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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육군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창설되었던 부대로는 제1, 2, 3, 5, 6, 7, 8, 수도경비사령부(전쟁 도중 수도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의 8개 사단 급 부대와 육군본부 직할의 제17연대, 기갑연대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국내 치안 유지에나 적합한 단출한 규모였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창설 당시의 모습
그런데 창군 당시의 군사(軍史)를 살펴보면 8개 사단을 구성하였던 예하연대 및 2개 독립연대들은 수시로 예배속을 변경하고는 하였다. 아래의 표는 사단 창설 시와 한국전쟁 종전시의 각 부대의 예하연대가 변경된 내용이다. 이런 이유는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창군 당시의 여러 사정과 곧이어 벌어진 전쟁으로 인하여 부대의 해체 및 재 창설 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창군 8개 사단의 전쟁 전후 예하연대 예배속 상황표
때문에 현재도 국군의 간성(干城 ;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으로 그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보유하고 있는 창군 8개 사단의 역사와 예하에 속해 있는 연대의 역사가 반드시 일치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국군 최초로 창설 된 연대였던 제1연대는 상급소속부대가 제1여단, 제7여단, 제7사단을 거쳐서 현재는 수도기계화사단의 예하부대(수도사단이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면서 현재 제1여단)로 있다.
세계적인 기갑부대인 수도기계화사단의 기동훈련
그런데 자료를 살펴보면 숫자가 아닌 단대호(單隊號 ; 단위 부대마다 소속, 규모, 병과 따위를 정하여 붙인 번호.)를 가진 연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기갑연대"인데 지금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전통의 부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부대는 오늘날 세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국군 기갑부대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1948년 "독립수색단"으로 창설된 후 수차례의 예배속 과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월남전쟁까지 참전한 기갑연대의 역사는 바로 국군 기갑사 그 자체라 할 수는데 다음은 기갑연대의 예속 및 참전기록이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서빙고에서 독립수색단으로 창설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기계화사단) 창설시 예속
1949년 11월 15일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연대로 예속 전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참전
1950년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 시 각 혼성사단에 분산 예속
1950년 8월 28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어 종전 시까지 주로 동부전선에서 전투
1965년 10월 23일 수도사단 예속부대로 월남전 참전
1974년 이후 월남 철군 후 수도사단의 기계화사단 개편 시 기갑여단으로 승격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기계화사단) 창설시 예속
1949년 11월 15일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연대로 예속 전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참전
1950년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 시 각 혼성사단에 분산 예속
1950년 8월 28일 수도사단에 예속되어 종전 시까지 주로 동부전선에서 전투
1965년 10월 23일 수도사단 예속부대로 월남전 참전
1974년 이후 월남 철군 후 수도사단의 기계화사단 개편 시 기갑여단으로 승격
창군 직후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기갑연대를 지금과 평면으로 비교하기도 곤란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침의 선봉이었던 북한군 제105 탱크여단과도 비교되지 않는 극히 빈약한 장비를 보유한 상태로 시작한 부대였다. 기갑이라는 부대명칭과 달리 일부 대대만 경량의 장갑차를 보유한 한마디로 무늬만 기갑부대였는데 그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장갑대대 - 예하 3개 중대
기병대대 - 예하 2개 중대
도보대대 - 예하 2개 중대
기병대대 - 예하 2개 중대
도보대대 - 예하 2개 중대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비록 전쟁 초기에 수많은 손실을 입어 부대가 붕괴되다시피 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만, 기갑연대는 국군 기갑부대의 선구자로서 후배들에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용맹함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국군 기갑부대의 시초가 되는 기갑연대의 초기 모습과 전선에서 용감하게 적과 맞섰던 전투,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국군이 세계적 수준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게 되기까지의 간략한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항복한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진입한 미군의 M-8 장갑차
3개 중대로 구성된 장갑대대는 M-8 정찰 장갑차 27대, M-2/M-3 반궤도 차량 24대 그리고 20여대의 무장 짚(Jeep) 차를 보유하였다. 부대 명칭대로 기갑연대 예하의 장갑대대라 칭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창군 초기에 국군이 보유한 모든 기동 전투장비였다. 오늘날 국군의 기갑부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민망한 수준에서 국군의 기갑부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당시 사료를 보면 이들 장비가 혼재된 형태로 중대가 편성되지 않고 M-8 중대, M-2/M-3 중대 그리고 무장 짚 중대로 각각 개별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방임무가 아닌 정규전에서는 각 중대별로 분리되어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대대 전체가 작전에 투입되어야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M-8 중대조차도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다.
M-8 장갑차는 부득이한 사유로 소대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나눈 것이었다.
창군 초기 국군의 기간 통신망 역할을 담당한 SCR-506 무전기
이미 제2차대전을 통하여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효과적임은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장갑중대의 전력으로는 굳이 집단화고 뭐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다.
창군 초기 M-8 장갑차는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을 어필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M-8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였지만 건군 초기에 국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M-8과 비슷한 성능의 BA-64 정찰 장갑차 54대를 정찰 및 수색 용도로 운용하였지만 M-8이 전쟁 초기에 달려 나가 막으려 하였던 상대는 북한의 T-34 전차였다. 화력이나 장갑능력에서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M-8이 상대할 적수라면 BA-64 장갑차가 맞지만
T-34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동하여야 했다. (노획한 BA-64)
M-8 장갑차의 모습을 일부 확인 할 수 있는 M-20 장갑차 (사진-4.19 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용감했던 M-8 중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장갑대대의 주력은 M-8이었지만 그 보조전력으로 약간 수량의 반궤도 차량과 정찰용 무장 짚차도 운용하였다. M-8이 오늘날 주력전차(MBT ; Main Battel Tank) 역할을 하였다면 반궤도 차량은 병력수송장갑차(APC ; Armored Personnal Carrier), 무장 짚차는 기갑 수색대의 역할을 하였다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갑 부대를 전역한 예비역이나 현역 장병들이 들었다면 기가 찰 정도의 빈약한 장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국군 기갑 부대의 역사는 이렇듯 빈약하게 출발하였다.
현재 국군의 주력 병력수송장갑차인 K-200
그렇지만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이런 빈약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용감히 맞서 호국의 첨병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중에는 M-8 장갑차처럼 약간의 흔적을 국군 역사에 남기고 사라진 장비가 있는데 흔히 하프트랙(Half Track)으로 불리는 반궤도차량도 그렇다. 반궤도차량은 말 그대로 전륜은 바퀴, 후륜은 무한궤도를 장착한 차량인데 요즘은 보기 힘든 주행 장치다.
가장 유명한 반궤도차량인 독일의 하노마그 Sd.Kfz.251
이들 반궤도차량은 제2차대전 당시 기계화부대의 주요장비였다. 전차와 함께 진격하는 보병들을 신속 정확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오늘날 병력 수송 장갑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장갑차라기보다는 야지 주행 성능을 높인 트럭에 가깝다. 특히 미국의 반궤도차량이었던 M-2/M-3는 독일의 하노마그(Hanomag Sd.Kfz.251)에 비한다면 차량으로 정의해도 무방하다.
미군이 사용하던 M-2 반궤도차량
그런데 국군은 당시 보유한 M-2/M-3 반궤도차량을 반장갑차라 하였을 만큼 귀하게 여기고 M-8 못지 않은 장비로 취급하였다. 전차와 같은 중무장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아야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있는 수송용 장비를 우리는 최고의 전투 장비로 운용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반궤도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을 호위 할 기갑세력도 없었으니 이런 생각이 잘 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당시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국군의 M-3 반궤도차량 (사진-LIFE)
일종의 트럭을 우리는 장갑차로 취급하며 귀하게 여겼다.
기갑연대의 장갑대대에는 반장갑차 24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하지만 말만 장갑차지 장갑 능력과 화력이 빈약하였던 관계로 전쟁 전 여순사건 같은 후방작전 시 교통이 나빴던 오지에 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기갑연대가 보유했던 반궤도차량은 경북 청송에서 기갑연대가 북한군 12사단에 포위당하는 악조건에서도 적의 진격을 10일 이상 막으며 분투하던 도중 장열하게 산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1년 실미도사건 당시의 수도경비사령부 M-16 반궤도차량 (사진-조선일보)
M-2/M-3의 개량형인 M-16을 70년대 초반까지 운용하였다.
더불어 장갑대대에는 M1919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 20여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제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집차 등을 정찰 및 수색용도로 투입할 때 많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는데 정확도 등을 고려한다면 이동 중 사격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정차 중 사격이나 목표까지 이동 후 탈착하여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 짚차 중대원들의 시가 행진 모습
오늘날 미군이 운용하는 험비 고기동차량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되나 험비와 비교한다면 말도 안 되는 빈약한 장갑 및 기동능력의 열세가 보인다는 것을 추측 할 수 있다. 전쟁 전 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따르면 짚차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배후를 우회 포위하는 훈련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비정규전 같은 상황에서나 효과가 있었을 것 같고 전쟁 같은 전면전에서는 별다른 전과를 올리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무장 짚차
국군의 경우 긴급 편성 된 김포 지역 방어사령부의 최복수 중령이 김포 공항 탈환작전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짚차를 몰고 돌진하다 산화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전쟁 중에 무장 짚차 중대가 어떠한 활약을 보였는지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비록 빈약한 장비였지만 M-2 반궤도차량과 무장 짚차는 당시 기갑연대 주력부대인 장갑대대의 보조전력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맡은 바 임무 이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기갑연대 소속이었던 기병대대의 검열 모습
시가행진 중인 기병대대
오늘날 제1사단을 최고의 상승부대(常勝部隊)로 꼽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은 후퇴 시기에도 대부분의 편제와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노력은 영웅적이라 할만 했다.
1950년 7월초에 촬영된 기병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혼성 부대 중에는 기병대대도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다. 한강을 방패막이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후퇴 시에는 기병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병대대
특히 미군 전사에는 7월 초순 경북 구미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 2개 소대가 적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후 북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기병대가 더 이상 전장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진 당시의 모습인데 이후 기병대대는 국군 역사에서 사라진다
도보대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구성된 경무장 보병대대였는데 오늘날 수색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 송신소 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 당시 북한군 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 반도 도하 작전으로 국군의 배후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도보대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동 중 휴식을 취하는 국군 보병부대
약간의 M-8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도보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북한군 최강으로 평가되던 6사단과 혈전을 벌여 상상 외의 타격을 입힘으로써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김포 공항 탈환에 실패하며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은 자결을 하였다.
도보대대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군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비록 도보대대는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가장 먼저 산화한 부대가 되었지만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전쟁 초기 크나큰 아픔을 안겨 준 북한의 T-34
낙동강 방어전 당시에 투입된 미군의 M-26 전차
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M-36
그런데 이때 장비한 M-36은 85mm 포를 갖춘 북한군 T-34를 충분히 능가하는 90mm의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이른 바 오픈 탑(Open Top) 구조의 포탑을 가진 보병 화력지원용 구축전차(Tank destroyer)였다. 얼핏 모양은 전차에 가까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포로 볼 수 있는 장비여서 부족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다.
개방된 포탑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M-36은 전차라기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궤도차량을 장갑차로 취급하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 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 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에게 M-36은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M-36의 귀한 컬러사진
그런데 M-36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도병 이야기가 있다. 1952년 4월, 16~18세의 학생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 전차중대의 소년 전차병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소년들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관으로 복무시켜준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입대하였으나,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만 훈련을 받은 뒤 학도병 신분으로 곧바로 최전방 연천 지역에 투입되었다.
출동하는 소년 전차병 부대인 제57 전차중대의 M-36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제57 전차중대는 연천 지역에서 제1사단을 지원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 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오래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은 소년 전차병 참전 기념탑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당시 M-36은 주로 5대로 편성된 소대 급 단위로, 보병의 돌격 시 배후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을 뿐 공산군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본격 참전한 전차 부대의 주력으로 M-36은 그 용맹을 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 전차병들의 피눈물은 이제 새롭게 밝혀져 자랑스러운 국군 기갑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1954년 본격적인 중(重)전차인 M-4를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국군은 드디어 진정한 전차부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대대적으로 철군을 단행한 1957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으로부터 총388대의 셔먼 전차를 축차적으로 도입하게 되면서 국군은 본격적인 기갑부대 확장기에 들어선다.
국군이 장비한 최초의 전차인 M-4A3E (1957년 해병대 소속)
북한군 전차에 응어리진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전차의 보유와 확장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여 어렵게 마련한 기갑전력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군이 도입한 M-4 전차는 76mm 주포를 탑재한 M-4A3E형 이었는데 비록 북한의 T-34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평가는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전력이었다.
4.19혁명 당시 출동한 M-4 전차
기록에 따르면 'M-36 전차는 본격적인 전차로 보기 힘든 장비이므로 진정한 전차라고 할 수 있는 M-4 전차가 우리 기갑 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 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 의의가 컸다. 하지만 이정도 수량으로는 집중화된 독립적인 기갑부대를 구축하기 힘들었다. 전쟁 전에도 그랬지만 북한은 우리의 기갑전력을 능가하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미국의 지원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T-54/55 계열의 전차를 대량 도입하자 대응에 나서야 했다
전후 북한이 당대 최신예인 T-54/55 계열의 전차를 도입하여 그 전력을 급격히 확대하여 나가자 한국군도 더 이상 M-4로 대응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대체전력으로 1959년부터 M-47 전차를 총 463대 도입하여 60~70년대 국군 기갑세력의 중추로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도 전반적으로 열세였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기갑전력에 대응하고자 도입된 M-47
대량 생산되어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상당량이 공급되어진 M-47은 많은 탄약 적재량과 함께 입체식 거리측정기를 장착하여 주포의 명중도가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일선에서 오래동안 활약하였고 현재 일부는 해안포로 운용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바로 M-48 전차의 개발에 착수 하였을 만큼 M-47은 개발국인 미국에서도 그리 성능에 만족하지는 않았던 전차였다.
퇴역하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전시 중인 M-47
국군의 기갑전력이 본격적인 확장기로 접어 든 것은 월남전 때문이었다. 국군의 대규모 월남전 파병과 1971년 한국에 주둔하던 미 7사단의 철수로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우고자 1971~1975년 사이에 한미 협의에 의해 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M-48A2C 전차 400여대와 M-113 장갑차 400여대를 미국이 지원하였다. 이를 모태로 해서 본격적인 국군의 기갑부대가 육성될 수 있었다.
오래 동안 국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M-48 전차
이렇게 취득한 대규모의 M-48 전차와 M-113 장갑차를 발판으로 1973년 월남에서 철군 한 수도사단이 국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어지고 후속하여 제1기갑여단, 제2기갑여단이 창설됨으로써 기갑장비를 집중 운용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힘들게 구축한 기갑전력은 우리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대외 원조에 의존 한 것이었다.
인천항을 통해 도입되는 M-113 장갑차
1970년대 들어 더 이상 원조에 의존해서 자주국방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그동안 이룬 경제개발을 바탕으로 '우리 땅은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기치하에 자주국방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더불어 기갑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하였다. 국군 기갑사에 새로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M-48 전차 개조공장을 방문한 故 박정희 전대통령
강력하게 개조된 M-48A5K 전차는 상당수가 현재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최초의 국산전차인 K-1
이후 계속 된 양산으로 약 1,000여대의 K-1전차가 국군에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공급되었고 더불어 동 시기에 함께 개발에 성공한 국산 K-200 보병수송장갑차가 함께 제식화 됨으로써 1990년대 초부터 국군은 창군이래 계속된 대북 기갑전력의 열세를 질적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세계최강의 기갑세력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공지합동 훈련에 참가중인 기계화보병부대
하지만 국군 기갑부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K-1 전차를 개량한 120mm주포를 가진 K-1A1 전차를 개발하여 배치하였으며, 거기에다가 K-2 차세대전차와 K-21 보병전투장갑차를 개발하여 현재 대규모로 도입하기 전 단계이다. 비록 양산 직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어 생산 및 도입이 늦어지고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배치가 이루어 질 것으로 확신한다.
보다 강력하게 업그레이드 된 K-1A1 전차
이러한 전력 확충을 발판으로 현재 국군은 맹호부대를 필두로 결전, 불무리, 필승, 화랑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되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뚜기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진행 중에 있다. 그외 별도로 수개의 기갑여단이 공격의 첨병으로 그 임무를 다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각 보병사단마다 전차부대나 장갑차부대를 운용 할 정도로 고도로 기계화된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도하 시범을 보이는 신형 K-21 전투장갑차
차세대 전차인 K-2
하지만 기갑연대에서 시작된 전력이 어느 날 갑자기 뻥튀기처럼 갑자기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갑이라 부르기 민망하였던 미미한 전력으로 시작되었던 국군의 기갑부대가 오늘날 이렇게 막강한 전력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창군 초기와 전쟁 당시의 피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국전쟁 직전 '기갑연대'에서도 핵심전력은 국군 유일의 기계화장비 완비부대인 장갑대대였다.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인도한 장비를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였는데, 당시 국군의 모든 대대급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반증 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하다.
항복한 일본군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진입한 미군의 M-8 장갑차
3개 중대로 구성된 장갑대대는 M-8 정찰 장갑차 27대, M-2/M-3 반궤도 차량 24대 그리고 20여대의 무장 짚(Jeep) 차를 보유하였다. 부대 명칭대로 기갑연대 예하의 장갑대대라 칭하기에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이것이 창군 초기에 국군이 보유한 모든 기동 전투장비였다. 오늘날 국군의 기갑부대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민망한 수준에서 국군의 기갑부대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시가행진 중인 기갑연대 소속의 M-8 장갑차
당시 사료를 보면 이들 장비가 혼재된 형태로 중대가 편성되지 않고 M-8 중대, M-2/M-3 중대 그리고 무장 짚 중대로 각각 개별 편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방임무가 아닌 정규전에서는 각 중대별로 분리되어 작전을 펼치기 보다는 대대 전체가 작전에 투입되어야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력이라 할 수 있는 M-8 중대조차도 소대별로 나누어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하여 운용하였다.
M-8 장갑차는 부득이한 사유로 소대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M-8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여 남산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전방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의 8사단에 배속한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 통신소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귀중한 자산을 통신용 목적으로 뿔뿔이 나눈 것이었다.
창군 초기 국군의 기간 통신망 역할을 담당한 SCR-506 무전기
이미 제2차대전을 통하여 집단화된 기갑부대가 효과적임은 입증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장갑중대의 전력으로는 굳이 집단화고 뭐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M-8을 통신용으로만 운용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T-34 전차에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출동하였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망설일 수 없었다.
창군 초기 M-8 장갑차는 국민들에게 국군의 위용을 어필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M-8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경장갑차였지만 건군 초기에 국군이 유일하게 운용한 중장비여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M-8과 비슷한 성능의 BA-64 정찰 장갑차 54대를 정찰 및 수색 용도로 운용하였지만 M-8이 전쟁 초기에 달려 나가 막으려 하였던 상대는 북한의 T-34 전차였다. 화력이나 장갑능력에서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M-8이 상대할 적수라면 BA-64 장갑차가 맞지만
T-34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출동하여야 했다. (노획한 BA-64)
의정부축선을 방어하던 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한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시켰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적 전차의 무한궤도를 끊어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다.
M-8 장갑차의 모습을 일부 확인 할 수 있는 M-20 장갑차 (사진-4.19 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 전력에서 사라졌다. 4.19 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 장갑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용감했던 M-8 중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장갑대대의 주력은 M-8이었지만 그 보조전력으로 약간 수량의 반궤도 차량과 정찰용 무장 짚차도 운용하였다. M-8이 오늘날 주력전차(MBT ; Main Battel Tank) 역할을 하였다면 반궤도 차량은 병력수송장갑차(APC ; Armored Personnal Carrier), 무장 짚차는 기갑 수색대의 역할을 하였다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갑 부대를 전역한 예비역이나 현역 장병들이 들었다면 기가 찰 정도의 빈약한 장비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국군 기갑 부대의 역사는 이렇듯 빈약하게 출발하였다.
현재 국군의 주력 병력수송장갑차인 K-200
그렇지만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이런 빈약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용감히 맞서 호국의 첨병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다. 그중에는 M-8 장갑차처럼 약간의 흔적을 국군 역사에 남기고 사라진 장비가 있는데 흔히 하프트랙(Half Track)으로 불리는 반궤도차량도 그렇다. 반궤도차량은 말 그대로 전륜은 바퀴, 후륜은 무한궤도를 장착한 차량인데 요즘은 보기 힘든 주행 장치다.
가장 유명한 반궤도차량인 독일의 하노마그 Sd.Kfz.251
이들 반궤도차량은 제2차대전 당시 기계화부대의 주요장비였다. 전차와 함께 진격하는 보병들을 신속 정확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오늘날 병력 수송 장갑차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장갑차라기보다는 야지 주행 성능을 높인 트럭에 가깝다. 특히 미국의 반궤도차량이었던 M-2/M-3는 독일의 하노마그(Hanomag Sd.Kfz.251)에 비한다면 차량으로 정의해도 무방하다.
미군이 사용하던 M-2 반궤도차량
그런데 국군은 당시 보유한 M-2/M-3 반궤도차량을 반장갑차라 하였을 만큼 귀하게 여기고 M-8 못지 않은 장비로 취급하였다. 전차와 같은 중무장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아야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있는 수송용 장비를 우리는 최고의 전투 장비로 운용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반궤도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을 호위 할 기갑세력도 없었으니 이런 생각이 잘 못된 것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당시 우리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국군의 M-3 반궤도차량 (사진-LIFE)
일종의 트럭을 우리는 장갑차로 취급하며 귀하게 여겼다.
기갑연대의 장갑대대에는 반장갑차 24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하지만 말만 장갑차지 장갑 능력과 화력이 빈약하였던 관계로 전쟁 전 여순사건 같은 후방작전 시 교통이 나빴던 오지에 병력을 수송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기갑연대가 보유했던 반궤도차량은 경북 청송에서 기갑연대가 북한군 12사단에 포위당하는 악조건에서도 적의 진격을 10일 이상 막으며 분투하던 도중 장열하게 산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1년 실미도사건 당시의 수도경비사령부 M-16 반궤도차량 (사진-조선일보)
M-2/M-3의 개량형인 M-16을 70년대 초반까지 운용하였다.
더불어 장갑대대에는 M1919 기관총을 장착한 짚차 20여대로 구성된 중대가 있었다. 제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집차 등을 정찰 및 수색용도로 투입할 때 많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는데 정확도 등을 고려한다면 이동 중 사격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정차 중 사격이나 목표까지 이동 후 탈착하여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장 짚차 중대원들의 시가 행진 모습
오늘날 미군이 운용하는 험비 고기동차량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되나 험비와 비교한다면 말도 안 되는 빈약한 장갑 및 기동능력의 열세가 보인다는 것을 추측 할 수 있다. 전쟁 전 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따르면 짚차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적의 배후를 우회 포위하는 훈련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비정규전 같은 상황에서나 효과가 있었을 것 같고 전쟁 같은 전면전에서는 별다른 전과를 올리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순사태 당시에 출동한 무장 짚차
국군의 경우 긴급 편성 된 김포 지역 방어사령부의 최복수 중령이 김포 공항 탈환작전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짚차를 몰고 돌진하다 산화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전쟁 중에 무장 짚차 중대가 어떠한 활약을 보였는지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처럼 비록 빈약한 장비였지만 M-2 반궤도차량과 무장 짚차는 당시 기갑연대 주력부대인 장갑대대의 보조전력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맡은 바 임무 이상의 역할을 다하였다.
기갑연대에는 기마 300필을 보유한 2개 중대 규모로 이뤄진 기병대대가 있었다. 요즘 일부국가의 산악부대 외에는 전투부대로 기병대를 별도로 운용하는 나라는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 되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전투부대였다. 장갑대대가 전쟁초기 서서히 각개 격파 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기병대대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전쟁초기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부대였다.
기갑연대 소속이었던 기병대대의 검열 모습
1950년 7월 말 경북 청송까지 후퇴한 기갑연대는 워낙 소모가 심하여 그 전력이 미약한 상태였다. 도보대대는 김포전투에서 상실되었고 장갑대대는 각 전선에서 거의 격파되어 M-8 장갑차 4대만이 청송으로 이동하였다. 반면 당시까지 200여명의 병력을 유지한 기병대대는 편제를 대부분 유지하면서 기갑연대의 주력으로써 맹활약 하였다.
시가행진 중인 기병대대
오늘날 제1사단을 최고의 상승부대(常勝部隊)로 꼽는 이유 중 하나에는 전쟁 내내 편제를 유지하였다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수많은 부대들이 전쟁 중 해체 및 재창설의 과정 등을 겪고는 하였는데 제1사단은 후퇴 시기에도 대부분의 편제와 장비를 보존하였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훌륭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갑연대 중에서도 최후까지 전력을 보존하여 방어전을 펼쳤던 기병대대의 노력은 영웅적이라 할만 했다.
1950년 7월초에 촬영된 기병대대원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긴급하게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하여 한강 남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던 혼성 부대 중에는 기병대대도 있었는데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였다. 한강을 방패막이 삼아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후퇴 시에는 기병대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아군의 최후 철수부대를 엄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전선으로 향하는 기병대대
특히 미군 전사에는 7월 초순 경북 구미 부근에서 미 제24사단 63포병대대 B포대가 1개 대대병력의 북한군에 포위되어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난 기병대대 2개 소대가 적 배후를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한 전과가 상세하게 나오기도 한다. 이후 북진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이 나와 있지만 1.4 후퇴 후 더 이상의 기록을 발견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기병대가 더 이상 전장상황에 맞지 않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북진 당시의 모습인데 이후 기병대대는 국군 역사에서 사라진다
도보대대는 2개 중대 규모로 구성된 경무장 보병대대였는데 오늘날 수색대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개전 시에는 기갑연대의 본부 및 남산 송신소 등을 방어하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여 김포지구방어사령부 소속으로 방어전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 당시 북한군 중 최고의 기동을 보여주었다는 북한군 제6사단의 김포 반도 도하 작전으로 국군의 배후가 노출될 위험에 처하자 도보대대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동 중 휴식을 취하는 국군 보병부대
약간의 M-8 장갑차의 지원을 받아 부천 및 오류동 방향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도보대대는 병력과 화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 북한군 최강으로 평가되던 6사단과 혈전을 벌여 상상 외의 타격을 입힘으로써 영등포 진출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김포 공항 탈환에 실패하며 부대가 해체 될 만큼의 타격을 입었고 지휘관은 자결을 하였다.
도보대대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군의 귀감으로 남아있다
비록 도보대대는 기갑연대의 제 부대들 중 가장 먼저 산화한 부대가 되었지만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시흥전투사령부의 각 부대가 수원 이남으로 안전하게 후퇴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도보대대의 용맹함은 오늘날 국군 수색대대나 수색중대와 같은 첨병부대들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기갑부대라고 칭하기 부끄러운 기갑연대를 보유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국군은 200여대의 T-34 전차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기습에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탱크를 막을 제대로 된 무기도 없었고 대전차 전술 또한 부재하여 설령 기습이 아니었다하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 초기 크나큰 아픔을 안겨 준 북한의 T-34
울분에 찬 병사들이 여러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전차를 막아냈으나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군은 극심한 전차 공포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전차의 보유를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군의 참전으로 아군에게도 기갑부대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국군이 본격적으로 기갑장비를 갖추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이후다.
낙동강 방어전 당시에 투입된 미군의 M-26 전차
1950년 11월 29일, M-36 전차 6대가 훈련목적으로 도입되고 동래에 위치한 육군종합학교에 전차병과가 설치됨으로써 국군은 그렇게 소원하던 전차를 보유한 진정한 기갑부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1년이 지난 1951년 10월 5일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51,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어 국군은 제대로 된 기갑부대를 보유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M-36
그런데 이때 장비한 M-36은 85mm 포를 갖춘 북한군 T-34를 충분히 능가하는 90mm의 대구경 포를 장비하였지만 이른 바 오픈 탑(Open Top) 구조의 포탑을 가진 보병 화력지원용 구축전차(Tank destroyer)였다. 얼핏 모양은 전차에 가까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주포로 볼 수 있는 장비여서 부족한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철판을 포탑에 덧대거나 심지어 샌드백을 쌓아 놓기도 했다.
개방된 포탑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M-36은 전차라기보다는 자주포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궤도차량을 장갑차로 취급하고 M-8을 국군 최고의 중화기로 여겼던 창군 초기처럼, M-36은 국군 기갑사에 있어 최초의 전차로 귀하게 여겨지고 운용되기 시작하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M-36을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하였을 정도로 전쟁 초기 북한 전차에 일방적으로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에게 M-36은 사기앙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M-36의 귀한 컬러사진
그런데 M-36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도병 이야기가 있다. 1952년 4월, 16~18세의 학생 120여명으로 구성되었던 제57 전차중대의 소년 전차병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소년들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기술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관으로 복무시켜준다는 구두약속을 받고 입대하였으나, 논산훈련소와 전차교육대에서 3개월 동안만 훈련을 받은 뒤 학도병 신분으로 곧바로 최전방 연천 지역에 투입되었다.
출동하는 소년 전차병 부대인 제57 전차중대의 M-36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제57 전차중대는 연천 지역에서 제1사단을 지원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노병의 증언에 따르면 "고지에서 밀려 퇴각할 땐 탱크 뒤에 아군의 시체를 십여 구씩 매달고 내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그들의 피눈물은 단지 학도병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오래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늦게나마 명예를 되찾은 소년 전차병 참전 기념탑 (사진-오명섭 참전용사)
당시 M-36은 주로 5대로 편성된 소대 급 단위로, 보병의 돌격 시 배후에서 화력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되었을 뿐 공산군 전차 부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본격 참전한 전차 부대의 주력으로 M-36은 그 용맹을 다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소년 전차병들의 피눈물은 이제 새롭게 밝혀져 자랑스러운 국군 기갑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국군이 장비한 최초의 전차인 M-4A3E (1957년 해병대 소속)
북한군 전차에 응어리진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전차의 보유와 확장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여 어렵게 마련한 기갑전력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국군이 도입한 M-4 전차는 76mm 주포를 탑재한 M-4A3E형 이었는데 비록 북한의 T-34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평가는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전력이었다.
4.19혁명 당시 출동한 M-4 전차
기록에 따르면 'M-36 전차는 본격적인 전차로 보기 힘든 장비이므로 진정한 전차라고 할 수 있는 M-4 전차가 우리 기갑 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 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그 의의가 컸다. 하지만 이정도 수량으로는 집중화된 독립적인 기갑부대를 구축하기 힘들었다. 전쟁 전에도 그랬지만 북한은 우리의 기갑전력을 능가하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는 미국의 지원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T-54/55 계열의 전차를 대량 도입하자 대응에 나서야 했다
전후 북한이 당대 최신예인 T-54/55 계열의 전차를 도입하여 그 전력을 급격히 확대하여 나가자 한국군도 더 이상 M-4로 대응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상응하는 대체전력으로 1959년부터 M-47 전차를 총 463대 도입하여 60~70년대 국군 기갑세력의 중추로 운용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도 전반적으로 열세였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북한의 기갑전력에 대응하고자 도입된 M-47
대량 생산되어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상당량이 공급되어진 M-47은 많은 탄약 적재량과 함께 입체식 거리측정기를 장착하여 주포의 명중도가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어 일선에서 오래동안 활약하였고 현재 일부는 해안포로 운용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곧바로 M-48 전차의 개발에 착수 하였을 만큼 M-47은 개발국인 미국에서도 그리 성능에 만족하지는 않았던 전차였다.
퇴역하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전시 중인 M-47
국군의 기갑전력이 본격적인 확장기로 접어 든 것은 월남전 때문이었다. 국군의 대규모 월남전 파병과 1971년 한국에 주둔하던 미 7사단의 철수로 생긴 전력의 공백을 메우고자 1971~1975년 사이에 한미 협의에 의해 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이에 따라 M-48A2C 전차 400여대와 M-113 장갑차 400여대를 미국이 지원하였다. 이를 모태로 해서 본격적인 국군의 기갑부대가 육성될 수 있었다.
오래 동안 국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M-48 전차
이렇게 취득한 대규모의 M-48 전차와 M-113 장갑차를 발판으로 1973년 월남에서 철군 한 수도사단이 국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으로 개편되어지고 후속하여 제1기갑여단, 제2기갑여단이 창설됨으로써 기갑장비를 집중 운용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힘들게 구축한 기갑전력은 우리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대외 원조에 의존 한 것이었다.
인천항을 통해 도입되는 M-113 장갑차
1970년대 들어 더 이상 원조에 의존해서 자주국방을 이룰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그동안 이룬 경제개발을 바탕으로 '우리 땅은 우리 손으로 지키자'는 기치하에 자주국방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더불어 기갑장비의 국산화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하였다. 국군 기갑사에 새로운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1978년 4월 7일, 신문 1면 톱으로 한국이 전차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하지만 사실 정확한 표현으로는 기존에 국군이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던 구형 M-48 전차를 M-48A3K와 105 mm 주포를 가진 M-48A5K로 성능개조를 하여 전력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 맞다. 특히 M-48A5K는 당시 미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M-60과 맞먹는 성능을 보유하여 국군의 기갑전력을 급속히 향상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M-48 전차 개조공장을 방문한 故 박정희 전대통령
이처럼 변신과정을 거친 M-48 전차는 현재도 국군 기갑전력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런 개조 생산은 한국형 전차의 개발에 중요한 경험으로 축적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 때문인지 미국이 여러 이유를 들어 M-60 전차의 한국 판매를 거부하자 독자적인 전차개발에 뛰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판매거부 조치는 국산전차 개발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한 형국이 되었다.
강력하게 개조된 M-48A5K 전차는 상당수가 현재도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1970년대 말 한국은 M-1 전차를 개발한 미국 크라이슬러 디펜스社의 도움을 받아 한국 지형에 맞는 전차의 개발에 나섰다. 이러한 장기간의 노력의 결과 시험 물량 출고와 테스트 후 1987년 9월, 드디어 국민들 앞에 그 자랑스러운 최초의 한국형 국산전차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K-1 전차였다.
최초의 국산전차인 K-1
이후 계속 된 양산으로 약 1,000여대의 K-1전차가 국군에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공급되었고 더불어 동 시기에 함께 개발에 성공한 국산 K-200 보병수송장갑차가 함께 제식화 됨으로써 1990년대 초부터 국군은 창군이래 계속된 대북 기갑전력의 열세를 질적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세계최강의 기갑세력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공지합동 훈련에 참가중인 기계화보병부대
하지만 국군 기갑부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K-1 전차를 개량한 120mm주포를 가진 K-1A1 전차를 개발하여 배치하였으며, 거기에다가 K-2 차세대전차와 K-21 보병전투장갑차를 개발하여 현재 대규모로 도입하기 전 단계이다. 비록 양산 직전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어 생산 및 도입이 늦어지고 있지만 지금까지처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배치가 이루어 질 것으로 확신한다.
보다 강력하게 업그레이드 된 K-1A1 전차
이러한 전력 확충을 발판으로 현재 국군은 맹호부대를 필두로 결전, 불무리, 필승, 화랑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되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뚜기부대가 기계화사단으로 개편 진행 중에 있다. 그외 별도로 수개의 기갑여단이 공격의 첨병으로 그 임무를 다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각 보병사단마다 전차부대나 장갑차부대를 운용 할 정도로 고도로 기계화된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도하 시범을 보이는 신형 K-21 전투장갑차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군 기갑부대의 시작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기갑이라는 호칭을 붙이기조차 낯간지러울 정도로 미약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미약한 전력을 원망하였지만 절대 탓하지 않고 용감히 전선으로 뛰어들어 전력 이상의 전과를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의 기갑전력은 국방백서에 나타난 것처럼 2,300여대의 전차 2,400여대의 장갑차 그리고 1,000 여문 이상의 자주포로 이루어진 막강 전력이다.
차세대 전차인 K-2
하지만 기갑연대에서 시작된 전력이 어느 날 갑자기 뻥튀기처럼 갑자기 늘어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갑이라 부르기 민망하였던 미미한 전력으로 시작되었던 국군의 기갑부대가 오늘날 이렇게 막강한 전력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창군 초기와 전쟁 당시의 피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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