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간 중의 《난중일기》는 7월 1일자와 8월 10일자 장계를 더욱 자세하게 해독할 수 있게 해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일 ※
맑다. 선전관 이춘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내용은 ‘물길을 끊어 막고 도망가는 적을 죽이라!’ 는 것이었다. 이날 보성 군수, 발포 만호 두 장수가 와서 모였고 다른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않았다.
농번기였기에 관내 다른 기지대장들은 출항 기일을 연기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3일 ※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많이 뒤떨어져서 유감, 유감이다. 이춘영(선전관)은 돌아가고 선전관 이순일이 또 왔다.
이억기의 수군이 ‘많이 뒤떨어져서’ 라고 했는데, 그곳 역시 농번기였고 조선 육군과 명나라 군에 대한 뒷바라지 때문에 기일을 맞추지 못한 기지가 여러 곳 있었다.
왜군들이 한성을 비워준 것은 1593년 4월 29일이다. 그래서 5월은 남으로 퇴각해 오는 왜군들과 그 뒤를 조 · 명 연합군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남쪽 백성들은 왜군들의 약탈도 피해야 했고, 또 조 · 명군의 징용과 징발도 피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농사일이 소홀해졌고 굶어 죽거나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
4일. 맑다. 이날은 (아산에 있는)어머님 생신인데도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우수사(이억기), 군관 등과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 권준)도 와서 함께 약속하였다.
5일. 맑다.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늦게 군관들을 시켜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했다.
6일. 맑다. 아침에 친척 신정과 조카 봉이 해포(아산 해암)에서 왔다. 늦게 큰 비가 쏟아지더니 그대로 종일 그치지 않아 개천에 물이 넘쳐 농민들을 만족하게 하니 다행, 다행이다.
이렇게 비가 와야 모를 심은 후 마음 편히 출동할 수 있다. 그래서 반가웠다. 모를 심지 못하고 출동한다면 후에 추수할 것이 없어 전후방이 모두 굶어 죽는 지경이 될 수도 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7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배에 올라 미조항으로 향했는데 동풍이 크게 불고 파도가 산더미 같아 간신히 이르러 잤다.
파도가 험해서 미조항에서 잤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8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떠나 사량도 앞바다에 이르니 만호가 나오기에 우수사(원균)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에 있다” 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쳐 배를 타지 못했다” 고 하였다. 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인사하며 수사(원균)의 잘못하는 일이 많다고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원균 쪽도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기일에 맞춰 출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영남이 원균의 군영 관리상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며 개탄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9일 ※
흐리다. 아침에 떠나 걸망포(통영군 용남면)에 이르니 바람세가 불순하다.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와 같이 앉아 군사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원 수사(원균)가 배 2척을 거느리고 왔다.
원균이 왔는데 ‘배 2척’ 의 초라한 모습이다. 원균 관내 후방 고을들이 채 회복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평소 백성들을 돌보고 병선을 건조하는 군영 관리에 매진하지 않고 주색과 죽은 자의 목 베기에 관심이 높았던 것이 문제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0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흥양(고흥) 군사를 점검하였다. 선전관 고세충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부산으로 나아가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는 것이었다. 저녁에 영남 우후 이의득이 와서 보았다.
흥양 고을 함대가 당번이 되어 그동안 견내량을 지키고 있었다. 또 다시 선전관이 와서 부산으로의 출동을 독촉했다. 선조가 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국방에 이 같은 관심을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선 인구의 절반이 죽었을 정도로 무방비로 지내오다가 이여송의 3만 5천군이 출전하자 수륙의 장수들에게 사흘이 멀다 하고 선전관을 보내 출동을 독촉하고 있는데, 민족사적으로 길이 남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사건’ 이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 ※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 선전관 성문개가 영남에서 왔기에 흑각궁과 천과 가죽으로 제작한 과녁(소포)을 주어 보냈는데, 성(선전관)은 이일(순변사)의 사위이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좌우도 체탐인을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정철총통은 개량형 승자총통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이로부터 3개월 후인 8월, 조총 제작에 관한 장계를 올린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3일 ※
맑다. 조그마한 산 등 위에 소포(소형 과녁)를 치고 순천, 광양, 방답, 사도, 발포 등의 여러 장수들과 편을 갈라 활을 쏘고 승부를 다투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밤에 들으니 영남우수사 원균의 처소로 선전관 도언량이 왔다고 하였다. 달빛은 배 위에 가득 하고 온갖 근심은 가슴을 치밀었다. 혼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탐색대가 돌아올 때까지 활쏘기를 하면서 군심을 가다듬게 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4일 ※
맑다. 선전관 박진종과 선전관 영산령 복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이억기)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영산령이 취해서 넘어져 정신을 못 차렸는데, 우스웠다. 밤으로 두 선전관은 돌아갔다.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그 속이고 망령됨은…’ 이라는 기록으로 유추해 보건대, 원균은 선전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술기운을 핑계로 이순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은 것 같다. 선전관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조정에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 《난중일기》 1593년 5월 15일 ※
맑다. 아침에 낙안군수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가 그 대장(원균)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이 봉사 윤제현과 함께 왔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원균이 ‘고약한 내용’ 을 장계로 올리자 그의 부하 군관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 장계의 초본을 몰래 가지고 와서 알려주었다. 조선 수군에 몰아닥칠 파멸의 기운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6일 ※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조카 해와 아들 울이 같이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중로에서 진군 속도를 늦추며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나름대로 무슨 교묘한 계책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라를 위해서 매우 걱정이다. 매사가 이와 같으니 더욱 한심스러워 혼자 눈물을 흘렸다.
정오 때 윤 봉사(윤제현)한테서 관동(서울 종로구 연건동) 아주머니(숙모)가 양주 천천(양주군 회천읍)으로 피난 갔다가 거기서 별세했다는 말을 듣고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어찌 세상 일이 이렇게도 차가운고! 초상 장사는 누가 맡아서 했는지. 대진(숙모의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데! 한결 더 쓰리다.
조카와 아들은 여수 본영과 한산도의 진영을 의병격의 전령으로 오가고 있었다. ‘명나라 장수’ 는 이여송인데 그는 이때 충주에 머물러 있었다. 문경새재 이남의 왜군들과는 무려 2백여 리의 거리였다. 조선 수군의 명나라와 수륙으로 왜군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바다에 나와 있었지만, 이여송의 명군은 한성과 충주 일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속만 끓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7일 ※
맑다. 새벽에 큰 바람이 불었다. 변존서는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진주)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보았더니 이 제독은 지금 충주에 있다고 하였다.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 치고 있으니 통분, 통분하였다. 종일토록 큰 바람이 불어 마음이 심란하였다.
고성 수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와 쇠고기 음식 한 꼬치와 벌통을 보내왔다. 하지만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받기가 미안하나 정으로 보낸 것이라 돌려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변존서는 이순신의 외사촌으로 경북 청도가 선조들의 고향인데, 변존서 대에 와서는 아산의 고모(이순신의 모친)가 사는 곳으로 이사와 있었다. 왜란이 나자 의병으로 이순신의 휘하에 있었는데, 병이 나서 다시 아산으로 돌아갔다.
‘추로(秋露)’ 는 가을 이슬이 엉겨서 된 물인데 한약재로 쓰인다. 귀한 선물을 받았지만 관동 서울 아주머니(숙모 또는 당숙모)의 상중이기에 모두 군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8일 ※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더니 조금 뒤에 시원하게 설사를 하고는 조금 편안해진 듯하였다. 해포에서 종 목년이 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답장을 써서 돌려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집으로 보냈다. 전주 부윤이 공문을 보냈는데, 겸순찰사(권율)가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공문에 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탐망꾼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나 그리 대단한 흉모는 없다” 고 하였다.
어머니 소식이 아산으로부터 왔고, 이로부터 2~3개월 후 어머니는 여수로 피난을 온다. 그 무렵부터 이순신은 한산도에 체류하였기에 두 모자는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순신에게는 한이 된다.
순찰사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음을 이상하게 여기고 메모를 해 두었다. 권율이 행주대첩으로 승진은 했지만 아직 정식 교지를 받지 못해서였을까? 《난중일기》는 충무공이 경영자로서 기록해 둔 일기이다. 여기에는 원균의 언행, 순찰사의 공문에 관인이 찍히지 않은 것, 장병들과 적군의 동태, 날씨 등 크고 작은 사안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이순신의 꼼꼼한 군영 관리의 면모를 실감하게 해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19일 ※
맑다. 순찰사의 공문에, 명나라 장수의 패문(공문)에 의하여 부산 바다 어귀를 벌써 끊어 막았다고 하였다. 영등 망군(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명 · 왜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하나는 ‘심유경-고니시 간의 회담’ 이고, 다른 하나는 ‘송응창이 주도한 사용재 · 서일관의 왜국 파견’ 이다.
조선에서는 이 같은 형태의 강화회담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명나라 측은 조선이 수륙군을 동원해서 부산을 공격할까봐 우려했다. 명군이 부산 바다 어귀를 끊어 막은 것은 이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0일 ※
20일. 맑다. 망군(望軍)이 와서 보고하기를 왜선은 형적도 없다고 하였다.
21일. 새벽에 출발하여 거제 유자도(죽도)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망군이 와서 적의 출입이 여전하다고 하였다. 원 수사가 허위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원균이 진중을 소동케 한 공문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순신은 이 같은 원균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난중일기》에 꾸준히 기록해 가면서 원균을 경계했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2일 ※
비. 사람들이 바라던 참에 아주 흡족히 내렸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이 본영에서 (경략) 송응창의 패문(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송응창의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서 들어온다고 하므로 곧 우후를 정하여 영접하도록 내어보내고 나대용은 문안하는 일로 내보냈다.
자나 깨나 농사일 걱정이다.
송응창은 명나라 군사의 최고사령관으로 왜국에 ‘사용재 · 서일관의 사절단’ 을 보내서 명 · 왜 간의 강화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이 강화회담에 방해가 되는 일을 할까봐 이에 대한 감시와 조선 수군에 대한 현황 파악차 관리를 보낸 것 같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3일 ※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늦게 비가 오락가락 하였는데 영남 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소식을 전하고 또 본도 병사의 편지를 전했다. 창원에 있는 적을 나가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진격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들어온다고 하였다. 영남수사도 명나라 관원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아들 회(33세)는 장남으로 종군한 몸이었다. 회는 여수에 온 명나라 관리를 안내하여 오다가 쾌속선으로 먼저 도착한 것 같다. 후에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곁을 지킨 사람이 아들 회(당시 37세)와 조카 완(20세)이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4일 ※
비가 오다 말다 하였다. 아침에 진을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옮겼다. 나대용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도 뒷 바다에서 만난 후 먼저 와서 전하기를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과 선전관 목광흠이 같이 온다” 고 하였다.
오후 2시에 명나라 관원 양보가 진영 문에 당도하였으므로 우별도장 이설을 시켜 나가 맞이하여 배에까지 인도에 오니 무척 기뻐하는 빛이었다. 내 배로 오르도록 청하여 황제의 은혜를 두 번 세 번 거듭 사례하고 마주 앉기를 청했지만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끝내 받아들이고는 무척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감사했다.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이순신 쪽에서도 진실되고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지만 명나라 쪽에서도 사실상 이순신이 명나라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순신을 예우했다. 또 조선 수군의 위용을 실감하면서 이순신의 명장다움도 확인했다.
고대로부터 중국은 남선북마의 전통이었고, 명은 양자강 유역의 수군력으로 중국을 통일했기에 수군을 중시했으며 수군에 대한 이해도 높았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
25일. 맑다. 아침에 통역 표헌을 다시 청하여 맞아들여 명나라 장수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할 따름이다” 고 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응창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탐정 양보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고 하였다.
늦게야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정오에 거제현 앞 유자도 앞바다 가운데로 진을 옮기고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했다. 광양 현감이 왔고, 최천보와 이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저녁에 조붕이 와서 만나보고 이야기한 후 보냈다.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도 관찰사의 영리 한 사람,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영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서 들이지 않았다.
26일. 비.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보니 그는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인데 글자도 조금 알았다. 한참동안이나 서로 이야기했지만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였다. 밤 10시부터 바람이 크게 불어 배들이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 배와 마주 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호했는데, 또 발포 만호가 탄 배와 마주쳐서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했다. 송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의 배에 부딪혀서 많이 상했다고 한다. 아침에 영남수사가 와서 보았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으니 가소롭다.
27일. 비바람으로 배가 부딪히기 때문에 유자도(경남 거제시 신현읍 교도, 죽도)로 진을 옮겼다. 협선 3척이 간 곳이 없더니 늦게야 들어왔다. 순천(부사 권준)과 광양(어영담)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렸다.
영남우병사(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수사(원균)가 송경략(송응창)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전라병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는데 창원의 적을 오늘 토벌키로 예정했으나 흐리고 비가 개지 않아 출동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비바람으로 실종된 협선 3척을 찾아왔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28일 ※
비. 종일 비가 왔다. 광양 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돌아 왔는데 광양 현감은 그대로 유임되었고, 독운어사 임발영이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분부가 있었고, 또 일족 가운데 대충 징발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 전과 같이 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였다.
1593년 4월 8일자로 올린 어영담 유임 건의 장계와 도망간 병사가 있을 경우 당분간은 일족 중에서 대신 징발하여 충당해야 한다는 이 전 장계의 건의 등이 받아들여졌다.
※ 《난중일기》 1593년 5월 30일 ※
종일 비. 오후 4시쯤에 잠깐 개었다가 다시 비가 왔다. 원 수사가 송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데, 기효근과 원균은 병선에 여자를 태우고 다녔다.
※ 《난중일기》 1593년 6월 1일 ※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님의 편지를 보니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한꺼번에 왔다. 충청수사 정공이 왔기에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충청수사 정걸이 선발대로 1~2척의 판옥선과 협선을 이끌고 왔다. 정걸은 임란 전에 전라좌수사를 지냈으며 전쟁이 나자 의병장으로 지원해서 2차 출동 때 흥양 고을의 유진장을 맡아 후방을 지켰다. 또 부산포해전 때에는 직접 참전해서 화약무기에 의한 해전의 원리를 격물치지하였고, 그 후 충청수사가 되어서는 권율의 전라 육군을 강화도로 수송했다. 그리고 행주대첩을 위해 충청 · 전라도의 화약무기(변이중의 화차 등)와 화살을 운송해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임란 후 조선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조정에서는 “정걸이 만든 병선에 대해서는 왈가불가 하지 말라” 는 공론이 있었을 정도였다. 오늘에 와서 보면 정걸은 조선공업과 중공업 분야의 전문가였다.
※ 《난중일기》 1593년 6월 3일 ※
새벽에 맑다가 늦게 큰 비. 지휘선을 연기로 그을리는 일(배의 수명 연장을 위한 작업) 때문에 좌별선으로 옮겨 탔다. 순찰사(권율), 순변사, 병사(선거이), 방어사(이복남)들의 답장이 왔는데, 각 도의 군마가 많아야 5천이 넘지 못하는데 양식도 거의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적도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데 일은 모두 이렇게 되어가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조선 육군의 주력이었던 권율의 전라 육군 5천은 진주와 함안 등지에 주둔해 있었는데, 식량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같은 형편에서 남하해 오는 16만의 왜군을 맞아 어떻게 싸워야할지 답답했다.
※ 《난중일기》 1593년 6월 5일 ※
비. 종일 비가 왔다. 바람세가 매우 험해서 배들을 겨우 구호했다. 경상 수사(원균)가 웅천의 적이 혹시 감동포로 들어올지도 모르니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내왔다.
그 흉계가 참으로 우습다.
감동포구(오늘날의 구포)는 김해와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물류 중심지였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큰 왜성을 쌓고 낙동강의 최대 병참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이동해 가자면 먼 거리였고 위험하기는 부산포 못지않은 곳이다. 또 이 무렵에는 북상했던 왜군 주력이 남해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일본으로부터는 1천여 척의 선단이 건너오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이었기에 권율 등 조선의 육군은 함안→의령→진주로 황금히 물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이 왜 갑자기 감동포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했을까?
또 이순신은 왜 이 같은 제안을 ‘흉계가 참으로 우습다’ 고 기록해 놓았을까? 상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함대가 정박해 있던 상황을 보면, 이순신과 이억기는 같은 도 소속이었으므로 강풍에 두 수사의 기함이 서로 부딪힐 정도로 함께 정박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원균의 함대는 도가 달랐으므로 다소 떨어진 곳에 진을 쳤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한산도 연안에 있었을 텐데 구태여 공문까지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둘째, 지금까지의 출동상황을 살펴보면 ‘혹시 올지도 모른다’ 는 정도의 불확실한 정보를 가지고는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당포와 당항포에서 보았듯이, 언제나 왜선단의 정박지와 적 함대의 규모를 파악해서 장수들과의 작전을 구상한 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만큼 출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원균의 감동포 공격안은 이 같은 작전 수립 과정도 없이 마치 ‘저녁 산책 가자’ 는 제안처럼 막연하고 갑작스럽다.
셋째, 날씨가 악천후였다. 이런 날씨라면 이순신이 분명 출항을 거절할 것을 알고 공격을 제의해 온 것은 아닐까?
원균은 공문의 사본을 자기파의 선전관과 조정 대신에게 전하면서 자기는 어명에 따라 늘 싸우러 나가자고 했지만 이순신은 겁이 많아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출동하지 않았다고 모함을 했던 것은 아닐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원균의 행각은 늘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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