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찾은 聖君의 길, 지식경영의 시대를 열다
태종이 효령을 제치고 충녕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이유도 독서가라는 데 있었다. 태종은 충녕을 선택하면서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아주 더운 때라도 밤새 독서하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야간 독서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내 큰 책을 모두 청해 가져갔다(
세종은 신하들과 각종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일종의 콜로키움(Colloquium)인 경연(經筵)을 중시했다.
세종은 어떤 종류의 책들을 선호했을까. 서거정은
그런데 세종이
그러나 유학자들은 사서(史書)보다 경서(經書:유학서)를 선호했다. 세종이 “내가 집현전 선비(儒士)들에게 여러 역사서를 나누어 주어 읽게 하려 한다”고 말하자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는 “안 됩니다. 무릇 경학(經學)이 먼저이고 사학이 그 다음이므로 오로지 사학만 닦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경연에서
세종이 경연 초부터 강론하고 싶었던 역사서는
김익(金益)은
세종이 재위 23년(1441) 정인지 등에게 “무릇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보아야 하고, 그 자취를 보려면 오직 사적(史籍)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책 편찬을 명한 역사서
역사서를 통해 세종은 미래의 지식 인재 양성이 국가 중흥의 요체라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래서 세종은 상왕 생존 시인 재위 2년(1420) 집현전(集賢殿)을 실질 부서로 만들었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존속했으나
세종은 재위 1년(1419) 2월 좌의정 박은(朴誾)이 “문신을 선발해 집현전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작시키자”고 건의하자 가납(嘉納)했으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그해 12월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왜 다시 아뢰지 않는가”라며 “선비(儒士) 10여 인을 가려 뽑아 매일 모여서 강론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세종 2년(1420) 3월 문신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있는 연소자(年少者)를 택해 오직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탄생시켰다. 연소자를 뽑은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비한 포석임을 주지시켜 태종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세종이 친정 후 집현전 학사들을 대상으로 집에서 독서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賜家讀書) 제도는 독서를 여가가 아니라 업무의 연장으로 보았던 세종의 시각을 잘 말해준다. 세종은 재위 8년(1426) 12월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권채(權綵),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 등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집현관원으로 제수한 것은 연소하여 장래가 있으므로 오직 독서를 시켜 실효가 있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각자 직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오직 독서에 전념해 성과를 나타내 내 뜻에 부응하라. 독서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휘를 받으라.(
변계량의 지휘를 받게 한 것은 사가독서가 ‘봉급 받고 놀아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었다. 집에서 독서하게 되면 각종 집안일에 부대낄 것을 우려해 재위 24년(1442)에는 신숙주·성삼문 등 6인을 진관사(津寬寺)에 들어가 독서하게 했는데, 이것이 상사독서(上寺讀書:산사에 올라가 독서하는 것)다. 학사들의 독서 장소가 독서당(讀書堂)이었다. 세종의 독서경영, 독서를 업무의 연장으로 본 세종의 지식경영은 그가 성공한 군주가 된 요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 경복궁 경회루 앞 수정전. 그 앞에 집현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집현전 초석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석재를 감싸고 있던 사진 속 나무는 2년 전까지 서 있었으나 최근 ‘정비’라는 이름으로 베어졌다. 언제까지 ‘정비’라는 명목으로 유적 파괴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임금의 명을 받아 집에서 독서하던 문신들의 계회(契會)를 그린 것으로 선조 3년(1570) 때의 것이다. 참석자 9인 중에는 이이·유성룡·정철·윤근수 등이 있는데 이들은 후기 조선을 이끌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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