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지원(方志遠)
가정제(嘉靖帝)는 양정화(楊廷和)를 핍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좌순문(左順門)에서 청원하던 관리들을 엄벌에 처하고, 장총(張?)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발탁하고, 양신(楊愼)등 반대파들은 징벌에 처하면서,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수립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한참 뜻을 펼치려 할 때, 여러 궁녀들이 감히 호랑이 아가리에서 이빨을 뽑으려 한 것이다. 이 불가일세의 황제를 통째로 목졸라 죽이려 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역사가 기록된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을 얘기하자면, 먼저 가정제의 신세내력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가정제의 부친은 주우원(朱佑?)으로 모친 장씨(蔣氏)와 호광 안륙주(安陸州)로 간 후 모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둘과 딸 둘이다. 가정제 주후총(朱厚?)은 막내였다. 그러나, 그는 형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의 형은 출생후 5일만에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큰누나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큰누나도 4살 때 병사하기 때문이다. 그 때 아직 그는 태어나지 않았다. 정덕 2년 즉 1506년에 가정제가 출생하는데, 그의 둘째누나가 4살때이다. 그가 6살이 되었을 때, 둘째 누나도 병으로 죽으니, 죽을 때 나이가 겨우 10살이다.
당시에는 가족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출생률이 높은 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출생률이 높아도,인구는 급격히 늘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질병예방이나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왕부이기 때문에 경제적 조건은 뛰어났고, 의료조건도 당시로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4명의 자식중 3명이 죽었으니,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밖에 없다. 첫째, 아마도 가족의 신체적 유전인자가 그다지 좋지 않았을 수 있다. 둘째, 가족이 호광의 안륙이라는 지방의 기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을 수 있다.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가정제가 13살이 되었을 때, 부친 주우원도 병사한다. 이제는 그와 모친 두 사람이 남았다. 모친 장씨는 아들을 신경쓰고 보살폈다. 이는 모자간의 정이 깊은 이유도 있지만, 다른 세 자식이 모두 요절하였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주후총의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각종 기록을 보면, 이 가정제는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북경에 오고나서도 적응과정을 거친다. 특히 황제가 되면 궁중내에서이 유일한 ‘남자’가 되니 문제가 많아진다. 당연히 후궁에는 환관과 일꾼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 온전하지 못하여 진정한 남자라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중국과 동방 군주국의 공통된 특색이다.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황제에게는 처첩이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아진다. 각종 소설과 평서에서 황제에게는 삼궁육원칠십이비빈이 있다고 하는데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후비뿐아니라, 황궁안에서 일하는 어떤 여인이든지 황제가 원하기만 하면, 그가 안을 수 있고, 그를 위하여 후손을 낳게 된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 다른 측면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황족혈통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황제와 그의 자식을 제외하고는 궁중에서 일하는 어떤 남자이든, 후궁의 여인과 단독으로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모든 남자는 반드시 거세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반드시 환관이어야 한다.
15세부터 황제가 된 주후총이 거처하는 곳은 이런 환겅이어다. 전전(前殿)에서 그와 국사를 논의하고 대예의에 대하여 논쟁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들이다. 그러나 후궁(後宮)에는 생육능력이 없는 환관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여인이다. 또한, 이들 여인은 모두 고르고 골라서 뽑았으므로 미녀라고 할만한 여인들이다.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15살의 아직 완전히 성년이 되지 못한 남자에게 이렇게 많은 꽃 같은 미녀를 상대한다는 것, 특히 이들 미녀들이 법적으로 언제든지 그가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 누군가 황제에게 아이디어를 내주었다. 무슨 아이디어냐고? 그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황제에게 청심과욕(淸心寡慾,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버리라)을 주문한 것이다. 국가대사를 많이 생각하고, 여인은 적게 접촉하며, 생활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이런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황제는 그다지 많지 않다. 가정제는 이런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둘째는 황제에게 갖은 방법을 써서 몸을 튼튼하게 하고, 갖은 방법을 써서 각종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중국역사상, 가정제를 포함한 모든 황제는 일반적으로 이런 의견을 채택했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까지, 우리는 가정제에게 이런 의견을 낸 사람들이 가정제에게 체조를 배우게 하고, 무술을 수련하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화타가 만들었다는 ‘오금희’라든지, 전설에 따르면 주원장이 만들었다는 ‘홍권’이라든지, 혹은 소림쿵후라든지, 무당권법이라든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방중술을 바치거나, 장생불로약을 바치는 것들 뿐이다.
한 비역사학자는 한가지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왕조의 황제의 후계자 즉 자식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것은 바로 황제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발견이다. 그것은 최소한 한 가지 문제를 던져준다. 만일 이 왕조의 어느 황제가 아들을 낳기 힘들어지면, 혹은 아들은 낳아도 기를 수 없게 되면, 그들의 체력 혹은 정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큰 의지나 역량이 없게 되고, 나라를 다스릴 굳은 신념도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가정제 및 그의 아들, 손자 그리고 청나라의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는 모조리 자손을 두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정권과 청나라정권의 통치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은 전반기에 전쟁을 벌이고, 후반기에 나라를 다스렸는데, 해야할 일이 한두개였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26명의 아들을 둔다. 딸은 포함시키지 않고서라도. 청나라의 개국황제 누르하치는 평생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볐다. 그렇지만 10여명의 아들이 있다. 강희제도 여러가지일을 했지만, 손자만 100여명이다. 다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이다. 대명왕조와 대청왕조는 그들이 창업하거나 흥성시켰다.
가정제가 처한 시대는 바로 명나라의 운명이 전성기로 향하거나 하락기로 접어들 수 있는 때였다. 그런데 그는 바로 병약하여 후손을 두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명나라의 명운을 좌우했다고 볼 수 있다.
가정13년 구월, 이때의 가정제는 겨우 28세였다. 그러나 병으로 1달간이나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전에, 가정제는 2년간이나 친히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당연히 2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2회이다. 매년 동지날에 황제는 북경 남쪽교외의 천단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가정제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해명했다. 해명내용은 <<명세종실록>>에 실려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고, 병이 발병할 때마다. 5일 내지 7일이 지나야 나았다. 요즘 들어, 짐의 신체는 예전과 같지 않다. 이미 2년간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원래는 잘 조정해서 내년에 몸이 좋아지면 친히 제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최근 들어 병세가 호전되지는 않고, 오히려 심해졌다. 기침이 나고 가래가 많으며,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한다. 그래서 1달동안 조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가정제의 이 해명은 말이 된다. 그것은 가정제가 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 그렇게 신경을 썼는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 그렇게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생각해보라 이처럼 자주 병을 앓게 되고, 한번 앓으면 칠팔일은 지나야 괜찮아지는 아이라면, 부모가 그에게 얼마나 많이 신경써주었겠는가? 특히 이미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다면,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에게 얼마나 신경쓰고 돌봐주었겠는가?
황제가 병으로 1달간 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아주 드물지만은 않다. 그러나 연속 2년간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가정제이전의 명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법도를 따르지 않던 정덕제도, 정덕15년 남경에 머물 때 한번 거른 것을 제외하고는 비록 회안에서 물에 빠져 병들어 있는 상황에서도 북경으로 돌아온 후 다음해의 제천례를 보완하여 행했다. 이를 보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황제는 스스로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황제의 권한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만일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친히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하늘의 아들이라고 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황제의 합법성에 회의를 품을 수 있다. 그래서 <<대명집례>>에는 “천자의 예는 하늘을 모시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는 내용을 남겨둔 것이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하늘을 모시지 않으면 그것은 큰 불효이다. 그럼에도 백성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가정제는 해명을 통하여 자신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사실상, 가정제는 “예의”논쟁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였으므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가정원년에서 9년까지, 매년 봄애 남교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는데, 가정제가 친히 하였다. ‘대예의’로 양정화등을 물리친 후, 가정제는 예제를 개혁하는데 열중한다. 가정9년, 그는 신하들의 반대주장을 물리치고, 홍무초기의 동지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하지에 땅에 제사지내는 천지분제제도를 회복시킨다. 그의 이유는, 부친은 하늘이고 모친은 땅이다. 그래서 서로 나누어 제사지내야 한다. 사실 나누든 말든 그것은 최고통치자의 마음이다. 명나라를 세울 때, 하늘과 땅에 나누어 제사지냈다. 나중에 명태조 주원장은 하늘과 땅을 합쳐서 함께 제사를 지냈다. 그 이유는 부친과 모친은 원래 함께 생활하는데 어찌 나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 한마디 말 때문에 합쳤다. 그러나 이제는 가정제의 한마디 말 때문에 나뉘었다. 바빠진 것은 황제의 말에 근거를 찾아주어야 하는 예부의 관리들이었다. 황제가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결론이고, 모두 그의 결정이 가장 영명한 것이라고 칭송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이론적인 근거를 찾아주어야 한다.
자신이 제정한 규칙이면 자신이 지켜야 한다. 그래서 가정9년 및 이후 가정 10년, 가정 11년의 동지일에 가정황제는 친히 남교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가정 12년, 가정 13년에 모두 몸이 좋지 않아 친히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여론의 압력을 상당히 받았고, 그는 반복하여 해명을 해야 했다.
황제는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병이 있으면 치료해야 한다. 이건 원래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황제의 병을 치료하는 것과 보통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보통사람이 병들면, 의원이 바라보고, 듣고, 묻고, 진맥한 후에 약처방을 내리고 치료를 한다. 목적은 하나이다.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다르다. 그가 병들면, 그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은 당시에 ‘어의’라고 불렀다. 역시 바라보고, 듣고, 묻고, 진맥하고 약처방을 내리고 그의 병을 치료한다. 그러나 목적은 이것 만이 아니다. 원인은 바로 그의 수많은 후궁들 때문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당연히 황제 자신이다. 몸이 좋지 않고 병약하면, 잘 요양하고 지나친 욕망을 자제하면 된다. 그러나, 주위가 온통 미녀들이고, 온통 유혹인데, 가정제 자신이 주체할 수가 없다. 유일하게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황후인데, 가정제의 성격이 괴퍅하여, 황후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젊고 아름다운 비빈들이다. 누가 그저 병석에 누워만 있는 황제를 원하겠는가? 그녀들은 황제의 몸이 튼튼해지기를 바란다.
이 두가지 측면의 필요는 모두 한 가지 종류의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바로 황제의 병을 치료하고 몸을 튼튼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그것이 진실로 튼튼해지거나 진실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들은 아주 중시된다. 그들은 황제의 곁에 있게 된다. 어떤 경우는 황제의 곁에 있지 않더라도 성지가 내리면 천리만리 떨어져 있더라도 바로 달려온다. 여기서 황제의 허약한 몸을 치료해줄 수 있다고 황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두 사람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소원절(邵元節)이고 다른 하나는 도중문(陶仲文)이다.
소원절은 강서 귀계 사람이고, 용호산 상청궁의 도사이다. 당시, 강서 귀계현 용호산의 상청궁은 대단한 곳이었다. 천사도(天師道)의 조정(祖庭)으로 대대로 이어지는 장천사(張天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천하의 도교를 관장했다. 그래서 귀계는 도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원절은 바로 당시 용호산의 유명한 도사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그가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가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특히 불임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뿐아니라, 이 소원절에게는 정치적인 두뇌가 있었다. 정덕제때, 영왕이 남창에서 모반을 일으킨 후, 사람을 보내어 선물을 잔뜩 들고와서 그를 초빙했지만, 소원절을 이유를 대며 거절한다.
가정제가 즉위한 후, 몸이 좋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소원절을 추천한다. 소원절이 명을 받아 북경으로 간 후, 가경제는 즉시 접견한다. 그리고, 당시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도관중 하나인 현령궁에 거주하도록 하며, 황실을 위한 제사와 기도를 책임지게 한다.
당시 신하들은 황제가 소원절을 중용하는데 불만이었지만, 소원절도 그냥 허명만 얻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이 소원절은 기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한때 북경에 비가 내려야 하는데 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있고, 눈이 내려야 하는데 눈이 내리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나, 소원절이 기도를 하면, 눈과 비가 내렸다. 당연히 이들 비와 눈은 소원절이 기도로 내리게 한 것은 아니고, 최소한 그는 비와 눈이 내리는 시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서 비와 눈이 오도록 기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삼국연의>>의 제갈량이 동풍을 불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둘째, 소원절은 남자불임증의 전문가였다. 가정제가 15세에 즉위한 후,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도 아들 하나를 낳지 못했다. 딸도 없었다. 그러나 소원절이 시키는대로 몸을 조정하고 도교를 믿고, 소원절이 지어준 약을 먹은 후, 3년이 시간이 흘렀고, 황자들이 속속 태어났다.
이렇게 대단한 재주를 지녔는데, 가정제가 어찌 그를 신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희 문관들은 내가 도교를 믿는다고 반대하고, 영약을 먹는데 반대하지만, 너희가 비를 내리고 눈이 내리게 하여 백성을 도와줄 재주를 지녔는가? 너희들 중 누가 나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해줄 능력이 있느냐? 너희는 못하지만 소원절은 할 수 있다.
이런 효과를 거두자, 가정제는 소원절을 더욱 맹신했다. 도사 소원절이 죽기 전에 가정제에게 다시 술사 도중문을 추천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바로 이 도사 도중문이 나타났기 때문에, 궁녀들이 가정제를 모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도중문은 호북 황강 사람이다. 원래 황해현의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용호산 도사에게서 귀신을 쫓는 기량을 배운다. 나중에 일이 있어 북경에 왔다가, 친구의 소개로, 소원절의 북경 저택에 들어간다. 소원절은 도중문의 법술을 아주 높이 평가했고, 그를 가정제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가정제의 아들을 위하여 천연두를 치료해주어, 바로 가정제의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소원절과 도중문은 가정제로 하여금 항자를 많이 낳도록 해주기는 하였지만, 가정제의 허약한 몸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가정제의 요구에 맞추기 위하여, 도중문은 온갖 재주를 다 쓴다. 그리고 위험을 안고 가정제를 위하여 소위 ‘장생불로약’을 만들고, 각종 방중술을 바쳐서, 가정제로 하여금 온갖 시험을 해보도록 한다.
다만, 보약을 먹는 것만으로는 잠시 몸의 성기능을 강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정제는 효과가 없으면 아주 짜증을 냈다. 그는 이렇게 효과없는 것이 원래 자신의 몸이 허약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약방이 잘못된 것이거나, 약재배합이 잘못되어 효과가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가정제는 무고한 궁녀나 비빈들에게 화를 풀었다. 가정제의 성격은 원래 편집적이고 괴벽이 있다. 대예의 논쟁과정에서, 그는 인간성의 흉악한 점을 하나하나 드러냈다. 약물의 효과가 없는 때가 잦아지자, 궁녀 비빈에 대한 불만도 늘어났다. 정신적인 발작이 더욱 자주 일어났다. 그는 대예의때 신하들에게 행했던 징벌방법을 후궁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다. 궁녀비빈들에게 약간만 불만이 있으면, 가벼울 때는 말로 혼내지만 심하면 몽둥이를 들게 된다. 여러해동안, 자잘한 일로 맞아죽거나, 놀라죽은 사람이 백명이 넘었다 가정제의 첫번째 황후는 바로 남편에게 혼나다가 놀라서 죽은 것이다.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고, ‘하늘에 해가 없는 것처럼 어둡다(暗無天日)’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궁녀, 비빈 내지 황후에 있어서,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 것은 성학대광, 성편집광이다. 이 학대광, 편집광을 그대로 놔주면 어느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이미 자유를 잃은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황제로부터의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황제로부터 맞아죽거나 놀라죽는 날까지. 그러나, 그녀들 중에서 몇몇 궁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녀들은 이 악마와 동귀어진할 계획을 세운다.
사건은 가정21년 십월 이십일일에 일어난다. 양력으로 계산하면, 1542년 11월의 어느날 밤이다.
이날, 황제는 도중문이 만들어준 약을 먹은 후 ‘단비(端妃)’로 봉해진 조씨(曹氏)의 거처로 간다. 조비가 거처하는 곳은 ‘익곤궁(翊坤宮)’이었고, 황후가 거주하는 ‘곤녕궁’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이 조비는 가정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또한 시시때때로 학대를 받고 있었다. 조씨를 모시는 궁녀는 더더욱 능욕과 처벌을 견뎌야 했다.
이들 궁녀중에서, 양금영(楊金英)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운명을 걱정했다. 그녀는 십여명의 그녀와 마찬가지로 능욕과 처벌을 받는 궁녀들과 결탁하여, 황제가 다음번에 익곤궁에 오면, 황제와 같이 죽기로 계획한다.
이날, 황제가 왔다. 조비와 잠자리를 같이 한 후 잠이 들었다. 조비는 황제를 모신 후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양금영과 궁녀들이 달려들어서, 가정제를 죽어라 눌렀다. 황제는 꿈에서 깨어나서, 소리치려고 해도, 사람들에게 둘려싸여서 입이 막혔다. 궁녀들이 사람을 죽여본 일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상대방은 황상이다. 그녀들이 황제를 죽이고 싶도록 원한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람을 죽일 담량이나 수단은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다.
그녀들은 그저 끈으로 목을 졸라죽일 것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끈을 이용하여 가정제의 목을 걸었고, 손으로 잡아당겼다. 가정제는 죽어라 저항한다. 그녀들은 끈에 고리를 묶었는데, 이것 때문에 아무리 졸라도 목을 제대로 조을 수가 없었다. 나머지 몇몇 궁녀들은 마음이 급해지자, 자신의 비녀, 머리장식을 빼내서 황제의 몸을 찔렀다.
가정제는 어려서부터 귀한 집안에서 자라서, 이런 경우를 당해본 적이 없다. 여러 궁녀에게 눌려서 꼼짝을 할 수 없을 뿐아니라, 놀라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 과정은 짧은 몇 분간이었다. 그러나 궁녀들에게는 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
황제가 죽지 않는 것을 보자, 일부는 겁을 먹었다. 이 황제는 사람이 아니라, 진룡(眞龍), 혹은 진명천자(眞命天子)라고 생각했다. 그의 목숨은 하늘이 관장하고 사람이 죽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워졌고, 장금련이라는 궁녀가 익곤궁을 빠져나가서 황후가 거주하는 곤녕궁으로 가서 자수한다. 그녀는 가정제의 세번째 황후이다. 황후는 궁녀들이 황제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서 익곤궁으로 달려간다. 양금영 등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황제를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황궁안에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결국 하나하나 다 붙잡혀 온다.
황후는 사람을 이끌고 황제의 목에서 끈을 풀어주고, 사람을 보내어 어의를 오게 한다. 이때 가정황제는 아직 목졸려죽지는 않았지만, 놀라서 혼절해 있었다. 상처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그저 궁녀들이 비녀와 머리장식으로 마구 찔러서 온 몸에 피가 났을 뿐이다.
황제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모살에 성공하지 못한 궁녀들은 모조리 처형당한다. 자수한 궁녀이며, 조단비까지도. 이 일이 가정 21년에 발생하였고, 임인년이어서, 이를 역사학자들은 ‘임인궁변’이라고 칭한다.
궁녀들이 죽는 날, 그리고 그 후 며칠간, 북경 및 교외지역에서는 온통 안개가 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하늘이 바로 비참한 운명의 젊은 여인들을 가련하게 생각해서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초겨울이었고, 안개가 끼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임인궁변의 궁녀들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를 보면 가정제가 비록 이때 화를 면하기는 하고, 화를 겨우 면하기는 하지만,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는 죽어마땅한 자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독부민적(獨夫民賊)이 되어 있었다.
이 임인궁변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가정제는 행운아이다. 그러나, 이 임인궁변이 실패한 것은 명나라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백성들을 위하여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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