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병자호란) -(25) 근왕병이 패하다

구름위 2013. 1. 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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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왕병이 패하다 Ⅰ

팔도 근왕병 속속 기치 들지만 중과부적에 한숨만…

몇 차례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날씨가 추운 것도 그대로였다. 근왕병이 올 기약은 보이지 않는데 식량이 줄어들면서 조바심은 갈수록 높아졌다. 산성의 민심도 심상치 않았다. 성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 가운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비단 옷 입은 벼슬아치들은 후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왜 우리들만 사선(死線)으로 밀어 넣느냐?’는 항변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안간힘을 써 보고 있었지만 청군의 포위망은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남한산성의 숭렬전. 백제 시조 온조 임금과 남한산성 축성의 총책인 이서 장군을 모신 사당. 청이 침입하자 인조는 어영대장 이서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했다.
경기 광주시 홈페이지

명을 향한 丹心은 변함 없건만

1636년 12월24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날은 명 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이른바 성절(聖節)이다. 인조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북경 황궁(皇宮)을 향해 절을 올렸다. 충성스러운 조선이었다. 청군에 쫓겨 손바닥만 한 산성에 갇혀 버린 상황에서도 황제에 대한 망궐례(望闕禮)는 거르지 않았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도 되지 않는다고 펄펄 뛰었던 것도 사실은 명나라 때문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의 황제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명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가 조선이 이렇게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일편단심을 명나라는 과연 알고 있는 것일까?

▲ 숭렬전의 원래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崇烈)’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진눈깨비가 비로 바뀌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첩을 지키는 장졸들의 몸이 모두 젖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행궁 후원(後苑)으로 갔다. 기청제(祈晴祭)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을 올린 뒤, 축문을 읽었다.

“이 외로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얼어죽고 말 것입니다. 이 한 몸이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시어 우리 신민들을 살려 주옵소서.”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울면서 계속 기도했다. 옷이 모두 젖어도 멈추지 않았다. 승지들을 비롯한 주변의 신료들도 비를 맞으며 같이 울었다. 승지들이 인조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신들이 달려왔다. 영의정 김류가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며 만류한 뒤에야 인조는 다시 사배(四拜)하고 일어났다.

일어난 뒤에도 인조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둥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통곡했다. 인조의 처절한 기도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얼마 뒤 비가 그쳤다.

근왕병 소식 전해지다

12월24일, 산성 안의 마초(馬草)가 고갈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말에게 줄 먹이가 없는 이상 기마전을 벌이기는 글러버렸다. 바야흐로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날 체찰부(體察府) 군관(軍官) 임몽득(任夢得)이 희소식을 전했다.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가 12월19일 병력 4000명을 이끌고 올라와 죽산(竹山)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전진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조는 성의 형세가 한결 나아졌다고 기뻐했다. 김류는 충청도 군사에 이어 경상도 근왕병도 차례로 올라올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성안의 분위기는 일시에 밝아졌다. 김류는 근왕병들이 성안의 형세를 잘 몰라서 전진하지 않는 것이라며 결사대를 모집하여 죽산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산성에서 보내는 전령이 죽산까지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곳곳에 배치된 청군 복병들 때문이었다. 이미 충청병사가 보낸 전령이 산성 문 앞까지 다 왔다가 청군 복병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우울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충청도 근왕병이 산성 근처로 다가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12월26일, 마침내 강원도에서 근왕병이 달려왔다.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에게 소속된 병력이었다. 그는 청군의 침략 소식을 들은 직후 도내 각 고을 수령들에게 병력 동원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조정호는 병력을 이끌고 12월24일 양근(楊根·양평)으로 진군했다. 그는 양근에서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井吉)을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 쪽으로 먼저 진군하게 했다.

권정길 휘하에는 원주, 횡성, 인제, 홍천 출신의 병력 약 100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권정길은 12월26일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의 검단산(檢丹山)까지 진출했다. 행군 도중 인제 출신 병사들이 청군 2명을 잡아 목을 베고 그들의 말을 노획해 왔다. 권정길은 청군의 목을 매달도록 하는 한편, 말을 잡아 병사들을 먹였다.

당시 검단산과 남한산성 사이의 평야 지대에는 청군 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청군 진영 부근에서 진을 칠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한 권정길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검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 곳곳에 널린 눈과 얼음 때문에 병졸들은 미끄러지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는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검단산 정상의 병사들은 횃불을 밝혀 들고 포를 쏘았다. 남한산성을 향해 보내는 신호였다. 산성에서도 검단산 쪽으로 북을 치며 호각을 울려 호응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근왕병이던가.

권정길은 병사들에게 남초(南草·담배)를 나눠주어 사기를 북돋았다. 늦은 밤, 산성에서 왔다는 승려 한 사람이 권정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검단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알고 있다며 스스로 향도(嚮導)가 되겠다고 나섰다. 권정길은 그의 말을 믿었다.

권정길은 병졸들에게 군장(軍裝)을 꾸리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아침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가려는 작전을 세웠다.

권정길의 근왕병 패퇴하다

12월27일 아침, 권정길 부대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이후, 청군의 포위망을 뚫어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청군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청군 2000여명은 나무로 만든 방패에 몸을 숨긴 채 조선군을 포위하려 들었다. 권정길 부대는 청군을 향해 일제히 조총과 화살을 쏘았다. 선봉에 섰던 청군들은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시간이 흐를수록 청군 측의 사상자는 늘어났다.

일단 물러났던 청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전투가 한창일 때, 조선군 진영에서 병사 하나가 ‘화약이 다 떨어졌다. 빨리 더 보내달라.’고 외쳤다. 군중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청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증강된 청군 병력의 공격에 조선군은 산 쪽으로 밀렸다. 전사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조총과 화살을 발사했지만 청군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군의 퇴로는 미끄럽고 험준했다. 달아나는 병사들은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조선군을 향해 청군 기마대가 들이닥쳤다. 전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권정길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부하들이 다투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결국 권정길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춘천으로 돌아간 권정길은 군관을 보내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부대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선봉장이었던 그의 부대가 패한 것은 강원도 근왕병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권정길에게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악조건 속에서도 분전했다. 겨우 1000명 정도의 병력만으로,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수만의 청군과 상대하기란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양근에 주둔하고 있던 조정호 휘하의 본대로부터 지원병이 왔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조정호의 본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권정길 부대와 공동작전을 벌이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것은 결국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과 외부와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왕병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권정길 부대의 패전 이후, 산성의 탄식이 더 커져 가고 있었다.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 남한산성의 장경사(長慶寺).1624년 승려 각성(覺性) 등이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성을 쌓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사찰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 북한산성의 모습.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 북한산성의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날로 어려워지는 산성의 사정을 바깥에 정확히 알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청군이 산성 주변에 설치한 목책 때문이었다. 청군은 소나무를 베어 만든 목책과 목책 사이에 새끼줄을 연결하고 방울 등 쇠붙이를 매달았다. 조선군 전령이 목책을 넘으려 하면 어김없이 매복한 청군이 뛰쳐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책은 서서히 산성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광나루(광진)의 모습. 출처 ‘그림으로 본 옛 서울’(서울학연구소 펴냄).
‘술과 고기’의 굴욕

12월27일 조정은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보냈다. 세시(歲時) 인사를 하면서 적정(敵情)을 떠보려는 깜냥이었다. 대사간 김반(金槃), 승지 최연(崔衍), 교리 윤집(尹集)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적진에 사람과 선물을 보내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김반 등의 주장을 일축했다.

대신을 보냈다가 혹시라도 억류될까봐 하급 관원을 한 사람 골랐다. 이기남(李箕男)이 그였다. 이항복(李恒福)의 서자인 그는 영리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소 두 마리와 돼지 세 마리, 술 10병을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영리한 그도 청군 진영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실언을 하고 말았다. 연말 인사차 왔다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날씨도 추운데 우리 전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특별히 술과 고기를 보냈다.’고 했다.

청군 장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하늘이 조선 팔도를 우리에게 주었으니 술과 고기 등 모든 물자가 다 우리 것이다. 국왕은 지금 골짜기에 갇혀 있고 안팎이 가로막혀 신하들은 모두 굶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문득 획득한 물품을 국왕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이 술과 고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도로 가져가 굶주린 너희 신료들에게나 주어라.’ 그러면서 청군 장수들은 조선 근왕병들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자신들의 성세(盛勢)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이기남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적정을 엿보려고 갔다가 도리어 적이 산성 내부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기남이 돌아온 직후 독전어사(督戰御史) 황일호(黃一皓) 등이 인조를 뵙자고 청했다. 황일호는 인조에게 빨리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자고 촉구했다. 그는 당시 형세를 ‘주객(主客)이 뒤바뀐 상태’라고 진단했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황일호는, 병사들은 사기(士氣)를 먹고 사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가만히 앉아서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헌릉.
서초구청 홈페이지
혹독한 추위 막을 가마니조차 부족

1636년 연말, 산성의 조선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망루에 올라가 있는 군사들의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방한복’이라 할 수 있는 빈 가마니(空石)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사정이었다.

황일호는 산성의 주민들에게 벼슬을 팔거나 면천첩(免賤帖)을 팔아서라도 병사들에게 군막(軍幕)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사들이 얼어죽을 것이고,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자기 몸을 가리고,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산성 주민들에게 무슨 물자가 있을 것인가.

도무지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12월28일, 술사(術士) 몇 사람이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日辰)을 뽑았다. 도체찰사 김류는 술사들의 얘기에 솔깃해졌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해야 한다는 건의도 들었던 터라 병력을 뽑아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했다. 노살(勞薩) 등이 이끄는 청군은 골짜기 여기 저기에 병력을 매복시키고 ‘미끼’를 던졌다. 다름 아닌 포로로 잡은 조선인 노약자들과 가축들이었다. 그들을 본 김류는, 달려 내려가 공격하면 조선인 포로와 가축들을 구해올 수 있다고 여겼다.

패전 책임 하위 무관에 전가해 원성

김류는 체찰부(體察府) 소속 장졸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장졸들은 ‘함정’일 수 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몸을 사렸다. 그러자 체찰부의 비장(裨將) 유호(柳瑚)가 군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김류에게 건의했다. 유호는 머뭇거리는 장졸들에게 김류가 건네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떠밀린 장졸들은 할 수 없이 달려 내려갔다. 매복한 청군은 처음에는 조선군이 포로와 우마(牛馬)들을 거두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적진이 비어 있다고 착각한 조선군 수백 명이 쏟아져 내려오자 청군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청군이 만든 ‘함정’에 빠져 당황하고 있는 상황에서 갖고 있던 화약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오판하여 애초부터 화약을 조금밖에 지급받지 못한 탓이었다. 화약을 더 달라는 고함과 아우성 속에 조선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산성 쪽에서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김류는 조선군이 섬멸당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초관(哨官)을 시켜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고 있는 장졸들이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올라 퇴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대형 사고’였다.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산성의 현실에서 이들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즉흥적이고 섣부른 작전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러나 패전의 진상 파악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호는 전사자가 40명 정도라고 축소하여 보고했다. 김류와 유호의 책임이 제일 컸지만, 군사들을 제 때 물리지 못한 과오는 김류의 퇴각 명령을 전한 초관에게 전가되었다. 그는 참수되었다. 또 혼전 중인 조선군을 제 때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성장(北城將) 홍두표(洪斗杓)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홍두표는 신료들의 구원으로 죽음을 겨우 면했지만, 패전 책임이 엉뚱하게 전가되는 와중에 병사들의 원성은 높아졌다.

홍타이지, 남한산성 압박 본격화

이 싸움을 계기로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누구도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더욱이 12월29일, 남하하던 홍타이지는 휘하 장수들을 먼저 도성으로 들여보내 숨어 있는 사람과 가축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자신은 직접 남한산성 근처로 나아가 인조를 더욱 압박할 심산이었다.

12월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하루 종일 청의 대군이 광나루, 마포, 헌릉(獻陵) 등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김류는 패전에 대해 사과하고, 적진에 사람을 보내자고 청했다. 패전을 계기로 다시 화의를 추진하려는 심산이었다. 김상헌이 당장 제동을 걸었다. 사간원 신료들도 오랑캐 진영에 사람을 보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만갑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들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길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디에선가 근왕병이라도 나타나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의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실의에 빠진 산성 사람들은 까치집을 바라보며 그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길조’가 나타난 이 날, 홍타이지는 탄천(炭川) 주변에 자신이 머물 진영을 설치했다.

1636년 12월30일, 남한산성 주변의 풍경은 스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