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질 부족한 임금 오락가락 정치 행보 망국은 필연이었다
1905년(고종 42)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발틱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과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까지 오는 긴 항해 끝에 5월 27일 일본군과 마주쳤다. 전날 밤 군신(軍神) 이순신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지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세 배나 많은 발틱함대를 격퇴했다. ‘5월 혁명’까지 일어나 전쟁을 계속할 상황이 아니었던 러시아는 그해 9월 일본과 포츠머드 강화조약을 맺는데 제1조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특별권리를 갖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1905년 7월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은 8월의 제2차 영·일동맹으로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했으므로 일본의 대한제국 점령은 결정된 것이었다. 그해 11월 일본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외교권을 빼앗고 5년 후에는 대한제국을 완전히 강점했다. 영조(52년)와 숙종(46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44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고종은 망국군주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자질이 부족했다. 고종의 시종 출신 정환덕은 남가몽(南柯夢)에서 ‘고종이 침소에서 낮 12시 전후에 나오니 백관의 조회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끝나버린다’고 전한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은 등불을 환히 밝히고 새벽까지 놀다가 새벽 4~7시경이 되면 비로소 잠을 자다가 오후 3~4시에 일어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세자는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치면 “마마, 잠 자러 가요”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수신(修身) 실패가 제가(齊家) 실패로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명성황후가 지탄의 대상이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은 고종에게 있다. 일본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청일전쟁 와중에 신법 제정을 강행하면서 고종에게 ‘백성들의 생업도 어진 부인의 도움을 받듯이 제왕가에서도 더욱 내조가 요구됩니다’라고 말하자 고종이 ‘우리 집안에도 내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라고 답해 좌우의 시신(侍臣)들이 웃었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 공사가 왕비의 권력 농단을 비웃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고종은 외척 정사 간여의 문제점을 몰랐다.
고종이 관직을 인재 등용의 수단이 아니라 축재 수단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매천야록과 남가몽 등에는 ‘이용직은 100만 냥에 경상감사를 샀다’ ‘남규희는 10만 냥, 정순원은 20만 냥에 직각(直閣:규장각 6품직)을 샀다’ ‘전국 수령의 3분의 2는 돈으로 산 것’이라는 등의 기록이 있다. 심지어 과거도 팔았는데, 을유년(1885) 식년과의 생원·진사 회시 때 ‘100명을 더 선발해 2만 냥씩에 매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과거 매매’에 대해 극도의 비난이 일면 김병덕(金炳德) 같은 강직한 인물을 한번쯤 고시관(考試官)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황현은 “고종은 오랫동안 재위해 신하들의 현부(賢否)를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公的)으로 처리하지 못하다가 그 일이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착잡하게 된 연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곤 했다”고 평하고 있다.
둘째, 고종은 시대 변화를 거부했다. 정환덕은 남가몽에서 즉위 이후 고종의 첫 명령이 자신에게 군밤을 주지 않았던 계동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만 11세의 어린 시절부터 왜곡된 권력관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강국이 되기를 원했지만 행동은 거꾸로 했다. 강국이 되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같은 헌정 체제의 수립이 필요했다. 그러나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 헌정 체제가 전제왕권에 조금이라도 저해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모두 무너뜨렸다.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를 죽이고, 아관파천으로 온건개화파를 죽였다. 외국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들을 죽였다. 독립협회 창설 때는 자금까지 지원했으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간부들을 구속하고 보부상(褓負商)을 시켜 테러를 가했다. 재위 35년(1898) 12월 독립협회에 대해 11가지를 들어 “군주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감히 못하는 바 포적(逋賊:박영효)은 용서할 수 없고 죽여야 마땅하거늘 그런 자의 임용을 도모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갑오개혁(1894) 때 박영효를 내무대신에 임명한 것은 고종 자신이었고, 재위 44년(1907) 박영효가 일본에서 귀국하자 궁내부의 관원을 중로(中路)까지 보내 영접하고 민영찬의 집을 130냥에 사준 것도 고종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 조칙에서 “처음에는 충군(忠君)한다 애국한다 해서 좋았으나 나중에는 패륜하고 나라를 어지럽힘에 의구지심(疑懼之心)이 생겼다”고 비판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 행태를 자인한 셈이었다. 왕권 강화에는 병적으로 집착하면서도 왕권 행사의 가장 큰 걸림돌인 노론을 자처했다. 노론은 ‘친구(親舊)’라고 부르고 남인·북인은 ‘그놈[厥漢]’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남인 정약용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그의 증손 정문섭(丁文燮)을 급제시켰다. 갑신정변 이듬해(1885) 고종은 정약용 저서의 필사를 명해 어람본(御覽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현 규장각본)가 작성된다. 그러나 후손들은 정약용이 직접 쓴 자찬(自撰)묘지명과 흑산도에서 사망한 중형 정약전의 선중씨(先仲氏)묘지명, 이가환·권철신·이기양·오석충 등의 묘지명을 일부러 누락시켰다. 노론의 박해로 죽거나 귀양 갔던 사람들의 묘지명인데, 후손들은 이 묘지명이 공개되면 다시 노론의 박해를 받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망국 후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주었는데, 순종의 장인 윤택영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 등의 왕족들을 제외하면 64명의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다. 이 중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노론이 무려 56명으로서 고종이 당인(黨人)으로 자처한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는 데 대거 가담했다.
셋째, 편의주의적 정치 행태를 반복했다. 대세에 순응하는 척하다가 틈을 보아 뒤집는 것이 고종 정치의 한 특징이었다. 갑신정변이 그랬고, 동학농민군과 맺은 전주화약이 그랬으며, 갑오개혁이 그랬고, 독립협회가 그랬다. 외교권을 박탈하는 1905년의 을사조약에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다가 2년 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도 이런 정치 스타일의 한 단면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강자에 약했다. 고종이 강제 양위를 당한 1907년 백성들이 이완용·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 등의 집을 불태웠다. 이완용은 백성들에게 살해될까 두려워 일본인과 사는 송병준의 집에 가서 거주해야 했다. 이런 이완용에게 고종은 신화(新貨) 2만 환을 하사해 새 집을 짓게 하고 정치자금 3천 환을 더 하사했다. 사람들이 이완용의 집이 불탄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1909년 12월 이완용이 청년 이재명(李在明)의 칼에 찔리자 고종은 시종 이용한(李龍漢)을 보내 위문했으며 망국의 해인 1910년에도 시종 홍운표(洪運杓)를 보내 병문안 했다. 심지어 망국 20일 전인 그해 8월 2일에도 부상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완용에게 1천 원을 하사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고종의 이런 지극 정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8월 4일에는 혈의 루의 저자이기도 한 비서 이인직(李人稙)을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에게 몰래 보내 망국 조건을 협상하게 했다(京城日報, 1934년 11월 25일). 국가에 충성하는 인물들은 다 죽여버리고 이완용에게는 지극 정성을 쏟은 이유는 그가 일본의 신임을 받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망국 5년 후인 1915년 이완용의 딸이 혼인할 때나 이듬해 이완용의 처 조씨(趙氏)의 환갑에도 돈을 주었고 1917년 이완용의 육순 잔치 때도 돈을 하사했다. 고종이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등과 몰래 접촉하면서 망명을 준비한 것이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러나 고종의 마지막 역전극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완용이 고종의 행보를 다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종실록 부록은 1919년 1월 20일 고종의 병이 깊었다고 전하는데 그날 밤 숙직한 인물은 이완용과 이기용(李琦鎔)이었다. 다음 날 묘시(오전 6시) 고종은 이 두 매국노만 지켜보는 가운데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이완용 등의 사주를 받은 이왕직(李王職) 장시(掌侍)국장인 남작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이 독약 식혜를 올려 살해했다는 독살설이 들끓었다. 이렇게 고종은 만 67세의 생애를 끝냈다. 망국 후 자결한 황현은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정권을 다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며 “고종은 모든 외교를 혼자서 다했지만 만일 하나라도 잘못이 생기면 무조건 아랫사람에게 죄를 돌리기 때문에, 외교를 담당한 대신들은 쥐구멍을 찾으며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거부한 채 부족한 자질을 ‘불세출의 자질’로 착각한 고종 정치의 종말이 망국이고 그 시대 민중은 한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 통감 관사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다. 1906년 설치돼 1910년 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대한제국을 지배했던 기구인데 초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사진가 권태균
* 젊은 시절 이완용 조선 말기에 찍은 이완용(왼쪽)의 사진. 1926년 사망했다. 오른쪽은 이지용으로 추측된다. 이완용은 고종의 망명 계획을 미리 알고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 단발령 이후 고종 고종은 재위 기간이 44년이나 됐지만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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