화를 푼다. 기실 당시의 거시적인 태세로 보면 북정과 이서는 근본적으로 지킬 수가 없는 곳이었다. 철저히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당나라조정이 배신의 짐을 지면서까지 토번의 화를 돋군 것은 정말 총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서로 싸운 후, 당나라와 토번의 사이에는 비록 10만명이상의 대규모 전쟁까지 발발하지는 않지만, 토번군은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군사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왕조의 원래 얼마남지 않은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한다. 토번의분노를 막기 위하여 당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낮추어 후한 선물을 보내고 회흘과 화친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20만대군이 섬멸된다. 대도하 이남의 토지를 모조리 잠식한 남조(南詔)와도 화평을 구걸한다. 자신을 서역에서 몰아낸 대식과 천축과도 우호적인 관계륾 맺고자 하여 거대한 댓가를 치른다.
이 몇십년동안, 당왕조와 토번은 기실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모두 변방의 평화를 바랐다. 그러나 각자 한번씩 남부끄러운 일을 하고 나서는 쌍방이 이미 결맹에 필요한 신뢰의 기초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시종 맹약을 체결하지 못한 것이다. 쌍방은 모두 대량의 병력을 변방의 방어에 쏟아붓는다. 인력재력이 소모한 것은 물론이고 결국 양패구상한다. 이런 'lose-lose'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이 양대제국의 멸망과정을 가속화시킨다. 기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당왕조가 멍청하게 약속을 파기하기 전에, 최종적으로 자잘한 것으로 큰 것을 잃는다. 이는 엄중한 득불상실(得不償失, 잃는 것이 얻는 것보다 많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극력 대당이 약속을 파기한 불의행위를 갑추려고 한다. 단지 토번이 겁맹한 일에 대하여만 대거 성토한다. 그리고 고의로 양자간의 인과관계를 말살하고 양국관계가 악화된 책임을 모조리 토번인들에게 떠넘긴다. 역사를 평가하는 태도로서는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사실상, 겁맹의 일은 모두 당나라조정이 약속을 파기한 것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만일 당나라가 먼저 실언하지 않았다면, 토번이 왜 안면을 바꾸고 겁맹했을까? 그러므로, 대당은 실로 양국간의 신의를 잃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평화가 물건너간 사실의 주요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기실 당나라조정은 약속을 지키는 데 있어서나 토지를 토번에 할양하는데 있어서나 만일 당나라에 어느 정도 기개가 있었다면 토번에 병력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반란을 평정하고 그 후에 토번과 평화공존하려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당왕조는 경낙과신했고, 마침내 이미 체결하며 만들어놓은 평화도 물건너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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