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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예해방 전쟁의 추한 진실

구름위 2013. 6. 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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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한다. 노예 "해방"이라고. 링컨에 의해 노예가 "해방"되었다고. 남북전쟁은 흑인노예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과연 그러했을까?

사실 노예해방을 주장하고 주도했던 것이 북부의 부르주아지들이었지만 정작 노예가 존재할 때나 노예가 "해방"된 뒤로도 그들은 남부의 백인농장주나 다름없이 흑인을 차별하고 있었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조금 더 가혹하고 잔혹했던 남부와 그보다는 조금 나았던 북부와.

원래 북부의 부르주아지들이 흑인노예의 "해방"을 주장한 것은 흑인의 인권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보다 값싼 노동력의 확보가 우선이었다.

아마 노예와 임금노동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비용이 많이 들까 한다면 거의 대부분은 임금노동자의 손을 들어주기 쉬울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 많은 임금노동자들이 최소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예 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당시 북부의 부르주아지들이 흑인노예의 해방을 주장할 당시만 하더라도 차라리 임금노동자 쪽이 훨씬 비용이 싸게 먹혔다.

당연한 것이 노예라는 것은 그 입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노예를 소유한 주인이 책임져 주어야 한다. 물론 비용을 아끼려 그 모든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자는 것들을 최하의 것들로 채울 수도 있었다. 실제 그런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임금노동자는 그저 정해진 임금만 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었기에 사실상 그 비용에서 임금노동자 쪽이 훨씬 유리했다.

실제 당시 산업화된 유럽의 임금노동자와 미국 남부의 노예의 삶을 비교해 본다면 임금노동자의 삶의 수준이 반드시 노예의 삶의 수준보다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오랜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 그리고 가혹한 대우, 그나마 임금이 비싸다고 어린아이를 고용해서 족쇄까지 채워가며 노예나 다름없이 혹사시키고 있었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 19세기에 들어 오히려 평균신장이 2센티미터 이상 줄어들었다고 하겠는가.

19세기 러시아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하려 했을 때 정작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은 그것을 순수하게 환영하지 못했었다. 그것을 자본주의 도입의 수순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유럽으로의 유학이나 여행, 혹은 유럽에서 수입된 서적등을 통해 유럽 자본주의의 실상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러시아의 착취당하는 농노가 더 나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참혹한 현실에 놓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러시아에는 절대 자본주의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농민들은 비록 농노라는 신분적 강제에 의해 토지에 대한 종속을 강요당하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농업공동체를 통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농업생산성의 향상으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토지에 대한 요구가 늘고, 또한 인구의 증가분만큼 빈곤 역시 늘어났지만 그래도 스스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고 그것을 나누어먹는 공동체 속에서 가난하지만 큰 절망은 없는 삶은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도 차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은 바로 이들 농민들이었다.

그런데 농노해방은 그러한 농민들을 토지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시켜주는 대신 다수의 값싼 임금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떠나도록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도시에서 보다 낮은 임금에 임금노동자로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라는 그러한 의도였던 것이다. 원래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막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후발산업국으로써 저렴한 임금노동자의 확보는 러시아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주의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고, 러시아에는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예상한 대로 초기자본주의의 비정함은 도시노동자를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었고, 그것은 결국 러시아에서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과 같이 임금노동자들이 그나마 좀 살 만하게 되고, 나름대로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려가며 투쟁하고, 그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던 임금노동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파업과 쟁의로써 그 권리를 쟁취한 때문이었다.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전까지 임금노동자라 하면 노예만도 못한 비참한 신세였다.

실제 노예가 해방되고 수많은 흑인노예들이 임금노동자가 되었을 때 해방된 흑인들은 대부분 끔찍한 빈곤에 노출되어야 했었다.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는 주인은 없었다. 그 대신 겨우 연명할 만큼의 임금만을 주고 오히려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고용주만이 있었다. 더구나 노예는 일자리를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임금노동자가 되고서는 항상 해고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아니 나이가 많다고 임금은 많이 받는다고 해고당하고 보다 임금이 싼 여성과 아이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흑인 가장도 많았다.

오죽하면 정작 노예에서 해방되고서 도리어 노예시절을 그리워하는 흑인들마저 있었을까. 자유가 없었어도, 인신이 구속되어 있었어도, 그래도 사는 걱정은 없던 노예 시절이 더 좋았다 그리워하는 흑인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해방의 결과 주어진 자유라는 것이 흑인들에게는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신의 구속에서는 해방되었지만 도리어 자본에 의한 더 강력한 구속과 강제에 노출되었다고나 할까? 족쇄를 채우고 채찍을 휘두르는 농장주나 관리인은 없지만 해고로써 위협하며 알량한 임금을 미끼삼아 더 가혹한 노동과 더 비참한 가난을 강요하는 현실이 그를 대신했던 것이다. 차라리 족쇄야 익숙해지면 되고, 채찍이야 말만 잘 들으면 피할 수 있다지만, 삶 그 자체로써 강요해 오는 자본의 위협에는 그들로써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노예 "해방"은 분명 "해방"이었다. 더 가혹한 현실로 흑인들을 내몰았지만, 그로써 법적으로나마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써, 미국의 구성원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럼으로써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엑스나 재키 로빈슨 같은 이들이 있어 지금의 흑인의 지위를 일구어낼 수 있었으니까.

분명 노예 "해방"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해방"이 아니었다. 보다 느슨한 노예라고 하는 구속에서 보다 가혹한 자본의 구속으로 그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보다 값싼 노동력을 원했단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그래서 초기 해방된 흑인들은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기도 했었다. 차라리 노예가 나았다고, 노예시절이 더 좋았다고,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거추장스러워하고 때로 원망하기도 했었다. 노예로서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의 앞에 놓인 자본주의와 값싼 임금노동자라고 하는 현실은 노예시절보다 더 가혹하고 잔인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과도기에 불과했다. 당장 어려워도, 당장 힘들어도, 당장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해도, 그러나 그러한 "해방"이 존재했기에 그들은 마침내 그들에게 주어진 또다른 구속과 억압과 강제로부터도 스스로 "해방"될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차별이 존재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빈곤을 강요당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를 극복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유라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거다. 자유를 줄 때는 그와 함께 반드시 어떠한 댓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댓가는 주어진 자유보다 더 가혹한 것이기 쉽다. 아니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애써 자유를 줄 이유가 없으니까.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 자유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어려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고 그래서 때로 좌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그 노예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도 한다. 자유는 필요 없다, 권리도 필요 없다, 그렇게 자유가 없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리로 돌아가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혁명이 그래서 실패했다. 자유를 위한 권리를 위한 인간의 존엄을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그 눈앞의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에 의해 쉽게 좌절되었었다.

어쩌면 자유야 말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가장 버거운 짐인지도 모르겠다. 누리고자 해도 그를 위해서는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인간의 나약한 의지로는 결코 감당하기 쉽지 않는 커다란 댓가들이다. 그래서 쉽게 자유를 원망하고 자유를 거부하고 자유가 없는 현실을 그리워하고, 그러면서 때로 자유를 내팽개치기도 한다. 차라리 끔찍하도록 무거워서.

노예가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민지의 백성들이 독립국가를 세우고 스스로 나라를 꾸려나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유로운 임금노동자가 노예를 그리워하고, 독립국가를 세우고 그 혼란에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고, 민주시민으로써 주어진 자유와 권리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던 독재권력을 그리워하고,

그래도 결국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은 인간은 결국 자유를 추구하는 동물인 때문일 것이다. 자유를 버거워하고 그래도 자유를 거부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유롭고자 하는 동물인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든, 어찌되었든, 그것이야 말로 역사가 발전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노예는 해방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해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은 더 가혹한 구속에서도 마침내 스스로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해냈다. 너 나은 미래, 더 자유로운 개인, 당장의 어려움에 좌절하고 절망하더라도 자유롭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지금의 그들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인간이니까.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