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명나라의 입장에서 본 임진왜란, 정유재란

구름위 2013. 10. 3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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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두차별(杜車別)

 

만력의 3대전쟁중 두번째는 바로 유명한 '항일원조' 전쟁(임진왜란)이다. 이는 삼대전쟁중 규모가 가장 크고, 지속시간이 가장 길었던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막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키며 전국을 통일했다. 일본의 군대무장실력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은 일본통일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전체 동아시아를 점령하고자 했다. 1592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에서는 '북경을 수도로 하는 대동아제국의 꿈'을 언급한다. 사실상 1년전에 그는 문서에서 이미 "지금 대명국을 정벌하고자 한다. 이는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일이다"라고 한 바 있다. 조선의 한양이 일본군에 점령된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더더욱 명나라를 정벌하는 구체적인 시간표를 내놓는다. 심지어 중국을 점령한 이후의 계획까지도 구체적인 조치를 끝내두었다. 모두 25조로 된 '대륙경략계획"에 따르면, 거기에는 '천황을 북경으로 옮긴다'(18조)는 내용도 있다. 일본본토는 천황의 아들이나 동생에게 맡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자신은 일본과 명나라의 무역중시지인 닝보(寧波)로 옮기고자 한다. 그러므로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었지 목적 자체는 아니었다.

 

만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계획이 원만히 실현되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현재 TV의 곳곳에서 변발드라마가 아니라 왜인드라마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천황비사>>, <<수길대제>>, <<대일풍운>>과 같은 드라마가 나타났을 것이다. 전문가들도 아마 논문을 써서 대화민족은 중화민족의 구성원이고, 대화미족이 중국을 통일한 것은 중화민족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떠들었으며, 명나라가 워낙 부패하여 망하지 않은 것은 천리에 부합되지 않고, 일본이 중국을 통일한 것은 천의민심에 부합하며, 중국이 다행히 일본에 통일되어, 비로소 이렇게 큰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명나라황제는 모두 멍청했고 부패했으며, 일본천황은 나라를 심혈을 기울여 다스렸고, 민심을 얻어 천하를 차지했다는 등등의 논조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는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놓지는 못했다. 일본이 평양을 침입한 이후, 명신종(만력제)은 조선의 구원요청을 박고는 즉시 병부에 명령한다: "조선이 위급하니, 원병을 파견해달라는 일은 병부에서 논의해서 처리하라. 조선왕이 오면, 좋은 땅을 골라서 머물게 하라" 반수지는 "비록 일부 소문이 있었지만, 명신종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왜군을 막고 조선을 원조하도록 지시하며 조선국왕의 피난요청을 받아들인다."

 

결장이 내려졌지만, 시작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먼저 병부에서는 여전히 그저 하는 척만 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유격 사유(史儒)로 하여금 소량의 병마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결국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다시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삼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지만 다시 패배를 맛본다. 조승훈만 겨우 살아서 도망쳐온다.

 

그후 조선원조를 책임지던 경략 송응창(宋應昌), 병부상서 석성(石星)등은 모두 겁이 많고 유약한 자들이었으며, 간이 작고 일을 벌이지 못했으며, 무능한 자들이었다. 송응창은 부임하자마자 사직할 것을 생각했다. 병부상서 석성은 더욱 유약하고 무능했다. 그저 화의를 하고 초무(招撫)하는데만 신경썼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모두 명신종에게 욕을 한바탕 얻어먹는다.

 

석성의 추천으로 유격장군을 맡은 심유경(沈惟敬)도 무뢰배 출신이다. 거의 매국노 수준이다. 유일한 장점이라면 일본어를 잘한다는 것이다. 이 자가 조선에 도착해서 한 첫번째 일은 바로 일본군과 접촉하여 화해를 추진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명신종은 이때 이여송을 제독계요보정산동군무로 임명하고 조선으로 가도록 명한다. 이여송은 조선에 도착한 후, 정월 초8일에, 당시 일본장수 고니시 유기나카(小西行長)과 전투를 벌여서 일본군을 대파한다. "한밤중에 고니시 유키나카는 병사를 이끌고 대동강을 건너, 용산까지 후퇴했다" 그후 명나라군대는 "승기를 잡고 추격하여, 일거에 개성, 황해, 경기, 강원의 4도를 수복한다" 4월 18일이 되어서는 일본군이 남으로 철수하여 부산으로 물러난다. 한강이남의 천여리 조선국토를 수복한 것이다.

 

일본군과 명군이 조선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군의 패배로 끝이 난다. 그후 양국은 협상을 벌인다. 만력제는 조선국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에게 교훈을 받아들여 개혁을 통해서 통치에 주력하도록 하며 더 이상 해태하지 말라고 한다. 동시에 명나라군은 조선에서 철수할 것이며 조선의 땅 한조각에도 뜻이 없다고 말한다. 조선이 이후 스스로 강해져야 하며, 명나라정부에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한다. 12월, 만력제는 병력을 모두 철수시킨다. 동시에 비록 철수하기는 하지만, 왜놈들이 교활하니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같다고 말한다.

 

사태의 진전은 만력제의 말대로 진행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명군의 간여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여기서 그만두지 않고자 한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조선에서 철군했고,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명나라황제의 책봉서에는 "만리밖에서 고개를 숙여, 중국의 귀부하기를 간청한다"라고 적기에 이르렀으니 내심으로 분노가 컸다. 그러나, 꾹 참고 받아들였다(일본책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 책봉서를 찢어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음날 "명나라 관복을 걸치고, 오사카성에서 명나라사절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역량을 축적한 후 다시 조선을 침공하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과 협상에 나선 석성, 심유경등은 만력제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실한 의도를 감추려고 갖은 애를 썼고,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만력25년 정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제2차조선침략(정유재란)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기세가 더욱 대단했고, 준비도 더욱 철저했다. 명신종은 소식을 듣고, 사신과 병부가 일본의 진실한 의도를 조정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화의를 추구하고, 극력 기만하려한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대노하여, 그 자리에서 명을 내린다. 병부상서 석성등의 직위를 박탈하고, 형개를 벼ㅇ부상서로 하고 도어사 양호를 경락조선군무로 삼아 다시 항일원조에 나선다.

 

명나라말기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병력은 명군이 일군보다 훨씬 적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에 동원한 병력은 십이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나라의 원군은 처음에는 7만으로 예정했는데, 실제로는 가장 많았을 때 4만이었다. 나중에 계속 증원되었다. 조선의 이조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군은 11만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만력26년의 일이다. 만력25년 전쟁초기에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군이 숫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명나라군대는 조선내에서 상당히 곤란했다. 지키던 도시가 차례로 함락된다. 진공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만력이 끝까지 지원하는 바람에 형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점차 명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 조선인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정유 구월육일, 천장(天將) 부총병 해생등이 적을 직산 금도평에서 물리쳤고, 마사요시등이 패퇴하며, 영남으로 도망갔다... 마귀(麻貴)가 대군을 이끌고 떠났고, 수원에 주둔한다. 병사를 개천의 아래위에 매족하여 뒤에서 지원했다...7일 여명, 천병(天兵) 좌협은 유포에서 나가고, 우협은 영통에서 출발했다. 대군은 작접 지름길로 가먼서 고함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대포를 연신 쏘며, 깃발을 흩들고 철마가 달렸으며, 창과 검이 날아다녔다. 순식간에 적군으로 치고들어가니 적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 하루에 여섯번을 싸우고, 적이 연패했다....다음 날 날이 밝으니, 적병은 다 함께 대포를 쏘고 학익진을 펼치며 진격했다. 시퍼런 칼날이 서로 부딛치고, 살기가 충천했고, 형상이 기이하여,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천병은 포를 같이 쏘며 철겸을 휘두르니 적이 어쩔 줄을 몰랐다. 전투를 몇번 벌이다가 적은 패배하여 도망했다. 목천, 청주 방면으로 도망갔다."

 

일본군이 이렇게 참패한 후, 명군은 승기를 잡아 추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둔다. 23일 다시 울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본군 장군 가토 마사요시가 이끄는 부대가 위기에 처한다. 이때 명군의 경략 양호는 지휘에서 실수를 한다. 황급히 철군한다. 그리하여 명군이 오히려 손실을 입는다. 그런데, 가소롭게도 만주족의 청나라에서 편찬한 <<명사>>에는 이를 심하게 왜곡한다. 이를 과장하여 전체적으로 명군이 조선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과소평가한다. 승리과정에서 작은 패배하나늘 과장하여, 무한확대시켜 사실의 진상을 왜곡한 것이다. <<만명사>>에는 이광도의 고증을 인용하고 있는데, 만청이 편찬한 <<명사>>에는 여러 곳에 고의로 사실을 왜곡시킨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만청의 편찬자들은 "이 전투는 여러 해를 준비하여 국내의 모든 힘을 다 모으고, 조선의 나라안의 모든 무리를 동원해서..." 그러나, 국내의 모든 힘을 들였다는 것은 과장이다. 원군으로 간 것은 합쳐서 14만2천에 불과했다. 조선의 나라안의 모든 무리를 동원했다는 것도 과장이다. 당시 조선의 병력은 1만2천5백에 불과했다.

 

다음, 만청의 편찬자들은 "여러 부대의 군적상 사망자가 2만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초기 참전병력의 절반수준이다. 조선의 선조실록에서는 이 전투후 명나라군대의 대세는 여전했고, 2만명이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선조실록과 만청이 편찬한 <<명사>>의 기술과는 어느 것이 더욱 사실에 부합할까? 이는 누구든지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만청의 편찬자들은 확실히 패배를 과장한 혐의가 있다.

 

그 다음, 만청의 편찬자들은 일본군의 당시 실패이유른 "땅에 진흙이 많고, 시절이 겨울이고, 눈보라가 왜군을 괴롭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선조실록을 찾아보면, 당시 울산 일대에는 그저 비가 조금 내렸을 뿐, 눈은 내리지 않았다. 소위 눈보라에 괴로웠다는 것은 억측이다. 그리고 일본의 많은 지방은 겨울에 눈이 내리고 춥다. 명나라군대에도 남부지방에서 모집한 병사들이 적지 않다. 추위를 견디는 능력, 한랭에 적응하는 능력은 일본군이 명군보다 위라고 봐야 한다. 겨울날씨가 문제라면 그것은 오히려 일본군에 유리한 요소이다. 한걸음 물러나서, 눈보라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눈보라가 무슨 유도탄도아닌데, 일본군만 괴롭히고 명군은 괴롭히지 않는단 말인가? 이런 핑계로 일본군의 실패원인을 찾으려는 것은 명군의 승리를 폄하하려는 것일 뿐이다. 가소롭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상, 일본인 자신들도 이번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던 것은 일본측이라고 인정한다. 삼전촌태조의 <<명제국과 왜구>>라는 글에서: 명나라원군은 카토 마사요시가 지키는 울산으로 대거 진공했다. 마사요시는 군대를 이끌고 악전고투했다. 다음해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원군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명군을 격퇴시켰다. 이번 울산전투는 일본이 조선에 들어간 이후 가장 어려웠던 전투였다"

 

사실상 전쟁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명나라군에 얻어터지고 나서, 조선의 일본군대는 이미 절망적인 지경에 처했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도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물며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따.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측에서 계속 싸울 생각을 가진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도 알고 있었다. 싸우면 싸울 수록 일본에 불리해진다는 것을. 승리의 희망은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거대한 압력 앞에서 화를 참지못한 토요토미는 결국 죽어버리고 만다. 토요토미가 죽자, 원래 붕괴상태에 처해있던 조선의 일본군은 황급히 귀국한다. 아무도 조선에 남아서 명군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어느 일본장수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진상을 감추고 명나라정부와 협상하고자 했다. 조건부로 조선에서 철수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조선 연합군이 계속 일본군을 몰아부치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그저 목숨만 건지고 빠져나가서 귀국하면 그것으로 행운이었다.

 

가소로운 것은 만청의 어용문인 주구들은 명나라를 추화(醜化)하기 위하여, 이번 항일원조의 승리원인을 토요토미의 죽음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사실 당시에 조선에 있던 일본군은 이미 연이은 패배로 붕괴직전이었다. 전투의 의지도 없었다. 일본군의 조선에서의 실패는 토요토미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화나게 해서 결국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최명부가 되었다. 토요토미의 죽음은 일본군의 붕괴를 앞당겼을 수는 있지만, 전체 국면을 바꾸는데 무슨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진상이다.

 

그래서 반수지가 <<명사. 일본전>>에서 한 "히데요시가 죽자, 여러 왜군은 배를 타고 돌아갔고, 조선의 환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관백(토요토미)이 동국(조선)을 침범한 이래 전후 7년간 잃은 병사가 수십만이고 군량이 수백만이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승산이 없었다. 관백이 죽게 되자, 병난이 끝이 난다. 여러 왜군은 모두 섬으로 물러났다. 동남에는 편안히 베개를 벨 수 있는 날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다. 완전히 진상을 왜곡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과 만청이 갑오전쟁을 벌이는데, 만청이 참패한다. 만청의 주구는 더더욱 <<명사>>의 이 왜곡된 진상을 가지고 청나라의 수치를 덮고자 했다.

 

실제로, 만력년간이후, 일본이 조선침략에서 대패한 후, 근 300여년간 일본은 본토에 쭈그리고 있었고, 감히 조선과 중국에 도발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이번 참패가 그들에게 준 교훈이 얼마나 컸던지를 알 수가 있고, 기억에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도 알 수 가 있다. 더더구나 이번 만력년간의 항일원조전쟁에서의 승리는 의미가 크다. 이는 절대 만청의 몇몇 황제나 어용문인주구들이 폄하하거나 추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