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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1) - 창업과 수성

구름위 2013. 3. 2. 22:10

창업(創業)에서 수성(守成)으로                               이길상

 

(1) 조공(朝貢)과 회사(回賜)

 

명대의 지배 영역명을 세운 태조 홍무제(洪武帝)는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7살에 부모를 잃고 황각사의 탁발승이 되었다가 25살에 곽자흥이이끄는 홍건적에 투신,

 

 41살 되던 해인 1368년 난징에서 즉위하여 천자(天子)가 되었다.

 

1398년 그가 죽은 후 손자 혜제 건문제(建文帝)가 뒤를 이었으나 정난(靖難)의 변(變)으로 삼촌인 연왕 체가 제위를 빼앗아 1402년난징에서 즉위하고,

 

 그의 본거지인 베이징에 머물다가 1421년에는 정식으로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는데 이가 중흥의 군주 성조 영락제(永樂帝)다.

 

명나라 2백 70 여 년 간의 초석(礎石)은 이들 부자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칼럼 제 35호 ~ 37호(元·明,高麗·朝鮮왕조의 교체)에서 이미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다음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중국은 예부터 자기들을 중화(中華)라 하고, 문화를 가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고, 사방은 오랑캐의 땅이라 해서 그 방향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화이관(華夷觀) 아래서 대등한 외교란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 나라가 어디든 우두머리가 누구든 상관없이 이들 모두를 속국(屬國)으로 보았고, 자기들은 이들 속국들을 다스리는 종주국(宗主國)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외국의 어떤 사절(使節)도 조공사(朝貢使)로 취급하였으며, 외방(外邦) 속국들의 군왕들에게는 천자에게 조공만이 허용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중원의 천자에 홍건적 출신 주원장이 즉위하였다. 의심 많은 그가 취한 대외 정책은 철저한 쇄국주의, 바다에는 나무토막 하나라도 띄어서는 안된다는 해금(海禁) 정책을 취했고, 1397년 대명률(大明律)에 이를 정식으로 공포했다.

 

송·원대에 발달했던 외국 무역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그래도 즉위 초에는 자기가 천자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리고 문안 인사를 받기 위해 사방으로 사절을 보냈다.

 

화이(華夷) 사상에 따르면 변방의 군주들은 천자의 신하이기 때문에 황실에서 좋은 일이나 슬픈 일(慶弔事)이 생기면 거기에 합당한 인사를 해야 된다.

 

사절(使節)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갈 수 없고, 돌려 보내면서 역시 빈손으로 돌려 보낼 수는 없다. 황제에게 올리기 위해 가져간 물품(進上品)을 조공(朝貢)이라 하고 답례(答禮)로 내린 물품(下賜)를회사(回賜)라 했다.

 

이런 조공품 외에 가져간 물품에 대해서는 관청에서사 들이거나 특정 상인과의 거래를 허용했는데, 이런 교역의 형태를 조공무역이라고 부른다.

 

이런 것은 국익(國益)을 챙기기 위한 경제적인 목적이 아니라, 미개한 만이(蠻夷)에게 중화의 문물을 주어 그들을 교화(敎化)하고 그 문화의 향상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사절들이 도착하는 장소, 통로, 기항지, 배의 척수, 인원(人員)등은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제한했다.

 

홍무제는 말년에 이르러 복잡한 국내 문제등으로 사신을 내보내지도 않고 조공에 대해서도 반기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회수도 크게 제한하여 거의 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었다.

 

뒤를 이은 영락제는 이와는 달리 외국에 사절도 보내고 조공도 촉구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온 국서(國書)를 해독(解讀)하기 위해 4이관(四夷館)을 설치하고 국자감생(國子監生) 들에게 외국어를 배워 이를 번역케 했는데,

 

처음에는 달단(몽고), 여직(女直 / 여진), 서번(西番/ 티벳), 서천(西天 / 인도), 회회(回回 / 페르시아), 백이(百夷 / 타이계 제족), 高昌 / 위구르), 면전(緬甸 / 미얀마)의 여덟 개 외국어를  8 관(八館)으로 나뉘어 각각번역과 해독을 맡아 보다가, 얼마 후 팔백(八百 / 타이 북부), 섬라(暹羅 / 타이)가 추가되어 십관(十館)을 두어 이를 담당케 했다.

 

이런 국서를 통해서 황제는 주변 군왕에게 봉작(封爵)을 내리고(誥命冊印) 상호간 신뢰를 구축하면 양국 정부는 외교관계가 성립되어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그 십관 중 조선과 일본은 없다. 소중화를 자청했던 조선에서는 국서 자체를 한문(漢文)으로 작성했고, 따라서 번역이니 해독이니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아직 독자적인 문자가 없었던 것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한글 창제 후에도 한문으로 작성하였다. 그래서 표(表)·전문(箋文)에 얽힌 웃지못할 사연들도 만들어 냈다(칼럼 제 53 ~ 55호, 조선왕조 초기의 대외관계참조 바람)

 

(2) 한왕의 반란

 

대외 원정에 영일(寧日)이 없었던 영락제가 1424년 몽골원정에서 귀환 중 병으로 쓰러지자 그의 장자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 / 1378~1425)가 뒤를 이어 명나라 4대 황제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전했고, 부친 영락제가 내·외정으로 바쁘게 돌아 다닐 때 궁정을 잘 다스려 명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였고, 즉위 후에도 3양이라 일컫는 명신(名臣) 양영(揚榮)·양사기(楊士奇)·양부(楊溥)를 중용하여흩어진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몸이 약하고 살이 찐 데다가 발에 병이 있어서 걸음도 잘 걷지 못하였다. 결국 홍희제는 제위 8 개월 만인 1425년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자문화권에서 군왕의 묘호(廟號)에는 같은 이름이 많다. 고려의 17대 왕 인종은 이모를 아내로 마지했다가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으로부터 소위 이자겸의 난(1126)을 치렀고, 조선왕조의 12대 왕 인종(仁宗)은 중종의 뒤를 이어 어진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1545년 31세의 나이로 제위 8개월만에 죽었다.

 

인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2살의 이복동생 명종이 왕위를 이었고,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으로 권력이 이합집산 하면서 이른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명(明)의 인종, 홍희제(洪熙帝 / 1378~1425)는 훌륭한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5대 황제로 즉위,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 1398 ~ 1435)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위 상속의 절대 원칙이 정해지지 않는 입장에서 막강한 황제자리를 두고 그 친족들이 그냥 넘어 갈리 없다.

 

영락제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장자(長子) 인종은 마음이 너그럽고 덕이 있었으나 몸이 약했고, 둘째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는 무식하고 간악했으나 무술이 뛰어나 정난의 변 이래 많은 무공을 세웠다. 셋째 조왕(趙王) 주고수(朱高燧)는 막내로서 영락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버지 영락제가 제위를 빼앗는 과정을 눈 여겨 보면서 자란 그 자식들이, 저마다 제위를 노리는 것은 당연하다. 후계자 문제가 일어 났을때 무장들은 둘째를 밀었고, 문신관료들은 인종을 밀면서 비방과 모략을 총 동원한 추악한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영락제는 손자인 선덕제를 둔 큰 아들 인종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셋째인 조왕 주고수가 이런 틈 세를 이용, 병석에 누운 영락제를 독살하고 그 혐의를 형들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진노한 영락제가 이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죽이려고 하자, 장자인 인종이 애걸복걸 하여 겨우 무마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들의 불미스넌 행동 속에 영락제가 진중에서사망하자 인종은 이를 숨기고 급거 귀경하여 제위를 계승하고 동생들에게도 분에 넘칠정도로 우대하였다. 그러나 형만한 아우가 없어서 였을까? 그 동생인 한왕 주고후는 여러 무장들과 연결하여 엉뚱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후덕했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었다. 한왕 주고후는 즉시 행동을 개시, 일차적으로 남경에 머물다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급거귀경 하는 황태자를 중간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선덕제는 무사히 환궁해서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군사를 동원했다. 다시 삼촌과 조카사이에 제위를 둘러싼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인 조카 건문제와 당시 새왕이었던 삼촌 영락제간의 싸움이었던 정난의 변(1399~1402)을 치룬지 20년을 조금 넘겨 다시 이런 같은 싸움이 일어났다. 장수들은 사태를 관망하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으며 조정은 그 대책에 골몰했다.

 

그러나 선덕제는 건문제와는 달랐다. 건문제가 삼촌을 죽였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 전략이 매우 소극적이 였는데 반하여 선덕제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자신이 진두에 나서서 지휘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쏜 살같이 한왕의 본거지인 운남성의 낙안을 기습했다. 이때 한왕의 맏 아들은 자기의 생모를 죽인 아버지에 대해서 큰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런 아버지에 대한 원한은 종형(從兄)인 선덕제와 내통했다. 이래서 한왕 주고후는 사로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 삼촌을 위문 차 선덕제가 감옥에 들어가자 한왕은 눈을 부릅뜨고 발길로 걷어 찼다.

 

이런 삼촌에게 선덕제는 제관(帝冠) 대신 3백근이 넘는 무쇠 솥을 그의 머리에 얹어 주고 그 위해 숯불을 올려 놓았다. 힘이 장사인 한왕은 솥을 번쩍 들어 올렸으나 기운이 빠지면서 숯불과 함께 그 몸도 연기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조카인 선덕제는 삼촌인 한왕을 숯불로 태워 죽였지만, 그 덕택(?)에 정난의 변(1399~1402)과 같은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았다.

 

이후 종실(宗室)의 친·인척에게는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졌다. 성묘를 위해 외출하는 일까지 일일이 사전 허락을 받도록 했다면 그 간섭과 제약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태조 주원장이 울타리로 만들었던 새왕(塞王)제도는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고, 정치 권력이 황제에게 모여 지면서 독재군주권이 재 확립되었다.

 

(3) 창업에서 수성으로

 

선종 선덕제는 아버지인 인종 홍희제를  닮아서 문무겸전한 유능한 군주였다. 즉위 초에는 젊은 혈기로 사천(四川/쓰촨)의 적당(賊黨)을 평정하고 동부 몽골을 친히 원정하였으며, 정화의 남해 원정을 계속 돕는 등 국위선양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조부 영락제 시절부터 시작된 무모한 대외 정책이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외정(外征)보다는 내치(內治)에 중점을 두게 되었는데, 이런 것은 현실적으로 원정에 따르는 막대한 비용이 재정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이기도 했다.

 

남쪽으로는 1427년 안남(安南 / 베트남)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데 실패, 안남의 독립을 승인하고 교지국(交趾國)이라 부르면서, 영락제가 1407년 안남(安南)을 평정하고 설치했던 교지승선포정사사(交趾承宣布政使司)는 폐지했다.

 

북쪽으로는 유목민의 침입에 대배해서 거점으로 두었던 여러 위소(衛所)를 만리장성 이남으로 이동 시켜 남북 양면에서 중국의 방위선을 대폭 축소했다.

 

남쪽으로 안남을 포기했고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을 방위선으로 삼은 것은 중국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는 것이 였으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토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무장들을 비롯한 일부 세력의 반대나 반발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선종 선덕제는 이를 과감히 추진했다.

 

누군가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면, 이를 키우고 거두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창업(創業)보다는 수성(守成)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선덕제는 이제 창업의 후예로서 이를 지키고 가꾸는 수성의 길을 택한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때 만들어진 제도 문물이 명나라 멸망 때 까지 대부분 남아 있었다.

 

한편 다정다감한 그의 성품은 많은 일화를 남겼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어서 북송의 휘종 황제와 쌍벽을 이루는풍류천자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유가적(儒家的)인 농본주의 국가로의 회귀(回歸), 황제 독재권의 확립, 여기에 자연발생적으로 수반되는 관료제도와 환관들의 정치참여 등은 국가 및 사회 발전에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런 선덕제도 1427년 춘추 38세로 타계했다.

 

 후사를 이은 영종 정통제는 이 때 나이 9세, 나이도 나이지만 그의 출생에는 권력을 둘러 싼 엄청난 음모가 황태후와 환관, 그리고 생모라고 알려진 손귀비 사이에 연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