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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 (31)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구름위 2013. 1. 2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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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50만명 ‘포로 사냥’ 희생양… 사고 팔리는 노예로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끔찍한 일이었다.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제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1592~1642)가 묻힌 중국 선양(瀋陽)의 소릉(紹陵).청 황제의 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1643년 조성하기 시작해 1651년 기본 건축이 완성되었고,이후에도 여러차례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져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被擄人)은 얼마나 될까.전쟁이 끝난 뒤,최명길은 가도(?島)의 명군 지휘부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이다.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포로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있는 나만갑(1592~1642) 선생 신도비.선생은 병자호란의 참상을 인조 14년(1636) 12월12일부터 이듬해 2월8일까지 생생하게 기록한‘병자록’을 남겼다.
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나만갑(羅萬甲)이 ‘병자록’에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뒤 시기 심양(瀋陽)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최명길의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50만명은 안 될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청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포로들을 끌고 갔을까.청은 일찍이 후금(後金)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로들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다.후금은 전투,납치 등을 통해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잡아가곤 했다.그들은 후금으로 끌려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특히 철장(鐵匠),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포로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을 때,조선에 들어온 병사들 가운데는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출신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영역은 날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후에도 ‘포로 사냥’에 몰두했다.특히 1629년 이후 명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매번 수만에서 수십 만의 한인들을 납치했다.그들은 후금의 새로운 인구가 되고,노동력이 되었다.따라서 병자호란 무렵에 오면,청은 이미 상당한 수의 한인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 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포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이미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은 청(후금)과 ‘포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특히 심각했던 것은 후금에 정착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포로(走回人)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후금은 조선에 대해 주회인들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거나,아니면 그들의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청과 조선은 포로를 바라보는 개념과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청은 포로를 ‘혈전(血戰)을 벌여 얻어낸 정당한 성과’로 인식했다.말하자면 피를 흘려 얻은 일종의 ‘소유물’이자 ‘재화’였던 것이다.따라서 포로들이 달아나는 것이나,달아난 포로들을 숨겨주고 송환하지 않는 조선의 행위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표시했다.

 조선은 달랐다.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조선 신료들은 포로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혈육과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 때문에 이루어진 부득이한 행동’으로 여겼다.따라서 주화인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도로 넘겨주는 행위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나아가 도망 포로들을 붙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는 청의 요구를 ‘짐승 같은 오랑캐들의 탐욕에서 나온 행위’로 매도했다.

▲ 주회인들이 건넜던 압록강 수풍댐의 오늘날의 모습.
 조선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포로를 송환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내 처음으로 데려온 이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교섭했다.당시 대마도와 막부(幕府)가 포로들을 일부 돌려준 것은,조선의 원한을 다독여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어쨌든 일본과의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한 조선의 생각은 나름대로 굳어졌다.‘똑같은 오랑캐임에도 일본인들은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였는데,만주족 오랑캐들은 어찌 이렇게도 잔인하단 말인가’.

 자연히 조선 조정은 주회인 송환에 극히 소극적이었고,청의 압박이 몹시 강해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몇몇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실제 정묘호란 무렵까지만 해도 후금 또한 ‘포로 문제’ 때문에 조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아직 명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데다,그런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공략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통해 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조선은,과거처럼 ‘혈육을 찾아 도망쳐온 포로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호소’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홍타이지가 제시한 조건에서도 드러나듯이 ‘포로 문제’를 둘러싼 청의 압박이 정묘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속환(贖還)을 시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 때문에 주회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이 같은 상황에서 청에 끌려간 혈육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이 거의 유일했다.속환이란 포로의 몸값을 청 측 주인에게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포로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이 서게 되었고,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

 청의 용골대는 1637년 4월,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에게 속환에 대한 청 측의 방침을 통보했다.그들은 속환과 관련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즉 중간에서의 속환은 불가능하고,속환을 원하는 포로의 보호자가 직접 심양으로 올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소현세자는 이 내용을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고,조선 조정은 비로소 속환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속환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전란 시기 행방불명된 혈육을 갖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그 단적인 사례로 대사간 전식(全湜·1563~1642)의 경우를 들 수 있다.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하지만 속환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전식은 1637년 4월,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을 비롯하여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그들을 속환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비원(悲願)이었다.하지만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높은 관직에 있거나,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바로 거기에 ‘포로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병자호란 직후 청으로 끌려간 수많은 포로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을까? 한마디로 그들 피로인(被擄人)들은 시종일관 끔찍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그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심양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심양에 도착한 이후에도,도망이나 속환(贖還)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또 조선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요컨대 청군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한,온갖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 중국 심양 백탑거리에 있는 라마교사원의 모습.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된 여인 가운데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청군은 이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은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고 저항하는 여인은 살해되었다.
●사로잡혀 끌려갈 때의 고통

포로들의 고통은 청군에게 붙잡히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도성이나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의 체포를 피해 달아나거나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죽음은 슬픈 것이지만,죽은 사람들은 그나마 처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1637년 9월,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속환에 몰두하라고 촉구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포로가 되어 겪는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하고,그것이 화기(和氣)를 해치는 것 또한 죽음보다 더 심하다.’고 말한 바 있다.

청군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은 심양으로 연행될 때까지 청군 진영을 비롯한 주둔지 이곳저곳에 수용되었다.포로들이 사로잡혔던 시기는 한겨울이었다.당시 남한산성을 지키던 병사들 가운데서도 혹심한 추위 때문에 얼어죽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그런데 포로가 된 조선 사람들에게 적절한 식사와 잠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결국 수많은 포로들이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수용되어 있거나 심양으로 연행되고 있었던 시기에 포로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이미 언급했듯이 1637년 2월8일,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출발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전송하던 자리에서 청의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신신당부했다.심양으로 가는 도중 소현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이었다.인조는 그러면서 1월30일부터 시작된 열흘 남짓의 노숙 때문에 아들에게 이미 병이 생겼다고 호소했다.장차 조선의 지존(至尊)이 될 신분이라 상대적으로 우대 받고 있었던 소현세자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나머지 일반 포로들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있는 홍학사 비각.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 분인 홍익한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자 선생의 무덤 앞에 세웠다.
문화재청 제공
포로들은 수백명 단위로 열을 지은 채,엄중한 감시 속에 심양을 향해 행군했다.청군 지휘부는 탈출을 우려해 포로들이 행군하는 연로에서 조선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행여 접촉이나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들에게는 곧바로 철퇴가 날아들고 처참한 살육이 자행되었다.

대오(隊伍)를 유지하면서 걷는 과정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당시 홍익한,윤집과 함께 척화(斥和)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던 오달제(吳達濟)는 ‘심양에 오기까지 60일 동안 옷을 벗지 못한 채 자야 했기에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성 포로들의 슬픔

포로들 가운데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특히 더 처참했다.그들은 우선 사로잡힌 뒤 능욕을 당하거나 그것에 저항하다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또 많은 여성들이 청군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특히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이 대거 피란해 있던 강화도의 비극이 처절했다.강화도 함락 직후,청군의 체포와 능욕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워낙 많은 여인들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의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청군은 아이가 있는 여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젊고 예쁜 여자는 가리지 않고 끌고 갔다.당시 포로가 된 여인들 가운데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청군은 이들 여인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다.저항하는 여인들은 살해되었다.‘강도록(江都錄)’을 비롯한 실기류(實記類)에 ‘포개진 시신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어미를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는 처참한 표현이 나오는 것은 그 같은 상황을 방증한다.

 

심양으로 연행되는 과정에서도 여성 포로들은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당시 청군 장수들은 사로잡은 조선 여인들을 자신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예쁜 여인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강제로 빼앗는 사례가 있었다.또 만주족 출신 장수가 한족 출신 장수가 데리고 있는 여인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조선 여인을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던 셈인데,이렇게 자신을 최초로 사로잡았던 장수로부터 또 다른 장수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 포로들이 어떤 수난을 겪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으로 전락하여 심양에 도착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뜻밖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청군 장수의 본처들이 자행하는 투기(妬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본처들 가운데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조선에서 온 여성 포로들을 참혹하게 학대하는 자들이 있었다.심지어 조선 여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이 같은 사태는 청 조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1637년 4월,홍타이지는 도르곤 등 신료들을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조선에서 데려온 여성들에게 계속 그런 짓을 자행하는 본처들이 있을 경우,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殉死)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홍타이지까지 직접 나서서 본처들의 악행(惡行)을 근절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여성 포로들에게 닥쳤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속환(贖還)의 난맥상

청이 조선인 포로들의 속환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은 1637년 4월 이후였다.하지만 실제로는 청군이 철수 길에 올랐던 2월 초부터 이미 속환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청군이 철수에 앞서 자신들의 주둔지 부근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매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포로들을 직접 끌고 가는 것이 귀찮거나 돈이 필요했던 자들이 매매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항복했던 직후부터 청군이 철수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포로들의 몸값(贖還價)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청은 병자호란 이후 속환가를 은(銀)으로 계산했는데,당시 남자는 한 사람 당 은 5냥,여자는 3냥 정도였다.또 아무리 높이 잡아도 10냥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속환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종전 직후 조선은 이성구(李聖求)를 사은사(謝恩使),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심양에 파견했다.사실상 최초의 속환사(贖還使)였다.이들이 심양에 도착한 5월15일 이후 심양에서 ‘인간시장’이 열렸다.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願贖人)들이 심양으로 모여들었다.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말았다.속환가가 최소 수백냥에서 천냥 단위로 폭등했기 때문이다.그것은 인신매매로 한밑천 잡으려는 청인(淸人) 소유주들의 탐욕과 그에 놀아난 일부 조선 고관들의 조바심과 무책임 때문이었다.한 예로 이성구는 자신의 아들을 1500냥에 속환했다.

헤어진 혈육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하지만 그들의 조바심은 몸값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뛰어버린 몸값을 마련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은 속환의 희망을 이룰 수 없었다.최명길은 한 사람의 몸값으로 100냥을 넘기지 말 것과 청인들이 100냥 이상을 부를 경우,속환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몸값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일부 고관들은 사적 통로 등을 이용하여 여전히 높은 몸값을 치르고 있었고,나머지 사람들은 은을 마련하기 위해 집과 땅을 팔고,빚을 내기 시작했다.그렇게 속환가를 마련한 사람들이 심양으로 달려가게 되면서 다시 값이 오르는 악순환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속환은 ‘사람 장사’… 혈육 눈앞에 두고 돈 없어 눈물만

당시 포로들을 속환해 오는 방식은 몸값을 누가 마련하느냐에 따라 크게 사속(私贖)과 공속(公贖)으로 나눠지고 있었다.사속이란 일반 사민(士民)들이 스스로 마련한 몸값을 갖고 심양에 들어가 혈육을 데려오는 방식이었다.공속은 국가가 몸값을 대고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어느 경우든 포로를 팔아 한 밑천 챙기려는 청인들의 탐욕,조선의 고관들이나 재력을 갖춘 사람들의 무절제 때문에 속환가(贖還價)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거기에 속환 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까지 더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환은 그저 ‘남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또 속환을 통해 돌아오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했다.이래저래 포로들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 단둥(丹東) 외곽의 변문진(邊門鎭) 팻말.변문(邊門)이란 단둥이 사실상 조선과의 국경임을 의미한다.
●속환의 문제점과 허박(許博)의 절규

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사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속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었다.하지만 공속의 대상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전란 직후,국가의 재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조정은 공속의 대상자를 종실(宗室),인조를 호종(扈從)했거나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로 제한했다.종실은 왕실의 피붙이이기에 가장 우선적인 속환 대상이 되었고,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국가 유공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국가가 몸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공속의 대상자도 아니고,비싼 속환가를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심양으로 달려갔지만 폭등해 버린 속환가 때문에 혈육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아예 속환가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압록강 너머의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처참한 장면이었다.

속환 자체가 사실상 무역으로 변질되면서 갖은 부작용과 부정 행위도 같이 일어났다.상인들 가운데는 심양을 왕래하며 ‘사람 장사’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청인으로부터 포로를 싼값에 사서 조선에 돌아온 뒤,포로의 연고자에게 비싼 값으로 되파는 방식이었다.

실종된 혈육을 가진 사람들의 애끓는 심정을 악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관원들도 나타났다.당시 조정은 심양에 억류된 포로들의 명단을 청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이른바 ‘피로인성책(被擄人成冊)’을 만들었다.실종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발을 구르던 사람들에게는 ‘성책’을 열람하는 것이야말로 속환을 위한 첫걸음인 셈이었다.하지만 당시 비변사에 보관되어 있던 ‘성책’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관련 당상(堂上)이나 서리들이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되었다.곤경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을 등치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이런저런 요인들 때문에 속환을 통해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누구보다 속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1637년 9월,인조에게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글자 수가 1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였다.그는 인조에게 속환을 전담하는 기구와 관원으로 속환도감(贖還都監)과 속환사(贖還使)를 설치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몸값 마련을 위한 방책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속환가로 충당되는 은을 마련하기 위해 은광(銀鑛)을 개발하고,벼슬아치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속환의 절박성을 설명하여 성금을 거두라고 건의했다.허박은 또한 왕실과 조정이 절용(節用)에 솔선하고,속환 과정의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고,속환가를 엄격히 제한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나라의 가용 재원을 총동원하여 속환에 나서라고 촉구하고,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이르고 그것이 궁극에는 조정을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하지만 허박이 제시한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수용되지 못했다.

▲ 병자호란 당시 속환된 포로들이 돌아오던 단둥(丹東)의 오늘날 모습.끊어진 압록강 철교의 구교가 보인다.
●속환은 시들해지고,청의 압박은 강화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의 속환 대책은 점차 흐지부지되어 갔다.속환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조선 조정이 속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청 측에서 먼저 속환을 종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1641년(인조 19) 6월,용골대(龍骨大)는 심관(瀋館)의 조선 관리들에게 자신의 곤궁한 경제적 사정을 이야기한 뒤,자신이 데리고 있던 열 살 아이를 속환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속환 문제를 포함하여 포로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지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은 도망해 온 포로(주회인)들을 송환하라는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병자호란 당시 워낙 많은 수의 포로가 잡혀갔기 때문에 주회인의 수도 크게 증가해 있는 상태였다.청은 때로는 심양의 소현세자에게,때로는 직접 서울로 사신을 보내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라고 협박했다.

정묘호란 무렵,조선 조정은 ‘부모 된 자로서 고향을 찾아 도망쳐 온 자를 차마 잡아 보낼 수 없다.’는 인정론(人情論)을 들어 청측의 요구를 무마하고자 했다.하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 같은 인정론이 통하지 않았다.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를 입조(入朝)시킨다.’고 하거나 ‘애초 산성에서 나올 때 왕을 교체하려 했는데,그러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는 등의 풍문을 흘려 인조를 직접 압박했다.

인조와 조정은 청의 압박에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주회인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부작용이 속출했다.수령들 가운데는 책임을 때우기 위해 주회인이 아닌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붙잡아들이는 자가 있었다.도망친 주회인 대신 가족을 잡아들이기도 했다.붙잡힌 주회인들 가운데는 청으로의 압송을 기다리며 몇 년씩 감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졌다.1641년(인조 19),유례 없는 대한재(大旱災)가 일어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포로들을 도로 붙잡아 보내 하늘이 노했다.’는 수군거림이 나타나고 있었다.

 

●귀환 과정의 고통

청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 속환 또는 도망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 행운아였다.하지만 그 ‘행운’도 잠시일 뿐 그들의 고통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우선 도망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도망자들은 낮에는 산 속 등지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을 이용하여 이동했다.당장 이동하는 도중에 굶어 죽을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다.또 산 속에서 맹수를 만나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사리 심양부터 진강(鎭江-오늘날의 단둥·丹東)에 이르는 만주 지역을 통과하더라도,압록강변에 이르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변방 관리들은 청의 힐책을 우려하여 주회인들의 도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국이 막힌 주회인들이 강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속출했다.1642년 2월,정언(正言) 하진(河?)은 ‘창성(昌城)과 삭주(朔州)의 압록강 줄기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고,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 없다.’며 참혹한 실상을 증언한 바 있다.

‘합법적인’ 속환인들의 사정도 주회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들 또한 만주를 통과하고,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오는 도중 아사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이동하는 도중 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637년 윤4월,조정에서는 미곡을 통원보(通遠堡) 서편으로 운송하여 속환인들에게 공급하자는 대책이 제시된 바 있다.또 조선에서도 속환인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따져 적당한 곳에 진제장(賑濟場)을 세워 구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성 포로들 가운데는 귀환 도중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그 때문에 조정은 1637년 2월,포로들이 지나는 연로와 나루터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고,사족 부녀들을 잡아가는 자들을 붙잡아 효시(梟示)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하지만 아사와 납치의 위험성 등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귀향에 성공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비판과 매도였다.병자호란 당시 포로들의 삶은 시종일관 참혹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사대부 집안 환향 며느리들 대부분 버림받아 ‘두 번 눈물’

속환이나 도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還鄕女)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사족(士族)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일부 신료들은 ‘속환되어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출가했던 딸이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이혼을 섣불리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도 있었지만,대부분의 사족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피로(被擄)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 산해관의 정문 천하제일관.명나라 홍무 10년(1381년) 세워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예부터 한반도에서 만주 방면으로 나가는 육상교통로의 관문이었다.

●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실절한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 행정구역으로는 친황다오시에 속하는 오늘날 산해관의 성 내부 모습.

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당시 어떤 종실(宗室)이,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은 단호했다.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이혼을 허락할 경우,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조, 훈신(勳臣)의 독자 장선징에게만 특별히 이혼 허락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실절한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포로가 된 부녀자들은,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실절한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최명길은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이번에는 호소문 속에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사책(史冊)에도 이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끌려가던 안단 “나를 죽을 곳에 빠트린다” 울부짖어

환향녀들의 운명은 가혹했지만,포로들 가운데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속환해 줄 가족도 없고,가족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고,또 도망쳐 돌아올 여건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청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속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와중에도 귀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현종대에 도망쳐 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의 사연이 주목된다.

개성 부근에 살다가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은 심양으로 끌려갔다.1644년 청이 입관(入關)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 갔다.그는 1662년(현종 3)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번 실패한 뒤 1664년 다시 시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대모험이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을 고향인 개성으로 보냈다.하지만 개성에는 그를 품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조정 또한 그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柵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물경 37년 만이었다.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안추원과 안단의 사연은 처절하다.각각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둘 모두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한 사람은 고국에서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했다.이들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연성을 새삼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