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소련과 중국의 핵개발

구름위 2013. 3. 10. 19:34

소련의 핵개발

소련은 1930년대부터 핵 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실용적인 쪽과 더불어 공업쪽 과학에 치중한 그당시 소련에선 그런 듣보잡 연구같은건 하지 마라고 하였으나 이런 천시는 1942년에 끝나게 된다.

1942년 4월, 게오르기 플료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미국, 영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 논문을 안 쓴다는 사실을 편지로 보내게 된다. 이는 미국-영국의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유력한 암시였다. 그래서 스탈린도 뒤쳐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랜드리스로 물자와 무기를 받고 있는데다 독일과 총력전 중인 것이 현실인지라 스탈린은 NKVD를 시켜 정보를 빼오게 했다. 놀랍게도 소련의 핵개발은 아직도 독소전쟁의 전황이 불투명했던 194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소련은 존망의 기로에 있었다. [1]

그래서 NKVD의 총수인 베리야이고르 쿠르차토프를 총수로 하는 핵무기 프로젝트를 가동하게 된다. 맨하튼 계획의 총 책임자 오펜하이머와 마찬가지로 이고르 쿠르차토프도 당시 40대의 비교적 젊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같은 간첩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2]

이런 첩보들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핵무기의 제조는 이란 단편적 정보보다는 거대한 플랜트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과 자금, 이런 핵플랜트에서 일할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소련의 핵개발의 규모와 어려움은 거의 맨하튼 계획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맨하튼 계획에서도 전체적인 진행상황은 오펜하이머만 알고 있었고, 나머지 과학자들은 그저 자기 맡은 분야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간첩들이 빼오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파편적이었다.

소련의 오펜하이머라고 할 수 있는 이고르 쿠르차토프는 연구 회의를 할때, 이렇게 정보원이 얻어온 단편적 정보를 그저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지 알아보라는 식으로 연구방향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는 스파이 활동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1945년 소련 간첩망은 원자폭탄 초기 설계도 하나를 빼올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쨌든 이런 첩보활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첩보에 공들인 결과 DT 반응을 발표 공표 3년 전에 알아내는 쾌거도 이뤄냈다. 그러나 이미 비탈리 긴즈부르크나 아님 사하로프 같은 소련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핵개발에선 이런 첩보뿐만 아니라, 소련 과학자들의 연구도 큰 역할을 했다.

참고로 당시 소련은 핵개발을 필요한 우라늄을 굴라그 죄수들을 갈아 서 얻어냈다. 실제로 당시 우라늄 채굴과 재처리에 투입된 인력 중에서 방사능 보호 장비를 갖춘 사람은 없었고(애초에 소련이 저걸 알고 있었을지도 의문이지만) 죄수들은 그저 허망하게 죽어간 것. 잠깐 묵념을 하도록 하자.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e/e8/Joe_one.jpg&width=450

여하튼 그렇게 해서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의 실험장에서 1949년 8월 29일날 22kt급의 RDS-1을 비밀리에 터트린다. 그리고 이 실험으로 인해 발생된 낙진을 미 공군이 발견하였다. 그리고 11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측이 핵을 갖고 있다고 공표하면서, 냉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측은 그뒤로도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여 1953년 8월 12일, 수소폭탄을 개발하게 되었고, 곧 사하로프가 텔러-울람 설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소련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서방측에 자랑하고 싶어하여 차르 봄바란 괴물을 만들어내게 된다.

소련측에선 이런 핵프로그램을 만들수 있는 도시들을 모두 비밀도시화 하였으며, 보통 아톰그라드로 불렀다. 현재도 이 도시들에 위치한 핵시설들이 가동중에 있다. 덤으로, 이 도시들의 문장은 모두 원자력과 관련이 되어있다.

러시아의 아톰그라드
당시 이름 현이름 설립목적
아르자마스-16 사로프 핵무기 설계, 연구, 조립
스베르들로프스크-44 노보우랄스크 우라늄 농축
첼리아빈스크-40[3] 오조르스크 플루토늄 생산, 장비 제작
톰스크-7 세베르스크 우라늄 농축, 장비 생산
크라스노야르스크-16 젤레즈노고르스크 플루토늄 생산
즐라토우스트-36 토리푸고르누이 핵무기 조립
펜자-19 자레츠니 핵무기 조립
크라스노야르스크-45 젤레즈노고르스크 우라늄 농축
첼리아빈스크-70 스네진스크 핵무기 설계, 연구

2 중국의 핵개발


중국의 핵개발은 1955년 첸쉐썬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출국이 보류되었던 100여명의 중국과학자들이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첸쉐썬박사는 상하이 교통대학출신으로 MIT에서 석사 칼텍에서 박사를 받은 천재과학자로 수학과 항공공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MIT교수를 거쳐 칼텍 교수로 재직하던 중,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참여하였은데, 1950년 매카시즘 시기에 중공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5년간 감금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에서 잡힌 미군포로들과 교환되어 중국에 돌아왔다.

처음에 중국은 소련에게 기술을 이전받아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거액을 챙기고도 중국에 기술을 이전해주는 척만하고 핵심기술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때문에 소련과 중국은 사이가 악화되었고, 그나마 있었던 1959년 소련 기술진들은 중국에서 철수하여 중국은 자체 기술진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첸쉐썬 박사는 귀환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전공인 유도탄(미사일) 개발계획뿐만 아니라 핵무기 제조도 감독했다. 다만 첸쉐썬박사는 핵과학자가 아니라 기계공학자이기 때문에 그는 감독만 했을뿐 실제 설계는 그분야의 전문가들이 했다.

운반체의 개발로 서둘러서 첸쉐썬 박사팀은 중소결렬후 1959년 독자개발을 시작하여 소련의 R-2의 복제부터 시작했고, 이후 자체 기술을 축적하여 유명한 둥펑(DF) 시리즈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다. 한편 핵무기는 1962년부터 개발을 추진했고, 2년만인 1964년 고비사막에서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1966년에는 수소폭탄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참고로 중국은 세계유일의 탄도핵실험을 한 나라이다. 1966년 DF-2A 중거리 탄도미사일에 실제 핵탄두를 실어 쏘는 실험을 성공시켰는데, 이는 미국이나 소련도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감히 못하던 것을 대륙의 기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다만 중국은 핵보유국들중에 유일하게 "적국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한,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현재 핵탄두수는 공식적으로는 발표하는 것은 수백기정도이나, 실제로는 미국과 러시아에 맞먹는 수천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운반체로서는 워싱턴이나 모스크바를 때릴 수 있는 ICBM는 20여기정도밖에 되지 않고, 대부분의 미사일은 사정거리 5000km 내의 중거리 탄도탄이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게 아니라 전략핵이든 전술핵이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태평양 기지들은 모두 중국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간다

'전쟁..... > 무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켓(rocket)  (0) 2013.03.10
야전삽  (0) 2013.03.10
E-3   (0) 2013.03.10
트라이던트  (0) 2013.03.10
총류탄  (0) 201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