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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키푸르 전쟁과 골다메이어

구름위 2013. 8. 14. 08:30

1973년 어느날 IDF(srael Defense Forces)의 작전참모실에는 골다 메이어(Golda Meire) 수상과 모세 다얀(Moshe Dayan) 국방장관을 비롯한 이스라엘군 주요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비드 엘라자르(David Elazar) 참모총장이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브리핑을 실시하였다.

"이집트군의 방어진은 수에즈 운하를 따라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병력은 10만, 탱크도 2천대가 넘습니다."

참모총장의 침울한 목소리는 지하 작전회의실에 메아리쳤다. 고급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망은 매우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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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 메이어와 다비드 참모총장


다비드는 설명을 계속했다.

"예비 병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85,000명의 병력과 276대의 탱크가 전부입니다."


그는 막대기로 지도 위를 가르키며 계속했다.

"시리아는 45,000명의 병력을 대기시켜 놓고 있으며 177대의 우리 탱크에 대해 5,700대의 탱크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참모총장은 말을 잠시 멈추고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골다 메이어 수상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정보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 대령이 답변했다. "우리는 시리아군이 먼저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골다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집트 측에서는? 대령?"

"만약 나세르가 살아 있었다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와르 사다트는 냉철한 인간입니다. 사다트는 정확한 전술에 의해서만 군대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골다 메이어는 실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도 우리가 예비 병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긱치 않는다는 말인가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욤 키푸르를 사흘 앞두고 나라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요?" 골다는 추궁했다.

유대인의 정신과 생활에서 두번째로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인 욤 키푸르를 앞두고 전국의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린다는 것은 확실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참모총장이 나섰다.

"욤 키푸르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우수한 정보원과 미국에서 보내온 정보에서 얻어진 판단입니다."


실내의 웅성거림은 차츰 그의 말에 동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이로써 회의는 끝이 났다. 그러나 이날 장군들이 내린 결론은 큰 실수였다.



- 골다 메이어의 선택 -

욤 키푸르 전날밤 모사드는 시리아와 이집트가 다음날 오후 공격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수상 사무실에는 모세 다얀, 다비드 장군과 갈릴리, 정보부의 탈미 대령등이 모였다. 골다 메이어가 사무실에 도착하자 밖은 이미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비드 참모총장은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즉시 동원하시오." 메이어 수상은 짤막하게 지시했다.

"다음 사항은 국방장관과 저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수상께서 승인하신다면 우리 항공기로 먼저 기습을 하고자 합니다."

모세 다얀 국방장관은 화를 내며 반대했다. "그렇게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세계로부터 침략자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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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다얀

엘라자르와 다얀은 동시에 골다 메이어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릴리를 돌아보았다.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가요?"

갈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엄격히 말해서 정치적인 것이지, 군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골다 메이어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당신의 주장이 일선의 우리 병사들이 입을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우리는 미래의 일을 알수가 없어요. 만약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한다면 아무도 우리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공을 할 수 없습니다."

모세 다얀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이들은 골다 메이어의 결정을 그녀 인생의 일대 실수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 욤 키푸르 전쟁 -

1976년 10월 6일 오후 2시, 시리아군은 포격을 퍼부은 후에 골란고원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남쪽에서는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 전역에 걸쳐서 공격해 들어왔다. 이집트군은 운하 동쪽 제방에 자신들의 국기를 세웠다.

전쟁이 시작된지 사흘이 지나자 이스라엘은 멸망의 위기에 쳐했다. 이집트군은 이스라엘의 가장 단단한 방어망 대부분을 돌파했다.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을 돌파하고 있었다. 반면 이스라엘 예비군의 동원은 늦어지고 있었다. 예비군을 편성하여 수송하는 데만도 며칠이 걸릴 터였다.

골다 메이어 수상은 미국 대사 디니츠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급품을 실은 수송기는 출발했나요?"

디니츠는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미 국방성은 자신들의 수송기로 우리에게 무기를 실어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송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골다는 다그쳤다.

"그러고 다니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닉슨은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언제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에게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전하세요. 바로 오늘이라고.. 내일이면 우리 이스라엘은 영원히 끝나버린다고 말이에요. 키신저에게도 전화하세요. 디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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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미국은 약속을 지켰다. 닉슨은 직접 G-5 요원들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에 탱크와 탄약, 의약품 등을 보급하도록 했다. 연료공급을 위한 중간착륙을 유럽국가들에게 허락받지 못한 전투기들은 공중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갔다.

전쟁이 발발한 지 9일이 지나자 미국의 보급품이 이스라엘에 도달하게 된다. 리다 공항에서는 보급품의 도착으로 환희의 물결이 일었다.

골다 메이어는 적국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고자 하던 유혹을 뿌리친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만일 이스라엘이 먼저 시리아와 이집트를 공격했더라도 미국이 도움을 주었을까?

이스라엘군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16일 째,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전체와 수에즈 운하 건너편의 상당부분까지 탈환했다. 이집트의 주력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북쪽에서도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을 넘어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 25마일 지점까지 진격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승으로 끝날 형국이었으나 아랍국들의 후견자 역할을 담당하던 소련의 압력으로 적당한 선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 전쟁후 -

골다 메이어 수상과 모세 다얀 국방장관은 개전 직전의 선제공격 금지조처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전쟁은 완승으로 끝났지만 이스라엘은 건국후 가장 많은 2,552명의 전사자를 내었던 것이다. 수상 관저에는 분노한 어머니들이 아들의 군번표를 흔들며 밀려들었다.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전례없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침략국가로 낙인찍혀 국제적 신뢰를 상실하는 큰 댓가를 치뤘다. 석유무기화로 세계경제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고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미국조차 표면적인 원조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이스라엘이 알랍국을 선제공격했다면 미국의 원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골다 메이어가 내린 조치는 지극히 타당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