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징비록 - 4장 - 국왕의 피란과 구원군의 요청

구름위 2013. 5. 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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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새벽에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서울을 버리고 피란하는 일)의 길을 떠났다.

 

신립이 떠난 후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싸움에 이긴 보고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전날 저녁에 전립(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사가 군장할 때 쓰는 갓)을 쓴 사람 세 명이 말을 달려 숭인문으로 들어오자 성안 사람들이 다투어 전쟁소식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순변사(신립) 군관의 노복인데, 어제 순변사가 충주에서 패전하여 죽고 여러 군사들도 크게 무너져 우리들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집안사람들에게 알려 피란시키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전하고 알려 얼마 안 되어 온 도성 안이 모두 놀라게 되었다.

 

초저녁에 임금께서 정승을 불러 서울을 떠나 피란 갈 일을 의논했는데, 임금께서 동상(동쪽 바깥채)으로 나오셔서 마루에 앉았으며 촛불을 켜놓고, 종실 하원군과 하릉군이 그 옆에 모시고 앉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께서 잠시 평양으로 가시어, 명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수복을 도모하옵소서” 하였다.

 

장령 권협*이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여 임금의 무릎 앞까지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서울을 굳게 지키기를 청하니 그 말이 매우 떠들썩했다.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비록 위급하고 혼란한 때일지라도 군신의 예의는 이럴 수가 없으니 조금 물러가게 장계로써 아뢰시오” 하자, 권협은 연거푸 부르짖기를 “좌상(유성룡)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서울은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 권협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장령으로 서울 사수를 주장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고급사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선무공신 삼등에 책정되고 길창군에 봉해졌다.

 

나는 임금께 아뢰기를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다만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서, 이내 왕자를 여러 도로 나누어 보내서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하고, 세자는 대가(어가)를 수행하도록 청하여 그렇게 하기로 의논이 정해졌다.

 

대신들이 합문 밖에 나가 기다렸다가 어명을 받았으니, 임해군은 함경도로 가는데 영부사 김귀영과 칠계군 윤탁연*이 따라가고, 순화군은 강원도로 가는데 장계군 황정욱*과 호군 황혁*과 동지(동지중추부사) 이기*가 수행하게 되었는데, 황혁의 딸이 순화군의 부인이고 이기는 원주 사람이어서 함께 보낸 것이다.

 

☞ 윤탁연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20년(1565)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를 역임하여 호조판서에 이르고, 선조23년(1590)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삼등에 책정되고 칠계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관찰사로 왕자 임해군을 배종했으며, 도중에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일으켜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던 중 병사했다.

 

☞ 황정욱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3년(155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응교 · 집의 등을 역임했다. 선조17년(1584)에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그 공으로 광국공신 일등에 책정되고 장계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자 순화군을 배종해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들어갔으나, 반적 국경인에게 잡혀 두 왕자(임해군 · 순화군)와 함께 왜적에게 넘겨져 감금되었다. 후에 석방되어 돌아온 후 대간의 탄핵을 받아 길주로 유배되었다.

 

☞ 황혁 : 조선시대의 문신 : 선조13년(1580)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우승지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자 순화군을 배종해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다가, 반적 국경인에게 잡혀 왜군에게 넘겨져 감금되었다. 후에 두 왕자(임해군 · 순화군)와 함께 석방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을 당하여 이산에 유배되었다. 광해군4년(1612)에 이이담에게 몰려 옥중에서 죽었다. 인조반정 후에 장천군으로 추봉되었다.

 

☞ 이기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0년(1555)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이 되고, 선조 원년(1568)에 광주 목사가 되었으며 11년(1578)에 양주 목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선조15년(1582)에 부제학을 거쳐 장흥 부사로 나갔다. 25년 임진왜란 때 순화군과 함께 강원도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28년(1595)에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때 우상(이양원)은 유도대장(임금이 거둥시 서울을 지키는 군대의 대장)이 되고 영상(이산해)과 재신(정삼품 이상의 당상관) 수십 인이 호종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나에게는 아무런 분부가 없었는데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호종하는 사람 가운데 유모(유성룡)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해서 나도 호종하게 되었다.

 

내의(내의원의 의관) 조영선과 승정원의 이속 신덕린 등 10여 명이 큰 소리로 “서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외쳤으며, 조금 후에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으나 이미 궁중의 위사(대궐을 지키는 장교)들은 모두 흩어져버렸고, 경루(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조차 울리지 않았다. 선전관청에서 횃불을 얻어 이일의 장계를 펴서 읽어보니 “적군이 오늘 내일 사이에 도성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 장계가 들어온 지 한참 만에 대가(어가)가 대궐 문 밖으로 나오는데, 삼청의 금군들은 달아나고 숨어버리느라 서로 어둠 속에서 마주치고 부딪혔다. 때마침 우림위의 지귀수가 앞을 지나기에, 내가 그를 알아보고서 호종하라고 책망하자 지귀수는 “어찌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같은 무리 두 사람까지 불러 모아왔다.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시가 양편에서 시민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문원의 서원 이수겸이 내 말 고삐를 잡고 묻기를 “승문원 안의 문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므로, 내가 그 가운데 긴요한 것만 수습해서 뒤쫓아 오라 하자 이수겸은 울면서 떠났다.

 

돈의문을 나와 사현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도성 안을 돌아다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와 불꽃이 이미 공중에 치솟고 있었다. 사현을 넘어 석교에 이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경기 감사 권징*이 뒤따라 와서 호종했다. 벽제역에 이르니 비가 더욱 심해져서 일행의 옷이 모두 젖었다. 임금께서 역에 들러 잠시 쉬셨다가 곧 떠났는데, 이때부터 여러 관원들 중에 도성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많았고, 시종과 대간들까지 가끔 뒤떨어져서 오지 않는 이가 많았다. 혜음령을 지나자 비가 쏟아 붓듯이 내리니, 궁인들은 약한 말을 타고 물건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큰 소리로 울면서 따라갔다.

 

☞ 권징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7년(1562)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1년에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 감사로서 광해군의 분조에 수행하여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고, 선조26년(1593)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했으며, 명나라 이여송의 화의에 반대해 왜군을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마산역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밭 가운데 있다가 바라다보고 통곡하며 “나라가 우리를 버리고 떠나니, 우리와 같은 무리들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합니까?” 하였다.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 안에서 수상과 나를 불러 입대(임금의 자문에 대답하는 일)하도록 했다.

 

강을 건너니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여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임진강 남족 기슭에 옛날에 세운 승청(나루터를 관리하는 청사)이 있었는데, 적군이 이곳에 오면 청사의 재목을 헐어 뗏목을 만들어 건너올까 염려되어 이것을 불사르게 했더니, 이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치므로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초경에 동파역에 이르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지대 차사원(임금을 접대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원)으로 그곳에 와서 임금께 드릴 음식을 간략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호위하는 사람들이 종일토록 굶주려왔기 때문에 마구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함부로 빼앗아 먹으니 임금께 드릴 것이 없어져서 허진과 구효연은 겁이 나서 도망쳐버렸다.

 

5월 초하룻날 아침에 임금께서 대신을 불러 보시고 “남방의 순찰사 중에서 국사에 힘쓰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하고 물으셨다. 날이 어두운 뒤에 임금께서 개성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셨는데, 경기의 이속과 군졸들이 모두 도주해 흩어져서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황해 감사 조인득*이 본도(황해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도우려 했는데, 서흥 부사 남의가 이보다 먼저 도착하니 군사 수백 명과 말 오륙십 필이 되어 비로소 길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때 사약 최언준이 나와서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못했고 오늘도 또한 먹지 못했으니 좁쌀을 구해 시장기를 면해야만 떠날 수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고서, 남의의 군사가 가지고 있던 양식에서 쌀과 좁쌀을 섞어 두세 말을 찾아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 조인득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장령 등을 지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 관찰사로서 임금의 호종을 주선했다. 후에 공조참판, 길주 목사 등을 역임했다.

 

낮에 초현참에 이르렀다. 조인득이 임금을 배알하러 와서 길 가운데 장막을 설비하고 맞이하니, 많은 관원들이 그제야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저녁에 개성부에 이르러 남문 밖 공서에 거처하셨다. 대간이 글을 번갈아 올려 수상(이산해)이 궁인과 서로 결탁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죄를 탄했했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2일에 대간이 또 이내 글을 올려 수상이 파직되고, 내가 수상으로 승진되었다. 최흥원이 좌상이 되고, 윤두수*가 우상이 되었으며, 함경북도 병사 신할*을 경질하여 오도록 했다. 이날 낮에 임금께서 남성 문루에 나가셔서 백성을 위로하며 타이르시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라 하셨는데, 한 사람이 나와서 엎드렸다. 임금께서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물으시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정 정승(정철)을 불러 쓰시옵소서” 하였다.

 

☞ 윤두수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3년(155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도승지,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선조23년(1590)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해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해 개성에서 어영대장이 되고 이어 우의정에 승진, 평양에 가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선조27년에 세자(광해군)을 따라 남도에 내려가서 삼도체찰사가 되고, 선조32년(1599)에 영의정이 되었다. 호성공신 이등에 추록되었으며 시호는 문청이다.

 

☞ 신할 : 조선 선조 때의 무장으로 신립의 동생이다.

 

이때 정철*이 강계에 귀양 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임금께서 알았노라 하시고 곧바로 정철을 불러 행재로 오도록 했다.

 

☞ 정철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7년(1562)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 · 전적 등을 역임했다. 그는 동서 분당 이후 서인의 위치에서 동인과 매양 불화했다. 선조22년(1589) 우의정으로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이 되어 동인을 철저히 탄압, 추방했다. 선조24년(1591) 건저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고 강계로 유배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저녁에 환궁하셨다. 나는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죄로 파면되고 유홍*을 우상으로 삼았으며, 최흥원과 윤두수를 차례로 승진시켰다. 적군이 아직 서울에 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들의 의론이 모두 서울을 떠난 것이 실책이라고 나무랐으므로, 승지 신잡에게 서울로 돌아가 형세를 살피게 했다.

 

☞ 유홍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8년(1553)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관직을 역임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선조22년(1589)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삼등이 되고 기성부워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종게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일들에 책정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승진하여 도체찰사를 겸직하고, 선조27년 좌의정이 되어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했다.

 

초3일에 적군이 서울에 들어오니 유도대장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이 모두 달아났다.

 

처음에 적군이 동래에서 세 길로 나누어 올라왔는데, 한 길은 양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패퇴시켰고, 한 길은 좌도(경상좌도)의 장기 · 기장을 거쳐 좌병영인 울산과 경주 · 영천 · 신녕 · 의흥 · 군위 · 비안을 함락시킨 다음 용궁의 하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나와 중로의 군사와 합쳐서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왔다. 충주에서 다시 두 길로 나누어 한 부대는 여주를 거쳐 강을 건넌 다음 양근에서 용진을 건너 서울 동쪽으로 들어왔고, 다른 한 부대는 죽산 · 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들어왔다.

 

또 한 길은 김해를 거쳐 성주 무계현으로 와서 강을 건너 지례 · 금산을 지나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를 함락시켰고, 경기도로 향하여 쳐들어오니 서로 들렸으며, 지나가는 곳마다 혹은 10리 또는 50리 사이에 모두 험준한 곳을 골라 영루를 세우고 군사를 남겨 지키게 하며, 밤에는 불을 켜서 서로 호응하도록 했다.

 

도원수 김명원이 제천정에 있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보고서 감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병기와 화포와 기계를 모두 강물에 집어넣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치려고 하자 종사관 심우정*이 굳이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이양원은 성안에 있다가 한강의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지키지 못할 거라 생각해 양주로 달아났다.

 

☞ 심우정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지평 · 정언 · 한성 판윤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의 종사관으로 한강 · 임진강의 싸움에 참가했으나 패전했으며, 후에 군기시정, 파주 목사를 지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처음에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여주 북쪽 언덕을 지키면서 적군과 서로 버티니 적군이 감히 건너오지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격문을 보내 원호를 불러 본도(강원도)로 돌아오게 했다. 적군이 여리의 민가와 관사를 헐어 그 재목으로 기다란 뗏목을 만들어 건너는데, 강 가운데서 물에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으나, 원호가 이미 가버리고 강가에는 지키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적군은 여러 날에 걸쳐 전원이 건너왔다.

 

☞ 원호 : 조선시대의 무신. 명종22년(1567) 무과에 급제한 후, 경원부사로 있을 때 니탕개의 침입을 막아 이를 물리쳤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해 적병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강원도 방어사가 되었다. 후에 강원 감사 유영길의 부름을 받고 금화에 이르러 적군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 유영길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4년(1559)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전적을 거쳐 선조22년(1589)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선조26년에 도총관 · 한성 부윤을 역임하고,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행호군 · 연안 부사로 봉직했으며, 선조33년 예조참판으로 치사했다.

 

이에 세 길의 적군이 모두 서울에 들어왔으나 성안의 백성들은 이보다 먼저 흩어져 가버리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명원은 이미 한강을 빼앗기고 행재소로 가려고 하여 임진강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전쟁 상황을 아뢰니, 임금께서 다시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강을 지키도록 명하시고 또 신할에게 명령하여 임진강을 같이 지켜서 적군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도록 했다.

 

이날(3일) 임금께서 개성을 떠나 금교역으로 행차하셨다. 나는 비록 파직당한 몸이지만 감히 뒤떨어질 수 없어서 함께 따라갔다.

 

4일, 임금께서 홍의 · 금암 · 평산부를 지나 보산역에 머물렀다. 처음 개성을 떠날 때 급작스러워서 종묘의 신주를 목청전(개성부에 있는 태조의 옛집)에 두고 떠나왔는데, 종실 한 사람이 울면서 아뢰기를 “신주를 적지에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여 밤을 새워 개성으로 달려가 신주를 모시고 돌아왔다 한다. 5일에 임금께서 안성 · 용천 · 검수역을 지나 봉산군에 다다랐다. 6일에 나아가 황주에 머물고, 7일에는 중화군을 지나 평양으로 들어갔다.

 

삼도 순찰사의 군사들이 용인에서 패전했다. 처음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본도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들어와 도우려 했으나,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란하시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거두어 전주로 돌아오니, 도내 사람들은 이광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음을 탓하며 분개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광은 마음이 편안할 수 없어서 다시 군사를 징발하여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윤선각의 아이 때 이름)과 군사를 합쳐 앞으로 나아갔다. 경상도 순찰사 김수도 그의 도에서 군관 수십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치니 군사의 수효가 모두 5만이 넘었다.

 

용인에 이르러 북두문 산 위를 바라보자 적군의 작은 진루가 보였다. 이광은 이것을 깔보고 먼저 용사 백광언*과 이시례 등을 시켜 적군을 시험해보게 했다. 백광언 등이 선봉대를 거느리고 산에 올라 적의 진루 십여 보 밖에 가서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았으나 적군은 나오지 않았다. 적군은 해가 저문 후에 백광언 등이 조금 해이해진 것을 보고 칼을 빼들고 크게 소리 지르면서 뛰어나왔고, 이에 백광언 등이 매우 당황하여 말을 찾아 달아나려고 했으나 달아나지 못하고 모두 적에게 살해되었는데, 여러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했다.

 

☞ 백광언 : 조선시대의 무관.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고, 선조22년(1589)에 북청판관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로 달려가 군대를 해산시키려는 이광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 싸움에서 조방장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때 순찰사 세 사람은 모두 문인(文人)이어서 병무(兵務)에 익숙하지 못했으며, 비록 군사의 수효는 많았으나 호령이 통일되지 않았고, 또한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방어물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옛사람이 말하던 “군사 행동을 봄놀이 하듯 하면 어찌 패전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대로였다.

 

이튿날 적군은 우리 군사가 분명히 겁낼 거라 생각하고 몇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용력(勇力)을 자랑하면서 달려 나왔는데, 우리 삼도(三道)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무너지니 그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군자(軍資=군수품)와 기계(器械)를 버린 것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그 수량이 많아서 길을 메워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는데, 적군은 이것을 가져다 불살라버렸다. 이광은 전라도로 돌아가고, 윤국형은 공주로 돌아갔으며,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다.

 

부원수 신각*이 적군과 양주에서 싸워 이를 패퇴시키고 머리 60여 개를 베었는데,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군중에서 신각을 베어 죽였다.

 

☞ 신각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0년(1587) 경상도방어사로서 왜구에 대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을 수비하기 위해 중위대장이 되고, 이어 도원수 김명원의 휘하에서 부원수가 되어 한강을 지키다 패전,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가 있었다.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의 원군을 만나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한 뒤, 양주 해유령에서 적병을 맞아 크게 쳐부수었다. 이때 한강 패전 후 임진강에 도피해 있던 도원수 김명원이 신각을 명령불복종죄로 몰아벌주기를 청하는 장계를 올리자, 우의정 유홍은 장계의 내용만 믿고 그의 참형을 계청함으로써 곧바로 선전관을 보내 참형을 집행했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신각의 첩보가 도착하자 그의 참형을 중지시키기 위해 다시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현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참형이 집행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신각이 처음에는 김명원을 따라가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패전하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런데 때마침 함경남도 병사 이혼의 군사가 도착하여 신각은 군사를 합쳐 적군이 서울에서 나와 민가를 노략질하는 것을 만나서 맞아 싸워 쳐부수었다. 왜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이번의 승전이 처음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뛰면서 좋아했다.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장계를 올려 “신각이 제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떠났으며 호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니, 우상 유홍이 임금에게 급히 베어 죽이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떠났다. 그런데 전쟁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뒤쫓아 보내어 중지시키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죽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지만 본디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었다. 전에 연안 부사로 있을 때 성을 수축하고 참호를 파며 군기(軍器)를 많이 준비해두어 훗날 이정암*이 연안을 지켜 성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것은 신각의 공이라 했다. 이번에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고 또 90세 되는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정암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6년(1561)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황해도 초토사로 임명되어 연안에서 성을 포위한 왜군 3천여 명을 크게 쳐부수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황해도 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했다. 선무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월천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지사 한응인*을 보내 평안도 강변(압록강의 연변)의 날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으로 가서 적군을 치도록 하고, 김명원의 절제(지휘)를 받지 말도록 했다. 이때 한응인이 명나라 수도에 갔다가 막 돌아왔는데 윤 좌상(윤두수)이 여러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의 얼굴에 복을 누릴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했다. 한응인이 마침내 임진강으로 떠나갔다.

 

☞ 한응인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주서 · 지평을 지내고 선조20년(1587)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삼등에, 선조23년 정여립 옥사고변의 공으로 평난공신 일등에 책정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순찰사로서 왜군 격퇴에 힘쓰다. 요동에 건너가 구원군을 요청했다. 서울이 수복되자 호조판서로서 군량보급에 진력했으며, 선조40년(1607)에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선조17년(1584)부터 32년(1599)까지 전후 네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한응인과 김명원의 군사가 임진강에서 패전하니 적군이 임진강을 건너왔다. 처음에 김명원이 임진강 북쪽에 있으면서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강의 여울을 따라 나누어 지키도록 했고, 강 가운데 있는 배는 거두어 북쪽 언덕에 매어두었다. 적군이 임진강 남쪽에 진을 쳤으나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다만 유격병(임기응변으로 공격하는 병사)만 출동시켜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싸울 뿐이었다.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적군이 강가에 있는 여막(廬幕)을 불사르고 장막을 걷으며 군기를 거두어 수레에 실은 다음 물러가는 시늉을 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했다. 신할은 본시 날쌔었지만 꾀가 없었으므로 적군이 정말로 물러가는 것이라 생각하고서 강을 건너 적군의 뒤를 쫓으려했는데, 경기 감사 권징이 신할과 합세하니 김명원은 이를 금지하지 못했다.

 

이날 한응인도 임진강에 도착하여 군사 전원을 거느리고 적군을 쫓으려 했는데, 한응인이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 강변의 건아(健兒=장사)들이며 북쪽 오랑캐와 가까이 있어서 전진(戰陣)의 형세를 잘 아는 터라 한응인에게 “군사가 먼 곳에서 오느라 피로하고 아직껏 밥도 먹지 못했으며, 병기도 정비되지 않았고 후군(後軍) 또한 일제히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적군이 물러가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사오니, 원컨대 조금 쉬었다가 내일 적군의 형세를 살핀 다음 나가 싸우도록 하십시다” 하였다.

 

그러자 한응인은 군사들이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는다고 여겨 서너 사람을 목 베어 죽였다. 김명원은, 한응인이 새로 조정에서 파견되어 왔으며 또한 자기의 지휘를 받지 말도록 했으므로 비록 하는 일이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별장 유극량은 나이가 많으며 싸움에 익숙한 터라 경솔히 나아가지 말도록 힘써 진언하니, 신할이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자 유극량이 “내가 성년 시절부터 군인이 되었는데 어찌 죽기를 피하려고 하겠습니까마는, 그토록 말씀드리는 것은 나라일을 그르칠까 두려워한 따름입니다” 하고 분개하면서 뛰쳐나가 자기에게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강을 건넜다. 우리 군사가 이미 험난한 곳으로 들어가자, 적은 과연 날쌘 군사를 산 뒤에 매복해두었다가 한꺼번에 함께 일어나니 우리의 여러 군대는 모두 패전하여 달아났다. 유극량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앉으면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겨 적군 몇 사람을 쏘아 죽인 다음 적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신할 또한 전사했다. 군사들은 달아나 강언덕까지 왔으나 건너지는 못하고 바위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강물에 뛰어드니 마치 바람 속에 어지럽게 떨어지는 잎사귀와 같았다. 미처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한 군사는 적군이 뒤에서 쫓아와 긴 칼로 내리찍으니 모두 엎드려 칼만 받을 뿐이었고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김명원과 한응인은 강 북쪽에 있다가 이 모양을 바라보고 그만 기가 꺾였다. 상산군 박충간이 때마침 군중에 있다가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나니, 군사들은 그를 바라보고 김명원으로 여겨 모두 외치기를 “원수가 달아났다” 하였다. 이에 강여울을 지키던 군사들이 그 소리에 호응하여 모두 흩어져버렸다. 김명원과 한응인이 행재소에 돌아왔으나 조정에서는 이 일을 문책하지도 않았다. 경기 감사 권징은 가평군에 들어가 난을 피했고, 적군은 마침내 이긴 기세를 타고 서쪽으로 내려오니 다시는 방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적군이 함경도로 들어오니 두 왕자가 적의 수중으로 떨어졌고, 따라간 신하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본도 감사 유영립*, 북병사 한극함* 등이 모두 붙잡혔으며, 남병사 이혼은 도주하여 갑산까지 갔다가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남 · 북도의 군현이 모두 적군에게 점령당했다.

 

☞ 유영립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15년(1582)에 종성부사가 되었다. 선조24년에 함경 감사가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 때 왜병이 북도로 들어오자 적군에 잡혀 있다가 뇌물을 주고 탈출했으나,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죄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 한극함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 병사로서 해정창에서 적장 가등청정과 싸우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단신으로 오랑캐 부락인 서수라로 도주했으나, 도리어 그들에게 붙잡혀 적군에게 호송되었다. 이듬해 적군이 서울을 철수할 때 단신으로 탈출해 고언백의 군중으로 돌아왔으나 처형당했다.

 

왜학 통사 함정호란 사람이 서울에 있다가 적의 장수 가등청정*에게 잡혀 그를 따라 북도(함경도)로 들어갔는데, 적군이 물러간 후에 서울로 도망쳐 돌아와서 나에게 북도의 사정을 자못 상세히 이야기했다.

 

☞ 가등청정 : 가토 기요마사를 말한다. 그 어머니가 풍신수길의 생모와 육촌 사이여서 어려서부터 풍신수길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일본국 내의 통일전쟁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조선침략군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 34세였다. 조선 침략 전쟁 중에 한때 풍신수길의 오해로 불려 들어간 일도 있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 전토를 침략했다.

 

가등청정은 적의 장수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했는데, 평행장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서 황해도 안성역에 이르러 양계(평안도와 함경도)를 나누어 빼앗기로 하고 각각 갈 길을 의논했으나 결정을 보지 못하자, 두 적장이 제비를 뽑아 평행장은 평안도로 가고 가등청정은 함경도로 가게 되었다.

 

이에 가등청정은 안성에 사는 백성 두 사람을 사로잡아 길잡이로 삼고자 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이곳에서 나서 자랐으므로 북쪽 지리에는 밝지 못하다고 길잡이 하기를 회피하자 가등청정이 당장 한 사람을 베어 죽이니 남은 한 사람이 겁이 나서 길을 인도하겠다고 나섰다.

이리하여 가등청정은 곡산에서부터 노리현을 넘어 철령 북쪽으로 나와 하루에 수백 리 길을 달리는데, 그 형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북도 병사 한극함은 육진 군사를 거느리고 해정창에서 적군과 만났는데, 북도 군사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데다 마침 땅이 평탄하고 넓어서 왼쪽과 오른쪽에서 번갈아 나와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대니 적군이 지탱하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때 이미 해가 저물었으므로 군사들은 조금 쉬었다가 적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내일 다시 싸우고자 했으나, 한극함은 듣지 않고 군사를 지휘하여 적군을 포위했다.

 

이에 적군은 창고 속에서 곡식 섬을 꺼내어 나란히 늘어놓아 성처럼 만들고 우리 군사의 화살과 돌을 피하면서 그 속에서 조총을 수없이 쏘니, 우리 군사는 빗살과 같이 죽 늘어서서 나뭇단처럼 겹겹이 서 있었으므로 맞으면 반드시 관통했고 간혹 총탄 한 알에서 서너 명이 쓰러지기도 하여 마침내 우리 군사는 무너지고 말았다.

 

한극함은 남은 군사를 거두어 고개 위에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싸우고자 했는데, 밤중에 적군이 몰래 나와서 우리 군사를 둘러싸고 풀 속에 흩어져 매복해 있었다.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서 우리 군사는 아직도 적군이 산 밑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한 방 총소리가 나더니 사면에서 고함을 치면서 뛰어오는데 모두 적군이었다. 우리 군사는 드디어 놀라서 무너졌는데, 장수와 군사들이 적군이 없는 곳을 찾아 도망치느라고 모두 진흙 속에 빠진 것을 적군이 쫓아와서 칼로 베니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며, 한극함은 도망쳐 경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사로잡혔다.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모두 회령부로 갔다. 순화군은 처음에는 강원도에 있었는데, 적군이 강원도에 들어오므로 북도로 향했다. 이때에 적군이 왕자를 끝까지 쫓으니,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먼저 왕자와 따라온 신하들을 묶어서 적군을 맞이하니 적의 장수 가등청정은 그 묶은 것을 풀어 군중에 머물게 하고, 함흥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 국경인 : 조선시대의 반란자. 처음에 전주에 살았으나 죄를 짓고 회령으로 귀양가서 부의 아전이 되었는데, 조정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장 가등청정의 군대가 회령에 가까이 오자, 그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그곳에 와 있던 두 왕자 임해군, 순화군과 종신인 김귀영 · 황정욱 등을 모두 포박하여 가등청정의 군문으로 가서 항복했다. 적군이 남쪽으로 퇴각할 때 회령 수비의 책임을 위임받았으나 북평사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 유생 신세준 · 오원적 등에게 붙잡혀 참살되었다.

 

칠계군 윤탁연만은 홀로 도중에서 병이 있다 핑계하고, 딴 길로 해서 별해보로 깊이 들어갔고, 동지(동지중추부사) 이기는 왕자를 따라가지 않고 강원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모두 적에게 잡히지 않았다. 유영립은 적에게 구금당한 지 며칠이 되자, 그가 문관이라 해서 적의 감시가 조금 해이해진 틈을 타서 빠져나와 행재소로 돌아왔다.

 

이일이 평양에 도착했다. 이일은 이미 충주에서 패전하여 한강을 건너 강원도 경계까지 들어갔다가, 이리저리 옮겨서 이곳 행재소로 온 것이다. 이때 여러 장수들은 서울에서 남쪽에서 내려가 도망치기도 하고 죽기도 해서 한 사람도 대가를 호종하는 장수가 없었는데, 적군이 장차 이곳에 이른다는 말을 듣고 인심이 더욱 두려워하던 차에, 이일은 무장들 중에서도 본래부터 대단한 명망이 있었으므로 비록 싸움에 패해 도망쳐 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일은 벌써 싸움에 여러 번 패하여 가시덤불 속에 숨어 다니던 터이므로 패랭이(댓가비로 엮어 만든 갓의 한 종류)를 쓰고 흰 베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고 왔는데, 얼굴이 몹시 파리하니 보는 사람이 탄식했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장차 그대에게 의지하여 든든하게 믿고자 하는데, 용모가 이렇게 바싹 말랐으니 어떻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겠소” 하고는 행장에서 남빛 비단 첩리를 찾아서 그에게 주었다. 그러자 여러 재신들이 총립(말총으로 만든 갓)도 주고 은정자(전립 따위의 위에 꼭지처럼 만든 꾸밈새)와 채색 갓끈도 주니 당장에 바꾸어 입어서 옷의 장식은 한결 새롭게 되었으나, 다만 신은 벗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짚신을 그대로 신고 있었다. 내가 웃으면서 “비단 옷에 짚신은 격이 서로 맞지 않는걸”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윽고 벽동에 있던 토병(그 지방 토박이로 사는 사람들 가운데 뽑은 군사) 임욱경이 적군이 이미 봉산에 왔다는 것을 탐지하여 보고해왔기에 나는 좌상(윤두수)에게 “적군의 척후가 응당 이미 강 건너편에 와 있을 것입니다. 여기 영귀루(대동강의 서북안에 있음) 밑에 강물이 두 줄기로 흐르고 있는데, 물이 얕아 건널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우리 백성을 잡아 향도군으로 삼고 강을 몰래 건너서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성이 위태로울 텐데, 어찌 이일을 급히 보내 물이 얕은 강여울을 지켜서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윤공도 “그렇습니다” 하고 곧 이일을 보내도록 했는데, 이때 이일이 거느린 강원도 군사가 겨우 수십 명뿐이었으므로 다른 군사들을 더 보태도록 했다.

 

이일은 함구문(평양성의 남문)에 앉아서 군사만 점고하고 곧바로 떠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일이 급한 것이 염려되어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그때까지 아직 문 위에 있었다. 윤공에게 잇달아 말하여 재촉하게 했더니 이일이 그제야 떠나갔다. 이일이 이미 성 밖에 나갔으나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없어 강 서쪽으로 잘못 가다가 평양 좌수 김내윤이 밖에서 오는 것을 만나 그에게 길을 묻고 인도하게 하여 만경대 아래로 달려가니 성에서 겨우 1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강 남쪽 언덕을 바라보니 적군이 벌써 와 모인 것이 이미 수백 명이나 되었으므로, 강 가운데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서 부르짖으며 달아나고 있었다. 이일이 급히 무사 10여 명을 시켜 섬 가운데로 들어가서 활을 쏘도록 했으나, 군사들이 겁이 나서 그제야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적군은 벌써 물 가운데 있으면서 언덕으로 가까이 오고 있어, 우리 군사들이 급히 센 활로 쏘아 연달아 예닐곱 명을 쓰러뜨리자 적군은 마침내 물러갔다. 이일은 그대로 머물러 나루를 지켰다.

 

요동 도사(명나라 요동성의 군정을 맡은 관직으로 총병관)가 진무 임세록을 왜적의 실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로 보냈는데, 임금께서는 대동관에서 불러 보시었다. 나는 5월에 관직을 파면당했다가 6월 초하루에 복직이 되었는데, 이날 임금의 명령을 받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게 되었다.

 

이때 요동에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도성이 함락되고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또 왜병이 이미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의심스러워했다. 왜적의 변고가 비록 급하더라도 이렇듯 빠를 수는 없을 것이라 여겼고,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임세록이 이일 때문에 왔으므로 나는 그와 함께 연광정에 올라 왜적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왜병 한 명이 강 동쪽 숲속에서 나와 잠시 나타났다 숨었다 하더니 조금 후에 왜병 두세 명이 잇달아 나와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했는데, 그 태도가 태연하여 마치 길 가다가 쉬는 것 같은 상태였다.

 

내가 임세록에게 이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이것은 왜병의 척후입니다” 하니, 임세록은 기둥에 기대어 바라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보이고서 “왜병이 어찌 저렇게 적을 수가 있겠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왜적은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이는데, 비록 많은 군사가 뒤에 있더라도 먼저 와서 정탐하는 자는 몇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적은 수효만 보고 그들을 깔본다면 반드시 적군의 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임세록도 “그렇습니다” 하고 빨리 회답하는 자문을 청구하여 그것을 받아서 달려갔다.

 

조정에서는 좌상 윤두수에게 명하여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 등을 거느리고 평양을 지키도록 했다. 며칠 전에 성안 사람들이 임금께서 평양을 떠나 피란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제각기 도망가고 흩어져서 마을이 거의 텅 비게 되었다. 임금께서 세자에게 명하여 대동관의 문에 나가서 성안의 부로(父老)들을 모아놓고 이곳을 굳게 지키겠다는 뜻으로 타이르게 했더니, 부로들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동궁 마마의 명령만 듣고는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사오니, 반드시 성상 마마께서 친히 타이르시는 말씀을 들어야만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임금께서 하는 수 없이 대동관의 문에 나가서 승지를 시켜 어제 세자의 말 그대로 타이르시니, 부로 수십 명이 절하고 물러났다. 마침내 그들이 각기 나누어 나가서 산골 속에 숨어 있던 늙은이, 어린이와 남녀,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찾아서, 성에 들어오니 성안이 가득 찼다. 그러나 적군이 대동강 가에 형체를 나타내자 재신 노직* 등이 묘사(종묘와 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궁인을 호위하여 먼저 성문을 나갔다. 이에 성안에 있는 이속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 들고 길을 가로막아 함부로 쳐서 묘사의 신주를 길바닥에 떨어뜨리고, 따라가는 재신들을 가리켜 크게 꾸짖으며 “너희들이 평일에 나라의 녹만 도적질해 먹다가, 이제 나랏일을 그르치고 속이기를 이와 같이 한단 말이냐?” 하였다.

 

☞ 노직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7년(1584)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주서를 거쳐 청관직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으로 왕을 호종했고, 후에 벼슬이 병조판서, 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연광정에서 임금 계신 곳으로 달려가면서 살펴보니, 길 위에 모인 부녀와 어린 아이들이 모두 성이 나서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서로 외치기를 “이미 성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 성안으로 불러 들여다가 우리들만 왜적의 손에 어육(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남에게 죽임을 당하기를, 생선과 짐승의 고기처럼 마음대로 베어 먹도록 버려둔다는 말)을 만들게 한단 말인가” 하고 했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이 거리에 가득한데,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칼이나 몽둥이를 가지고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후려치니 매우 소란스럽고 북적거려서 제지할 수가 없었다. 문안의 조당(조정)에 있던 여러 재신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여 뜰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난민들이 궁문에 들어올까 걱정되어 문 밖 층계 위에 나가 서서 그중에 나이 많고 수염이 많은 사람을 보고 손짓하여 불렀다. 그 사람이 곧바로 다가왔는데, 바로 그 지방의 관리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이 성을 지키며 임금께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으시기를 원하고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은 지극하다. 그런데 다만 이 일로 인하여 난을 일으켜 궁문을 소란하게까지 하니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다. 또한 조정에서도 지금 이곳을 굳게 지키기를 계청하여 임금께서 이미 허락하셨는데,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야단스러운가? 네 모양을 보건대 식견이 있는 사람 같으니 모름지기 이 뜻으로 여러 사람들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장차 중한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곧바로 몽둥이를 버리고 두 손을 마주잡고 “소민(小民)들은 나라에서 이 성을 버리고자 한다는 말만 듣고 분개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여 이렇듯 망동한 것인데, 지금 이런 말씀을 듣자오니 소인이 비록 우매하고 용렬하오나 가슴속이 곧 시원해집니다” 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그 무리들을 손을 휘둘러 헤쳐버렸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조신(朝臣)들은 적군이 장차 가까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나가 피란하기를 청했는데,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와 홍문관에서 날마다 대궐 문 앞에 엎드려 힘써 이를 청했으며, 인성부원군 정철도 피란하여 성을 나가자는 의론을 주장했다. 나는 말하기를 “오늘날 사세는 먼젓번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서울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무너져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었지만, 이 성은 앞이 강물에 막혀 있고 민심도 자못 안정되어 있으며 또 중원 지방에 가까우니, 만약 며칠만 더 굳게 지킨다면 명나라 군사가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며, 그 힘을 빌려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곳에서부터 의주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지킬 만한 땅이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좌상 윤두수도 내 의론에 동의했다.

 

나는 정철에게 다시 청하기를 “평시에 내가 생각하기는, 공은 의기가 강개하여 어려운 일이니 피하려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날 공의 의론이 차마 이럴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윤 정승(윤두수)이 문산(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의 호)의 시 “내가 칼로써 영신의 목을 베려고 한다” 라는 글귀를 읊자, 인성(정철)은 크게 성내서 옷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가버렸다. 평양 사람들도 내가 성을 지키자는 의론을 주장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날 내 말을 듣고는 자못 순종하면서 물러간 것이다.

 

저녁 무렵에 감사 송언신*을 불러 난민을 진정시키지 못한 일을 문책해, 송언신이 지난번 앞장선 사람 세 명을 적발해서 대동문 안에서 목 베어 죽이자,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이때는 벌써 성을 나가 피란하기를 결정했으나 갈 곳을 정하지 못했는데, 조신들은 대부분 북도(北道)는 지역이 궁벽하고 길이 험준해서 적병을 피할 만한 곳이라 주장했다. 이때 적병이 이미 함경도를 침범했지만, 길이 통하지 않았고 또한 변고를 보고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한 것이다.

 

☞ 송언신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평안감사로 있었다. 그 후 대사간,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에 동지(동지중추부사) 이희득*이 전에 영흥 부사로 있을 때 어진 정사를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는 이유로 그를 함경도 순검사로 삼고, 병조정랑 김의원을 종사관으로 삼아 북도로 가게 한 후, 내전(왕비)과 궁빈 이하의 사람들을 먼저 북쪽을 향해서 떠나가도록 했다. 이에 나는 굳이 반대하여 아뢰기를 “임금께서 서쪽으로 떠나오신 것은 본시 명나라 군사의 원조에 힘입어 흥복을 도모하려 한 것입니다. 지금 명나라에 군사 요청까지 했는데 북도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중간에서 적병이 가로막아 명나라 소식도 통할 길이 없을 터인데, 하물며 나라의 회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적군이 여러 도로 흩어져 나아가고 있으니 어찌 북도에만 반드시 적병이 없을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불행히도 이미 그곳으로 들어간 후에 적병이 따라 들어오게 되면 딴 곳으로 갈 길도 없고 다만 북쪽 오랑캐 땅에 갈 수 밖에 없으니 어느 곳에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위태로움이 또한 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조신들의 가속(家屬)이 북도로 많이 피란해 가 있는 까닭에, 각자가 자기 집 생각만 해서 모두 북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도 늙은 어머니가 계신데, 듣건대 동쪽 방면으로 나가서 피란했다 하니 비록 있는 곳은 알 수 없사오나 반드시 강원도나 함경도 사이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신 또한 저의 사정으로 말한다면 어찌 북쪽으로 갈 뜻이 없겠습니다마는, 다만 국가의 큰 계책은 신하들의 사정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감히 이토록 간절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내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자, 임금께서 가엾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경의 어머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 나의 탓이로구나!” 하셨다.

 

☞ 이희득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5년(1572) 춘당대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0년(1587)에 대사간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 순검사가 되고 그 후 이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내가 이미 물러나온 후 지사 한준*이 다시 혼자 임금을 뵙고 북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힘써 말하자, 이에 중전(왕비)이 마침내 함경도를 향해 떠났다.

 

☞ 한준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21년(1566)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1년(1588)에 우참찬이 되었다. 이듬해(1589) 정여립의 옥사를 고발해 그 공으로 평난공신 이등이 되고 청천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로 왕자 순화군을 배종하여 강원도로 피란, 이듬해 한성부 판윤에 전임되었다.

 

이때 적군은 대동강에 도착한 지가 사흘이나 되었다. 우리들이 연광정에 있으면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왜병 한 명이 나무 끝에 조그만 종이를 달아 강 위 모래 바닥에 꽂고 가기에 화포장 김생려를 시켜 조그만 배를 타고 가서 그것을 가져오게 했다. 왜병은 무기를 가지지 않았으며 김생려와 악수를 하고 등을 두드리며 매우 친근하게 굴면서 서신을 부쳐 보냈다. 서신이 왔는데 윤 정승(윤두수)은 열어보려고 하지 않으므로, 내가 “열어보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여 열어보았다. 그 글에 “조선국 예조판서 이공 합하에게 올린다” 라고 씌어 있었는데, 이것은 이덕형에게 보내온 서신으로 평조신과 현소가 쓴 것이며, 이덕형을 보고 강화를 의논하고자 한 것이다.

 

이덕형이 작은 배를 타고 가서 평조신과 현소 두 사람을 강 가운데서 만났는데, 평일처럼 인사하고 난 다음 현소가 “일본이 길을 빌어 중국에 조공하고자 하는데 조선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이라도 한 가닥 길을 빌려주어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과 통할 수 있도록 하면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형은 전일에 그들이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하고 또 군사를 물리친 후에 강화를 의논하자고 했는데, 평조신 등의 말이 자못 겸손하지 못하여 마침내 각기 헤어지고 말았다. 이날 저녁에 적병 수천 명이 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쳤다.

 

6월 11일, 임금께서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행차하셨는데 대신 최흥원 · 유홍 · 정철 등이 호종했고, 좌상(윤두수)은 김 원수(김명원)와 이 순찰사(이원익)와 함께 평양에 머물러 지켰으며, 나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같이 머물러 있었다. 이날 적군이 성을 공격했다. 좌상 · 원수 · 순찰사와 나는 연광정에 있었고, 본도 감사 송언신은 대동성의 문루를 지키고, 병사 이윤덕은 부벽루 뒤쪽 강여울을 지키며, 자산 군수 윤유후 등은 장경문을 지키고 있었다.

 

성안에 있는 군사와 민정들은 모두 3천~4천 명인데 성가퀴에 나누어 배치했으나, 대오가 정돈되지 못하여 성 위에 사람이 빽빽한 데도 있고 드문드문한 데도 있었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서서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치기도 했고, 서너 살받이터 사이에 한 사람도 없는 곳도 있었다. 을밀대 근처 소나무 가지에 옷을 여기저기 걸어놓고 의병(疑兵=적을 현혹시키기 위해 군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 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니 적병 또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동대원 언덕에 일자진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벌여 꽂았는데 마치 우리나라 만장을 세워놓은 모양과 같았다. 적군이 말 탄 군사 10여 명을 출동시켜 양각도를 향하여 강물 속으로 들어서니, 물이 말의 배에까지 찼다. 모두 고삐를 잡고 나란히 서서 장차 강을 건너올 것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 군사들 중 강가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한두 사람씩, 혹은 서너 사람씩 큰 칼을 메고 있었는데, 햇빛이 칼날에 비치자 마치 번개처럼 번쩍번쩍 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진짜 칼이 아니고 나무로 만들고 백랍을 칠해서 남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라고 했으나 멀어서 분간할 수 없었다.

 

또 적병 예닐곱 명이 강가에 이르러 성을 향하여 조총을 쏘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웅장하였다. 탄환이 강을 건너 성안에까지 떨어졌는데, 멀리 오는 것은 대동관까지 날아와 기왓장 위에 떨어졌으니 거의 천여 보나 날아온 셈이고, 성루 기둥에 맞은 것은 깊이가 서너 치나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중에 붉은 옷을 입은 적병이 연광정 위에 제공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장수인 줄 알고 조총을 들고 겨누면서 점차 앞으로 나와 모래사장까지 와서 탄환을 쏘았다. 정자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맞혔으나 거리가 먼 곳이어서 심한 부상은 당하지 않았다. 내가 군관 강사익을 불러 방패 안에서 편전(짧고 작은 화살로 날카로워 갑옷이나 투구를 능히 뚫는다)으로 그 적병을 쏘게 했다. 화살이 강 건너 모래 위에 떨어졌는데 적병이 멈칫하다가 물러갔다.

 

원수가 활 잘 쏘는 사람을 동원하여 날랜 배를 타고 강 가운데서 적병을 향해 쏘았는데, 배가 동쪽 언덕에 점점 가까워지자 적병도 물러나서 피했다. 우리 군사가 배 위에서 현자총(불화살을 쏘는 대포의 한 종류)을 쏘았는데, 서까래 같은 화전(옛날 싸움에서 쓰던, 불을 붙이고 쏘는 화살)이 날아서 강을 지나가자 적병이 쳐다보고 모두 큰 소리로 떠들면서 흩어졌다가 화전이 땅에 떨어지자 앞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했다.

 

이날 병선(兵船)을 곧바로 정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방리 한 사람을 목 베어 죽였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날로 줄어들기 때문에, 그전에 재신들을 단군 · 기자 · 동명왕(고구려의 시조인 추모태왕)의 사당으로 나누어 보내서 비오기를 빌었으나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다. 내가 윤 정승(윤두수)에게 “이곳은 강물이 깊고 배도 없으니 적병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으나, 상류에는 얕은 여울이 많으므로 멀지 않아 적병이 반드시 그곳으로 건너올 것이고, 건너온다면 성을 지킬 수 없을 텐데 어찌 엄중하게 방비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김 원수(김명원)는 성질이 느려서 다만 “이미 이윤덕에게 명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라고 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윤덕 같은 사람을 어찌 믿고 있으리오” 하고는, 이 순찰사(이원익)를 가리키면서 “공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마치 잔치모임 같아서 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 가서 강을 지키지 않으시렵니까?” 라고 하자, 이 순찰사가 “만약 가보라고 명령하신다면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윤 정승이 이 순찰사에게 “공이 가보시오” 하자, 이 순찰사가 일어나 나갔다.

 

나는 이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일만 할 뿐이었고 군무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군사는 반드시 패전할 테니 빨리 명나라 장수를 도중에서 영접하여 한 걸음이라도 빨리 와서 우리를 구원하여 일이 성사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날이 저물었으나 마침내 종사관 홍종록* · 신경진*과 함께 성을 나와서 밤이 깊을 무렵에 순안에 도착했다. 중로에서 이양원의 종사관 김정목*이 회양에서 오는 것을 만나 적병이 철령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 홍종록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5년(1572)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16년(1583)에 병조정랑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황해도 암행어사 · 조도사를 지낸 뒤 직제학에 이르렀다.

 

☞ 신경진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7년(1584)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좌랑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 왕을 평양에서 호종해 그곳에서 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이 디어 공을 세우고, 전쟁이 끝난 후 이조참의, 충주 목사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2년(1610)에 경상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 김정목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성천 부사로 있었다.

 

이튿날 숙천을 지나 안주에 도착하니 요동 진무 임세록이 또다시 왔기에, 자문을 받아 임금 계신 곳으로 보냈다.

 

이튿날 임금께서 이미 영변을 떠나 박천으로 행차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박천까지 달려갔다. 임금께서 동헌에 나와서 나를 불러 보시고 “평양은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시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인심이 자못 안정되어 있으므로 지킬 수 있을 듯합니다마는, 다만 구원병을 빨리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신이 이 때문에 여기에 와서 명나라 군사를 맞이하고 빨리 달려가서 구원하도록 요청하고자 하는데, 지금까지 군사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입니다” 라고 했다. 임금께서 윤두수의 장계를 손에 들고 나에게 보이면서 “어제 벌써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하니 민심이 반드시 동요했을 텐데, 어떻게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진실로 성상께서 걱정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그곳에 있을 때는 이러한 일은 보지 못하였사오나, 대개 그곳의 형세(지세)를 보건대, 적병이 반드시 얕은 여울로 건너올 것이니 마름쇠를 물 속에 많이 깔아서 방비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 고을에 마름쇠가 있는지 물어보도록 했는데 “수천 개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임금께서는 “급히 사람을 시켜 평양으로 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셨다.

 

나는 또 아뢰기를 “평양 서쪽에 있는 강서 · 용강 · 증산 · 함종 등 고을에는 창고의 곡식이 많고 백성도 많이 있는데 적병이 벌써 가까이 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분명 놀라서 흩어질 테니, 급히 시종 한 사람을 보내 달려가 인심을 진무(鎭撫)시키고 또 군사를 거두어 평양을 구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자, 임금께서 “누구를 보내야 하겠는가?” 하시므로, 나는 “병조정랑 이유징*이 계략과 사려가 있으니 보낼 만합니다” 라고 했다.

 

☞ 이유징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선조15년 임진왜란 때 왕을 평양에서 호종했고, 이듬해 의주 목사를 지냈다. 죽은 후인 선조37년(1604)에 호성공신 이등에 추록되고 완흥군에 봉해졌다.

 

나는 다시 아뢰기를 “신은 일이 급해서 지체할 수 없사오니 밤새워 달려가서 명나라 장수를 만나보겠습니다” 하고, 하직하고 물러나와 이유징에게 임금 앞에서 아뢴 말을 고했다. 그러자 이유징은 깜짝 놀라면서 “그곳은 적병이 들끓는 곳인데 어찌 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하므로, 내가 그에게 “나라의 녹을 먹고 있다면 어려운 일을 사피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된 도리인데, 지금 나라 일이 이토록 위급하니 비록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이라도 피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어찌 이 한번 걸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가?” 하며 책망하자, 이유징은 잠잠히 있으면서 뉘우치는 기색이 있었다.

 

내가 임금님을 하직하고 떠나와서 대정강 가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는데, 광통원 쪽을 돌아보니 들판에 흩어진 군사들이 하나 둘씩 계속해서 오기에, 평양이 적에게 빼앗겼는가 의심스러워 군관 서너 사람을 시켜 달려가서 데려오게 했더니 19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바로 의주 · 용천 등 고을의 군사들이며 평양으로 가서 강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제 적병이 이미 왕성탄에서부터 강을 건너오니 강가의 우리 군사들이 무너지고, 병사 이윤덕도 달아났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크게 놀라 곧바로 노상(路上)에서 글을 써서 군관 최윤원을 보내 임금 계신 곳으로 달려가서 보고하도록 하고, 밤에 가산군으로 들어갔다. 이날 저녁에 내전께서 박천에 이르렀는데, 도중에서 적병이 이미 북도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더 가지 않고 되돌아온 것이었다. 통천 군수 정구*가 사람을 보내어 음식물을 진상해 왔다.

 

☞ 정구 : 조선시대의 문신. 조식 · 이황의 문인이다. 선조6년(1573) 유일로 천거되어 예빈시 참봉을 거쳐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통천 군수로 재임했다. 광해군5년(1613)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고, 향리에서 후진을 교육했다. 경학과 예학에 정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