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병자호란 ] (9)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

구름위 2013. 1. 2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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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Ⅰ
반정 직후 인조정권이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했던 것과 맞물려 후금에 대한 적개심도 높아져 갔다. 인조와 신료들은 후금과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가상하고 작전과 승패 향방을 자주 논의하곤 했다. 하지만 후금과의 군사적 대결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우선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은 정권 교체 이후 극히 불안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문제였다.

●불안한 민심

예나 지금이나 정권이 바뀌면 여러 가지 후유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더욱이 반정처럼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니라 무력을 동원한 쿠데타일 경우, 그 후유증은 결코 만만할 수 없었다.

▲ 인정전.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태종 연간에 창건된 이후 인조반정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적 소용돌이의 중심이 됐다. 이래 창덕궁을 그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동궐도(東闕圖·아래)에서도 오른쪽 상단에 인정전이 보인다.
인조정권은 대북파(大北派)를 비롯한 북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진입했던 직후부터 ‘살생부’에 올라 있던 인물들을 줄줄이 처형했다. 입궐하라는 명패(命牌)를 받고 가장 먼저 달려 왔던 병조참판 박정길(朴鼎吉)이 최초로 참수되었다. 이윽고 광해군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32명의 관인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죽음을 겨우 면한 인사들도 대부분 멀리 유배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쫓겨났다. 복주된 자들의 ‘적산(賊産)’은 몰수되었다. 북인들은 이제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도성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죽음을 당하거나 관직을 잃은 자들뿐 아니라 하루아침에 실직하게 된 모리배들도 적지 않았다.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높아갔다. 살벌하고 뒤숭숭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날뛰는 자들이 출현했다. 무뢰배들 가운데 ‘인조 호위’를 핑계로 몰려 다니면서 재물 약탈에 재미를 붙이는 자들이 횡행했다. 유생들 가운데는 반정공신들의 종사관(從事官)이란 직함을 갖고 설치는 자들이 있었다. 바뀐 현실 속에서 상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은 민심 수습을 꾀하는 한편 인조에 대한 호위를 강화했다. 특히 이귀의 노심초사가 컸다. 그는 무엇보다 ‘반혁명(反革命)’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종실(宗室)들의 동향을 주시했다. 인조에게 흥안군(興安君)을 잘 감시하라고 강조하고, 능원군(綾原君)의 동향도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흥안군은 인조의 숙부이고, 능원군은 동생이었다.1623년 7월29일, 우려했던 ‘반혁명’의 움직임이 현실로 나타났다. 전 현령 유응형(柳應泂)이 역모가 일어났다고 고변(告變)했다. 관련자의 진술 가운데 ‘지금 반정한 사람들은 천명(天命)이 돌아간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했다. 그런데 금상(今上)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은 옳지 않으며, 조정의 사대부들이 하는 행위도 지난날과 다름이 없다. 우리들이 다시 거사하려 하는데, 성공하지 못해도 사육신(死六臣)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란 내용이 나왔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되돌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8월25일에도,10월1일에도 고변이 터졌다.10월1일의 공초에서는 ‘지금 하는 짓은 광해군 때보다 더 심하고, 인사가 불공평하고 부역이 무거워 원망이 자자하다.’라는 진술이 나왔다.

●‘정권 안보’를 위한 노심초사

불과 석 달 사이에 세 번이나 고변이 발생하자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경악했다.‘정권 안보’에 비상이 걸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기찰(譏察)을 강화했다. 기찰이란 ‘반혁명 세력’을 색출하려는 목적으로 감시와 사찰을 벌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사찰 리스트’에 올랐다. 광해군때 벼슬에 있었다가 쫓겨난 인물들이 일차적인 대상이었다. 반정에 동조했던 남인(南人)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찰의 방식이 문제였다. 반정공신들은, 의심되는 인물에게 자기 휘하나 심복을 접근시켰다. 심복들은 ‘사찰 대상자’에게 반정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거나 스스로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먼저 고백한다.‘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대상자가 동조하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그를 잡아다가 족치는 방식이었다. 한마디로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기찰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불신 풍조가 심해졌다.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무장들은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을 사렸다. 훈련을 목적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려 해도 반정공신들이 보낸 밀정들의 감시를 의식해야만 했다. 자연히 군사 훈련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반정공신들은 휘하에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반정이 성공한 뒤에도 사병을 해산시키지 않았다. 민심이 불안하기 때문에 인조에 대한 호위(護衛)를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런데 사병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군관(軍官)들의 폐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개인적인 집사(執事)나 마찬가지였다. 호위를 명분으로, 반정공신들의 위세를 빌려 백성들에 대한 침학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지급하는 급료는 국고에서 충당되고 있었다.

남인들은, 횡행하는 기찰과 군관들의 폐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당장 기찰을 중지하고, 군관들을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반정공신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발하는 신료들에게 ‘반혁명 분자’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어렵게 잡은 정권이 또 다른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괄이란 인물

잘 알려진 것처럼 인조정권은 1624년 이괄의 반란 때문에 전복될 뻔했다. 겨우 진압되긴 했지만 이괄의 반란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인조는 공주(公州)까지 쫓겨가는 수모를 겪었다. 반정에 참가하여 광해군 정권을 뒤엎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공신’ 이괄이 ‘반란군의 수괴(首魁)’로 변신하게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반정을 성공시키던 당일뿐 아니라 성공했던 직후, 이괄은 인조에게 가장 믿음직한 무장이었다. 이괄 또한 인조에게 후금군을 방어하는 대책을 아뢰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정권 보위에 나섰다.

인조는 이괄을 서북 변방으로 보내 후금 방어를 맡기려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반대했다. 그는 ‘이괄을 서울에 남겨 의지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괄에게 호위를 맡기자는 것이었다. 이괄은 1623년 5월,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포도대장 이괄은 5월27일, 군관들을 이끌고 전 부사(府使) 박진장(朴晋章)의 집에 난입했다. 박진장을 ‘반혁명 분자’로 의심하여 기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괄의 군관들은 박진장을 끌고 나오면서 그의 노모까지 구타하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했다. 적어도 1623년 5월까지 이괄은 인조 정권을 지키기 위한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변방의 정세가 수상해지자 인조는 8월16일, 이괄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서변(西邊)으로 내려가게 했다. 인조가 송별을 위해 그를 접견했을 때, 이괄의 태도는 태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인조에게 ‘신의 재주가 없는 것을 아시면서 변방의 중임을 맡기시니 은혜를 갚으려고 할 따름’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적이 쳐들어 올 경우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의 휘하에는 1만 5000의 병력이 주어졌다.

녹훈(錄勳)이 문제였다. 이괄이 임지로 떠난 지 세 달 여가 지난 윤 10월18일, 인조는 김류와 이귀를 불러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논의했다. 정사공신(靖社功臣) 53명을 선정했다.

1등 공신이 10명,2등이 15명,3등이 28명이었다. 김류와 이귀 등은 1등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공신 가운데 첫머리에 놓여졌다.

임지에서 소식을 접한 이괄은 불만스러웠다. 더욱이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을 옹호했던 이귀가 ‘이괄을 속히 잡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소식도 날아들었다.

이윽고 1624년 1월17일, 이괄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금부도사 일행을 살해하고 병력을 일으켰다. 인조정권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당일, 대장 김류는 미적거렸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경에 모이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고, 그가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그 때 군사들을 다잡아 대오를 안정시킨 사람이 이괄이었다. 반정 성공 직후 ‘이괄이야말로 병조판서 감’이라는 칭송이 있었지만 병조판서는커녕 궁벽진 변방으로 발령이 났다. 이등공신으로 녹훈하여 불만을 돋우더니 ‘역모를 꾀하고 있으니 잡아들여야 한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이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던 것이다.

▲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 가 머물렀던 충남 공주 공산성(公山城).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이괄군의 승승장구

자신을 잡아가려고 금부도사가 영변(寧邊)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이괄은 구성(龜城)에 있던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을 시켜 자산(慈山)으로 출격하게 했다.

이윽고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당도하자 그들을 난자한 뒤 불 속에 집어 던졌다. 이어 자신도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괄은 안주를 우회했는데, 그곳에는 상관인 도원수 장만(張晩)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산에서 한명련의 부대와 합세했다. 당시 삼남에서 선발된 병력과 평안도 군병의 대부분이 이괄의 휘하에 있었다.1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안주의 장만은 허를 찔린 셈이 되었다. 반란군을 정면에서 막지 못하고 뒤에서 추격해야 하는 형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란군은 1월28일 상원(祥原)을 지나 2월1일에는 수안(遂安)으로 접어들었다. 황주(黃州)의 신교(新橋)에 이르렀을 때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이 이끄는 진압군이 막아섰다. 두 장수가 역순(逆順)의 도리를 내세워 반란군을 선무하자 이괄 진영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선봉을 맡은 항왜(降倭)들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하자 진압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항왜란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귀순했던 일본군과 그 후예들을 말한다. 검술이 뛰어나고 조총을 잘 다루는 데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용맹한 자들이었다. 이괄 휘하에는 수백명의 항왜가 있었는데 그들이 선봉을 맡음으로써 반란군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당황했다. 내응을 우려하여 서울에 남아 있던 이괄의 인척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2월6일에는 이괄의 장인 이방좌(李邦佐)를 참수했다. 이방좌는 이괄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사위의 올해 운이 한 번 외치면 만인이 응답하는 형상이라 자신도 부원군(府院君)이 될 것’이라 자랑했다고 한다.

관군은 평산(平山)의 마탄(馬灘)이란 곳에서 다시 막아섰지만 또 패하고 말았다. 방어사 이중로(李重老)가 전사하고 병사들은 대부분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이괄군은 이제 임진강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仁祖, 파천길에 오르다

마탄의 패전 소식이 날아들었던 2월7일, 인조는 밤중에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대사간 정엽(鄭曄)이 서울을 버리고 파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좌우의 신료들은 서로 돌아만 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들은 세자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윽고 장유(張維)는 공주(公州)로 가자고 주장했다. 공산성(公山城)이 있는 데다 금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반정 성공 이후 맞이한 최대의 위기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에게 훈련도감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신경진은 미적거리면서 명을 따르지 않았다. 당연히 군율로 다스려야 할 사안이었지만 인조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인척인 데다 반정공신이었기 때문이다.

2월 8일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괄은 관군이 개성에서 저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왜 수십명을 앞세워 개성을 우회하여 파주로 진격하게 했다. 파주에서 임진강의 방어를 맡고 있던 목사 박효립(朴孝立)은 이괄의 회유에 넘어갔고 병사들은 달아나버렸다.

밤에 인조는 궁궐을 나섰다. 숭례문에 이르렀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하인을 시켜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한강변 나루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었다. 강 건너편에 몇 척의 배가 있었지만 사공을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무사 우상중(禹尙中)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헤엄쳐 건너가서 사공 한 사람을 베고 배를 저어 건너왔다. 곧 이어 전라병사 이경직(李景稷)도 배 한 척을 구해왔다. 배가 도착하자 수행원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임금의 존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경직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비로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인조가 배에 올랐지만 배는 한참 동안 강물 가운데 떠 있어야 했다. 인조를 경호할 군사들이 강 건너에 상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겨울 밤의 습기가 몹시 차가웠지만 황망한 와중에 장막도 준비하지 못했다. 인조가 탄 배가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 도성 쪽에서는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난민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괄, 서울에 입성하다

인조의 피난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반란군이 어가를 쫓아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2월9일 아침, 인조 일행은 양재역(良才驛)에 도착했다. 유생 김이(金怡) 등이 콩죽을 쑤어 갖고 나와 인조를 마중했다. 김이는 이 때의 공으로 뒷날 의금부 도사(都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조의 위기의식이 그만큼 컸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2월9일 한밤중에야 인조 일행은 수원에 도착했다. 위기 상황에 몰리자 대신들은 응급책을 내놓았다. 이정구(李廷龜)와 오윤겸(吳允謙)은 항왜들의 공격을 도무지 막아낼 수 없으니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왜인 1000명을 빌려다가 적을 치자고 했다.

평소 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원한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인조도 동의했다. 즉석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이 있는 이경직을 청왜사(請倭使)로 임명했다.

이경직은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군을 요청하려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알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보나마나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또 일본군이 대거 몰려올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인조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했다. 위기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해프닝이었다.

2월11일 피난 행렬은 직산(稷山)을 거쳐 천안에 도착했다. 천안까지 밀려왔음에도 도원수 장만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진압 소식이나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경기도 일원에서는 명령도 통하지 않았다. 호남에서 강화도로 이어지는 조운로(漕運路)를 탈취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터져나왔다. 인조는 급히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이괄이 지방관을 임명하여 파견할지도 모르니 그들을 베어버리고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2월10일 이괄의 반란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했다.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괄은 경복궁의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윽고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흥안군은 일찍이 이괄로부터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인조를 수행하다가 중간에 도주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귀가 반정 성공 직후부터 ‘흥안군이 수상하니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이괄이 승승장구 끝에 도성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수원부사 이흥립(李興立)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한번 배신하면 계속 배신한다고 했던가?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관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 다시 이괄에게 붙은 것이다. 이괄은 지인들을 끌어모아 조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반정 이후 세력을 잃거나 소외되었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이 대목까지는 일단 이괄의 거사가 성공한 셈이었다. 인조 일행은 이미 서울을 버리고 떠났고, 진압군의 존재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624년 2월, 조선에서는 또 다른 정권교체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순간이었다.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하여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의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품이 되었다. 흔들리고 있는 내정을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우선 땅에 떨어진 인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추된 권위, 동요하는 민심

▲ 겸재 정선이 그린 ‘안현석봉’(1740년). 간송미술관 소장.
인조는 서울로 돌아온 직후 무신 김응창(金應昌)과 임박(任)을 처형했다. 당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이괄이 입성했을 때 각각 좌우변 순장(巡將)이 되어 이괄을 경호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무신만이 아니었다. 문신들 가운데도 이괄의 난을 맞아 심각하게 동요했던 자들이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이안눌(李安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괄의 난 당시 공조참의 김덕함(金德)과 함께 가도( 島)에 파견되어 있었다. 김덕함이 모문룡에게 원군을 청해다가 이괄을 토벌하자고 했을 때 이안눌은 동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인조가 저자도(楮子島)로 피난 가고 이괄이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오자 이안눌은 거침없이 인조에 대해 불경한 말을 내뱉었다.‘자전(慈殿-인목대비를 지칭)을 모셨다면 또한 우리 임금의 아들일 것이다.’,‘저자도에서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등등 인조는 이미 끝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안눌은 그 밖에도 ‘반정 이후 개혁이 지지부진했고 공신들의 운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동요했던 것은 백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현 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기미를 보이자 도성 문을 닫아걸어 반란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이괄이 입성했을 때 도성 백성 대부분이 이괄에게 붙었기 때문에 법으로 논하면 죽여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은 백성들의 ‘불충(不忠)’을 불문에 부치자고 했다. 그는 “나라의 형세가 당당할 때는 조정에 문제가 있어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못하지만, 쇠약한 때에는 한 가지 잘못만 있어도 원망이 일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당시를,‘늙고 병들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급박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말자고 했다. 정경세(鄭經世)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반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반정 직후부터 조정이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민심은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난이 진압된 지 한달 여가 지난 1624년 3월 중순,“장차 큰 변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퍼지는 와중에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밤에 여염을 돌아다니며 피란하라고 소리치며 선동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조정이 민심 수습을 위해 ‘과거를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이괄 치하에서 부역(附逆)했던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은 좀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정권 안보´에 올인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우선 인조에 대한 경호를 강화했다.1624년 3월, 비변사(備邊司)는 ‘숙위(宿衛)하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며 외방의 출신들 가운데 재주 있고 용맹한 자들을 뽑아 경호 병력의 숫자를 늘리자고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반정공신 네 사람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의 숫자를 400명에서 1000명으로 늘리자고 했다.

그것은 당시의 민심과는 거리가 먼 조처였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군관의 수를 늘리면 정권의 안보가 확보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료를 국고에서 지급 받음에도 불구하고 군관은 사실상 반정공신들의 사병(私兵)이었다. 언필칭 ‘인조 호위’를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공신들의 집안 일을 건사하는 집사였기 때문이다. 유사시에도 공신 집안을 호위하고 재물을 운반하는 등 사사로이 부려졌다. 실제로 반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대가를 호위했던 군관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또 군관을 거느리고 있던 신경진은, 나아가서 적을 막으라는 인조의 명령도 무시했다. 이제 그런 군관의 숫자를 더 늘리자고 하는 판이었다. 이괄의 반란으로 혼쭐이 난 인조는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더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명령을 어긴 신경진을 불문에 부치고, 군관의 수를 늘리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반정공신들의 권세는 더 높아졌고, 이런 저런 비리가 터져 나왔다. 자연히 ‘광해군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겠다.’는 구호는 힘을 잃어 갔다.

정권이 바뀌면 무언가 과거와는 확 달라진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인조정권도 광해군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재생청(裁省廳)이란 기구를 설치하고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개혁’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다.‘정권 안보’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황에서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조정권의 실세였던 김류와 이귀가 박승종 부자의 저택을 불하(拂下) 받은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정공신들의 탐욕스러운 처신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다만 주인이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냉소가 번져갔다.1625년(인조3) 6월, 도성에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아, 너희 훈신들이여(嗟爾勳臣)

잘난 척하지 말라(毋庸自誇)

그들의 집에 살고(爰處其室)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乃占其田)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또 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又行其事)

너희들과 그들이(爾與其人)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顧何異哉)

반란의 대외적 여파

이괄의 반란은 나라 밖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압박해오자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 자문(咨文)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모문룡은 조선의 보고를 접한 뒤, 유격(游擊) 왕보(王輔)에게 선사포(宣沙浦)에서 군사를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왕보는 자신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진격한다.’고 큰소리쳤다. 조정은 다급한 마음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당시 모문룡의 접반사(接伴使)였던 윤의립(尹毅立)은 신중했다. 그는 모문룡의 군대가 육지로 나온 이후의 상황을 우려했다. 왕보의 말대로 1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올 경우, 그들에게 군량을 지급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윤의립은 왕보를 만나 ‘이 적은 얼마 안 가서 주벌될 것이니 천병(天兵)을 역적 토벌에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며 원병 요청을 취소했다.

결과적으로 윤의립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란이 곧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모문룡의 병력이 나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 대한 접대와 그들이 자행하는 민폐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을 것은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후금을 군사적으로 자극하여 또 다른 사단이 발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서술하겠지만, 반란 종식 이후 모문룡과 그의 군대가 보여주었던 행태를 보면 윤의립의 ‘결단‘이 얼마나 빛나는 ‘혜안’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반란의 여파는 후금에도 미쳤다.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조선을 탈출하여 후금으로 투항했던 것이다. 한윤은, 당시 후금에 억류되어 있던 강홍립(姜弘立)을 만나 “강씨 일족이 다 죽었다.”고 무고했다. 강홍립은 격앙되었다.‘새로 들어선 인조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정보도 후금 측으로 건네졌다. 한윤의 투항은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괄의 반란을 계기로 조선은 명과 후금의 대결 구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