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에덴동산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고,사람들은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행복은 끝나지 않을것 같았
다.18세기, 에덴은 지옥이 되었다.그 시절은 영원히 돌아갈수 없는 전설이 되었다. 남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뿐이었다.먹을 것이 없었다.사람말고는...서로가 상대의 생살을 뜯어먹는 이 시대가 언제쯤 끝
날지...
황량한 이스터섬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남태평양의 절해 고도, 이스터섬..원주민들은 라파누이라고 불렀다.모아이라는 거대 석상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3~10m 높이에 무게가 20~90톤에 달하는 거대석상 900여기가 드넓은 초원에 서 있거나, 넘어져
있어 낯설고 황량한 느낌을 준다. 참혹했던 옛이야기와 입을 다물고 있는 석상이 겹쳐지며, 한동안 우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스터섬의 거대석상 모아이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서기 500년에서 1000년 사이였다.이섬에 최초의 인간들이 나타났다.길고 긴 항해끝에 발견한 이 땅은
과분한 선물이었다.끝없이 펼쳐진 야자나무들,하늘을 뒤덮은 바다새들,그사이로 샘물들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손도손 살았다.세월이 흐르면서 인구가 2만명가까이 증가했고, 어느
덧 11-12개의 씨족이 형성되었다.각 씨족의 정치,종교지배층은 조상숭배를 강조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 했다.13-15세기,씨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모아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씨족간의 경쟁의식이 불을 뿜었다.모아이는 더욱 많이,더욱 크게 만들어 졌다.이시기는 섬의 풍성했던
자원들이 눈에 띠게 고갈되어 가던 시기였다.아마도 그 불안감이 더해 졌으리라...
이스터섬은 남미대륙과는 3800km,서쪽의 최근단섬까지는 1900km 떨어져 있다
출처:http://blog.naver.com/lth365
사람들을 모아이를 만드는데 동원할수록, 지배층은 그들을 부양해야 했다.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숲을 불태우고 밭을 만들었다.거대한 모아이를 해안지대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나무와 밧줄이 필
요했다.나무는 갈수록 없어졌다.그럴수록 모아이는 더 거대해졌고 많아졌다.파국이 왔다.
17세기,에덴동산은 지옥이 되었다.나무가 사라지자, 거센 바닷바람이 섬을 휩쓸었다.곡물이 자랄수가
없었다.원주민들은 필사적이 되었다.구덩이를 파고 그속에서 작물을 재배했다.돌로 뿌리를 덮어 수분증발
을 억제시켰다.동굴속에 지하텃밭을 운영하기도 했다.
인간이 오기전,이섬은 태평양 최대의 조류서식지였다.25종의 육지새와 수많은 바다새들이 살고 있었다.
열대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섬은 수온이 낮은 편이라 물고기의 번식처인 산호초군락이 적었다.대신 조금만
나가면 돌고래와 참치들을 잡을수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카누를 만들수 있는 나무가 없었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이시기 원주민들은 동물성 영양분으로 돌고래와 참치를 잡을수 없자,새들을 먹었
고 새들이 멸종하자 조개류,쥐,집에서 키우던 닭등을 먹었으나 턱없이 부족했다.나무 열매도 없었고 곡물
도 바닥을 드러냈다.고통스런 얼굴,드러난 갈비뼈,부어오른 배를 묘사한 이시기 조각상들을 보면, 당시 굶
주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수있다. 이제 먹을 것은 없었다.단 하나만 빼고..그것은 사람이었다.
드러난 갈비뼈 부어오른 배를 보여주는 조각상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했다.원주민들은 적들을 피해 지상에서 지하동굴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들은 더이상 햇빛아래에서 걸어다닐수 없었다.한때 2만을 헤아리던 인구가 2천명정도로 줄어
들었다.모아이는 1620년경을 끝으로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세군데 삼각형의 꼭지점에 각각 분화구가 있는 화산섬이라 지형이 완만하다 출처:위키피디아
모아이들은 해안가에서 육지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전사의 시대였다.쿠데타가 일어났다.기존의 지배층과 낡은 이데올로기,종교가 모두 무너졌다.
씨족의 상징이었던 모아이는 적들에게 파괴되고 넘어졌다. 영성을 상징하는모아이의 눈은 산산조각이 났
다. 사람들은 더이상 이렇게 살수가 없었다.육지에서 수천Km 떨이진 이섬에서 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모두가 공멸할수밖에 없었다.
18세기,새질서가 등장했다.버드맨(조인)신앙이었다.각씨족의 대표들이 모여 300m절벽에서 뛰어내려
1.6km를 헤엄쳐 조그만 돌섬의 제비갈매기알을 가지고 돌아오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우승한 자가 앞
으로 1년간 섬을 지배하는 것이다. 매년 이 의식을 치름으로서 민주적방식으로 자원을 분배하여,분쟁
을 종식시키기로 하였다. 평화가 찾아왔다.하지만 그 기간은 수십년에 지나지 않았다. 더큰 재앙이 다
가오고 있었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722년,네덜란드배가 이섬에 나타났다.그들은 이날이 부활절인것을 기념하여 이스터섬이라 이름붙였다.
첫접촉부터 불길했다. 서양인들의 발포로 10여명의 원주민들이 사망한 것이다. 돈이 될만한 것이 보이지
않자 서양인들은 떠났다.그러나 뒤에 온 상인들은 달랐다.돈이 될만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이었다.
1862년 노예상인들이 들이닥쳤다.1500여명을 노예로 끌고갔다.대부분이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1년후 끌려간 이들중에서 살아남은 15명이 섬으로 돌아왔다.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천연두와 함께 들어온 것이다.천연두가 섬을 휩쓸었다.
1877년 고작 111명의 원주민만이 살아 남았다.섬전체에 백골이 굴러다녔다.서양인들은 이섬을 죽은자의
땅이라고 불렀다.1888년 칠레에 병합되고,양방목목장이 들어섰다.원주민들은 목장에서 허드레일을 하면
서 목숨을 연명했다.현재 섬의 인구는 약 4000명이며 이중 원주민혈통은 3000여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칠레정부는 이스터섬의 3분의 1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뒤
원주민들을 공원부지에서 몰아냈다.또한 관광객유치를 위한 대규모개발계획과 본토민 이주계획을 밀어붙
이고 있다.또다시 밀려날 위기에 처한 원주민들은 관공서 건물을 점거하고 3개월간 농성을 벌이며 저항했
다.2010년 12월 칠레폭동진압경찰은 고무탄과 최루가스를 발사하며 이들을 진압했다...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스터섬의 비극은 인간의 무절제한 환경파괴
가 낳은 비극으로 회자되고 있다.문명사가인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스터섬의 붕괴는 씨족간의 과도한석
상건축경쟁이 환경파괴를 가져왔고, 그 결과 사회붕괴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다른 가설도 있다.이섬의 문명붕괴는 처음부터 없었고, 서양인들에 의한 원주민들의 대학살과 원주민들과
같이 온 쥐떼의 극성이 이섬을 황폐화 시켰다는 이론이다.쥐는 한쌍이 수백마리로 번식하는 데 3년이 걸리
지 않는다.천적이 없는상태에서 쥐들은 달콤한 야자나무열매들을 갉아먹어 숲의 재생을 차단했다는 것이
다.이스터섬 문명자멸론은 고고학적 증거가 아닌 인간이 자연을 망친다는 20세기 서구사회의 편향된 사고
방식이반영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느 쪽에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이스터섬의 대재앙은 인간의 환경파괴가 생태계교란과 인구급감을 가져
온 상태에서, 서양인들에 의한 대량학살이 결정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추천 참고 자료>
1.문명의 붕괴/재레드 다이아몬드/김영사
2.총,균,쇠/재레드 다이아몬드/문학사상
:문명사가인 재래드의 통찰력을 볼수 있다
3.<이스터섬의 비밀>/내셔널 지오그래픽채널/2011년 5월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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