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해전기록 - 21장 - 강화 회담|

구름위 2013. 5. 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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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조선 조어에는 다음에서와 같이 평양성 패전 관계 정보들이 더 많이 입수되었고, 조정은 입수된 정보들을 토대로 패전에 대한 분석과 대책을 논의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중국 장수가 패하고는 도리어 우리나라에 탓을 돌리니 국사가 불행하게 되었다.

 

윤근수 : 우리나라의 군량과 배를 관리하는 관원들 중에 한 사람도 전장(戰場)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고, 출동시킨 군대까지도 겁을 내어 전진하지 않았으니, 큰 나라 장수들이 성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선조 : 출동시킨 군대란 절도사(이빈)를 말하는 것인가?

 

윤근수 : 평양 전투에서 큰 나라 장수는 우리 군대를 다섯 부대로 나누어 동시에 함께 진격하여 습격하도록 하였는데, 성 아래에 도착하자 4개 부대는 도착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조 : 그렇다면 절도사(이빈)가 속인 것인가? 판서가 한 말을 나는 지금 처음 들었다. 아군이 전진하지 않았으니 조 총병이 성을 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절도사는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윤근수 : 절도사에게는 죄를 줄 수 없을 듯하고, 4개 부대의 영장(領將)은 죄를 주어야 합니다. 듣건대 큰 나라 장수가 돌아올 적에 별장 김응함(명량해전 때 중위장)이라는 자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후퇴하였기 때문에) 병사(이빈)가 우선 곤장을 때렸다고 합니다.

 

조승훈이 패전하게 된 데에는 이빈 병마사의 잘못도 한 원인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김응함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다. 또 더욱 자세히 보면 조선군은 억지로 끌려나온 오합지졸의 군대였고, 조정의 권위는 극도로 실추되어 있었기에 지휘체계 전반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감사와 병사는 어째서 빨리 보고하지 않았는가?

 

윤근수 : 감사와 병사는 실상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감사는 이원익이다. 이원익은 이 무렵 평안도 후방 고을들을 다니면서 군사와 군량을 모으느라 조승훈의 패전 사실을 보고할 형편이 못 되었을 수도 있다. 이빈 병사는 장계는 올리지 않았지만 김명원 등에게 공문이나 구두로 보고했으며, 그 내용을 윤근수가 임금에게 보고하게 된 것은 아닐까?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평양성에서 화살을 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윤근수 : 큰 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적병들이 처음에는 목궁(木弓)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의 힘이 세지 않았다. 그런데 흰 깃발을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자 편전(片箭) · 장전(長箭)으로 어지럽게 쏘아댔다. 이는 반드시 너희 나라 사람이 적병에게 투항한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조선 활은 물소 뿔을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활보다 사거리가 길었다. 오늘날의 활터를 보더라도 과녁과의 거리는 150m 정도에 이른다. 특별히 팔 힘이 센 궁수라면 물소 뿔 부분을 강화해서 더 멀리 쏘았을 것이며, 그래서 ‘흑각궁의 신비’ 등 조선 활의 위력을 말해 주는 전설도 많다.

 

이에 비해 왜국의 활인 목궁은 활의 크기는 조선 활보다 두 배나 길었지만 과녁과의 거리는 100m 정도로 사거리가 짧았다. 편전은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조선 특유의 것이다. 조승훈 군은 이 같은 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평양성에서 왜군 측이 편전 · 장전으로 자신들을 공격한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것이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윤근수 : 중국 장수가 또 ‘그 날은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함부로 접전한 까닭에 패배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선조 : 무슨 까닭인가?

 

윤근수 : 그 날은 큰 비가 와서 말의 배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조 총병이 순안현에서 10리를 와서 회군하려 할 적에 한 명의 군졸이 말을 가로막으며 억지로 싸우기를 청한 까닭에 전진하여 싸웠다고 합니다.

 

‘한 명의 군졸’ 은 군졸 복색으로 평양성을 탐색하고 돌아온 조승훈의 첩보대장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반 군졸의 신분으로 어찌 조승훈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면 ‘말을 가로 막은 것’ 이 아니라 조승훈이 행군을 멈추고 보고를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이 중국말이나 만주 말로 대화하는 모습이 멀리 떨어져 있던 조선 병사들에게는 마치 그가 말을 막았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큰 나라 군사가 바로 오지 않고 가산에서 머물러 주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윤근수 : 조 총병은 다시 전진하여 싸우려고 했는데 양 총병이 소환(召還)했기 때문입니다.

 

조승훈은 가산에 머물면서 양 총병의 작전지시를 기다렸고 양소훈은 곧 소환령을 내렸다. 양소훈이 소환명령을 내린 이유는 조승훈이 보고한 내용이 대단히 심각한 사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 양소훈은 의주 건너편 구연성에 와 있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큰 나라 군사가 일단 압록강을 건너가면, 혹 다시 안 오는 것은 아닌가?

 

윤근수 : 우선은 남쪽 지방의 병사들을 기다렸다가 후일에 거사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신점 : 남병이란 곧 포수(砲手)들입니다. 해마다 1천 5백 명이 산해관에 와서 방어하는데, 소신이 올 때 들은 바로는 곧 해주위에 당도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남군 포수’ 는 절강성과 양자강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명나라의 화약무기(총포) 부대이다. 조승훈 군은 요동지역 소속으로 화약무기가 아닌 기마군이 주축이 된 부대였다. 이듬해 다시 조선으로 ㅊ출정해 온 명군의 규모는 이여송의 3만 5천 군인데, 이 부대는 ‘남병의 화약무기 부대와 요동 기마부대의 혼성군’ 이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선조 : 평양의 적병은 얼마나 되는가?

 

윤근수 : 우리나라의 염탐꾼들은 모두 숫자가 적다고 하는데 중국 군사들은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왜군이 동대원에 나타난 6월 초부터 50일 동안의 《선조실록》 기록들을 살펴보면 왜군의 수는 계속해서 2~3천 명 정도로 언급되어 있다. 더 소급해서 살펴보면, 임진강 전투 때에도 조정에서는 한성과 경기 지역에 주둔해 있는 왜군의 규모를 몰랐으며, 한반도에 건너온 전체 왜군의 규모도 모른 채 전란을 치렀다.

 

반면에, 명나라 측은 병법에 밝은 무장들이 실전을 통해서 왜군의 실체를 파악했다. 물론 명나라 조정에도 보고되는 숫자였기에 다소 부풀려졌을 수는 있지만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였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임금이 묻기를 “혹시 왜적이 지친 군사를 내보내어 약함을 보인 까닭에 염탐하는 자가 망령되이 숫자가 적다고 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중국 군사 가운데 성에 올라갔다가 전사한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왜군 측은 조승훈 군을 평양성의 뒷골목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성 위에 보초를 세우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약한 모습을 보였다. 환속한 중 유중립으로부터 전해진 “금년에는 철이 늦어 전진하기 어려우니 서울로 올라가 새해를 맞은 뒤 명년에 요동을 침범하겠다” 고 했다는 보고나, 순안군수가 도원수 김명원에게 “왜적이 모두 한성을 향해 떠났으며, 평양에 남아 있는 왜병은 극히 적고…” 등의 정보들도 사실은 전부 왜군 측이 꾸며낸 역정보였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윤근수가 보고하였다. “성에 올라간 사람은 모두 정병(精兵)이었는데 점검하여 헤아려보니 3백 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사유는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일찍이 달적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불행히 죽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하겠습니다. 또 기마병을 많이 두는 것은 오직 양 총병의 분부에 달려 있습니다” 고 하였다.

 

3백 명을 잃었다면 부상병은 1천 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마병을 많이 둔 것’ 은 요동군의 주력이 기마대였기 때문이다. ‘달적’ 이란 ‘달단족’ 으로 여진족의 일종으로 보이며, 사유는 여진족을 상대로 기마전에 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역시 신립처럼 왜군의 3교대 밀집사격에 당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임금이 비변사에 지시하기를 “지금 예조판서의 장계를 통하여 4초의 군사가 약속을 하고서도 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병사로 하여금 적발하여 군율로 죄를 주게 하라” 고 하였다.

 

비변사에서 회답 건의하기를 “신들의 생각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군정(軍政)이 소란스러울까 걱정되니, 우선은 중지하기 바랍니다” 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뜻이 매우 옳다. 서서히 하라” 고 하였다.

 

조선군은 3~4천 명 정도였고, 이들을 군율로 다스리면 그나마 ‘소란’ 이 일어날 것이 우려되어 군율의 시행을 중지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윤근수가 보고하였다.

 

“김명원은 중국 군사를 다시 청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고, 유성룡은 청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김명원이 명군을 달가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명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그 역시 평양성에 있는 왜군의 수를 2천 명 정도로 알았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6일 ※
신점이 보고하였다.

 

“신이 산해관 주사를 만났더니, 주사가 말하기를 ‘옛날 당 태종은 극서의 나라로서(당나라 수도 장안은 중국의 서쪽 끝에 있었다) 극동의 나라(고구려)를 쳤으니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태조 황제(명나라 주원장)는 수군(水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그대는 신중히 하라’ 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난 명나라는 역사 · 지리적으로 해전에 밝았다. 때문에 한산도에서의 승전으로 왜국의 명나라 침공이 사실상 물건너갔음을 간파했고, 조승훈 사건은 있을 수 있는 병가지상사 쯤으로 돌리면서 속히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조선 조정이 제공하는 왜군들의 규모나 전략 · 전술 등에 대한 정보와 작전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유경을 보내어 이들 분야를 조사하고, 그 조사를 토대로 이여송의 평양성 탈환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9일 ※
임금이 행궁의 동헌에 나와 3도 도체찰사 정철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선조 : 경은 잘 가도록 하라. 성공하면 국가의 다행이다. 수로를 따라 가겠는가?

 

정철 : 해서(황해도)의 적세를 탐지한 다음 수로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선조 : 평양의 전투에서 이제 또 이기지 못하였으니 나랏일이 어찌 이리도 불행하단 말인가? 경은 잘 가도록 하라. 국가의 회복은 오로지 경에게 달려 있다. 종사관과 군관(軍官)은 경의 마음대로 하라. 단지  이곳에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발송하지 못한다.

 

정철 : 용렬한 소신이 제대로 조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길을 떠난 정철은 종사관과 군관을 구하는 데 시일이 걸려서 그랬는지 아래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틀이면 갈 길을 열흘이나 걸려서 영유에 도착했다.

 

※ 《선조실록》 1592년 7월 29일 ※
사관은 말한다.
정철이 길에 오른 지 열흘 만에 영유에 도착하여 그곳의 현비(관기)를 보고는 끌어다 앉히고 시를 지어 주기를,

 

미인이 청강의 일 물으려 하나
청강의 일 말하려니 눈물이 절로 난다
천리 먼 땅에서 님 그리는 꿈꾸었으나
북쪽으로는 첩첩 산 넘기가 어렵구나

 

라고 하였다.

 

청강은 정철이 지난날 귀양 갔던 강계의 별명이다. 아, 임금은 파천하고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었는데 지금이 참으로 흥얼거리며 시구나 찾을 때인가. 몸은 대신으로서 3도를 체찰하게 되었으니 임무 또한 무겁다.

 

그런데 도리어 일개 기녀(妓女)와 마주 앉아 이야기한 것이 겨우 청강에 불과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어찌 자신이 배척당한 한 가지 일뿐이겠는가. 더구나 세상을 원망하여 하는 말이 ‘넘기가 어렵다’ 는 두 글자 속에 들어 있으니, 그가 평생 동안 마음에 품었던 것을 대체로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 국가 회복의 큰 공 이루기를 기대하기란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정철은 배편을 기다리는 중에 관기의 치마에 시를 써주며 시문놀이를 즐겼다. 아무튼 훗날의 사관은 정철이 영유까지 오는데 봄날 꽃놀이 가듯 열흘씩이나 걸렸고, 영유에서는 관비와 시문놀이나 했다고 준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 강화 회담

 

※ 《징비록》 ※
이일을 순변사로 삼고 이빈을 불러 행재소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일은 이보다 먼저 대동강 여울을 지키다가 평양성이 함락되자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황해도로 들어가서 안악을 거쳐 해주에 이르렀다. 그는 또 해주로부터 감원의 이천에 이르렀다.

 

그는 세자를 모시고 군사 수백 명을 모은 다음, 왜적이 평양성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있고 장차 명나라 구원병이 오게 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평양 가까이로 돌아와서 진을 임원역(林源驛)에 쳤는데, 여기는 평양성 동북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의병장 고충경 등과 함께 세력을 연합하여 (평양성에서 나오는) 왜적을 쳐서 꽤 많이 베어 죽였다.

 

이때 이빈은 순안에 있었는데, 늘 군사를 내보내어 (평양에서 나오는 왜군을 상대로)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배하니 무군사(비변사의 한 관청)의 종사관들이 다 이일을 이빈과 교체시키려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홀로 이빈을 그대로 맡겨두자고 주장하여 무군사와의 논의가 맞지 않아 자못 서로 격돌할 기색까지 보였다. 조정에서는 나로 하여금 순안 군중으로 가서 이를 진정시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당시 조정의 공론이 다 이일이 이빈보다 낫다고들 말하고, 또 명나라 구원병이 곧 나온다는 말이 들리므로, 그렇다면 이빈이 그 임무를 이겨내지 못할 것으로 염려되어 드디어 이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박명현이 대신 이일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이빈을 행재소로 돌아오게 하였다.

 

1593년 9월, 명나라 유격 심유경이 왔다. 이보다 앞서 조승훈이 패전하고 돌아가자 왜적들은 더욱 교만해져서 우리 군사에게 글을 보냈는데 ‘염소 떼가 호랑이를 친다’ 는 말이 있었다. 염소는 명나라 군사를 비유한 것이고, 호랑이는 자신들을 자랑한 것이었다. 왜적들은 가까운 시일에 서쪽(의주쪽) 방면으로 내려간다고 떠들므로 의주 사람들은 다 피난할 짐을 지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심유경은 원래 절강성(양자강 하류 지역) 백성이었는데, 석상서는 평소 그가 왜국의 실정을 잘 안다고 하여 유격 장군이란 직위를 주어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순안에 이르러 급히 왜적의 장수에게 글을 보내어 성지(명나라 황제의 교지)로써 ‘조선이 일본에 무슨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는가? 일본은 어찌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느냐?’ 고 문책하였다.

 

이때 왜적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고, 또 그 잔인하고 혹독함을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심유경은 노란 보자기에 편지를 싸서 집안 하인 한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달려가게 하여 보통문으로부터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그 편지를 보고 즉시 ‘직접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 고 회답해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니 그만 두라고 권했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으랴!” 고 하면서 3, 4명의 부하를 데리고 평양성으로 갔다. 소서행장 · 평의지 · 현소 등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베풀고 나와서 평양성 북쪽 십리 밖의 강복산 밑에 모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는데 왜적의 군사가 매우 많았고 창칼이 눈빛처럼 번뜩였다. 심유경이 말을 내려 왜적의 진중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떼를 지어 사면으로 둘러서므로 붙잡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날이 저물어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왜적들이 그를 전송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 다음날 소서행장은 그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대인(심유경)께서는 시퍼런 칼날 속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당나라 때 곽영공(당나라의 명장. 현종 때 안녹산의 난리를 평정한 인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혼자서 회흘의 만군 속으로 들어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왜적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돌아가서 우리 황제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을 기한으로 정하여 왜군은 평양성 북쪽 십리 밖으로 나와서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선 군사도 그 십리 안으로 들어가서 싸우지 말도록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 그곳 경계에 나무로 금지 푯말을 만들어 세워놓고 갔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당시 만주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명의 요동군은 기마군 중심의 부대로서 약 3만 명 규모였다. 조승훈 군은 그 선발대로 동원되었다가 크게 패했는데, 심유경은 평양성 탈환을 위해 화약무기 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고니시와의 회담을 통해 화약무기 부대가 합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고자 했고, 결국 50일 동안 왜군들의 발을 평양성에 묶어놓는 데 성공했다. 심유경으로부터 이 같은 보고를 받은 명나라 조정에서는 즉각 양자강(절강성 지역)의 화약무기 부대가 동원된 이여송의 3만 5천군을 파병하게 된다.

 

※ 《징비록》 ※
12월에 명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병부우시랑(국방부 차관급) 송응창을 경략(최고 군영)으로 삼고, 병부원외랑 유황상, 주사 원황을 찬획군무(참모장)로 삼아 요동에 주둔하게 하고, 제독 이여송을 대장으로 삼아 삼영장인 이여백(이여송의 동생) · 장세작 · 양원과 남방(양자강 하류지역) 장수 낙상지 · 오유충 · 왕필적 등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오니, 그 군사의 수가 4만여 명이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이 돌아간 뒤에 왜적들은 과연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약속한 50일이 지나도 심유경이 오지 않으니 왜적들은 의심하여 “새해 초에는 말을 몰아 압록강에서 물을 먹이겠다” 는 소문을 퍼뜨렸다. 왜적에게 잡혔다가 도망쳐서 돌아온 사람들도 다 “왜적들이 성(안주성, 의주성 등)을 공격할 때 쓰는 기구를 크게 수리한다” 고 하므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1월 말에 심유경이 또 와서 평양성으로 들어가 며칠을 머물며 다시 서로 약속을 하고 돌아갔으나, 그가 약속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명나라 구원병이 안주에 이르러 병영을 성 남쪽에 설치하니, 그 깃발과 무기가 정돈되고 엄숙함이 귀신같았다.

 

내가 제독(이여송)에게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자 만나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동헌에 앉아서 들어오라고 하기에, 만나 보니 풍채가 뛰어난 장부였다.

 

의자에 마주 앉아 나는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 놓고 그 지방의 지세와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켜 보이니, 제독은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점을 찍어 표시해 두고는 나를 보고 말하기를 “왜병들이 믿는 것은 단지 조총뿐이지만 우리는 대포를 쓰고 있다. 대포는 모두 5, 6리(약 2km)를 날아간다. 왜적들이 어찌 당해 내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물러나온 후에 제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적은 부채를 보내왔다.

 

군사 거느리고 압록강 건너온 것은
삼한의 나라가 불안해서요
황제께선 날마다 승첩 소식 기다리므로
미천한 신하 밤에도 술 마시지 못한다오
살기 품고 왔건만 마음 오히려 장해지니
이제부턴 요망한 적들 뼈가 시릴 것이오
담소 중에도 승산 아닌 것 감히 말 않고
꿈속에도 말 달리는 싸움터만 나온다오

 

이때 성 안에는 명나라 군사들로 가득 찼다. 나는 백상루(안주성의 한 건물)에 있었는데, 밤중에 갑자기 명나라 사람이 군사상의 비밀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내보였다.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그는 알려 주지 않고 가버렸다.

 

● 제2차 평양성 전투

 

※ 《징비록》 ※
제독(이여송)이 부총병 사대수로 하여금 먼저 순안으로 가서 왜적을 속여 말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하였고 유격장군 심유경도 곧 올 것이다” 라고 하니 왜적은 기뻐하였으며, 현소가 시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일본이 싸움 그치고 중국 굴복시키니
마침내 천지가 한 집안으로 되었구나
기쁜 기운이 땅 위의 눈을 녹이니
이른 봄 음양의 기운으로 태평화가 피었네

 

라고 하였다. 이때는 계사년(선조 26년, 1593년) 정월 초하루였다.

 

왜적은 그 소장 평호관(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으로 하여금 20여 명의 왜적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나와서 심유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총병은 그들을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시다가 복병을 일으켜 그들을 닥치는 대로 몰아쳐서 평호관을 사로잡고 따라온 왜적들을 거의 다 베어 죽였다. 그 중에서 세 사람이 도망쳐서 달려가자, 왜적들은 그때서야 명나라 군사가 쳐들어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해졌다.

 

이때 명나라 대군은 벌써 숙천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물어 진영을 치고 밥을 짓고 있던 중에 보고가 도착하였다. 제독이 화살을 쏘아 시위 소리로써 진격의 신호를 보내고 곧 몇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순안을 향해 달려 나가니, 여러 진영의 군사들이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아가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치니, 적병은 성 위에 올라 붉은 깃발과 흰 깃발을 세우고 막아 싸웠다. 명나라 군사는 대포와 화전으로 이를 공격하니,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시켜 수십 리 사이의 크고 작은 산들이 모두 요동쳤다. 화전은 공중에서 베틀의 올처럼 펼쳐져서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화살이 성 안으로 떨어지니 곳곳에서 불이 일어나 수목이 모두 불타올랐다.

 

낙상지 · 오유충 등은 자기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성에 붙어 올랐는데, 앞선 군사가 떨어지면 뒤따르는 군사가 또 올라 물러나는 군사가 없었다. 적병의 칼과 창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성가퀴(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들이 더욱 힘차게 싸우니, 마침내 적들은 지탱해내지 못하고 내성(內城)으로 물러갔는데, 칼날에 베이고 불에 타서 죽은 군사가 매우 많았다.

 

명나라 군사가 성 안으로 들어가 내성을 공격하였다. 적병은 성 위에 토벽(土壁)을 쌓고 구멍을 많이 뚫었는데 바라보니 마치 벌집과 같았다. 적들이 구멍 틈으로 총탄을 함부로 쏘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상하였다. 제독은 궁지(窮地)에 빠진 적병이 죽을힘을 다 내지 않을까 염려하여 군사를 거두어 성 밖으로 나가서 적군의 달아날 길을 열어주니, 적군은 그날 밤에 얼음을 타고 강(대동강)을 건너서 도주해 버렸다.

 

이보다 앞서 내가 안주에 있을 때, 명나라 대군이 장차 나온다는 말을 듣고는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 김경로에게 비밀히 통지하여 적군이 돌아가는 길을 요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그대들 양군은 길가에 복병하고 있다가 적군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추격하면 적군은 굶주리고 피곤한 채로 도망쳐 가니 싸울 생각도 못할 것이므로 빠짐없이 잡힐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시언은 곧 중화로 갔으나 경로는 딴 일을 핑계 삼아 따르지 않으려고 하였다.

 

나는 또 군관 강덕관을 보내어 독촉하였더니, 경로는 마지못해서 중화로 갔다가 적군이 물러가기 하루 전날,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의 공문에 의하면, 그만 재령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유영경은 해주에 있으면서 경로가 자기를 호위해 주기를 바랐고, 경로는 적군과 싸우기르 꺼려서 피해 갔던 것이다.

 

적의 장수 평행장 · 평의지 · 현소 · 평조신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새워 달아났는데, 기운은 빠지고 발은 부르터 절룩거리며 가면서 혹은 밭고랑 사이에 배를 대고 기어가기도 하고, 입을 가리키면서 밥을 ㅂ리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나와서 (이들을) 치는 자가 없었다.

 

나라 군사도 또한 추격하지 않았는데, 홀로 이시언만이 그 뒤를 쫓았으나 감히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적병 60여 명만 베어 죽였을 뿐이었다.

 

때에 왜적의 장수로서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은 평수가(우키타 히데이에)뿐이었는데, 평수가는 관백(히데요시)의 조카라고도 하고 혹은 사위라고도 하였다. 나이 어려서 군무(軍務)를 주관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무의 주관은 행장(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있었고 청정(가토 기요마사)은 함경도에 있어 돌아오지 않았었다. 만약 소서행장 · 의지 · 현소 등을 사로잡았더라면 서울의 왜적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등청정은 돌아갈 길이 끊어져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들이 바닷가를 따라 도망하더라도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한강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은 차례로 부서져서 명나라 군사가 북을 올리며 천천히 따라가기만 해도 바로 부산까지 이르러 싫도록 술을 마실 수 있었을 것이고, 잠깐 동안에 온 나라 강산 안의 왜적이 숙청되었을 것이니, 어지 몇 해 동안을 두고 어지럽게 싸웠을 리 있었겠는가? 한 사람(김경로)의 잘못한 일이 온 천하에 관계되었으니, 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나는 장계를 올려 김경로의 목을 베자고 청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나는 평안도 체찰사로 있었고 김경로는 나의 관할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이를 청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선전관 이순일을 파견하여 표신을 가지고 개성부에 일러 그를 죽이려 하다가 먼저 제독에게 알렸더니, 제독은 말하기를 “그의 죄는 마땅히 죽여야겠으나 왜적이 아직 섬멸되지 않았으므로 한 사람의 무사라도 죽이기는 아까우니, 우선 백의종군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그 죄를 벗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공문을 만들어 이순일에게 주어 돌려 보냈다.

 

이시언, 김경로 등이 쫓겨 가는 왜군들을 추격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이여송이 군령으로 내린 추격 금지령 때문이었고, 이여송이 김경로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징비록》 ※
이일을 순변사 직책에서 갈고 이빈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평양성 싸움에서 명나라 군사가 보통문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군사를 거두게 되자 다 물러나와 성 밖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밤에 왜적들이 도망쳐 가버렸는데도 그 다음날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제독은 우리 군사들이 잘 경비하여 지키지 않아서 왜적이 도망가는 것도 알지 못하게 했다고 나무랐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로서 일찍이 순안으로 왕래하며 이빈과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이일은 장수 재목이 못 되고 이빈이 좋겠다” 고 다투어 말하니, 제독은 공문을 보내어 그런 사정을 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좌상 윤두수로 하여금 평양에 이르러서 이일의 죄를 묻게 하고 군법으로 다르리려 하였으나, 얼마 뒤에 풀어 주고 다시 이빈으로 이일의 소임(순변사)을 대신하게 하고, 군사 3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제독 이여송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하였다.

 

이여송은 고니시와의 협상에서 ‘왜군의 뒤를 추격하지 않는다’ 는 약속을 한 후, 이일과 김응서 군이 왜군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군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같은 군령은 ‘당당한 것’ 이 아니었기에 이여송은 ‘조선 군사들이 경비를 소홀히 해서 왜적이 도망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 했다. 명나라 장수로서 순안으로 왕래하며 이빈과 친숙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이일은 장수 재목이 못 된다’ 며 이일을 비판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이일의 죄를 군법으로 다스리려 했지만 이여송의 만류로 파직시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 선조실록으로 보는 평양성 탈환전

 

※ 《선조실록》 1593년 1월 11일 ※
처음에 제독 이여송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을 중협대장으로, 부총병 이여백을 좌익대장으로, 부총병 장세작을 우익대장으로 삼았다. 또 부총병 임자강 · 조승훈 · 손수렴 · 사대수와 참장 이여매 · 이여오 · 방시춘 · 양소선 · 이방춘 · 낙상지 · 갈봉하 · 동양중과 유격 오유충 · 이영 · 양심 · 조문명 · 고철 · 시조경 · 척금 · 심유 · 고승 · 전세정 · 누대유 · 주역 · 왕문 등 여러 장수를 그들에게 소속시켰다.

 

임진년 1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와 계사년 1월 5일에 순안현에 머물면서 먼저 부총병 사대수를 보내어 왜장과 부산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도록 했는데, 평양성의 적장 평행장이 그의 비장 평후관을 시켜서 가서 영접하게 하였다. 사대수가 그를 사로잡아 제독의 군중으로 보냈는데, 밤에 적 몇 명이 기회를 틈타 도망치자 여러 군사들이 쫓아가서 죽이고, 평후관을 단단히 가두었다.

 

6일 새벽에 제독이 군사를 진격시켜 평양성 밑에 닿게 한 후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성을 에워싸고 백기에다 “조선 군민으로서 자진하여 기(旗) 아래로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는 글을 써서 세워 놓았다.

 

왜적이 1천여 명의 군사를 내어 성 북쪽에 있는 모란봉에 웅거하여 청백기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았다. 또 군사 약 5천여 명을 나누어 북성에서부터 보통문까지 성 위에 줄을 지어 서서 앞에서 녹각책자(목재 바리케이트)를 박고 방패로 가린 채 칼을 번뜩였다.

 

그 가운데 큰 투구를 쓴 자가 강한 군사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대장기를 세우고 나팔을 불고 북을 울리면서 성 위를 순시하고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제독이 한 부대를 내보내어 모란봉을 경유하여 올라가 쳐다보며 공격하는 것처럼 하게 했더니 적은 높은 지세를 이용하여 아래를 향해 조총을 쏘아댔으므로 군사들은 물러났다.

 

적이 성을 나와서 추격하므로 명나라 군사가 쇠방패 수십 개를 버리고 가자 적이 그것을 다투어 가지므로 명나라 군사가 되돌아서서 공격하니 적이 성으로 들어갔다. 포시(오후 4시 경)에 제독이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적 수백여 명이 재갈을 물고 몰래 나와 우영을 습격했는데, 명나라 군사가 일시에 기를 거두고 등불을 끄고 거마목 아래에서 일제히 화전을 발사하니 밝은 빛이 마치 대낮과 같았으므로 적은 도망쳐서 성으로 되돌아갔다.

 

7일에 세 진영이 함께 출동하여 보통문에 이르러 성을 공격한 다음 짐짓 물러나는 척하니, 적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추격하므로 명나라 군사가 되돌아서서 싸워 30여급을 목 베고 문입구까지 추격하다가 되돌아왔다.

 

8일 이른 아침에 제독이 향을 피우고 좋은 날을 점쳐서 택한 다음 삼군(三軍)이 아침밥을 먹은 후 세 진영의 장수와 함께 각 해당 장수들을 나누어 통솔하여 성 밖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유격장군 오유충과 원임부총병 사대수는 모란봉을 공격하고, 주군 양원과 우협도독 장세작은 칠성문을 공격하고, 좌협도독 이여백과 참장 이방춘은 보통문을 공격하고,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 낙상지는 조선의 병사 이일, 방어사 김응서 등과 함구문을 공격하였다. 여러 군사가 비늘처럼 늘어서서 차례차례 진격했는데, 빙판길을 바라보니 말발굽에 날리는 얼음 조각과 잡다한 티끌이 흰 안개처럼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해가 떠올라 투구와 갑옷에 내려 비치자 은빛이 찬란하고 현란하게 빛나 매우 장관이었다.

 

적도 성가퀴(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쌓은 낮은 담) 위에서 오색 깃발을 많이 펼치고 긴 창과 큰 칼을 묶어 날을 가지런히 하여 밖으로 향하게 해놓고 항거하며 지킬 계획을 하였다. 제독이 친병 1백여 기를 거느리고 성 아래로 바짝 진격하여 장사들을 지휘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포 1호를 발사하자 각 진에서 잇달아 일제히 발사하니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 산악이 흔들리는 듯하였으며, 어지럽게 화전을 발사하자 연기와 화염이 수십 리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단지 고함소리만 포 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이 수많은 벌레들이 윙윙대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서풍이 갑자기 일어 포연을 거두어 곧바로 성안으로 몰려갔는데 세찬 바람에 불길이 몹시 거세었다. 먼저 토굴에 불이 붙으니 붉은 화염이 하늘에 뻗치고 부근으로 번져 모두 태웠으며 성 위의 적의 깃발도 잠깐 사이에 바람에 쓰러졌다.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고무시켜 성에 다가가자 적이 성가퀴 안에 엎드려 있다가 어지럽게 탄환을 쏘고 끊인 물을 붓고 큰 돌을 굴리며 저항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조금 퇴각하자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퇴각하는 자 중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진(陳) 앞에서 돌려가며 보인 다음, 제독이 앞장서서 진격하면서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겠다!” 고 소리쳤다.

 

오유충은 탄환을 맞아 가슴을 다쳤는데도 전투에 더욱 힘써 독려하였으며, 낙상지는 함구문 쪽의 성을 따라 긴 창을 가지고 마패를 짊어지고 몸을 솟구쳐 성가퀴에 오르는데 적이 던진 큰 돌을 발에 맞아 다쳤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곧바로 올라갔다. 여러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을 지르며 그를 따르니, 적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절강의 군사가 먼저 올라가 적의 깃발을 뽑고 명나라 군사의 기를 세웠다. 제독이 좌협 도지휘 장세작 등과 칠성문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문루에 웅거하였으므로 쉽게 빼앗지 못하자 대포를 쏘며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포 2발이 명중되자 문루가 부서져 쓰러지며 모두 타버렸다.

 

제독이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자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틈타 앞 다투어 진격하니 기병과 보병이 구름같이 모여 사방에서 적을 쳐 죽였다. 적들은 기세가 위축되어 달아나 장막 속으로 들어가자 명나라 군사들이 차례로 태워서 모두 죽이니 냄새가 십여 리 밖까지 났다.

 

적장 행장이 도망쳐서 연광정 토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땔 나무를 운반해 와서 사방에 쌓아넣게 한 후 장차 불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으나, 칠성문과 보통문 등 여러 굴 속에 잇던 적들이 굳게 지키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모아 위로 쳐다보며 공격하게 하니 적들은 굴 안에서 탄환을 쏘았는데 맞아 죽은 명나라 군사의 시체가 서로 잇달았고 제독이 탄 말도 탄환에 맞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제독에게 조금 후퇴하여 군사들을 휴식시키자고 청하였다.

 

‘적장 행장이 도망쳐서 연광정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고 하였는데, 연광정은 내성(內城)에 있는 건물이다. 고니시 군은 평양성에 주둔해 있는 동안 평양성을 왜성의 구조처럼 토치카 형태로 고친 것 같다.

 

※ 《징비록》 ※
포시(저녁 때)에 제독은 적의 소굴을 함락시키기 어렵고 많은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다고 하여 군사를 물려 병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대선(절강성 출신으로 고니시 군의 중국어 통역관)을 시켜 행장 등에게 지시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한번 거사하여 충분히 섬멸시킬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모두 죽일 수 없어 우선 물러나 너희들의 살길을 열어주니, 속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서 나의 분부를 듣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후한 상을 주겠다” 고 하니, 행장 등이 회보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하고자 하니 후면을 차단하지 말기 바란다” 고 하였으므로, 제독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날 저녁 통역관을 시켜서 평안병사 이일에게 분부하여 중화 일로의 우리나라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 · 현소 · 의지 · 조신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중화와 황주 일대에 연이어 주둔해 있던 적들이 평양의 포성을 듣고 먼저 철수하였다.

 

제독 이여송이 ‘평안병사 이일에게 분부하여 중화 일로의 복병을 철수하게 하였다’ 는데, 이 같은 과정을 알게 된 것은 뒷날에 가서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평양성 탈환 직후에는 이일이 단독으로 군사를 철수시켰기 때문에 왜군들이 무사히 도망가게 된 줄 알고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으나, 이여송의 반대로 이일은 파직만 당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이빈을 순변사로 삼게 된 것이다.

 

※ 《징비록》 ※
황주 판관 정엽이 행장의 후미를 끊어 왜적의 목 90여 급을 베었다. 적은 굶주리고 군색함이 심하여 인가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찰에 묵기도 하였다가 참살당한 자가 또 30여 급이었다. 봉산의 동선현에 이르러서는 적들은 더욱 피곤했지만 황해의 직로를 차단하는 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저 괴수들은 온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명나라 군사가 전투에서 참획한 것이 모두 1,285급이며, 사로잡은 자가 2명이고, 아울러 절강인 장대선을 사로잡았고, 빼앗은 말이 2,985필이고, 본국의 사로잡혔던 남녀를 구출해 낸 것이 1,225명이었다.

 

이여송의 추격 금지령으로 황해도의 직로를 차단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 《징비록》 ※
9일에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다가 죽은 장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몸소 통곡하였으며, 고아와 과부들을 위문하였다.

 

다음날 기자묘에 제사를 지낸 후 비로소 선봉의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 보내어 적을 추격하게 했는데, 황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여송이 전사자를 위한 제사와 기자묘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같은 행사로 인해 왜군에 대한 추격이 늦춰졌고 황주까지만 추격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추격을 회피하고 있는 모습이다.

 

※ 《선조실록》 1593년 1월 11일 ※
이 전투에서 남쪽(절강성 지역)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고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달았다. 뒤에 산동도어사 주유한과 이과급사중 양정란 등이 올린 보고서에서,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포정 한취선과 순안 주유한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조선)도 사실에 의거하여 보고하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해명을 하였다.

 

고니시 군에게 징용당한 조선인 1만여 명이 현장에서 목 베임을 당한 것 같다. 명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조선 조정에 이 문제를 거론했으나 조선 조정은 이여송을 위해서, 그리고 명과의 정치 ·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다.

 

※ 《선조실록》 1593년 1월 11일 ※
원 주사(원황)가 묻기를 “8도에 있는 군사의 총수는 얼마나 되며, 왜놈에게 잃은 것은 얼마이고, 현재 남아있는 군사는 얼마이고, 어느 곳에 주둔하고 있는가? 왕경(한성) 앞뒤 좌우에 조선의 군사가 있는가 없는가, 또 대동강 저쪽에 군사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경상도에 아직 남아있는 군사의 수는 얼마나 되며 어느 곳에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숫자로 회답 보고하기를,

 

‘경기도 강화부에 주둔한 전라도절도사 최원의 군사 4천 명, 경기도순찰사 권징의 군사 4백 명, 창의사 김천일의 군사 3천 명, 의병장 우성전의 군사 2천 명, 수원부에 주차한 전라도순찰사 권율의 군사 4천명(이상은 경성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하루거리이다). 양주에 주차한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2천 명, 양근군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의 군사 6백 명(이상은 왕경 동쪽에 위치). 여주에 주차한 경기순찰사 성영의 군사 3천 명, 안성군에 주차한 조방장 흥계남의 군사 3백 명(이상은 왕경에서 하루 반 거리에 있다). 충청도 직산현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옥의 군사 2천 8백명, 평택현 등지의 장수와 관리들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5천여 명이다(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2~3일이나 4~5일 거리이다).

 

경상좌도 안동부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사 1만 명, 울산군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박진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에 주차한 의병장 성안의 의병 1천 명, 영산현에 주차한 의병장 신감의 군사 1만 5천 명, 창원부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의 군사 3천 명, 의령현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의 군사 2천 명, 거창현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의 군사 5천 명(이상은 왕경의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7~13일 거리). 전라도 순천부 앞바다에 주차한 본도 좌수사 이순신의 수군 5천 명, 우수사 이억기의 수군 1만 명 및 각 처에 나누어 주둔한 방비군 1만 명(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 8~14일 거리). 함경도 함흥부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성윤문의 군사 5천 명, 안변부에 주차한 평사 정문부의 군사 5천 명, 안변부에 주차한 별장 김우고의 군사 1백 명, 조방장 김신원의 군사 1백 명(이상은 경성 북쪽에 있으며 15~25일 거리). 강원도 안제현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강신이 군사 2천 명(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4일).

 

평안도 순안현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일의 군사 4천 4백 명 내에 사수 1,280명, 법흥사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정희운의 군사 2천 명 내에 사수 223명 · 포수 50명, 의병장 이주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70명, 소모관 조호익의 군사 3백 명(이상은 평양부 동쪽에 있으며 평양부와 하루거리). 용강현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응서의 군사 7천 명 내에 사수 770명, 조방장 이사명의 군사 1천 명 내에 사수 90명, 대동강 하류에 주차한 수군장 김억추의 군사 3백 명 내에 사수 120명(이상은 평양부 서쪽에 있으며 평양부와는 하루 반나절 거리). 황해도 황주에 주차한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의 군사 1천 8백 명, 재령군에 주차한 우방어사 김경로의 군사 3천 명, 연안부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이정암의 군사 4천 명이다(이상은 왕경의 서북쪽, 평양부에서 남쪽에 있으며 왕경과의 거리는 7~8일)

 

의 각처 군마(軍馬)는 합계 17만 2천 4백 명인데, 적의 향방이나 기회에 따라서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치 않다.

 

모두 17만 2천 4백 명이다. 여러 가지 현지 사정으로 가감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총병력의 규모에서 조선에 상륙한 왜군 16만과 비슷한 규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