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스크랩] 이종의 화제 서태후 실사

구름위 2012. 10. 6.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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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칭

    자희태후(慈禧太后), 효흠(孝钦),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 국적

    중국

  • 시대

    청 함풍제(咸丰帝)

  • 출생 - 사망

    1835.11.29 ~ 1908.11.15

  • 가족관계

    배우자 : 청 함풍제(咸丰帝)

청 함풍제(咸丰帝)의 황후. 효흠(孝钦), 서황후(西皇后),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라고도 한다. 또한 동치제(同治帝)의 어머니이자 광시제(光緖帝)의 양어머니로서 보수파 관료를 기반으로 한 철권통치로 청(清)을 거의 반세기 동안 지배하였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으로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 재순(載淳)을 낳고, 황제가 죽자 당시 6세이던 재순이 동치제(同治帝)로 즉위하자 국사(国事)는 8명의 원로로 구성된 섭정위원회가 주관하였으나, 그녀와 함풍제의 정실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 东太后)가 계략을 꾸며 섭정을 넘겨받고, 전 황제의 동생으로서 의정왕(议政王)이 된 공친왕(恭親王)이 두 태후를 보좌하는 3인 집정(三人執政)을 이루어 태평천국(太平天国) 운동(1850~64)과 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염군(捻军)의 난을 차례로 평정하였으며,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 근대적인 세관 설치, 서양식의 군수공장 설립 및 외교 담당부서를 만들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이후인 1873년 섭정은 끝났지만 서태후는 계속 국사를 장악했으며,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3세의 조카를 양자로 싼야 제위를 넘겨주고 두 태후가 계속해서 섭정을 하였으나 1881년 자안황태후가 사망하자 서태후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3년 후 공친왕을 제거하고 개혁정책의 대부분을 폐기시켰으며, 1889년 명목상 자신의 권력을 정부에 넘겨주고 은퇴하여, 베이징 북서쪽에 재건한 이화원(頤和园)에서 기거하였다. 

중국이 청일전쟁(1894~95)에서 패배를 당한 지 3년이 지난 1898년 젊은 광시제가 개혁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정부를 쇄신·근대화하고 부패를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계획을 추진하자, 수구파 관료들이 서태후 주위에 집결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일격을 가함으로써 개혁정책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궁전에 연금되었고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 서태후는 반외세적 성격의 의화단(义和团) 운동을 지원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최고조에 달하여 수백 명의 외국인이 살해되고, 베이징에 주재하던 외국공사관들이 포위되었으나 외국 연합군이 곧 베이징을 장악함에 따라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 시안(西安, 서안)으로 피신하고, 강화조건을 받아들였으며, 1902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1898년에 자신이 무산시켰던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서태후는 청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시제가 죽은 하루 뒤인 1908년에 사망하였다. 출처 - 네이버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태극고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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