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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 (12) 정묘호란 일어나다

구름위 2013. 1. 2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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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후금군 파죽지세… 인조 강화로 피난갈 궁리만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비호 속에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을 탈출하는 반민(叛民)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의주·정주·안주성 차례로 함락

후금군은 1월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후금군은 다국적군이었다. 만주족 병사들뿐 아니라 한족과 몽골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아민이었고,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 조선 출신의 강홍립과 한윤(韓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다. 이영방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했고, 강홍립은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했다. 한윤은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었다.

후금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왔다.14일 새벽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한윤은 병기고에 불을 질렀다. 혼란한 와중에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었고 후금군은 수월하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의주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은 일제히 조총을 쏘았지만 다시 탄환을 재기도 전에 돌격해 들어간 후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했다.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부 머리를 깎였다. 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후금군은 1월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들이닥쳤다. 안주는 당시 청북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조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방어태세를 점검해 왔던 곳이었다. 성 안의 군민도 3만 6000이나 되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 대포와 화살을 일시에 발사하여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남(三南)의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성을 넘어왔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안주 함락 후 아민은 병사들에게 4일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들은 느긋했다. 반면 안주성이 함락된 후, 숙천(肅川)과 평양의 조선 관민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후금군의 승승장구였다.

당황하는 조선 조정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월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보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장만(張晩)은 속히 하삼도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에 별장(別將)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했다. 이귀(李貴)는 황해도를 방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강화도를 피란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패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설정해놓고 대응하려는 자세 같았다.

최명길은 임진강을 방어할 계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무신 신경진(申景 )을 임진강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의 우선 관심사는 자신의 호위(扈衛:궁궐을 지킴) 문제였다. 인조는 아마도 ‘이괄의 난’ 당시 권력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궁벽한 강화도로 들어가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조운(漕運)도 어렵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分朝)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를 삼남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흠(申欽)은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 ‘실정’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강화도 이외의 방어를 포기하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했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거부했다. 호위에 충당할 어영군의 병력을 덜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비변사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반정공신들 또한 극도로 몸을 사렸다. 강화도로 피란하기로 결정한 직후 논란이 된 것은 임진강을 방어하는 문제였다.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하게 되자 임진강 방어에 충당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발끈했다. 이귀는 ‘군량이 궁핍한 상황에서 수원의 병력을 임진강으로 보내면 오직 죽음 뿐’이라고 반발했다. 이시백은 이귀의 아들이었다.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를 호위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는 반박했다.‘적병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를 버리고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냐?’고 힐문했다.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적이 아직 천리 바깥에 있음에도 먼저 도성을 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고 통탄하고 인조에게 경솔히 파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병력 500명만 주면 임진강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1월26일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기 위해 노량(露梁)으로 거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강을 건너기가 여의치 않았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밭에 앉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피해 한강변으로 나왔던 이래 두 번째 맞는 파천이었다. 다음날 인조는 김포를 경유하여 저녁에 통진(通津)에 도착했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치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했던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다.

조선과 무역 통한 식량 확보도 전쟁 도발 배경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해 강경론자였다. 그는 일찍부터 부친 누르하치에게 조선을 공격하라고 청했다. 특히 1619년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심하 전역에서 패하여 투항한 뒤에는 ‘후금과의 화의에 미온적인 조선의 장졸들을 전부 살해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의 입장은 달랐다. 두 사람은 ‘조선이 명의 배후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적대하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을 삐딱하게 보고 있었던 홍타이지가 한으로 즉위한 것 자체가 조선에는 재앙이었던 셈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즉위 당시 홍타이지의 권력은 미약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한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형제들과 연정(聯政)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촌형 아민은 홍타이지 추대에 반발하여 자신의 기(旗)를 이끌고 독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홍타이지가 조선을 치러 가는 원정군 사령관으로 아민을 임명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민에게 원정의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그의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고,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아민은 실제 원정 도중 홍타이지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독단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홍타이지의 ‘기대’에 부응한 바 있다. 후금이 전쟁을 도발했던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제적 문제였다. 홍타이지의 즉위 직후 만주 지역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청태종실록’에는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점령 지역은 늘었지만 농작에는 아직 서툴렀던 후금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명나라 상인들과 곡물 무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명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심각한 기근 때문에 위기에 처한 후금에 조선의 존재는 특별했다.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유일한 나라였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무역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고자 했다.

후금의 전쟁 도발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핵심은 역시 ‘모문룡 문제’였다. 모문룡이 가도에 머무는 한, 후금의 서진(西進) 시도는 언제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문룡의 존재 때문에 한인들이 계속 후금을 탈출하고 있었다. 모문룡이 군사적으로는 미약했지만 후금에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그 ‘가시’를 제거하여 ‘후고(後顧)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아민, 홍타이지에 증원군 긴급 요청

조선 조정은 황해도 이북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에게 평안도 지역의 패잔병과 함경도, 강원도 등지의 병력을 모아 임진강을 방어토록 했다.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는 남한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하삼도 군사를 통괄 지휘하여 한강을 방어토록 했다. 그리고 통제사 구인후(具仁)가 거느리는 수군 병력으로써 적의 강화도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처했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인조가 머물고 있는 강화도를 수비하는 문제였다.

전쟁 초반의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상황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윤훤은 후금 측에, 조정에 품의(稟議)한 후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이 갑자기 화의를 제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점이다. 후금은 조선 침략에 약 3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직후, 이미 홍타이지에게 사람을 보내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3만명의 병력으로는 한편으로 전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점령 지역을 방어하고 그곳의 조선 관민들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은 원숭환의 위협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조선으로 쳐들어가면서 가장 우려했던 것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미 살폈듯이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이후, 후금군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오히려 영원성에 주둔하는 원숭환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 산해관과 영원의 병마와 모문룡의 병력을 동원하여 배후를 협공함으로써 조선을 원조하자는 내용이었다.

답장 내용 놓고 설전

후금이 화의를 제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조선 조정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양사(兩司) 관원들은 ‘평안감사 윤훤이 엄한 말로 오랑캐의 서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답장을 주겠다.’고 응답한 것을 비난하고 인조에게 신중히 대처하라고 촉구했다. 이윽고 후금 측은 강홍립의 종자인 언이(彦伊) 등을 다시 윤훤에게 보내 ‘화의를 논의하기 위해 사람을 서울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윤훤의 장계를 통해 두번째 화의 제의를 받자 인조는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서신을 받자마자 화친을 허락하면 우리가 겁을 내서 그런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흠(申欽)은 ‘명나라도 그들과 화친하려는 판에 우리만 화친을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이귀는 ‘적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면 사태 수습이 불가하다.’며 답서를 꾸며 강홍립의 아들 강숙 편에 부치자고 했다.

최명길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먼저 서신을 보낸 주체가 후금의 한 홍타이지가 아니라 사령관 아민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도체찰사 장만의 명의로 답하되, 무고하게 침략하여 군민들을 도륙한 허물을 따지고 ‘위협적인 맹약은 죽어도 따를 수 없으며 침략 사실을 명에 알리겠다.’는 내용을 집어넣자고 했다. 명을 이용하여 후금군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의견이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후금 측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사간 윤황(尹煌) 등 삼사 신료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떠나기 전부터 반정공신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윤황 등은 ‘전하께서 총애하는 김류 이귀 이서 신경진 김자점 등 반정공신들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거나 산성으로 올라가고, 혹은 호위(扈衛)를 칭하거나 검찰(檢察) 직책을 맡아 안전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로지 힘없고 배경이 없는 장만만을 맨손으로 적진에 보냈다.’고 성토했다.

그들은, 맨 처음 도성을 떠나자고 주장한 자의 목을 베고 인조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여하튼 강숙 등은 조정의 답서를 가지고 1월27일 후금군 진영에 도착했다. 후금군은 이미 중화(中和)까지 남하해 있었다. 답서의 핵심은 이러했다.‘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조선의 답서 내용에 반발했다. 그는 ‘조선은 명의 은혜만 강조하는데 과거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고 맞받았다. 바야흐로 ‘은혜’를 둘러싼 설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자신들이 부잔타이를 설득해 침략을 중지시켰던 것, 심하 전역 때 포로로 잡은 조선 병사들을 송환해 준 것 등 ‘은혜’를 열거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모문룡을 편들고 군량을 제공했던 것,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조문(弔問)하지 않은 것 등을 침략의 원인으로 제시했다.

▲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강화도 김상용 순절비(殉節碑). 김상용은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다

아민은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고 강변하면서, 조선 사신들에게 계속 싸울 것인지 화약(和約)을 맺을 것인지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자신들은 조선의 토지와 백성에 아무런 욕심이 없으며 조선이 화의를 바란다면 국왕이 신임하는 사람을 속히 보내라고 닦달했다. 아민은 사신인 강숙 일행이 돌아가는 편에 자신의 사자 아본(阿本)과 동나미(董納密) 등을 동행시켰다. 그들이 떠난 뒤 전진을 멈추고 중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렀다. 휴식을 취하면서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자는 심산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화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월28일 아민이 보낸 사신 일행이 강화도 건너편의 풍덕(豊德) 부근에 당도했다. 조선 조정은 ‘오랑캐 사신(胡差)’을 어느 길로 들이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인조는, 조선인들이 평소 이용하지 않는 샛길로 호차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호차가 전하는 국서를 직접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화약을 맺어 후금군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급하기는 했지만 ‘오랑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 강화도 고려궁터의 강화유수부 동헌 모습.
2월2일, 호차가 갑곶(甲串)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불러모았다.‘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다시 확인되었다. 인조는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 준다면 화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들이 들고 일어났다.2월3일, 태학생 윤명은(尹命殷) 등이 상소를 올렸다.‘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예빈직장(禮賓直長) 강유(姜瑜)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이 주축인 비변사는 뜨끔했다. 비변사는 ‘오랑캐와 화친하려는 것은 전쟁을 완화시켜 종사(宗社)를 보전하려는 부득이한 계책’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외방에서는 ‘조정이 대의를 망각하고 더러운 오랑캐와 우호를 맺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다고 우려했다. 인조는 여론을 의식하여 다시 교서를 반포했다.‘종사의 위기를 늦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랑캐와 화친하지만 명과 관계를 끊으라는 요구만은 절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오랑캐와 화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 정권을 타도하고 들어선 인조정권은 광해군대의 ‘화친’을 반복하는 데에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강홍립과 유해의 화의 주선

2월5일 조정은 회답사 강인(姜絪)을 임시로 형조판서에 임명하여 적진으로 보냈다. 그가 가져간 국서에서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또 의연히 천계(天啓) 연호를 사용했다. 후금 측은 반발했다. 그들은 ‘천계’의 ‘계(啓)’ 자 대신 ‘총(聰)’ 자를 쓰라고 종용했다.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는 요구였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울까지 진격하여 1년 동안 머물며 철수하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후금군 지휘부는 계속 전진할지의 여부를 놓고 의견이 서로 달랐다. 총사령관 아민은 다른 장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서울로 전진할 것을 고집했다. 귀순한 한인(漢人) 출신 장수 이영방(李永芳)이 반대하자 아민은 이영방에게 “내 어찌 너 같은 오랑캐 놈을 죽이지 못할까?”라고 면박을 주었다.

졸지에 ‘오랑캐’로 전락한 이영방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濟爾哈朗)과 다른 장수들이 모두 나서서 설득한 뒤에야 아민은 전진하겠다는 고집을 꺾었다.

2월9일, 후금 측이 보낸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 호차 유해(劉海)가 강화도로 들어왔다. 후금군 지휘부는, 천계 연호를 포기하지 않는 조선 측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화친을 깨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2월10일, 인조는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했다. 두 사람 모두 심하 전역에서 투항했던 이후 9년 만의 귀환이었다. 상당수 신료들은 강홍립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인조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강홍립은 인조에게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9년 만에 전하를 뵈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후금 측의 내부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강화를 맺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유해는 본래 한인(漢人)으로 후금으로 귀순한 인물이었다. 후금 측이 그를 사신으로 보낸 것은, 조선이 한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상황을 염두에 둔 조처였다. 실제로 유해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과거 명의 칙사들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다. 그는 ‘조선이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종사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어 가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화친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조정은 원창부령(原昌副令) 구(玖)를 원창군(原昌君)으로 삼아 그를 왕제(王弟)라고 칭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보내기로 했다. 일종의 볼모였다.2월15일에는 목면 1만 5000 필, 면주(綿紬) 200 필, 백저포(白苧布) 250 필 등을 후금군 진영에 보냈다. 일종의 세폐(歲幣)였다. 원창군을 파견하고 세폐를 보냄으로써 화친을 위한 기본 토대는 마련되었다.

인조, 맹세 의식에 태연

조선과 후금의 화의 과정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화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맹세(盟誓)하는 문제였다.

후금 측은 국왕과 후금 사신이 동참한 가운데 흰말(白馬)과 검은 소(黑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자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그것을 비루하게 여겨 거부하려 했다. 언관(言官)을 비롯한 상당수 신료들은 ‘존엄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임금이 개돼지와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후금 측은 완강했다. 아민은, 맹세를 기피하는 것은 겉으로만 화친하려는 것으로 끝내 거부한다면 다시 싸워 승부를 가리자고 협박했다.‘청실록’이나 ‘만문노당(滿文老)’을 보면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킬 때마다 희생을 잡아 회맹(會盟)하는 장면이 나오거니와 만주족의 입장에서 맹세는 서로의 신의(信義)를 담보하는 의식이었다.

신료들과는 달리 인조는 맹세 의식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맹세는 대의와는 무관하다. 두 마리 가축을 아끼려다가 위망(危亡)을 초래할 수는 없다.”며 맹세와 관련된 책임은 자신이 모두 지겠다고 나섰다.

3월8일, 인조는 대청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는 예를 몸소 거행했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이 각각 동쪽과 서쪽 계단에 도열하여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인조가 예를 마치고 행궁으로 돌아가자 만주인들이 흰말과 검은 소를 잡아 피와 골을 그릇에 담았다. 조선 신료들과 호차들은 새로 만든 서단(誓壇)에 서서 맹세문을 낭독했다.‘조선이 향후 후금을 적대시하여 나쁜 마음을 품으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되고, 후금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역시 피와 골이 나와 하늘 아래서 죽게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묘호란이 화친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을 비롯한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잠시 서진(西進)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묘호란 이모저모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대개 화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斥和)파들도 큰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론이 무서워 자기 입으로 화의를 말하지 못했는데 유독 최명길(崔鳴吉)만이 주저하지 않고 화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화의 후에도 전투가 벌어지다

1627년 3월3일, 화의를 맺은 사실을 하늘에 고하고 그것을 준수겠다는 맹세 의식을 치름으로써 정묘호란은 일단 끝났다.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어렵사리 전쟁을 끝내게 되었지만 인조와 신료들은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오랑캐’에게 세폐를 제공하고 화의를 맺은 것도 그랬지만 적이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변변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화의가 성립된 직후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적이 철수할 때 이상한 행동을 하면 지방 지휘관들에게 기회를 보아 공격하라.’고 지시할 것을 요청했다.

후금군은 예상대로 곱게 물러가지 않았다. 그들은 철수하는 길에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3월13일에 날아든 보고에 따르면 후금군의 약탈 때문에 평산, 서흥, 봉산, 해주, 문화 등 황해도의 여러 읍들이 텅 비었다고 했다.3월9일 조정은 선전관을 후금군 진영에 보내 약탈을 중지하라고 촉구하는 한편, 강홍립에게도 서신을 보내 후금군 지휘관들을 설득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서북 지방의 조선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철수로 주변에 매복했다가 후금군을 습격하여 병사들을 살해하거나 마필(馬匹) 등을 빼앗는 소규모 유격전을 도처에서 벌였다. 평안도 순안에서는 삭주부사 이명길(李明吉), 평양판관 권이길(權 吉 ), 좌척후장 정지한(鄭之罕)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운산에서는 우후(虞侯) 이직(李 )이 경상도 포수 등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후금군 1000명을 야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금군에 연행되고 있던 포로들이 탈출하고 가축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선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후금군 지휘부 역시 조선 조정에 서신을 보내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귀국의 기마병들이 곳곳에서 노략질과 살육을 일삼기 때문에 촌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수하려고 일어선 것”이라고 응수했다.3월17일 총사령관 아민이 다시 서신을 보내왔다. 그는 ‘서울을 점령하여 팔도를 다 차지할 수 있었고, 조공을 요구할 수도 있었는데 조선을 위해 자제했다.’며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청천강 이북 지역을 반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조선과 후금의 화의는 체결 직후부터 이렇게 삐걱거렸다. 하지만 평안도 지역의 전투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의병들이 있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의병

정묘호란 시기에도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의병들이 일어난 지역과 활동의 성격이 임진왜란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선 팔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정묘호란 당시 의병 활동의 중심지는 주로 양호(兩湖) 지방과 평안도였다.

인조는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인 1627년 1월19일,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을 각각 경상좌도 호소사(號召使)와 경상우도 호소사로, 전 호군(護軍) 김장생(金長生)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하여 그들에게 의병을 모집하여 근왕하라고 지시했다.

김장생(1548∼1631)은 당시 여든 살의 고령으로 인조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다. 서인들 학통(學統)의 정점에 있던 이이(李珥)의 수제자인 데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반정 주체들에게 전체적인 시정의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 김장생이었다. 그는 1월23일 향리 연산에 의병 본부를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그의 호소에 호응하여 연산의 이복길(李復吉), 니성의 윤전(尹 ), 회덕의 송국택(宋國澤), 전주의 송흥주(宋興周), 보성의 안방준(安邦俊), 광주의 고종후(高從厚) 등이 병력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김장생은 호남의 의병들을 전주로 모이도록 한 뒤, 자신도 호서의 의병들을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당시 전주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하했던 소현 세자 일행이 머물 곳이기 때문이었다. 김장생 휘하의 의병은 이후 소현 세자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금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분조의 신료들은 소현 세자를 모시고 영남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분조를 옮긴다는 소식에 의병 진영은 동요했다. 그러자 김장생은 분조 신료 가운데 최고위 인물인 이원익을 만나 이동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전주를 굳게 지키면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후금군과 직접 전투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김장생의 의병 활동은 인조정권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경상도에서는 정묘호란 시기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인조정권을 바라보는 지역 민심과 관련이 있었다. 경상우도 지역이 광해군대 집권세력의 정치적 근거지였던 것을 고려하면,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정권을 위해 지역의 사대부들이 궐기하는 것은 정서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김장생이 궐기를 호소했던 충청도 지역의 민심도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김장생의 회고에 따르면, 청주 등지에서는 익명서 등을 통해 사족들에게 “의병 활동에 호응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을 정도였다.

평안도의 의병

조정으로부터 종용을 받은 양호 지역 의병과는 달리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 의병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적의 침입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데다, 조정이 사실상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해 버린 상황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에 정봉수(鄭鳳壽·1585∼1668)가 있었다. 그는 철산(鐵山) 출신으로 본래 사족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용천 용골산성(龍骨山城) 전투에서의 빛나는 활약 때문이다.

후금군이 의주를 함락시킨 직후 용천부사였던 이희건(李希建)은 휘하 병력 500명과 용천 백성들을 용골산성으로 이주시켜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가 후금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유격전을 꾀하려 나갔다가 전사되자 그의 부하 장사준(張士俊)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후금군에게 투항해 버렸다. 후금군 지휘부는 그를 용천부사에 임명했고, 그는 용골산성을 나가 백성들을 선동하여 후금군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바로 그 무렵 정봉수가 용골산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은 백성들을 효유하는 한편 인근의 용천, 의주, 철산 출신 피난민들을 불러들여 약 4000명의 병력을 모았다.1월16일 장사준이 후금군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라고 협박했다. 정봉수는 성 밖에 미리 매복시켜 둔 의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장사준을 참수했다. 장사준을 처단하여 사기가 오른 의병들은 곧이어 벌어진 전투에서도 후금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화의가 이루어진 뒤인 3월17일, 후금군의 대병력이 다시 공격해 왔다. 아침 7시경부터 10시간 이상에 걸쳐 모두 5차례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 정봉수 휘하의 의병들은 활과 조총, 돌 등으로 일제히 공격하여 적 기병 수백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물러났던 후금군은 4월13일에도 청북 지역의 병력을 끌어 모아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용골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의주로 철수했다.

용골산성 싸움은 정묘호란 시기 조선군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조정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고립된 산성에서 처절한 사투 끝에 이뤄낸 승리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것이었다.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오는 백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다.’고 했다. 정봉수는 죽어 가고 있는 평안도 백성들을 살릴 진휼(賑恤) 대책을 속히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북 백성들의 비극

정묘호란 시기 평안도와 황해도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조정에서 버림받은 채 후금군의 칼날 앞에 가장 먼저 노출되었던 그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후금군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해에 있는 섬으로 들어갔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섬으로 들어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갑자기 들어간 섬 안에 식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었다. 후금군을 겨우 피했지만 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가 맺어져 전쟁은 끝났지만 서북 백성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고을을 가든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로 넘쳐났다.‘황해도의 마을들은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고, 평양성 안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압록강 부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처참했다. 후금군에 끌려가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후금군은, 투신을 막으려고 포로들을 결박하고 배에다 울타리를 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압록강이 시체로 뒤덮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초기, 평안도 백성들 가운데는 후금군의 앞잡이가 되어 모문룡 휘하의 명군(모병:毛兵)을 공격하는데 가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난이 일어나기 이전 모병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민폐 때문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강화가 이루어지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모병들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곽산, 구성, 삭주, 선천, 창성, 철산, 의주 등 모병의 주둔지 부근에 살고 있던 무고한 양민들까지 모병들에 살해되었다. 정묘호란 직후 모병들의 살육과 약탈은 극에 이르렀다.1627년 4월19일 무렵, 모문룡의 부하 모유후(毛有厚)는 안주에 정박해 있던 조선 선박 3척을 나포했다. 조선 피란민들이 타고 있는 배들이었다. 모유후는 배들을 기습하여 건장한 남자들과 노약자들은 모두 살해하고 여자들과 화물만을 남겨 끌고 갔다. 중군(中軍) 진계성(陳繼盛)이란 자는 조선 조정이 황해도 장연의 선박들을 쇄환하려는데 불만을 품고 조선인 역관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귀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서북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 체계와 공권력이 허물어진 상황에서 모병들은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정묘호란 중의 모문룡

후금의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공격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틈을 이용하여 청북(淸北) 지역 주민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정묘호란 당시 평안도 지역의 조선 의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용골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던 중군 이립(李)과 품관 장희범(張希範)은 자신들이 벤 후금군의 수급(首級-머리)을 모문룡에게 가져다 바쳤다. 용천(龍川)의 군관 김여의(金汝義)는 수급뿐 아니라 후금군에서 노획한 말을 바쳤다. 모문룡은 그들에게 은이나 식량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적과 싸워 군공을 세워도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지 못하던 서북 지역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이 상으로 주는 식량 등이 아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문룡에게 수급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인의 머리를 후금군의 것으로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그렇게 얻은 수급을, 마치 자신이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명 조정에 군공으로 보고했다. 청북 지역에 대한 조선 조정의 통제력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조선 조정은 강화가 성립된 후 모문룡에게 문안사(問安使)를 보냈다.1627년 4월27일, 문안사 신달도(申達道)는 모문룡을 면담했다. 신달도가 “수로와 육로가 모두 막혀 이제야 노야(老爺)를 찾아 뵙게 되었다.”고 공손히 안부의 인사를 전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신달도가 가져간 자문(咨文)의 내용이었다. 자문 속에는 ‘귀하의 진영에서 조선을 돕기 위해 한 무리의 군대도 동원하지 않아 섭섭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문을 읽은 뒤 모문룡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는 ‘조선이 후금군을 끌어들여 명군을 도살했고,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후금군이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고의적으로 그들을 방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과 강화를 체결한 것은 명의 은혜를 배신한 ‘패륜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신달도가 ‘강화를 체결한 것은 조선의 본심이 아니며 적을 기미(羈-어르고 달래는 것)하기 위한 목적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모문룡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백성들을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부하들을 단속해 달라.’는 신달도의 요청도 묵살했다.‘조선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보복한 것’이라며 입을 막았다.

모문룡에 미곡 5만석·은 10만냥 하사

4월28일, 정묘호란의 전말을 명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북경으로 가고 있던 주문사(奏聞使) 일행이 가도에 도착했다. 주문사 일행은 모문룡에게 면담을 신청했지만,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모문룡은 부하들을 시켜 조선의 주문사 일행이 명나라로 가는 것을 저지하도록 했다. 주문사 일행의 보고를 통해 정묘호란 중 자신의 행적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문룡은 아예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 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이 크게 패하여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정묘호란 직후 명의 천계제(天啓帝)는 모문룡의 사기 행각에 완전히 넘어갔다. 요동에 파견되었던 태감(太監) 유응곤(劉應坤)은 정묘호란과 모문룡에 관련된 보고서를 조정에 올렸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설’이었다.‘오랑캐 군사 6만이 조선을 공격했는데 모문룡이 기책(奇策)을 내어 제압하여 그들이 심양으로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모문룡은 다른 경로로 올린 보고서에서는 ‘자신이 세 차례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이 보전되었다.’고 허풍을 치는가 하면 ‘조선이 요민들이 끼치는 민폐에 불만을 품고 후금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무고까지 했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 평소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을 뇌물로 ‘구워 삶았던’ 모문룡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최고 지도자가 환관과 간신들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있던 명의 앞날이 어떤 모습일지 예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묘호란의 후유증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는 와중에 모병과 후금병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조선이 오랑캐와 화친했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후금은 ‘속히 모문룡을 잡아 죽이라.’고 채근했다. 민생 문제가 시급한 와중에 조정 신료들은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에 대해 시비와 논란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모문룡, 후금과 화친 빌미 자신의 발호 정당화

화의가 체결되면서 후금군 대부분은 철수를 시작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의주를 조선에 반환하지 않았다.

후금군은 의주 부근에 주둔하면서 모문룡을 체포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병을 포함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아예 농사를 지으면서 장기간 주둔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사자를 보내 완전히 철수하라고 종용했지만 후금 측은 듣지 않았다.“조선이 모문룡을 제거해 주면 철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모병들은 그들대로 청북 주변의 섬과 육지를 오가며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후금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조선 관아와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이 후금과 화친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발호를 정당화하려 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정묘호란 이후 청북은 훨씬 더 위험한 ‘화약고’가 되어 버렸다. 모병과 후금군 사이의 충돌은 다반사가 되었고, 그 와중에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몰렸다. 화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자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문제는 사자들이 서울과 심양을 오가면서 모병들이 득실대는 청북 지역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문룡은 후금 사자를 체포하여 ‘한 건 올리려’ 덤볐고, 후금 사절들은 그들대로 모병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1627년 5월, 심양을 왕래했던 이홍망(李弘望)의 보고 내용은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조선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 준다.“후금 군인이 한인 네 명과 조선인 네 명을 붙잡아 제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한인이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기에 잡아 왔으니 그대가 직접 한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더니 후금 군인이 말하기를 ‘조선은 한인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으니 도리상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한인을 죽였습니다.”

화친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다

종묘사직을 지키려고 화의를 맺긴 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오랑캐’ 후금을 ‘형’으로 받드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을 특히 힘들게 했던 것은 명의 반응이었다. 이미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 명 일각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1627년 5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가 귀국했던 김상헌(金尙憲)은 명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양곡을 원조했던 사실이 있다. 조선이 후금을 두려워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1627년 6월, 요동에서는 ‘조선이 오랑캐와 혼인을 맺었고, 오랑캐에게 땅을 내주고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은 명의 그 같은 태도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것 때문에 인조반정 당시 내세웠던 명분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스스로 찜찜해 하던 차였다.‘광해군이 후금과 화친했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외쳤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 명의 비난은 극심한 굴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미 척화파 윤황(尹煌)의 발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윤황은 강화도에 있을 때, 화의에 반대하면서 ‘오늘의 화친은 이름만 화친일 뿐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간신들에게 넘어가 더러운 오랑캐 사자를 접견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십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항복’이란 말에 격분한 인조는 ‘유식한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윤황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지시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논란은 재연되었다.7월1일, 생원 이흥발(李興渤) 등이 상소를 올렸다.‘명나라 장수가 우리 경내에서 피살되었음에도 전하는 오랑캐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예우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적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중국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인조는 ‘그대들이 가상하다. 나도 후회하고 있다.’며 물러섰다.

화의에 대한 자괴감과 명에 대한 미안함은 신료들에게 엉뚱한 자격지심을 촉발시켰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강홍립이 조선에 남도록 허용했다. 이어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었을 때 거느리던 사람들도 조선으로 송환했다.

화의가 이루어진 데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송환된 사람 가운데는 강홍립이 후금에서 재취(再娶)했던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한족 출신 장군 동기공( 奇功)의 딸이었다. 신료들은 그녀가 강홍립에게 가겠다고 하자 아우성을 쳤다.‘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섬긴 자에게 한족 여인을 다시 거느리게 해 주는 것은 참람하다.’는 것이 반대 명분이었다.

인조는 그녀를 강홍립에게 보내라고 했지만 신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그녀를 명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기공의 딸은 ‘조선에서 살 수 없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논란이 한창이던 7월27일 강홍립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의 죽음과 함께 논란은 종식되었다.

이인거, 창의중흥대장 칭하며 병권 요구

화의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던 1627년 9월, 모반 사건이 터졌다. 강원도 횡성(橫城)에 살던 유학(幼學) 이인거(李仁居)가 주도했던 사건이었다.

이인거는 9월26일, 원주목사 홍보와 강원감사 최현(崔晛)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조정에서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내가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가겠다. 전하께 주화파 간신 한 사람의 목을 베도록 청한 다음 서쪽으로 달려가 오랑캐를 토벌하겠다.’ 최현 등이 미심쩍게 여겨 반신반의하고 있던 9월29일, 이인거는 군사를 일으켜 횡성현의 무기고를 탈취한 뒤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했다.

10월1일, 이인거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인거는 ‘전하는 호란을 맞아 몸소 갑옷을 입고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랑캐 사신의 접대나 일삼고 눈치만 살폈으니 천지와 귀신이 공분(公憤)하고 나라가 견융(犬戎)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일갈한 뒤, 자신에게 병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조정은 경악했다. 급히 선전관을 보내 강원감사 최현을 잡아들이게 하는 한편, 서울과 경기도의 병력 수천을 동원하여 전진시켰다.

비변사는 궁성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위대장이 군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밖에서 숙직하도록 하고, 동대문에서 횡성에 이르는 길의 요소 요소마다 정탐병을 배치했다.

이인거가 거느렸던 병력은 고작 70명 남짓이었다. 그는 9월30일, 횡성읍에서 벌어진 가벼운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참혹했다. 심문 과정에서 모두 20명이 죽고 14명이 유배되었다. 진압 이후 인조는 모든 책임을 윤황에게 돌렸다. 윤황이 ‘항복’ 운운하는 바람에 이인거 등이 민심의 불만을 틈타 일을 저질렀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의 마음은 도무지 편치 않았다.

이인거의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후금과의 화의에 대한 싸늘한 민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직후 조선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수선하고 착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