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투가 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명나라에게는 쇠망의 조종을 울리고, 청나라에게는 굴기의 표지가 된다. 이는 청나라가 268년간이나 중국을 통치하는데 기반을 쌓은 전투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명나라가 쇠망하고 후금이 흥기한 것은 모두 이 전투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건륭제도 선조의 전투사를 회고하면서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태조의 이 일전은 왕조의 기업을 열었다(太祖一戰 王基開)"
이 전투가 바로 살이호(薩爾滸)전투이다. 명나라와 후금간의 가장 중요한 결전이다. 이 전투에서, 후금정권의 창업자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드러냈다. 병력을 집중시켜, 각개격파의 전술을 사용하여, 열세에 처해있던 후금군을 이끌고, 5일안에 3로의 명나라군을 차례로 패퇴시키고, 명나라군사 십여만명을 섬멸했으며, 대량의 군용물자를 획득했다. 이 전투이후, 전쟁의 쌍방은 공수가 역전된다. 명나라는 역량이 대거 쇠퇴하여 부득이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하게 되고, 후금은 역량이 급증하여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게 된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이 전투를 겪으면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 누르하치는 여진족 즉 만주족 출신이다. 13벌의 갑옷을 가지고 창업하여, 역사에서 청태조로 불리며, 중국역사상 최후의 봉건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그는 웅재대략의 정치가, 군사가로 전쟁으로 일생을 보냈다. 백전노장으로 동북을 종횡하여, 전공이 혁혁했다. 그는 만주족의 발전과 강성, 역사의 전진과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역사적 공헌은 주로 다음과 같다: 여진각부와 동북지역을 통일하였다; 만주문자와 팔기제도를 창건하여 만주족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후금정권을 건립하여 청나라왕조의 기틀을 세운다; 풍부한 군사경험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김용 선생은 일찌기 "징기스칸이래 4백여년동안 전세계에서 나타난 적이 없는 군사천재 누르하치"라고 칭송한 바 있다.
누르하치는 어려서 명나라의 요동경략 이성량(李成梁)의 노비로 있으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가슴에는 천하를 담았다. 전체 여진을 통일하고, 사분오열되어 각 부족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국면을 끝내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고 결심했다.
여진족은 중국고대에 동북지방에 생활하던 오래된 민족이다. 6세기, 7세기때는 "흑수말갈"로 불리웠다. 9세기부터 여진으로 명칭을 바꾼다. 누르하치가 생활하던 시대에 여진부락은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동해여진(東海女眞)의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에 속한다. 명나라 만력11년(1583년), 누르하치는 조부가 남긴 13벌의 갑옷을 가지고 거병했고, 험난한 여진통일을 위한 일련의 전쟁을 개시하게 된다.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누르하치는 먼저 내부를 다스리고 다시 외부를 치는 전략, 먼저 약자를 치고 나중에 강자를 치는 전략, 원교근공전략등을 활용하여, 조가성전투, 마이돈성전투, 혼하전투, 악이혼성전투, 극산채전투등을 통하여 건주여진을 먼저 통일한다. 그후에 해서여진중에서 비교적 강한 예허(葉赫), 우라(烏拉)의 두 부족을 끌어들이면서, 비교적 약한 하다(哈達)와 휘파(輝發)부락을 고립시킨 다음에 소멸시켰다. 후고지우(後顧之憂)를 제거한 후, 누르하치는 다시 비교적 분산된 동해여진을 공격하여, 17년간의 계속된 공격을 통하여 동해여진을 모조리 복속시킨다. 이리하여 동으로는 동해에서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압록강, 북으로는 흑룡강이북의 외흥안령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점유하게 된다. 여진부락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누르하치는 8기군제를 건립하여, 황,백,홍,남의 4기를 두고, 나중에 상황, 상백, 상홍, 상남의 4기를 추가한다. 이리하여 모두 8기가 된다. 모든 기에는 우두머리를 두는데 고산액진(固山額眞)이라 부른다. 여진인들은 8기에 나누어 편제시키고, 평소에는 농사등 생산에 종사하다가, 전시에는 군인이 된다. 매 기마다 7500명가량의 병사를 조직할 수 있다. 이리하여 병력 합계 6만여명이 된다. 주로는 기병이다. 팔기군제를 통하여, 누르하치는 여진인들은 단결시켰고, 생산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진의 굴기에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명나라 만력43년(1615년), 누르하치는 허투아라(지금의 요녕 신빈)을 수도로 정하고, 후금정권을 건립한다. 자친 천명칸(天命可汗)이라 한다. 그후 누르하치는 여진통일을 위한 최후의 일전 즉 예허부의 정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이때 명나라에서 간섭하기 시작한다. 명나라는 오랫동안 여진각부의 통일을 와해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왔고,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하여 divide and rule의 전략을 썼다. 누르하치가 굴기하는 과정에서, 명나라는 조정의 부패와 조선원정등으로 동북을 돌볼 틈이 없었고, 이 기회를 틈타서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명나라는 누르하치가 더욱 강대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허부는 해서여진의 4부중 하나이며, 명나라와 관계가 밀접했다. 명나라에서 당시에 마시(馬市)를 열었던 진북관(鎭北關, 속칭 북관)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명나라사람들은 예허부를 '북관'이라고 칭했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확장되자 예허부는 집어먹히지 않기 위하여,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명나라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예허부를 보호하고 누르하치를 위협한다. 아직 세력이 충분하게 성장하기 못했던 누르하치는 아직 명나라와 정면대결할 준비는 갖추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참고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된다.
누르하치는 일찌감치 여진족을 탄압하는 명나라관리를 뼛속까지 미워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인 각창안(覺昌安)은 바로 명나라군대에 의하여 오살(誤殺)되었다. 이제는 다시 명나라의 간섭까지 받으니,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허부를 정복하려면, 명나라군대와 일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누르하치는 그리하여 군대를 적극적으로 훈련시키고, 양초를 모으고, 병기를 만들며, 간첩을 파견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준비에 착수한다. 명나라는 내부농민반란을 진압하는데 정신이 없어, 요동까지 돌볼 틈이 없었다. 요동의 명나라군대는 비록 10여만이지만, 매우 분산되어 있었고, 전투력도 강하지 못했다. 명나라 만력46년(1618년), 누르하치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사월 십삼일 하늘에 명나라에 대한 "칠대한(七大恨)"을 고하고, 2만의 병력을 일으켜서 명나라를 공격한다.
누르하치의 공세는 명나라의 무순(撫順)을 향했다. 무순의 수비장수인 이영방(李永芳)은 그들을 보고는 바로 항복한다. 요동총병 장승음(張承蔭)은 1만의 원군을 데리고 도착하고, 쌍방은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후금군대는 용맹하게 전투를 벌이고, 명나라는 9천의 병사를 잃고 궤멸한다. 장승음도 피살된다. 누르하치는 다시 청하(淸河, 지금의 요녕성 본계시 동북쪽)를 공격하여, 명나라군대를 전멸시킨다. 수비장수 추저현이 전사한다.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서 무순 동쪽의 명나라 거점을 많이 점령한다. 누르하치는 원래 승세를 틈타서 요양(遼陽)까지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측면의 예허부가 움직인다는 정보와 명나라가 요동에 군대를 증원한다는 정보를 얻고는 구월에 약탈한 인구와 가축을 이끌고 철수하고 잠시 휴전한다.
명나라 만력47년(1619년) 일월, 누르하치는 다시 병력을 일으켜서, 예허부를 맹공한다. 양군이 싸웠는데, 예허부가 대패한다. 누르하치는 많은 인구와 가축을 빼앗았다. 그는 명나라군대가 퇴로를 차단할까 우려하여, 급히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누르하치의 공공연히 도전하여 무순, 청하등이 함락당하자 명나라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명나라가 모든 정력을 농민반란군의 진압에 투입했었다. 명신종 만력제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에 임명하고, 은200만냥을 주어, 사천, 감숙, 절강, 복건등지의 군대를 뽑고, 여기에 예허부와 조선의 지원군까지 가세하여 누르하치를 평정하는 일전을 준비하도록 명한다.
1619년 이월, 양호는 명나라군대를 이끌고 누르하치를 토벌하러 나선다. 명나라군대는 개략 12만명이었다. 여기에 예허부 1만명, 조선군 1.3만명을 합하여 모두 14만명이었다. 대외적으로는 47만이라고 선전했다. 양호는 명나라군대를 4로로 나누어 북로군 2만명은 총병 마림(馬林)이 통솔하도록 했고, 개원을 떠나 삼차아보(지금의 요넝 철령 동남쪽)를 거쳐, 혼하상류지구로 들어갔다; 서로군 약 6만명은 주력부대인데, 맹장 두송(杜松)이 통솔하여, 심양에서 무순을 거쳐 소자하곡으로 들어간다; 남로군은 명군과 조선군 합계 2만여명인데, 총병 유정(劉綎)이 통솔하여, 관전을 거쳐, 동가강(지금의 길림 혼강)을 따라 북상한다; 서남로는 총병 이여백(李如柏)이 통솔하여 서로군의 측면을 지원한다; 예허부의 1만명은 후방을 맡는다. 그외에 총병 관병충(官秉忠)은 요양에 주둔하는 기동부대를 지휘하며, 총병 이광영(李光榮)은 광녕(지금의 요녕 북진)에 주둔하는 부대를 이끌고 후방의 교통로를 보장한다. 4로의 군대는 서로 약속에 따라 허투아라를 공격하기로 하고, 양호는 심양에 남았다.
이 신임요동경략 양호는 문관이며, 군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삶을 탐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선을 지원하러 나갔을 때 전투중에 도망간 적이 있고, 이로 인하여 근 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일본도아래 죽어갔다. 그는 이로 인하여 관직을 잃고 20여년간 집에서 쉬었다. 명신종 만력제가 그를 다시 기용한 것은 정말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양호는 출병하자마자 병가의 금기를 범했다. 명나라군대는 비록 숫자가 많지만, 전투력은 후금군만 못했다. 당연히 병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런데 4로로 나누다보니, 모든 로의 군대는 후금군과 1:1로 싸워서 이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주 쉽게 각개격파당할 수 있었다. 양호는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심양에 남아 있으니, 통일적으로 전군을 지휘할 방법이 없엇다. 이런 배치는 이미 패배의 씨앗을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명나라군대의 장수들 중에는 전투를 잘하는 자들이 있었다. 총병 두송은 아주 용맹한 장수이고, 전투가 벌어지면 맨팔로 나서기를 좋아해서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총병 유정은 당시 명나라의 최고용장이었다. 일찌기 버마와 일본군을 무찌른 바 있고, 사천의 양응룡의 반란을 진압한 바 있었다. 그는 크고 작은 수백번의 전투를 겪었고, 그가 쓰는 빈철도는 무게가 120근이나 나갔다, 말에 올라타서 나는 것처럼 휘둘러서 "유대도(劉大刀)"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여백은 장수집안출신이다. 부친인 이성량은 요동경략을 지냈고, 모략이 뛰어났다. 누르하치가 젊었을 때, 그의 집에서 노예로 있었다. 만일 이성량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누르하치는 이렇게 쉽게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여백의 형인 이여송(李如松)은 더욱 유명하다. 그는 조선지원군을 통솔한 저명한 장수이다. 이런 대장들이 동시에 출정하였으니, 잘만 썼더라면 못이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총사령관이 양호였다.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한마리의 양이 이끄는 사자떼를 이길 수 있다. 누르하치는 바로 그러한 사자였고, 양호는 바로 그러한 양이었다.
양호는 멍청하고 무능했다. 교만하면서도 결단력이 없었다. 모든 일에 이여백의 말만 들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출병하는 날, 두송은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을 찾기 어려우니 출병일을 늦추자고 한다. 유정도 지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출병일을 연기하자고 한다. 그러나 양호는 대노하여 소리쳤다: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함인데, 만일 다시 늦추자고 얘기한다면, 군법에 따라 다스리겠다" 그리고 상방보검을 문에 걸어놓는다. 양호는 요행히 승리를 거두는 것을 바랐다. 스스로도 몰랐고, 상대방도 몰랐다. 천시, 지리, 적의 동태파악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하루빨리 출병할 것만 재촉했다.
이때 누르하치는 일찌감치 간첩을 보내어 명나라군대를 정찰했다.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획득한다. 명군의 일거일동을 누르하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훤히 꿰뚫었다. 결국 '명나라군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상대방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후금의 병력은 모두 6만도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패륵,대신을 모아서 상의한 후, '명나라군대가 몇 로로 나눠서 오든지간에, 나는 오로지 한 로만 막겠다"는 작전방침을 세운다. 즉, 병력을 집중하여, 명군을 하나하나 격파하겠다는 것이다.
1619년 이월 이십구일, 누르하치는 4로의 명군중 두송군이 가장 앞장서서 오고, 마림군이 그 다음으로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일부 의병(疑兵)을 남겨 유정을 견제하는 외에, 주력군대를 두송군과 마림군을 맞이하러 보낸다.
명나라의 서로대군은 산해관총병 두송이 주장이었다. 총병 왕선과 조몽린이 부장이었다. 두송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용맹하며, 전투에 능했다. 다만 강퍅해서 용맹하기는 하지만 모략이 모자랐다. 그리고 공로를 탐하여 먼저 군대를 이끌고 무순관을 떠나 하루에 백리를 행군하여 하루빨리 후금의 주력군과 싸우고자 했다. 군대가 혼하의 강가에 이르렀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두송은 그래도 강을 건너야 한다고 고집부렸다. 여러 장수들이 간했지만 듣지 않았다. 두송은 가슴을 드러내고, 배도 타지 않고, 말을 올라타고 강물로 뛰어들며 대소하며 소리쳤다: "전투에 임하면서 갑옷을 단단하게 입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군대에서 지냈고, 지금은 늙었지만, 갑옷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군대에 신속히 강을 건널 것을 재촉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후금군은 이미 누르하치의 지시에 다라, 혼하의 상류에 물을 가두고 있다가 명나라군대가 도하할 때, 둑을 터뜨렸다. 졸지에 강물이 불어나서 명나라병사들중 수백명이 익사하고, 많은 물자를 잃어버린다.
삼월일일, 두송의 군이 살이호(지금의 무순 동쪽 대호방댐 부근)이 도착한다. 두송은 병력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살이호에 주둔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길림애로 가서, 계범성을 공격한다. 두송군은 적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진격하여, 다른 로의 군대보다 먼저 후금의 병력과 맞부닥친다. 누르하치는 먼저 병력을 집중하여 두송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고의로 그들의 날카로움을 피하여, 친히 대군을 이끌고 살이호의 명나라군영을 공격하다. 포성이 울리고, 함성이 하늘을 찌른다. 얼마후 후금군은 살이호의 군영을 함락시킨다. 살이호군영을 점령한 후, 누르하치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길림애로 지원을 떠난다. 그때, 두송군은 길림애에 주둔하고 있던 후금군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후금군은 계속 물러서고 있었는데, 원군이 도착하자 전투형세는 바로 역전된다. 두송군은 앞뒤로 적을 마주하게 되고 포위망에 갇히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반면에 후금군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두송은 몸에 18발의 화살을 맞으면서 분전했으나 전사한다. 총병 왕선과 조몽린도 모두 전사한다. 명나라 서로군은 이렇게 전멸한다.
이때 북로의 마림군은 이미 살이호 동북의 상간안에 도착했다. 두송군의 패잔병과 만나서 서로군이 이미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림은 전률하고, 병사들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황급히 공격을 멈추고 수비로 전환한다.
그날 밤에 숙영하는데, 마림은 군영바깥에 3층의 참호를 파게 하고, 바깥에는 다시 화포를 배치했다. 이렇게 수비하겠다는 태도를 드러낸다. 다음 날, 누르하치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즉시 명나라군에 대한 진공을 개시한다. 명나라군은 거의 추풍낙엽이었고, 대부분 궤멸하여 도망갔다. 장수 마림은 몇 기를 이끌고 개원으로 도망간다. 감군인 반종안은 무리를 이끌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반종안이 전사한다. 죽었을 때 뼈가 드러나고 사지가 찢어져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예허부의 병사들이 마림의 군대를 지원하러 왔는데, 돌연 마림의 군대가 패배했고, 반종안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심이 동요하여, 후금군과 감히 싸우지 못하고 전투도 해보지 않고 그냥 도망쳤다.
사실, 반종안은 일찌감치 마림이 시문을 잘하지만, 군대를 지휘하는데는 문외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림은 허명을 가지고있을 뿐 장수의 재주는 없었다. 일찌감치 군대가 출발하기 전에, 반종안은 양호에게 서신을 보낸다. "마림은 용렬하고 겁이 많아서 한쪽을 맡길만하지 않다. 다른 장수로 하여금 이 중임을 맡게 하는 것이 좋겠다. 마림은 멀리 뒤에서 호응하게 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고, 내 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받고도 양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며칠 후 반종안의 말은 그대로 사실이 된다.
동로군은 용맹한 유정의 통솔하에, 이미 후금군의 진지로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나머지 2로의 명나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유정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하여, 누르하치는 유정군이 전진하는 길에 큰 나무를 잘라서 도로를 막고, 3단계의 도로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유정군은 행군하기가 어려웠다. 당시는 날씨가 춥고 악독했다. 명나라군대는 후송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얼어죽는 자가 많았다.
누르하치는 허투아라에 앉아서, 대패륵 다이샨, 이패륵 아민, 사패륵 홍타이시등으로 하여금 유정군을 맞이하게 한다. 유정군이 후금의 포위망에 들어온 후, 누르하치는 두송군을 격파할 때에 얻은 두송의 영전(令箭)을 쏘고, 이미 투항한 명나라군사를 두송의 군사인 것처럼 변장시켜 유정의 군대앞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서로의 두송대군이 이미 누르하치의 도성에 도착했으니 동로군도 신속히 진격하여 같이 포위공격하자고 말한다.
유정은 이를 사실로 믿고, 두송군이 먼저 공로를 차지할까 우려하여, 급히 진군한다. 강홍립(姜弘立)은 조선의 원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하여 유정군은 한걸음 한걸음 후금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간다. 유정군이 이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겹겹이 포위된 후였다. 유정은 과연 맹장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후금군은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때 조선원군이 투항한다. 그렇게 되니 유정군은 고립되고, 누르하치는 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유정과 계속 맞싸우게 한다. 다이샨, 아민, 홍타이시가 병력을 이끌고 진격하니, 유정은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다가 몸에 수십발의 화살을 맞고, 힘이 다해 죽는다. 명군이 궤멸한다. 유정의 아들 유초손은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힘들게 싸우다가 그 자리에서 전사한다. 남은 명나라군대는 금방 후금군에 섬멸되니 남로의 명나라군대는 이렇게 전멸했다.
유정군이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여백은 원래 군대를 이끌고 가서 호응해야 했다. 그러나 이여백은 무서워해서 감히 증원을 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외로이 싸우다가 전멸하게 만든다. 명나라의 4로군은 서로간에 호응을 하지 않고, 각자 싸웠다. 이는 양호의 전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금군은 하나하나 각개격파를 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다시 회군하여 서남로 명군을 섬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이여백은 비록 장수가문의 후예이지만 담이 작았다. 병력을 출동시키는데 동작이 느렸고, 고의로 뒤로 쳐졌다. 살이호대전이 이미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호란강(요녕 본계시 동쪽)에 도착할 정도였다. 이때 심양에 있던 양호는 전선의 대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긴급히 이여백에게 후퇴하도록 명령한다. 이여백은 마치 사면령을 받은 것처럼 급히 회군한다. 명나라군대는 황급히 철수하다가, 도중에 후금의 소규모부대가 북을 울리자, 후금의 주력부대가 온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그러면서 1000여명이 그 와중에 사상당한다.
이제, 명나라의 4로군과 조선, 예허의 연합군 10여만명의 후금정벌은 실패로 끝이 난다. 살이호전투는 중국역사상 소수로 다수를 이긴 전형적인 사례이다.
<<요사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군대는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많았다. 전투에서 죽은 장수만 300여명이고, 사병은 45,870여명이다. 당나귀, 말, 창, 포등은 무수히 잃었다. 그러나 금나라병사들 중에서는 200여명도 죽지 않았다. 명나라의 요동방어선은 모조리 후금에 돌파된다. 살이호전투는 후금이 약세에서 강세로 돌아서고 명나라가 강세에서 약세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다.
살이호전투후에 명나라군은 다시는 후금에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승세를 틈타서 개원,철령을 점열하고, 예허부를 점령한다. 이렇게 하여 요동에서의 전략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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