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9월이 되자 북상한 왜군들은 함경도와 평안남도까지 진출했다.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군은 의주의 선조와 조정을 위협했고, 함경도 일대를 석권한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군은 회령에서 피난 중이던 임수군과 순화군을 생포하면서 한껏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해에서는 전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나고야 사령부에서는 서해 진출을 위해 병선과 병력이 고갈될 만큼 수군에 쏟아 부었지만 끝내 조선 함대의 가덕도-거제도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순신은 김해강과 양산강의 왜선단을 소탕하고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압박해 들어갔다.
● 최강 함대
부산포해전이 기록된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조선 3도 수군이 병력은 약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장계에는 전라 좌·우수영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합친 큰 병선의 수가 74척, 중간 병선이 94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균의 경상우수영 쪽은 판옥선과 중간 배, 작은 배를 각각 10척이라고 보면 거북선을 포함해 각 병선에 탑재한 천 · 지 · 현 · 황자 대포의 수는 약 1,600문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 병력 |
○ 대포 |
그 무렵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병력 14,000명(무적함대에 맞선 영국 함대는 9,000명)에 2,500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동함대 병력으로 보면 2만의 조선 함대가 수적으로는 우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 함대는 전체 병력 중 비전투원인 격군이 50%를 넘었다. 그러나 전투가 한창일 때는 격군들도 갑판 위아래를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며 장탄을 돕거나 적선을 향해 발화탄을 던졌을 것이므로 격군 모두를 비전투원이라고 볼 수도 없다.
보유한 대포의 수에서 스페인 함대가 화력에서 앞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기전 등 조선 함대가 보유한 다종의 화약무기들을 감안한다면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판옥선과 거북선이 펼친 ‘환상의 해전법’ 을 놓고 본다면 당시 지구촌 최강의 함대는 단연 조선 함대였다.
또 중세기 때 사용된 대포들은 유럽과 조선 쪽 모두 주물제였다. 포탄과 구경 간에는 5% 정도의 오차가 있었고, 따라서 표적이 50m 이내에 들어왔을 때 사격하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당시는 주물공업의 시대였으므로 대포의 품질과 성능 면에서는 조선 대포가 더 우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이 주물공업 분야에서 앞서 있었다고 하는 점은 세종 때 천자포의 사정거리가 무려 2km(유럽은 1km)에 달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세계 최고의 동활자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그렇고,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 보면 신라의 에밀레종 같은 작품은 그 무렵 유럽의 수준으로는 상상도 못할 만큼 앞선 기술이었다.
사실 당시 세계 최강의 함대가 어느 나라 함대였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조선 함대와 스페인 함대, 그리고 영국 함대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과 영국의 경우에는 국가 차원에서 추진한 해외 원정, 그리고 신대륙에서 약탈해온 황금 등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함대를 건설해 왔다. 또 그 주역은 국왕이었다. 즉, 국력을 총동원해서 이룩한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조선 함대는 변방의 장수들과 백성들이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맨주먹으로 이룩한 피와 땀의 역사였다. 이순신이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수군제독으로 전해지고 있는 데에는 이러한 점도 참작된 것이다.
● 화약 무기
화약이 처음 개발된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이다. 송의 화약제조법은 그 후 몽골이 입수해서 아랍과 유럽 침공에 사용했다. 당시 몽골군은 화약의 추진력으로 발사되는 로켓탄을 사용했다. 수백 발의 로켓탄이 굉음을 터뜨리며 적의 진영으로 쏟아지자 아랍의 코끼리 부대도 유럽의 기마대도 대 혼란에 빠져버렸다.
치렁치렁 요란하게 매단 장식물들이 불타기 시작하면서 각 진영에는 자중지란이 일어났고, 순간 몽골의 기마대는 쏜살같이 내달려 적진을 유린했다.
화약무기에 자극받은 아랍과 유럽은 그후 몽골의 화약무기 제조법을 입수했고, 유럽 각국은 대포와 조총을 만들어 아프리카와 신대륙 정복에 나서게 된다.
그 무렵 일본의 한 영주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과 화약제조법을 전수받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년 전이었다. 이렇게 전수받은 조총과 화약제조법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이르러 일본의 주력 병기가 되었다.
몽골은 원나라를 세운 후 화약 제조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이러한 보안의 역사는 180년이나 지속되었을 만큼 원의 화약 제조기술에 대한 통제는 매우 엄격했다.
고려시대 최무선 때는 원이 망국의 조짐을 보일 무렵이어서 화약 제조기술에 대한 감시가 비교적 허술한 편이었다. 최무선은 이 때를 기회로 삼아 중국인 출신이었던 이원을 초빙해 화약 제조기술을 터득했다. 고려 조정의 《화통도감》 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써 고려도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고, 화약 제조술을 바탕으로 고려식 대포도 만들게 된다. 이렇게 제작된 고려의 대포는 그 후 왜구 퇴치에 긴요히 사용되었다.
1380년 아기발도라는 일본의 한 영주가 노략질을 하기 위해 고려에 침입했는데, 고려군은 화약무기로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에 돌아갈 길을 잃은 왜적들은 전라·충청·경상도를 다니면서 끈질기게 저항했고, 결국 이성계에 의해 진압된다.
이성계는 활도 잘 쏘았지만 화약무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위화도 주둔 때에는 최무선을 늘 곁에 있게 했다.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게 된 데에는 믿고 있던 화약무기가 장마로 사용하기 어렵게 된 것도 중요 원인이었다.
최무선은 1389년에 《화약수련법》 과 《화포법》 을 저술해서 조정에 바쳤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부상한 이성계는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간파했기 때문에 최무선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선왕국이 개국(1392년)되자 최무선은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와 판군기시(병기분야 최고직)에 봉해졌다.
태종도 화약무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고, 세종 2년에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세종 시대의 각종 화약무기 개발사는 태종의 화약무기 개발사에 기초한 것이다.
●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
※ 충무공의 장계(부산포파왜병장) ※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경상도 연해안의 적을 세 번 가서 토벌한 후 가덕에서 서쪽으로는 적의 그림자가 끊어졌거니와 각 도에 가득 찼던 적들이 날로 내려오므로 장차 그 도망갈 때를 타서 바다와 육지에서 합세하여 공격하려고 본도 좌우도 전선 합하여 74척과 협선 92척을 한결 더 엄하게 정비하고, 지난 8월 초 1일 본영 앞바다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협선의 수가 92척으로 늘어난 것은 그 동안의 해전을 통해서 기동성이 뛰어난 협선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또 판옥선 건조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도 줄여야 했다. 그래서 기존의 협선 보수와 병행하여 이미 만들어져 있던 어선, 상선, 화물선들을 협선형으로 개조해 4차 출동에 임했다.
소형선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낙동강 하구→다대포→부산으로 향하는 항로를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풍랑을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판단하고 최소한으로 줄인 것 같다.
8월 1일, 이억기가 이순신 함대와의 동반 출동을 위해 여수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장게에서와 같은 계획을 이억기와 논의했다.
출동일은 8월 24일로 정해졌고, 출동 전까지 두 함대는 약 20일간의 합동훈련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적의 심장부를 목표로 한 훈련이었던 만큼 일사불란한 단위전술과 시스템적인 함대전술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야 했다.
8월 24일, 두 함대는 여수를 출발하여 사량도에서 원균 함대를 만났다. 그리고 27일 웅천 땅 제포(薺浦) 뒷바다 원포에서 밤을 지냈고, 다음 날 아침 적정(敵情)을 입수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그런데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의 공문에 “위로 쳐올라 갔던 적도들이 낮이면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강과 김해강 등지로 잇대어 내려오는데 짐짝들을 가득히 실은 것이 도망가려는 자취가 현저하다.” 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 달 24일 우수사 이억기 등과 배를 띄우고 수군 조방장 정걸도 함께 데리고서 남해 땅 관음포에서 밤을 지내고 25일에 사량도 바다 약속한 곳에 이르러 동도 우수사 원균을 만나서 적의 소식을 자세히 물은 뒤에 함께 당포에 이르러 밤을 지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함대 수뇌진들은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북상했던 왜적들이 낮이면 숨고 밤에는 행군하면서 짐짝을 가득 싣고 내려오는데 도망가는 빛이 뚜렷하다’ 는 내용의 공문을 받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찌를 듯한 기세로 조선 반도를 주름잡았던 왜군들의 모습과는 아무래도 많이 다른 모습이다. 왜군 측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각지에서 패전한 왜군들이 갈 곳을 잃고 떠돌이 부대가 되어 그나마 안전한 밀양과 김해 등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둘째, 그 동안 약탈한 문화재 등을 본국으로 가져가려는 자들이 있었다.
셋째, 눈치 빠른 일부 왜장들이 가망이 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군속을 본국으로 퇴각시키고 있었다.
이순신도 이러한 낌새를 알아챘고 이 참에 낙동강 하구에 밀집해 있는 왜군 기지들과 왜군의 한반도 최대 병참기지였던 부산포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기존의 임진왜란 관련 책자들은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을 부산포해전에 포함시켜서 대충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왜군들이 김해와 낙동강 하구를 전략 요충지로 삼았던 점을 들어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때문에 이순신의 기록을 토대로 이 해전을 부산포 해전과 구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해야 뒷날 있게 되는 삼도수군통제사 교체 사건과 원균 통제사의 칠천량 패전의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26일은 비바람이 교대로 불어서 배를 출발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녘에야 거제도에 이르렀는데, 밤을 타서 몰래 건너갔고, 27일은 웅천 땅 제포 뒷바다 원포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28일에 경상도 육군 탐색인이 와서 말하기를 “고성 · 진해 · 창원 병영 등에 둔치고 있던 왜적이 이 달 24 · 25일 밤중에 전부 도망했다.” 고 하는데, 그것은 필시 산에 올라 망보던 적들이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위엄에 놀라 배 대어 있는 곳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조선 함대는 밤을 타서 이동했고, 원포에 선단을 숨기고 탐색조를 보내 고성 진해(진동) 일대의 적정을 살피게 했다. 이 지역을 미리 수색해 놓음으로써 함대가 부산 쪽으로 나갔을 때 생길 수 있는 후환거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함대는 조선 육군의 탐색대를 만났고 왜적들이 도망가고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이 날(8월 28일) 이른 아침 웅천포를 출발해서 곧장 양산 · 김해 두 강(낙동강 하구의 양산과 김해 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 앞바다로 향하는데, 창원 땅 구곡포의 보자기 정말석이라는 사람이 포로가 된 지 사흘이 되는 날 김해에서 도망 왔다면서 말하기를, “김해 강에 정박해 있던 적선들이 수삼일 동안 떼를 지어 몰운대 쪽으로 도망치듯 노를 재촉해 가는지라, 소인은 그 밤을 타서 도망해 돌아왔습니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덕 서쪽에 선단을 감추어 두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가덕 바깥쪽에 복병케 한 후 양산 쪽으로 가서 적선을 탐망하고 오도록 사람을 정해 보냈더니, 하오 4시경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종일 망을 보아도 다만 왜의 작은 배 4척이 두 강으로부터 나와 몰운대를 지나가더라(부산 쪽으로 가더라)” 고 하므로 그대로 천성(가덕도)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습니다.
김해와 양산강의 포구들은 서쪽으로 진출하는 왜군들의 수군기지이자 낙동강 왜군 수송선단의 기지였다. 그래서 왜선들의 출현이 빈번했고 이들 포구에는 정박해 있는 왜선도 많았다.
이순신은 이 기지들에 대한 소탕을 1차 목표로 정했다.
그때 정말석이란 사람이 이 지역의 상황을 알려 왔기 때문에 왜군들의 동정을 자세히 살피고자 일부 선단을 가덕도에 숨겨놓고, 다른 일부는 가덕도 바깥쪽에 매복시켰다. 아울러 여러 척의 탐색선을 띄워 주변을 철저히 정찰토록 지시했다.
만약 이곳에 큰 규모의 왜선단이 숨어 있다면 최종 공격목표인 부산포 공격 때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또한 공격을 마치고 돌아와 가덕도 등지에서 쉬고 있을 때에도 야습의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왜군 함대가 견내량 해협을 봉쇄하고 나온다면 조선 함대는 귀로를 잃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적정을 보다 철저히 살피게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29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밝을 무렵에는 두 강(양산, 김해)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동래 땅 장림포 앞바다에 낙오된 왜군 300여 명이 큰 왜선 4척과 작은 배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경상우수사가 거느린 수군들이 그것을 불태워 깨뜨렸는데, 전라좌수영 좌별도장(좌측 특공부대장) 우후 이몽구도 큰 배 1척을 깨뜨리고 적의 수급 1개를 베었습니다. 그후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두 강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강어귀의 지세가 좁아서 판옥선 같은 큰 배는 싸울 수 없겠으므로 어두워질 무렵에 가덕도 북쪽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습니다.
29일 새벽, 가덕도를 출발한 좌수영 함대는 낙동강 하구에 이르러 발견한 6척의 왜선을 불살랐다. 그리고 밤 사이 왜선단이 김해 등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곳까지 들어가려 했지만 강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는 판옥선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강 폭이 좁았다는 것이 아니라, 판옥선 같이 큰 배가 학익진법을 펴고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좁았다는 의미다.
이순신은 거기서 부산을 공격하고 되돌아 나오기에는 시간(이미 정오 무렵이었다)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선수를 돌려 가덕도에서 숙영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밤새껏 의논하고 9월 1일 닭이 울자 출발하여 아침 8시 경에 몰운대를 지나자 동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세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의 큰 배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의 큰 배 8척, 서평포(부산시 구평동)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의 큰 배 2척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대어 있으므로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과 조방장 정걸 등이 합력하여 남김없이 두드려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배에 가득 실린 왜의 물건과 전쟁기구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불살라 버렸는데, 왜인들은 우리의 기세를 바라보고 산으로 올라가므로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으며, 절영도 안팎을 샅샅이 뒤져 봤으나 적의 종적은 없었습니다.
9월 1일, 첫닭이 울자 출발, 8시경 다대포 앞바다에 왔는데, 부산포를 공격하고 되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이 불어 파도가 높게 일었다. 때문에 부산포 공격에는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화준구미에서 왜군 대형 수송선 5척, 다대포에서 부산 쪽으로 도망가는 수송선 8척, 서평포에서 대형 수송선 9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 함대가 왜선들을 추격해서 격파하는 동안 조선 함대 탐색선단은 영도 주위에 왜군의 복병 함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 함대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 수군과는 절대 접전치 말라!” 는 히데요시의 명령도 있었지만, 이 같은 명령이 없었다고 해도 왜군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와키자카, 구키 등의 왜국 전투선단은 한산도와 안골포 등지에서 섬멸되었기에, 이 무렵에 김해와 부산 등지를 오가고 정박한 선단은 대부분이 수송선단이었다.
왜군 수송선단에게 조선의 전투선단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낙동강 하구의 해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틀 동안 불태운 왜선이 30척이었다.
둘째, 김해와 부산 사이에 왜군 수송선들이 줄을 잇고 있었던 것을 보면 왜군들은 낙동강을 주 보급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셋째, 가덕도에서 출발해 부산을 공격하고 다시 가덕도로 돌아오는 데는 하루해가 빠듯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넷째, 부산 진출시 가덕도 외에는 조선 함대가 안심하고 정박할 곳이 없었다.
다섯째, 가덕도와 부산 사이의 바닷길은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이 일어나는’ 위험한 항로였다는 점이다. 이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다. 한 두 척도 아닌 300여 척 규모의 소 · 중 · 대형으로 구성된 대 선단이라면 대단히 위험한 항로이다. 이순신은 이렇게 위험한 해역을 격물 · 치지의 정신으로 꼼꼼하게 이치를 따져가면서 조심스럽게 항해하고 다녔다.
● 부산포 해전
영도 일대를 수색하는 동안 부산포 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탐색선으로부터 “약 500여 척의 왜선이 동쪽 산기슭 언덕 아래(오늘날 우암동과 자성대 동쪽)에 정박해 있다.” 는 보고가 들어왔다. 역시 왜군의 한반도 최대 병참기지다운 모습이다.
왜선 500척이 부산과 경상도 일대의 병력을 싣고 나온다면 무려 500척 규모의 대 함대를 상대해야 하는 격이므로 조선함대 사령부에서는 공격 방식과 공격 시점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세 명의 수사들은 결전을 합의하고 각 함대에 공격 준비령을 하달했다. 이에 각 기함과 대장선들에는 “공격에 들어간다!” 는 깃발이 연이어 올려졌다.
곧바로 이순신 함대, 원균 함대, 이억기 함대 순으로 전 함대는 분항하기 시작했다.
전라좌수영 함대가 선봉에 나선 것은 타 함대에 비해 전투경험과 전력 면에서 앞서 있었기 때문이며, 전략상으로도 사실상의 주장을 맡고 있던 이순신 함대가 선봉에 서는 것이 바람직했다.
부산포해전은 왜군 측이나 조선 함대 측이나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이었다. 부산의 왜군들로서는 나고야 사령부와 한성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포만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지켜내야 했다. 조선 함대 역시 부산포를 서둘러 공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따라야 했다.
상부의 명령도 지엄했지만 필승에 대한 양측 수뇌진의 입장 또한 확고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 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양측 모두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회전을 기다렸다.
조선 함대가 부산포 공격을 위해 최상의 전력으로 출전하고 있었던 것처럼 왜군 측도 수륙군이 연합하여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한 수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주역은 구키 요시다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 등 이미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던 수군장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면대결의 무모함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간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 마지막 보루를 지켜냄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했다.
모두가 패장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었던 만큼 이전의 패배에 대해서 누가 누구를 욕하고 나무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수군 총사령관 신분이었던 구키 요시다카의 입장에서는 독단적인 행동으로 화를 자초한 와키자카에 대해서만큼은 따가운 질책을 가한 바 있었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는 서로가 공동운명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에서 지난날의 패배를 만회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동변상련의 심정으로 소통시켰다. 그것이 부산포해전을 앞둔 이들 수군장들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부산포해전은 나고야의 한성 사령부, 그리고 조선 주둔 전 왜군 부대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부산이 보급과 증원을 위한, 자신들의 밥줄과 관계된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나리오로 기획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왜군 측으로서는 대규모 육군 병력과 나고야의 히데요시 직할 수군력까지 참여시킨 최초의 수륙 합동작전이었으며 그 성격은 받아치기를 곁들인 완고한 수비전이었다.
이같은 작전은 히데요시의 “조선 수군의 부산포 공격에 대비하고 적의 공격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 는 명령에 따른 것으로, 작전을 구상한 이는 33세의 왜군 총감독관 이시다 미쓰나리였다.
히데요시 정권의 막후 실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심복, 히데요시 가신 그룹의 수장이기도 했던 그는 문무를 겸비한 흔치 않은 전국 영주였으며, 임진왜란을 입안한 대 기획가이기도 했다.
전쟁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으로서 그림의 완성을 보기 위해 우키타 히데이에와 함께 한성에 입성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그림이 마구 훼손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분을 삭이고 있던 터였다. 이에 더 이상 방치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부산 방어전을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시다로서도 자신이 이처럼 피해갈 수 없는 벼랑 끝 작전을 주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연합함대의 패전, 그리고 이순신의 등장… 사실상 그의 기획은 휴지조각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로 인해 기획의 백미가 되었을 나고야 주둔 예비대 10만의 평안도 상륙은 끝내 무위로 그쳤고, 이것은 훗날 숙명의 라이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단판 승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히데요시와 그 가문을 위해 한 목숨 바치겠노라 맹세하며 히데요시의 막하로 들어간 이시다에게 도쿠가와는 늘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며(1586년) 대결의 시대를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 사후 몇 년간 지속된 패권 구도에서 도쿠가와가 보여준 히데요시에 대한 적대행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의 징표였다.
신종의 예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이시다의 눈에 비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통일사업에 가장 적대적이었으며 창칼을 겨누어 서로를 살상하기도 했던 지우지 못할 전과를 남긴 잠재적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쿠가와를 납작 엎드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주군인 히데요시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시다의 불만이었다. 엎드리게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 도쿠가와와 어깨를 견줄 만한 실력자는 없었다. 그런 도쿠가와가 60을 코앞에 둔 히데요시 사후에 어떻게 나올지는 대충 짐작할 만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시다가 죽은 히데요시를 대신해서 도쿠가와를 상대로 치른 마지막 대리전이었다.
양측 도합 20만 명이 격돌한,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격렬했던 이 전투에서 이시다는 피의 시대를 짊어지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 같은 운명을 예감했을까? 연합함대의 패전보가 전해지던 날 이시다는 이렇게 소리쳤다.
“아! 나의 계획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조선의 속지화는 둘째 치고 도쿠가와를 전장으로 끌어내지 못한 것을 이시다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조선 원정에 참여한 다이묘들은 퐁토병과 굶주림, 대륙의 매서운 추위와 기나긴 전투를 치르면서 반 이상의 병력과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지만 도쿠가와는 전력의 100%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등의 불로 다가온 조선 함대의 부산포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이시다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사건일 뿐.
이시다는 구키의 소견이 담긴 해전 보고서를 참고해서 주도면밀한 방어전을 구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작전명령을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의 이름으로 부산 사령부에 하달했다.
⑴ 조선 수군의 부산 진출 예상 항로를 예측하고 곳곳에 망대를 세울 것. 근해에서의 적 발견 전이라도 적 선단의 부산 족 기동이 확인되면 남해안 일대의 전 선단을 부산으로 집결케 할 것.
⑵ 포구 방파제를 더 견고히 높이 쌓을 것.
⑶ 조선 대포를 있는 대로 확보하고 그 사격법을 익혀둘 것.
⑷ 투석기와 석탄을 최대한 많이 제작하고, 언제든 사용 가능하도록 적소에 배치시켜 둘 것.
⑸ 적의 상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적소에 배치할 것.
⑹ 적을 최대한 끌어들여 싸우고, 거북선의 타격에 집중할 것. 적 사령선에 대한 타격이 용이하다면 역시 집중 타격할 것.
⑺ 선상 병력을 정예화 하고, 그 병력은 화공에 대비한 화재 진압조와 저격조로 편성할 것.
⑻ 적을 공격하기 용이한 곳에 엄폐용 참호를 파고 필요하다면 새로이 진지를 구축할 것.
⑼ 적의 부산 쪽 기동이 확인되면 즉시 비상체제에 들어가고 야간에도 상시 전투체제로 운용할 것.
⑽ 전투가 종료되면 그 결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즉각 보고할 것.
● 창과 방패
조선 함대 수뇌진들에게 부산포 공격은 벼르고 벼른 지상과제였다. 그동안 조정으로부터는 “왜 부산으로 나아가 싸우지 않느냐!” 는 성화에 시달려 왔음은 물론 전략상 적의 본거지를 그냥 방치해 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오기까지는 위험을 무릎쓴 대장정이었다. 여수에서 부산까지의 항로는 멀고도 험했다.
그동안 숱한 난관을 극복했고 크고 작은 해전을 치렀다.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도착한 조선함대 장병들로서는 감회가 클 수밖에 없었다. 첫 출동일로부터 네 달만의 일이었다.
부산 포구에는 500여 척의 왜선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또 그 주위를 튼튼하게 쌓아올린 방파제가 원형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방파제 앞 수로에는 여러 척의 병선이 수로를 막아선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왜군 측 병력은 선상과 해안가, 그리고 포구 주위 언덕과 왜성 등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육지에 진을 치고서 조선 함대가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안에서부터 왜성 외곽에 이르기까지 투석기, 각종 총포류 등을 앞세우고 있었다.
또 그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들이 대오를 갖추고 곳곳에 늘어서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순신은 ‘이번만큼은 절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는 왜군 수뇌부의 전의를 읽었다.
잠시 동안 양측 간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구 앞 수로를 막아섰던 병선들 중 4척이 조선 함대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장인 신의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등이 앞서 내달아 적의 선봉 4척을 두들겨 부수고 불살랐습니다. 적도들은 헤엄쳐서 육지로 도망갔습니다.
4척의 왜선은 부산포 방어를 담당하는 항만수비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상 어쩔 수 없이 나섰을 뿐 처음부터 여차하면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왜군들에게 조선 수군과의 싸움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는 상대는 전라좌수영의 중위장 권준, 전부장 이순신, 좌부장 신호, 우부장 정운,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 등이 이끄는 최정예 ‘거북선 + 학익진’ 함대였으므로 실제로 싸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왜군들은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포 공격을 받아 깨지고 불타는 배를 뒤로한 채 사력을 다해 헤엄쳐 달아났다.
4척의 병선이 한 순간에 박살나는 것을 목격한 왜군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것은 그토록 떨쳐내려고 몸부림쳤던 악몽의 재현이었으며 아직 조선 함대와의 해전을 경험한 바 없었던 왜군들까지도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 군함 퍼레이드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이때 뒤에 선 여러 전선들은 이 승기를 타고 기를 날리고 북을 치면서(병선마다 북과 기가 있었기에 군악이다) 긴 뱀 모습의 진으로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4척의 왜선을 격파한 선봉 함대는 긴 뱀 모습의 일자형(一字形) 장사진을 펴고 곧장 포구를 향해 돌진했다.
방파제 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던 왜선단은 안골포에서의 구키 함대처럼 젖은 가마니와 젖은 이불 등으로 선체를 덮고 연신 물을 끼얹으면서 화공에 대비할 뿐 어떠한 응전의 기미도 취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선단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았을 부산의 조선 백성들에게는 군악을 울리며 펼쳐진 조선 함대의 장사진 군함 퍼레이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의 그림이었다.
장사진으로 포구 앞에 다다른 선봉 함대는 군악을 바꿔가며 6개의 학익진 대형으로 각가 분항했다. 그리고 선단별로 왜군들의 포구와 해안 기지들을 막아섰는데 이 모습도 영락없는 군함무(軍艦舞)였다.
※ 충무공의 장계 (부산포파왜병장) ※
적들은 부산진성의 동쪽에 있는 한 산으로부터 5리쯤 되는 언덕 밑 3곳에 정박해 있었는데 큰 배, 중간 배, 작은 배 모두 470여 척이었습니다.
적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더니 우리 여러 전선들이 곧장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의 굴(왜성이거나 포탄 공격을 막기 위해 파놓은 참호인 듯) 속에 있던 적들이 총과 활을 가지고 나와 거의 다 산으로 올라가 여섯 군데로 나누어 진을 치고 내려다보며 빗발치듯 쏘아댔습니다.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 같고, 때때로 큰 철환을 쏘는데 크기가 모과만했습니다. 또 수마석(굵은 자갈)을 던지는데(투석기 등의 장비를 이용한 듯) 크기가 주발만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므로 여러 장수들이 더욱 분발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돌진하여 천자 · 지자 · 장군전 · 피령전 · 장편전 · 철환 등을 일제히 쏘며 종일토록 접전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습니다.
자성대 동쪽 5리쯤 되는 곳이라면 현재는 매립된 지역이다. 당시에는 갈대밭과 갯벌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선봉 함대가 여러 단위의 학익진으로 포위하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왜군들이 배 위, 해안가, 언덕 위, 왜성 등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왜군들은 조선의 비밀병기인 편전으로도 공격했다. 이는 조선인 징용병들을 시켜 쏘게 한 것이다. 모과만한 철환은 큰 포탄인데 사정거리나 관통력에서 조선제 대포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유는 화약을 많이 넣어 사격하게 되면 포신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포신이 깨졌던 것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일본의 주물공업 수준이 조선의 주물공업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왜군들이 쏜 철환, 편전, 수마석(큰 자갈) 등이 선봉 함대의 갑판에 날아들었다. 이에 선봉 함대에서도 사격에 나섰다. 주목표는 방파제 안의 왜선단이었다. 그러나 방파제가 넓게 둘러쳐져 있었고 표적과의 거리가 멀었던 탓에 효과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다.
왜군들의 방어 사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거센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선봉 함대는 왜선단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공격선을 점차 포구 쪽으로 좁혀 들어갔다. 공격선이 좁혀지면서 선봉 함대 역시 투석기와 대포를 동원한 왜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공격선을 더 좁히게 되면 조총의 유효사거리에도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직 거북선만이 적의 반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선봉에서 공격을 주도하던 거북선단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향해 공격을 집중시켰고, 크고 작은 석탄류와 각종 철환들이 “쿵! 쾅! 쿵!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북선의 등과 선체에 쏟아졌다.
왜군들은 조선제 대포로도 사격을 가해 왔다. 무적의 전함, 거북선이 처음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이었다. 거북선이라고 해도 조선 대포의 공격을 장시간 버텨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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