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식민통치 구조 ④ 교육 장악

구름위 2013. 6. 2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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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권 뺏은 일제, 민족사학 1217곳 중 1175곳 퇴출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은 일제 식민정책에 그 뿌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 문제도 그중 하나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관학(官學)이 현행 한국 교육시스템을 주도하는 기형적 뿌리는 일제 식민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다. 사학(私學)의 설립·운영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한국학생 교육 장면, 일제는 ‘조선교육령’에서 충성스럽고 양순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후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관한 지식을 위험하게 보았다. 조선총독부관보(官報:1910년 11월 19일)나 경찰월보(月報:1910년) 등에는 총독부에서 판매를 금지시키거나 압수한 서적의 목록이 나오는데, 초등 대한역사(大韓歷史)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같은 역사서와 국문과본(國文課本) 같은 국어 관련 서적이 들어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은 1920년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일제는) 우리의 역사·국어·국문을 힘써 금지시키고 있다. 학교 교사인 최창식은 국사를 저술하고 보자기에 싸서 감추었을 뿐 수업 때 자료로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일본인의 정탐에 걸려 금고 1년형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최신대한신지지(最新大韓新地誌) 같은 지리서들도 금서였다. 한국인들이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식민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육시스템을 철저하게 장악해야 했다.

 

1 조선교육령 시안. 일제는 한국인이 설립한 대부분의 사립학교를 체제 위협 요인으로 봤다. 2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구마모토 이케루요시. 동경제대사학과 출신을 학무과장으로 임명한 데서 일제의 검은 의도가 엿보인다. 


구한말은 교육전쟁 시기이기도 했다. 항일인사 대부분은 학교 설립 경험이 있었다. 안중근은 1906년 황해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했고, 망국 직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도 1907년 경상도 안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심산 김창숙도 1909년 경상도 성주에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협동학교는 백하 김대락의 사랑채를 확장한 것이고 성명학교는 기존의 청천서당을 활용한 것이다. 교육의 뜻이 중요했지 학교 부지나 교사(校舍)가 중요하지 않았다.

 

구한말에는 국가 차원에서도 각종 학교를 설립했다. 기존의 성균관과 사학(四學) 외에 1895년 갑오개혁 와중에 한성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 및 소학교 등을 설립했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6월에는 러시아어[露語] 학교를 개설했다. 또 각종 실업학교를 개설해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와 상공(商工)학교를, 이듬해 9월에 광공학교(鑛工學校)를 개설했다. 이런 관립학교 이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이화·숭실·양정학교 등도 있었다.

 

그러나 애국지사들과 지방유지들이 설립한 사립학교가 가장 많았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の保護及倂合)은 ‘1908년 경성 시내에 약 1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000여 개, 20만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면서 “서당의 수는 만(萬)으로 헤아린다”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후 사립학교 장악에 나섰다. 1908년 8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에게 칙령 제62호로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반포하게 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때 사립학교가 각 군에서 설립되었는데 교과서를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술했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하게 여겨 모두 비슷한 내용을 서술하였다…일본인들은 그것을 싫어하여 이재곤에게 그런 글을 쓴 사람을 제재하도록 칙령을 내렸다”고 ‘사립학교령’ 반포의 배경을 전한다.

 

‘사립학교령’ 제2조는 “사립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좌(左)의 사항을 구비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사립학교령’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제2조 학교의 재산에 관한 부분으로서 그 3항은 ‘학교 부지와 학교 교사(校舍)의 평면도’였고, 5항이 “기본 재산과 기부금에 대하여 증빙서류를 첨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자본이 없는 사람은 학교를 설립할 수 없게 만든 것인데, 현행 대한민국 학교 설립 요건도 이와 비슷해 그 잘못된 뿌리가 ‘사립학교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9조는 “사립학교의 설비, 수업 및 기타 사항에 대해서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 학부대신은 그 변경을 명령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한 설립자, 학교장 및 교원의 이력서를 제출하게 해서 반일 성향 인사들을 교육에서 배제시켰다.

 

‘사립학교령’ 제8조는 “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사립학교의 설립자, 교장 및 교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금옥(禁獄) 이상의 형에 처했던 자’ ‘징계 처분을 받고 면관(免官)된 자 중에 1개년을 지나지 않은 자’ ‘교원 허가장을 환수 당하고 2년이 지나지 않은 자’ ‘성행(性行)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라고 폭넓게 규정했다. 반일 인사들은 물론 ‘성행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속했다. 제10조는 “다음 경우에 학부대신은 사립학교의 개폐를 명령할 수 있다”며 ‘1. 법령의 규정에 위배될 때. 2.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풍속을 괴란(壞亂)할 우려가 있을 때… 4. 학부대신의 명령을 위반할 때’라고 규정했다. 반일 비슷한 교육만 시켜도 강제 퇴출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더 큰 문제는 “기존에 설립된 사립학교도 모두 ‘사립학교령’ 시행일로부터 9개월 내에 본령 규정에 준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제17조의 재심사 규정이었다. 기존에 설립된 모든 사학도 다시 인가를 받아야 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반발하자 조선통감부는 “서류 작성의 수고만 해달라”고 무마했다. 그 주요 과녁은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학교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양 선교사들이 신청한 종교 사학 778개 교(校)는 모두 인가되었지만 한국인들이 신청한 1217개 교 가운데 42개 교만 인가하고 1175개 교를 불인가하거나 퇴출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12월 통감관저에서 열린 이듬해의 예산심의회에서 각 도에 1개씩 간이 실업학교를 설립하자는 학무대신 이재곤의 청에 “한국의 실업이 과연 실업학교 졸업생을 필요로 할 정도로 발전했는가?”라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실업학교를 통해 한국인 사업가가 배출될 것을 꺼린 것이다.

 

한국을 강점한 이듬해인 1911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반포하는데 제2조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한 충량(忠良)한 신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本意)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양순[忠良]한 신민을 기르는 것이 교육 목적이 되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私立學校規則)’이 반포되면서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대한제국 학부(學部)는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산하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공상부·사법부의 5부 중에 내무부 소속의 일개 학무국(學務局)으로 격하되었다. 내무부 학무국 산하의 2개 과가 전체 교육사항을 관장했다. 학무국의 핵심인 학무과장은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의 구마모토 이케루요시(<9688>本繁吉)였다. 구마모토는 나중에 대만의 학무국장으로 부임해 대만 식민교육을 총관장하는데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을 조선총독부 학무과장으로 임명한 저의는 분명했다.

 

그가 남긴 구마모토문서(<9688>本繁吉文書)의 조선편(朝鮮篇)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는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8일 총 12장으로 구성된 ‘교화의견서(<6559>化意見書)’를 비밀문서로 총독부에 제출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순량화(順良化)시켜야 한다면서 ‘철두철미하게 조선은 일본 민족의 발전을 위한 식민지로서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인 초등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이지만 한국인 학교는 4년이었고, 중등학교도 일본인 학교는 5년이지만 한국인 학교는 4년이었다. 나라가 근대화되면 사학이 늘어나지만 일제 때는 거꾸로였다. 1908년 5000여 개였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 1973개 교로 줄었고, 1914년 5월에는 다시 1244개 교로 줄어들었다가,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다시 줄어들었다.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1912년 강제 폐교)와 김구가 교장으로 있던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1911년께 강제 폐교) 등이 이 과정에서 모두 폐교되었다.

 

 

 

 

 

일제 관학교육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서당으로 몰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7)에 따르면 1911년의 서당 수는 1만6540개에 학생 수는 14만1604명이었는데, 1917년에는 2만4294개에 학생 수가 26만4835명으로 늘었다. 서당 재학생의 숫자를 세밀하게 파악할 정도로 일제는 서당 교육도 위험시했고 드디어 1918년 서당규칙(書堂規則)을 반포해 서당도 통제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자체를 위험하게 본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