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부도사 일행은 순천에서 한성으로 되돌아갔고, 이순신 일행은 권율과 이원익 등의 배려로 초계로 향했다. 이순신은 초계에서 권율의 군사 고문역을 맡아 다가올 위험에 대비해 나갔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일 ※
늦게 개었다. 원수는 보성으로 갔고, 병사는 본영으로 갔고, 순찰사(박홍노)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들러 보고 갔다. 부사(순천 부사 우치적)도 와서 보았다. 진흥국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원균)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형복, 신홍수도 왔다. 남원 종 말석이가 아산으로부터 와서 어머님의 영연을 편안히 모셨다고 전하였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슬픈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여수 본영으로부터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뿌리며’ 이야기하였다. 여수는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고, 한산도는 둔치고 있는 진(陣)이다. 원균이 군영 경영을 어떻게 했기에 여수 본영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고 있을까?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한 지 불과 세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에는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 《징비록》 ※
이보다 먼저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렀는데, 그는 이순신이 정하여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장수와 군사들 중에 이순신이 신임하여 부리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내쫓아버렸으며, 이영남이 자기가 전날에 패하여 도망하였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니, 군사들의 마음은 그를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집을 한 채 지어 운주당이라 이름 짓고 밤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에는 장수들을 불러 모아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다음에야 싸웠기 때문에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 안에서 살면서 이중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막아 놓으니 여러 장수들도 그의 낯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이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는 은밀히 수군거려 말하기를 “만약 왜적을 만난다면 오직 도망치는 수만 있을 따름이다” 고 하면서 여러 장수들은 몰래 서로 그를 비웃었으며, 또한 다시 품의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선조는 이순신이 거느린 함대를 원균에게 주면서 원균이 잘 싸워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원균 통제사의 조선 함대는 싸우기도 전에 여수 본영과 한산진의 군영 경영에서부터 먼저 무너지고 있었다.
충무공은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 는 정신을 밝히고, 역대 전라 감사(이광, 권율, 이정암, 박홍노)들이 백성과 힘을 합해 한산도를 지켜 왔지만, 원균은 취임 3개월 만에 한산도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한산도의 위기는 곧 호남과 조선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전라도의 장졸들과 백성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이때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다리를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호남 땅에 접어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호남의 민 · 관 · 군은 돌아온 영웅을 반기며 불안감을 달랬다.
그러나 박홍노 감사는 이순신이 전주에 유숙하고 있었어도 이순신이 죄인의 몸이었기 때문에 만나서 문상조차 하지 못해 미안해했고, 원균의 부실한 한산도 군영 경영에 대해 자문을 구하지도 못해 답답해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아져서 ‘정사준 집에서의 만남’ 이 이루어졌고, 전라도의 수뇌진들은 그곳에서 향후 이순신에 대한 예우와 역할을 논의했던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
3일. 맑다. 이기남이 와서 보았다. 차남의 이름 울 자를 열 자로 고쳤다. 이 자(字)는 소리는 ‘기쁠 열(悅)’ 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다’ 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이다. 늦게 강소작이 와서 곡을 하였다. 오후 4시 무렵에 비가 내렸다. 저녁에 고을 수령(부사)이 와서 보았다.
4일. 비가 왔다. 이 날은 어머님의 생신일이라 슬프고 애통함을 참을 길이 없다. 닭이 울자 일어나 앉아서 눈물만 흘렸다. 오후에 비가 몹시 퍼부었다. 정사준도 오고 이수원도 왔다.
5일. 맑다. 새벽꿈이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우치적)가 와서 보았다.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이 한산에서 와서 원공(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날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종군하여 어머님의 영전을 멀리 떠나 있어서 장례도 못 지내니, 무슨 죄로 이런 일을 당하는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나 같은 운수(운명)는 고금을 통해서 둘도 없을 것이다. 다만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6일. 맑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관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랴!” 라고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하심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능성 현감 이계명도 역시 상제의 몸으로(복상 중에) 기용된 사람인데, 늦게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원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부찰사(한효순)가 여수로 나와서 병으로 조리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어 조상(弔喪)하였다.
7일. 맑다.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가 와서 짚신을 바치므로 거절하고 받지 않았으나, 두 번 세 번 간절히 받으라고 하므로 값을 주어 보냈다. 짚신은 곧 정원명에게 주었다.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 군수 안괄도 한산에서 와서 흉측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이원룡은 수영(水營)에서 돌아왔다.
이순신은 짚신 한 켤레라 하더라도 신세를 지는 관계라면 빠짐없이 기록을 해 놓았다. 한산도 시절에도 승려들이 삼베를 가져오면 대신에 김과 미역을 주어 보내곤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8일 ※
맑다. 아침에 중 수인이 밥 지을 중 두우를 데리고 왔다. 원(원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상하였는데, 이것은 원수(권율)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중에게 밥을 짓게 한 것은 이순신이 상중이어서 고기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절간 음식을 차려주려는 배려였다. 한 끼에 몇 인 분의 밥을 지었을까? 이순신과 아들, 그리고 두 사람을 수발하는 하인 2~3명, 도원수가 한산진에서 차출해 보낸 군관들과 그들의 하인들, 문상객과 그들의 하인들… 이렇게 따져보면 약 20명 내외의 식솔이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
이경신이 한산에서 와서 음흉한 원(원균)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 원(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9일. 흐리다. 아침에 이형립이 와서 보았다. 순천 급제 강승훈이 군병을 모으러 왔다. 종 한경이 보성에서 말을 끌고 왔다.
10일. 궂은 비. 늦게 큰 비가 왔다. 이날은 태종대왕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 날은 비가 온다고 한다. 집주인이 보리밥을 지어 들여왔다. 부사도 조문 편지를 보내왔다. 녹도 만호 송여종이 삼과 종이 두 가지를 부의(賻儀)로 보내왔다. 전라도순찰사는 “백미와 중품 미 각각 1곡(1곡은 10말, 즉 1섬)씩과 콩, 소금도 구해 놓았는데 군관을 시켜 보내겠다” 고 하였다.
11일. 맑다. 전 광양현감 김성이 체찰사(이원익)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화살 제작용 대나무)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원균)의 일이다. 부찰사(한효순)가 순천부에 도착하자 정사립, 양정언이 와서 “부사가 보러 오시겠다고 합니다” 고 전했으나, 나는 몸이 불편하여 보지 못했다.
12일. 맑다. 이원룡을 보내어 부사에게 문안했더니 부사도 김덕린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아침에 아들 열을 부사에게 보냈다.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13일. 맑다.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이원익)가 보낸 편지에 영공(원균)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 고 하였다. 늦게 정사준이 떡을 만들어 왔다. 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주어 참으로 미안하다.
14일.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만나보고 돌아갔고, 부체찰사는 부유(승주군 주암면 창촌리)로 향해 갔다. 정사준, 정사립, 양정언들이 와서 나를 모시고 가겠다고 하기에, 일찍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나 송치(승주군 서면) 밑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운봉과 박롱이 왔다. 저물녘에 찬수강(승주군 황전면)에 도착하였다.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강을 건너 구례 마을(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 현감이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15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주인집이 너무 낮고 깨끗하지 못하여 파리가 벌떼처럼 모여들어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관아의 정자로 옮겨왔더니 남풍이 바로 불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구례 현감과 하루 종일 같이 이야기하였다.
16일. 맑다.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돌아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들러 본 고을(구례)로 들어와서 며칠 머문 뒤에 진주로 갈 것” 이라고 전하였다.
이원익 체찰사는 곡성→구례→진주로 순찰을 다니고 있었는데 역시 이순신의 남행길과 관련이 있는 행적으로 보인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17일 ※
맑다. 남원 탐후인이 와서 전하기를 “원수가 운봉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을 영접하는 일로 완산(전주)으로 달려갔다” 고 하였다. 내 걸음이 낭패여서(제대로 걷지 못하여) 답답하였다.
걸음이 늦은 것은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말을 타고 급히 달릴 수 없었던 탓이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
18일. 맑다. 동풍이 크게 불었다. 저녁에 김종녀 영공이 남원으로부터 와서 만나보았다. 충청 수영의 영리 이엽이 한산도로부터 왔기에 집에 보낼 편지를 부쳤다.
19일. 맑다. 체찰사가 고을로 들어올 텐데 성 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안하여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저녁에 체찰사가 고을로 들어왔다.
백의종군하는 죄인의 몸이었으므로 성문 밖에서 기다렸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0일 ※
맑다. 첨지 김경로가 와서 보았다. 체찰사가 내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군관 이지각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다시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여 말하기를 “상(喪) 당한 소식을 일찍 듣지 못했다가 이제야 들었습니다. 매우 놀랐으며 애도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면서 저녁에 다시 만나볼 수 있겠는지 물었으므로, 나는 “저녁에 마땅히 찾아가 뵙겠다” 고 대답하고 어두울 무렵에 가서 뵈니, 체찰사는 평복을 입고 접대하였다. 조용히 일을 의논하고 나올 무렵에 남 종사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체찰사 이원익이 평복을 입고 그를 맞이한 것은 이순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고, 조용히 일을 의논했다는 것은 원균과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2일 ※
맑다. 유 박천이 승평(순천시)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기에 전라도, 경상도의 두 수사(水使)와 가리포 등에게 보낼 문안편지를 써서 보냈다. 늦게 체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고을로 들어오고, 배흥립도 온다고 하였다. 회포를 터놓을 수 있을 터이니 다행, 다행이다. 배(裵) 동지(同知)와 구례 현감이 와서 보았다.
배흥립은 개전 초부터 함께 싸워 온 부하장수인데, 그는 이날부터 50일 후인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3일 ※
아침에 정사룡과 이사순이 와서 보고 원공(원균)의 말을 많이 전했다. 늦게 배흥립이 한산으로 돌아갔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했는데, 시국이 그릇되어 감을 무척 분히 여기면서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하였다. 내일 초계로 가겠노라고 하니, 체찰사가 이대백이 모은 쌀 두 섬을 부쳐 주기에 성 밖 집주인 장세호의 집으로 보냈다.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 고 했는데, 이순신이라는 거목(巨木)이 통제사에서 물러나자 한산도의 조선 수군과 후방 기지인 호남의 백성들은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비변사-이원익의 체찰사 본부-권율의 도원수부-원균의 3도수군통제영 간에는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서로 따로 놀 듯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시국을 맞아 체찰사 이원익도 몹시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같은 혼란과 갈등 속에서 원균 통제사는 후에 권율 도원수부에게 (‘부산으로 나아가 왜적을 치라’ 는 어명을 이행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맞았고, 조선 함대는 칠천량에서 전부 불타고 말았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4일 ※
맑다. 아침에 광양의 고언선이 와서 만나보았다. 한산의 사정을 많이 전해 주었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그릴 방도가 없으니 본대로 그려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었다. 저녁에 비가 크게 쏟아졌다.
이순신이 지리에 밝고 지도를 잘 그렸다는 점은 이원익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날 이원익이 요청한 지도는 남해안 일대의 왜성과 왜군들의 주둔 현황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지도였을 것이다.
이 무렵은 원균이 부산포 공격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안골포 등지의 왜군을 육군에서 선제공격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장계로 올렸고, 조정 · 체찰사 · 도원수 등이 원균의 전제 조건에 대한 대책을 놓고 고민에 쌓여 있던 때였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5일 ※
비가 왔다. 아침에 떠나려 하다가 비에 막혀서 멈추었다. 혼자 촌가에 앉아 있으니 착잡한 마음 그지없다. 슬픈 생각을 어찌 다 말하랴.
초계로의 출발이 비 때문에 늦어지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
26일. 종일 큰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려 하자 사량만호 변익성이 무슨 신문받을 일로 체찰사에게로 왔는데 잠깐 서로 만나보고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엎어지며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의 아우 김덕린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을 시켜서 억지로 사정하게 해서 들어가 잤다. 행장(行裝)이 흠뻑 다 젖었다.
김덕령 (1567~1596) :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경수. 본관은 광주이다.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거를 받아 조정의 종군명령을 받았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권율 밑에서 왜군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 후에도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번 왜군을 물리쳤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1596년, 윤근수의 노복이 주인의 세도를 믿고 명령을 듣지 않자 곤장을 쳐서 죽인 일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의 변호로 석방된 일이 있었다. 그 후 명 · 왜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신들을 제거하려는 문신들의 모함으로 대역죄에 몰려 매를 맞고 옥사하였다.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678년 벽진서원에 모셔졌다.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년)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에 남긴 옥중시로서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시가 있다. 젊은 나이에 전쟁에 공을 세우고서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 자의 울화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이 옥사한 것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기 2년 전인 1595년이다. 대역죄로 몰렸기에 그의 아우 김덕린의 집안도 벼슬길은 물론 사람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렇게 되자 김덕린은 세상을 비관했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두문불출했으며 과객들의 출입도 거절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날도 이순신 일행의 진입을 거절했는데, 과객 중 한 젊은이(이순신의 아들 열)가 하인들을 밀치고 들어와 자신은 이순신의 아들이라면서 비라도 피하게 해 달라며 사정을 했다. 이에 주인집은 깜짝 놀라 이순신 일행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김덕린의 집으로 들어간 10~20명 정도의 이순신 일행은 스스로 밥을 해 먹는 등 민폐는 끼치지 않았다.
이때로부터 세월이 흘러 1668년(숙종 때)에 와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이 벗겨졌고, 그 후 이민서(1633~1688)가 《김충장공유사》를 집필하였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 《김충장공유사》 ※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심을 품고 또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저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죽었으며,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들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죽었다’ 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순신 자살설’ 의 시작이 이곳이다. 과연 자살했을까?
※ 《난중일기》 1597년 5월 ※
27일. 흐렸다 개었다 하였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리느라 늦게 출발하여 두치(광양군 다압면 섬진리)의 최춘룡의 집에 도착했다. 유기룡이 와서 만나보았다. 사량 만호 이종호가 먼저 와 있었다. 변익성은 곤장 20대를 맞고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였다.
28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늦게 출발하여 하동에 이르니 현감(신진)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원균)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하였다. 변익성도 왔다.
죄인이었음에도 성 안 별사에서 반갑게 대접을 받은 날이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29일 ※
흐리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면서 조리하였다. 현감(신진)이 정겨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황생원이라고 하는 칠십 난 노인이 하동으로 왔는데, 본래는 서울 사람인데 시골로 떠돌아다닌다고 하였다. 나는 만나보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한데 26일 비를 흠뻑 맞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
1일. 비.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청수리)의 시냇가 정자에서 말을 쉬고, 저물어 진주 땅 접경에 있는 단성 땅 박호원의 머슴 농사꾼의 집에 들어가니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기는 하였으나 숙소가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보냈다.
2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였다. 일찍 떠나 단계(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서 아침을 먹고 늦게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 현감 신효업은 이미 산성으로 가고 없어서 빈 관아에서 잤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와서 먹으라고 하는 것을 종들에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3일. 비. 길을 떠날 수 없어서 머물러 유숙하였다. 도원수의 군관 유홍이 흥양에서 와서 길이 험하다고 일러주었다.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에게서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듣고 종들에게 매를 때리고 밥쌀을 도로 갚아 주었다.
종들이 민폐를 끼쳤기에 매를 때렸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4일 ※
맑다. 일찍 떠나려는데 삼가 현감이 문안편지를 보내고 노자까지 보내왔다. 합천 땅에 이르러 말을 쉬고 5리쯤 되는 앞에 이르니 갈래길이 있는데 한 길은 바로 고을로 들어가고 한 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어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10리나 가니 도원수 진(陣)이 바라보였다. (어릴 적 친구인)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개연(속칭 갯벼루)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며, 굽이도는 강물이 깊고, 길 또한 건너질러 놓은 다리가 위태로웠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적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가 모여곡(합천군 율곡면 영전리 팔복원. 이순신이 이날부터 7월 18일까지 머문 곳)이다.
초계 땅 갯벼루까지 왔을 때 지형 공부가 습관이 된 듯 적어둔 글귀이기도 하고, 도원수부의 군사 고문으로서 행한 지리 연구이기도 하다. 이런 곳을 택해서 산 위에는 육군을, 강에는 수군을 배치한다면 적들이 그 사이의 길로는 감히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 길이 되어 넓고 낮아졌지만 당시에는 절벽을 타고 도는 좁은 길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천험의 요새가 도원수부 인근에 있음을 메모해 두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5일 ※
맑다. 아침에 초계 군수(이유검)가 달려오기에 곧 불러들여 이야기하였다. 식후에 중군 이덕필도 달려와서 옛날 이야기를 하였다. 조금 있으니 심준이 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이승서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들이 도망간 일을 말했다. 이날 아침 구례 사람과 하동 현감(신진)이 보내준 종과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남행길의 종착지인 초계에 도착했기에 그간 수고해 준 종들을 주인들에게 돌려보냈다. 돌려보낸 숫자는 10여 명의 종과 10여 필의 말 정도였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6일 ※
맑다. 자는 방을 새로 도배하고 군관 휴식소 두 칸을 만들었다. 모여곡의 주인집 이웃에 사는 윤감과 문익신이 와서 보았다. 집주인이 과부여서 곧 다른 집으로 옮겼다.
군관들과 주인집 과부 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다른 집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의 신독(愼獨)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의 여성 관계는 엄격했다. 더구나 이 무렵은 백의종군의 죄인이자 개인적으로는 상주의 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하 군관들과 집주인 과부 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주변을 깨끗하게 관리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
7일. 맑다. 원수의 군관 박응사와 유홍 등이 와서 만나보았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고마워하더라고 말을 전하라고 하여 보냈다.
8일. 맑다. 오후에 원수가 진에 도착하였기에 곧 가서 만나보고 원수와 2시간 넘게 이야기하였다. 원수가 박성이 올린 글의 초본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원수의 처사에 허술한 점이 많다고 박성은 진술하고 있었다.
원수는 스스로 불안하여 체찰사(이원익) 앞으로 글을 올렸다고 하였다. 저물어서 돌아왔는데, 몸이 불편하여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권율은 순천에서 이순신을 만나본 후, 독려차 보성 등지로 나갔다가 이날 초계로 돌아왔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9일 ※
궂은비가 내렸다. 늦게 정상명을 원수의 처소로 보내어 문안인사를 드리게 하였다. 처음으로 노마료(종과 말을 거두는 데 드는 비용)를 받았다.
권율이 초계에 도착하자 종과 말에 대한 급료도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백의종군의 몸이던 이순신에게 지급된 급료는 얼마나 되었을까? 아래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소설가 송우혜 씨가 발표한 백의종군 관계 내용이다.
※ 《백의종군(白衣從軍)》 ※
조선왕조에서 죄를 범한 무장에게 가했던 처벌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가장 중형이 장수에 대한 처형이었고, 그 아래로는 귀양을 보내는 유배가 있고, 그보다 약한 처벌은 파면이었다.
백의종군은 파면보다 더 약한 아주 가벼운 처벌로서 정확히 말하자면 ‘보직 해임’ 의 처벌이었다. 그래서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으면 흰옷을 입고 자신이 근무하는 곳에서 계속 근무해야 했는데, 실제 사례를 고찰해 보면, 보직을 해임당한 상태로 흰옷을 입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직을 그대로 지니고 근무하면서 옷만 백의를 입게 하는 사례도 있는 등 일종의 ‘정서적 처벌’ 로 활용되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그 사람의 신분과 위계를 표시하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관리로서 관복이 아닌 ‘백의’ 를 입고 집무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충분한 징계 효과가 있는 처벌 방식이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자신의 종을 거느리고 다니고, 그가 묵는 곳에 각급 관리들이 와서 현안을 보고하고, 다량의 녹봉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백의종군의 실상을 알려주는 산 자료이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0일 ※
맑다. 원수의 종사관(황여일)이 삼척 사람 홍연해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자기는 늦게 와서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연해는 홍견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竹馬)를 타고 같이 놀던 서철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서 만나보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였는데, 음식을 대접해 보냈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이 와서 만나보았다. 임진년 때 적을 무찌른 일에 대하여 한참 동안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리고 현재 토벌과 방비의 대책이 허술한 것 등에 대하여 한탄하였다.
도원수부 종사관과의 대화는 군사 고문으로서 나눈 대화이다. ‘산성에 험고한 요새’ 는 행주산성과 독성산성에서처럼 화약무기를 설치한 요새를 말한다.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화왕산성과 황석산성 외에도 크고 작은 산성과 고갯길을 막아서 왜군들의 북상을 저지했다. 이 막아서기 작전 속에는 임진년 때 곽재우 군을 펼친 게릴라전술, 권율의 웅치 · 이치 고갯길 막아서기 노하우, 그리고 백의종군의 이순신이 초계에서 조언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기에 왜군들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울돌목(명량) 해전과 명나라 군이 참전하자 왜군들은 남해안으로 퇴각해 내려갔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1일 ※
맑다. 중복(中伏)이어서 쇠라도 녹일 것 같았고 땅은 찌는 듯하였다. 명나라에서 보낸 관리 경략의 군문(軍門) 이문경이 와서 만나본 후 부채를 선물로 주어 보냈다. 어제 저녁 원수의 종사관(황여일)과 이야기할 때 변흥백(변존서)의 종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해주었다. 그편에 어머님의 영연(靈筵)이 평안하신 줄은 알았으나 쓰린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그런데 흥백이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돌아갔다고 하니, 참으로 섭섭하였다. 흥백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곽란(吐瀉霍亂)을 만나 고통스러워서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닭이 울고 나서야 좀 덜해졌다. 이날 아침 한산진의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를 14통이나 썼다.
변존서는 외사촌으로 변존서는 초계 변(卞) 씨이며, 경북 청도에 살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고모(이순신의 모친)가 사는 아산으로 피난을 왔고, 그 후 여수까지 피난 와서 의병장으로 종군했다. 이순신이 하옥되자 변존서는 아산으로 돌아가 아산과 초계, 그리고 청도를 오가면서 이순신을 뒷바라지하는 가운데 의병을 모집하고 다녔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2일 ※
맑다. 종 한경과 종 인을 한산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이응표), 녹도(송여종), 여도(김인영), 사도(황세득), 배 동지(배흥립), 김 조방장(김완), 거제(안위), 영등(조계종), 남해(박대남), 하동(신진), 순천(우치적) 등에게 편지를 썼다.
거처할 곳이 마련되었기에 두 사람의 종을 시켜서 그간 받은 문상에 대한 답례 편지를 보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2일 ※
늦게 승장 처영이 와서 만나보고 부채와 짚신을 바치기에, 대신 물건으로 보상해 주어 보냈다.
승장 처영은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운 후 권율 휘하의 장수가 되었다. 개인적인 전답이나 수입이 없었던 승려에게 시주는 못할망정 신세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물건으로 답례했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2일 ※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갔다는 말을 들었으나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런데 원수에게 가서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들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들은 경주로 진을 옮기고 있다’ 고 하였으므로, 복병을 보내서 길을 막고 군대의 위세를 뽐내려고 했던 모양이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이 일이 있어서 원수에게 와서 인사를 하였다. 나도 김자헌을 만나보고 늦게 달빛을 이고 돌아왔다.
권율과 함께 아군의 대응전략을 논의했는데, 군사 고문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 《난중일기》 1597년 6월 13일 ※
맑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이 찾아와서 두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였다.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점심을 대접해 보냈다. 이날 낮에 왕골을 쪄서 말렸다. 어두워져서 청주의 이희남(4월 28일자에 기술된 ‘친한 군관들’ 중의 한 명)의 종이 들어와서, 그의 주인이 우병사(김응서)에게 와서 방어하게 되었으므로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그곳에서 묵고 있다고 하였다.
이복남 병마사의 우후가 도원수부를 다녀가면서 이순신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역시 군사 고문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간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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