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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도 놀래킨 조선의 무림검객

구름위 2013. 4. 26. 09:25

 

 

조선 검객의 자존심, 김체건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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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평범한 인물이었다가, 정말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펼치는 고수의 제자가 되어 소위 말하는 '무림비기'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가 고수일 경우에는 직접 손이나 칼을 맞대지 않고서도 그의 기를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쉽게 무예를 펼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스승의 가르침을 되뇌이며 초절정 무공으로 최후의 적을 제압합니다.

이러한 무협지의 내용들은 대부분 중국을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막연히 중국에는 무림 고수들이 많고,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중국으로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손바닥에서 장풍이 나가고 손가락으로 땅콩을 튀기면 그것이 총알처럼 날아가 상대의 칼을 부러뜨리는 생각은, 어찌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을 로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 아닌 조선에 무림고수가 있었다면 믿으시겠는지요. 그리고 실제로 놀라운 무예 실력으로 왕을 비롯한 신하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초절정 무림고수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면,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은 또 다른 로망을 펼치기에 더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임진왜란, 그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현장

1592년 4월 14일, 새벽 안개가 조용히 드리운 부산 앞바다에 수백 척의 왜군 전투함대 및 수송선이 출현하였습니다. 조선 장수는 필사의 의지로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말을 남기며 결사항전의 전투를 벌였지만, 동래성과 주변의 방어시설들은 채 하루를 못 넘기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후 파죽지세로 조선반도를 밀고 들어간 왜군들은 12일 후 수도 최종 방어선인 충주성을 점령하였고, 선조는 화려한 정궁을 버리고 도망하기에 이릅니다. 두 달 뒤에는 조선 군사의 요충지였던 평양성마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피난간 조선 정부는 너무나 빠른 왜군의 진격 속도에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조선 병사들은 왜군의 조총과 왜검 공격에 칼도 뽑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쓰인 무예서인 무예제보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왜군과 대진할 때 왜군이 갑자기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조선의 군사들은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칼은 뽑지도 못하고, 창은 적을 겨눠보지도 못하고 적의 칼날에 꺾여 버렸다." <무예제보, 주해중편교전법>

이처럼 왜군의 검술은 조총에 현혹되어 사기를 잃었던 조선 병사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근접무기로 인식되었고 이후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조선은 새로운 검술을 군영에 보급하기에 이릅니다.

▲ 광해군 대에 훈련도감의 도청을 맡았던 최기남이 지은 <무예제보속집> 중 왜검의 그림입니다. 비록 원수의 검법이지만 그것을 익혀야만 한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익히고, 그들 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춰야만 했던 것이 조선검객들의 목표였습니다.
총칼을 들이밀고 조선에 진군했던 왜군은 명군의 압력으로 인해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평양성에 머물며 평화협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군 내부에서도 많은 분열이 일어났고, 조선에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왜군장교들이 조선군에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군에서는 이들 중 특별한 재주가 있는 자들을 선별해서 직위를 주었고, 이후 이들은 왜군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공들과 왜검을 제작하는 도검장, 그리고 왜검을 가르쳤던 장교들은 실전에 바로 배치되어 조선군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검술은 아주 구체적으로 상대의 뒷목이나 팔꿈치 등을 공격하는 것으로, 실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기술들을 조선군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을 피 흘리게 한 일본의 검술이 이제는 조선 군영에 보급되어 왜군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진군의 나팔을 불었던 왜군들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왜관에 숨어들어 검술 익힌 김체건, 숙종을 놀래키다

임진년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인 1636년 12월 6일, 청나라는 왜군의 진공 속도보다 더 빠르게 말을 타고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조선 반도를 휩쓸었습니다. 그 말발굽 소리는 이른바 '조선시대 최악의 치욕'으로 불린 병자호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왕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채 45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뒤로하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갈수록 전쟁의 양상은 속도전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기병을 강화하고 화약무기를 개량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선회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어렵게 얻은 왜검법이 조금씩 희미하게 사라졌고 군영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현장에서 개인 군사들이 서로 창칼을 맞대고 싸우는 것은 최종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이었기에 왜검법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때, 숙종 대에 훈련도감의 군교였던 김체건은 동래 왜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왜검의 기법을 훔쳐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놓고 있습니다.

"김체건은 숙종 때 훈련원에서 무예를 더 익히기로 하였는데, 조선의 검술이 왜인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스스로 왜관에 들어가 하인 노릇을 하였다…(중략)…체건은 그들끼리 검술을 겨눌 때 남 몰래 지하실에 숨어 엿보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왜인의 검법을 다 익히게 되었다." <유본학, 김광택전>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김체건이 조선통신사 연행에 함께 참여하여 일본에 건너가 직접 왜검법을 익혀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검법에 대한 공부는 쉼이 없었습니다.

몇 년에 걸쳐 남의 집 하인 노릇을 하며 검술을 훔쳐 배우고, 당시에는 결코 가깝지 않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왜검을 익히고 온 그는 아마도 뜨거운 열정에 뭉친 조선의 무사였을 것입니다.

▲ 동래부사가 초량 왜관에 온 일본 사신을 맞이하여 의례를 지내는 장면을 그린 <동래부사접왜도> 입니다. 칼 두 개를 허리춤에 찬 일본무사들과 허리에 띠돈을 메어 칼날이 아래로 가도록 하는 조선 검객들의 환도패용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렇게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검술 연마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김체건은 드디어 검술의 고수가 되어 다시 훈련도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새롭게 배운 검법을 조선 군영에 보급하기 위해서는 임금님마저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야 하는데, 드디어 그가 숙종 앞에서 자신의 검술 실력을 평가받는 날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의 관한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보법', 즉 걸음입니다. 무예를 익히는 데 있어 보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수인지 하수인지를 평가할 만큼 중요합니다. 보법이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놀라운 무공이라 할지라도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불안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숙종께서 체건을 불러서 시험하였는데, 체건은 칼을 떨치며 발뒤꿈치를 들고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걸었다." <무예도보통지, 왜검 편>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재를 땅에 깔고 맨발인 채 두 엄지발가락으로 재를 밟고 나는 듯이 칼춤을 추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나간 자리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임금까지 감동하여 그를 검법 교련관으로 임명하고 조선군에게 그의 검법을 전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의 검법에 대한 열정은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 그 또한 검선이었다

이렇듯 숙종에게도 총애를 받아 조선 최고의 검법 교련관으로 불리던 김체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광택이었습니다. 그 또한 당대에 이름을 날린 검객으로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피나는 검법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김광택전>에 실린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의 칼춤 실력이 신의 경지에 도달해서 '땅 위에 가득 떨어진 꽃이 쌓인 것처럼 칼에 몸을 숨겨 보이지 않는다'라고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나이 여든이 되어도 얼굴빛이 어린 아이와 같고 그가 죽던 날 남들은 그의 몸은 남아 있고 혼백만이 빠져나가 신선이 되었다며, 그를 신선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마도 부자가 나란히 검법의 고수로 이름을 날린 경우는 김체건·김광택 부자가 처음일 것입니다.

비록 당시 원수의 나라 검법이지만 그것이 조선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김체건과 그의 아들 김광택은 왜검법을 배우기 위해 혼심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후 검법을 연마해서 조선화된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기에 까지 이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이며,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 준 김체건 부자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