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에 발생한 의화단과 팔국연합군과의 전투는 백년동안 많은 논쟁거리를 남겼다.
외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자체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저항의 전략과 방법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의화단사건과정에서 세계전쟁사상 보기드문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사관지역을 포위공격하였는데, 그것도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포위공격했다는 것이다.
사실 포위공격전에,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이무어의 부대는 당고에서 북경으로 진격하다가 낙벌에서 저지당해 물러나 있었다. 이는 팔국연합군이 먼저 전쟁을 도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대사관구역을 포위공격한 이유는 아니다.
대사관구역은 국제법의 보호를 받는 구역이다. 그곳을 포위공격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국제적인 여론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침략자들에게 불필요한 구실을 준다. 군사적으로도 침략자의 전투력과 사기를 꺽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에게 모험을 시도할 용기를 북돋아주게 될 뿐이고,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심리적인 저지선을 없애는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실제 포위공격에서, 수만의 청나라병사와 의화단은 겨우 수백의 수비대원을 지닌 대사관구역을 시종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적군에게 청나라측 전투력이 허약하다는 것만 보여준 꼴이 되었다.
당연히, 당시의 국가는 이미 위기의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열강들이 이미 국경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열강들에게 힘을 보여주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이런 방법은 아니다. 힘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자체방어준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런 조건이 되었는가? 그렇다.
1860년대이후 소위 "동치중흥(同治中興)"으로 중국에 일정기간의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이런 평화는 좌종당의 서북에서의 승리, 유명전과 유영복등의 대만, 월남에서의 성공적인 군사행동 그리고 증기택, 설복성등의 외교적인 성공이 가져다 준 것이다. 잠재적인 적국이 침입에는 큰 곤란이 따를 것이라고 인식해야만 비로소 적국에 위하력을 가지게 될 것이고, 영토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해상에서는 극동제일, 세계5위의 북양함대가 해양을 순시하고, 포문을 나카사키에 겨누고 있어, 일본이 등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극동의 안전을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형은 금방 무너진다. 원인은 청나라측의 나태함에 있었다.
해군측면에, 군비는 대량으로 유용되어, 군함이 장비를 제대로 보충할 수 없었다. 문외한인 지휘관은 낡은 훈련방법과 보수적인 전술을 썼다. 군수물자 보급의 부패는 군함 1척에 두, 세개 국가로부터 구입한 대포가 각각 장착되어, 크루버대포는 '유탄무약(有彈無藥)", 암스트랭대포는 "무탄유약(無彈有藥)"의 황당한 지경에 이르렀다. 육군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비록 서양총과 서양대포가 보급되었지만, 부대편제는 여전히 명나라때의 척가군의 건제였다. 기(旗) - 영(營) - 대(隊)의 삼급편제였다. 화력배치와 대병력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과 기본적인 참모조직, 군수조달체제도 갖추지 못했다. 심지어 서양총의 구경이 모두 10여종이어서, 유럽, 일본의 현대편제의 정규군과 싸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청나라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하이지만, 전략방침만 정확했더라면, 부흥의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장지동은 호북에서 자강군을 편성하고 훈련시켰다. 군수공장과 제철공장을 설립한 것은 장기적 안목이 있는 조치였다. 이 자강군은 나중에 신해혁명의 정예 제8진이다. 한양의 병기공장등은 직접적으로 나중에 항일전쟁에 거대한 공헌을 한다. 살진빙(薩鎭氷)등은 해군을 정비하여 효과를 나타냈다. 초보적으로 원래 각자 따로 놀던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던 폐단을 시정하고, 순양, 장강의 두 함대를 결성한다. 그리하여 근해전투력은 어느 정도 회복한다.
다만, 이것이 청나라의 주류는 아니었다.
보수사상이 머리를 들고 황위를 둘러싼 내부투쟁이 첨예하게 일어나면서, 전국의 군수장비정돈은 사실상 방치되어버린다. 무위군계통의 약 5만명이 명목상 편제되어 있을 뿐인데, 그중 우군(右軍) 원세개의 부대는 멀리 산동에 있었따. 후군(後軍) 동복상의 부대는 감숙의 지방부대였고, 장비도 형편없었따. 진정 전투력이 있던 것은 중(中), 좌(左), 전(前)군이었다. 그런데, 중군 영록(榮祿)의 부대는 황성을 보호하는 책임도 맡고 있었서, 실제로 전투에 나선 것은 섭사성, 송경의 부대로 겨우 2만여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제대로 편제되지 못한 잡군과 의화단이었으니, 한방에 무너질 수준이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청나라가 전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서태후가 열강의 의도를 잘 몰랐고, 광서에 대한 시기심과 약간의 왕공대신들이 외환을 일으켜 정적을 몰아내려는 기도도 있었고, 황위계승권을 빼앗으려고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전쟁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중국의 독립적인 지위와 완고한 보수세력이 동귀어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리하여 중국은 더더욱 반식민지화하며, 외국세력은 중국에서 더욱 힘을 키우고, 중국민중은 더욱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보면, 외적을 막기 위하여 투기적인 방식은 안된다. 요행히 어부지리를 바라는 것은 결국 국가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그저 쿠바가 미국에 대항한 것처럼, 월남이 프랑스와 싸운 것처럼, 중국이 한국전쟁때 미국과 싸운 것처럼 자신의 실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적인 존중과 적국으로부터의 제대로된 대우를 받는다. 그렇게 하여야 국가와 백성의 장기간의 평화와 안정을 얻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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