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청나라에 의하여 왜곡, 조작된 명나라 역사

구름위 2013. 10. 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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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도랑영웅(屠狼英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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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많은 사람들은 명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편협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영원히 승리자에 의하여 쓰여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중국역사상 글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청나라때, 편찬된 <<명사>>는 청나라의 통치필요에 의하여 명나라에 대한 왜곡과 조작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흘러 300년이 되었지만, 우매하고 선량한 백성들은 장기간의 우민통치의 영향으로 이미 양주80만대도살, 가정삼도, 강음대도살등 청나라에 의하여 저질러진 만행을 잊어버리고 있다.

 

첫째, 명태조화상을 폄훼

 

청나라 사람에 의하여 그려진 화상에 의하면 명태조는 거의 외계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편찬한 <<태조황제본기>>에 근거했다고 한다. 명태조의 부인인 마황후는 당시 반란군의 총사령관의 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설마 총사령관이 눈이 멀어서 자기 딸을 외계인처럼 생긴 주원장에게 주었겠는가? 역사적으로 그들 두 사람의 감정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명태조의 후대의 사람들이 모두 영웅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면, 적어도 혈통상으로 명태조는 정상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어야지, 어찌 외계인처럼 생겼을 수 있겠는가. 너무 현실에 맞지 않는다.

 

둘째, 명태조가 공신을 죽인 것을 폄훼.

 

명태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탐관오리에 대하여는 그 원한이 깊었다. 명태조의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사상은 새로이 태어난 대명에서는 깨끗하고 천하가 같이 행복해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초기에 그를 따라 천하를 얻었던 일부 부하들이 점점 부패하였다. 명태조는 강맹함으로 통치하고, 철면무사하게 통치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을 엄하게 처벌하였다. 심지어 자기의 친척마저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런 조치는 명나라의 국가근본을 안정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명나라가 3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명태조가 죽인 것은 대부분 탐관오리였다.

 

셋째, "봉양화고"를 개사하여 명나라를 폄훼.

 

모두 알다시피 "봉양화고"는 청나라 초기에 나왔다. 이 노래는 시작하자 마자 "주황제가 나오고부터 10년에 9년은 망쳤다네"이다. 명나라때 누가 감히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겠는가? 머리가 붙어있고 싶다면. 이것은 분명히 청나라가 입관한 후에 곡의 내용을 개사한 것이고, 청나라의 통치자들이 교사하고 장려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지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고, 전국각지로 퍼지게 한 것이며 고의로 명나라를 낮춤으로써 청나라 통치를 안정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넷째, 명태조를 한족이 아니라 회족이라고 함.

 

이유는 명나라때 이슬람묘를 수리하였다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명나라는 백가쟁명의 시대였고, 명나라는 천주교회도 수리했다. 그렇다면 명태조가 유럽사람인가? 명태조는 안휘 봉양의 토박이이고, 역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다섯째, 영락제를 조선사람이라고 함.

 

이유는 명성조의 모친이 조선에서 대명에 진공으로 바친 비라는 것이다. 명성조의 모친이 조선사람이라고 하자. 그녀가 명태조에게 시집왔다면 이미 중국의 며느리이고, 그의 아들은 중국인인 것이다. 강희황제의 부인과 모친은 모두 몽고사람인데, 그렇다면 강희를 몽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여섯째, 영락제가 정화를 파견할 것을 건문제 주윤문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조작

 

영락제는 스케일이 큰 황제였는데, 2만여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해상으로 나간다면, 오히려 건문제가 놀라서 더 숨어버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영락제는 이미 건문제가 불에 타서 죽었다고 선포하였고, 국장까지 치렀는데, 그를 찾아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일곱째, 명나라 황제들이 요절한 것을 음탕했기 때문으로 설명.

 

명나라 황제들은 도교를 숭상하였다(무당산의 영나라황가의 도교건축군을 보면 알 수 있듯이...그 중 진무대제의 조상은 바로 영락제 본인이 만든 것이다), 명나라 황제들은 연단약을 먹는 습관이 있었고, 대부분은 단약을 과다복용하여 요절한 것이다.

 

여덟째, 명무종이 "표방"을 만든 것을 음탕했기 때문으로 설명.

 

고증에 의하면 "표방"은 사실 명나라 황제의 황가동물원일 뿐이었다. 명무종은 표범과 기타 동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자주 여기로 와서 표범에게 먹이를 주고 피서를 즐겼다. "표방"의 공능은 사실 청나라 황제의 "피서산장"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홉째, 명신종이 조회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대명천자는 정치를 방기했다고 설명.

 

이 일에 대하여 가장 말을 많이 만들어낸 것은 무협소설작가 김용이다. 그는 명신종이 조회에 참여하기 이전에 이미 완비된 내각수보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황제가 직접 정사를 처리할 필요가 없었고, 당시 명신종은 내각에 맡겨두었던 것이다. 나중에 명나라의 내각수보제도는 서방에도 영향을 주었다.

 

열째, 명나라말기의 환관이 10만명에 이르렀다고 조작

 

이것은 과장이다. 자금성의 규모로 어떻게 10만명을 둘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머문다는 말인가. 게다가 명나라의 자금성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은 대내어림군도 있고, 궁녀도 있는데, 명나라말기에 진짜 10만명의 환관들이 자금성내에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면 말이 되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명나라때 환관의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1만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열한째, 숭정제가 국고에 은량을 숨겨두었다고 설명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명나라 말기에는 매년 천재가 있었고, 명나라는 해마다 전투를 벌여야 했으므로 국고는 당연히 비어있었을 것이고, 군수물자는 항상 모자랐을 것이다. 게다가 숭정제는 밤잠을 자지 않고 여기저기서 군비를 모았다. 국고에 돈이 있다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을 모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만일 국고에 정말 돈이 있었다면, 그것은 숭정제가 여기저기서 모은 후에 미처 쓰지 못한 돈일 것이다.

 

열두째, 명헌종이 자기보다 20세이상 나이많은 여자를 사랑했다고 설명

 

사랑에 나이제한이 있는가? 사람이 누구를 좋아하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명나라때의 애정관이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세째, 명나라의 해금(海禁), 폐관쇄국을 폄하.

 

명나라가 해금을 실행하였다면 정화가 대항해를 할 수 있었겠는가. 명나라가 쇄국정책을 썼었다면, 홍이대포를 들여올 수 있었겟는가? 그리고 서학동점을 제창하고, 전국각지에 천주교회를 세웠겠는가? 서양선교사를 그렇게 많이 받아들였겠는가? 명나라의 해금은 왜구를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다. 전체적인 명나라는 가장 개방된 시대였다.

 

열네째, 명나라의 환관을 마귀로 묘사

 

명태조는 건국이래로 환관은 조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명나라에는 좋은 환관들도 많았다. 풍보, 왕승은 등이 그들이다. 명나라때의 동창은 정보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