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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구름위 2014. 9. 2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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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무릎꿇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1809년, 영국 탐사대가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 국경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 외교관은 부족장을 만난 자리에서 부족끼리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지 말고 중앙정부를 만들면 많은 장점이 있다고 설득한 적이 있었다. 부족장은 "우리는 사이가 나쁜게 좋아. 긴장이 있는 것이 좋지. 피흘린다고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 머리 위에 누군가가 있는 것은 절대로 못참아"라고 대답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노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라시아 국가 중에 아프가니스탄 만이 고대부터 냉전시대까지 강대국에게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다. 

 

그림 설명: 총과 칼이 신체의 일부와 같다는 아프가니스탄 부족전사들입니다. 다른 대륙의 원주민들과 달리, 이들은 전투에 필요한 무기에 대해서는 반감없이 수용했습니다. 그림은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고, 클릭하면 자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느 한 강대국의 땅이 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거친 환경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동쪽은 완전 산악지대로 800km 길이의 힌두 쿠시(Hindu Kush) 산악이 동과 서를 나누고 있다. 산악이 아닌 서쪽은 거의 사막지역으로 몇 군데의 강 주변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외부에서 침입할 수 있는 경로는 판즈쉬르(Panjshir) 계곡이나 크히베르(Khyber) 협로 등이 전부다.

거친 국토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민족은 지역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부족사회로 살아왔다. 외세가 통치할 수 없었듯이 어느 한 부족이 전국을 통치했던 적도 없다. 아프가니스탄 인구 중 가장 많은 파쉬툰(Pashtun, 또는 Pathan)족은 아직도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고 카불의 통치보다는 부족자체의 결정을 따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민족이 서로를 만날 때는 내전인 경우가 더 많았다. 

 

 

윈스턴 처칠은 원시적인 파쉬툰족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줄루족의 용기에 인디언의 기교에 보어인의 총솜씨까지 모두 갖췄다. 외부인은 900m 정도 거리에서 날라든 화승총탄에 부상을 입는다. 암살자는 호주원주민의 속도로 다가와 목을 벤다"라고 기록했다. 

 

그림 설명: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이 즐겨 사용하던 소총입니다. 휘어진 총대가 특징입니다.

 

외세가 아프가니스탄의 영토를 점령했던 적은 많지만 그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몇 개의 도시일 뿐, 진짜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악과 강 계곡지대는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시 사람들의 순순한 태도에 속았다가 산악지대의 부족전사의 저항을 만나면서부터 진정한 아프가니스탄을 겪고 좌절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강력한 외세의 명단은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부터 지금의 미국까지 상당히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알렉산더대왕, 징기스칸, 빅토리아여왕, 소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놀랄 것이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엉망으로 만들어진 국경이 있다. 현재의 국경은 아프가니스탄 인구분포나 정치체계와 전혀 상관이 없이 누더기로 기워진 것으로 국경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림 설명: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국경과 주요 도시입니다. 위치를 잘 봐두시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1893년 영국인 모티머 두란드(Mortimer Durand)에게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국경을 그리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크히베르(Khyber)와 크호자크(Khojak)협로와 같은 전략요충지 그리고 페샤와르(Peshawar)와 퀘타(Quetta)와 같은 중요 도시를 인도 국경 안으로 넣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파쉬툰족 영토를 가로지르는 국경선이 생겼고 국경 안과 밖이 모두 아프가니스탄 영향권인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두란드 국경선이 생기기 전에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서쪽 영토도 프가니스탄에 속해 있었다. 1947년 인도에게서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이 국경지역을 부족 영토로 지정하고는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북서국경주(North-West Frontier Provinc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도 강대국이 마음대로 국경을 정해 민족분쟁을 유발한 경우는 많았지만 아프가니스탄만큼 국경이 엉터리로 정해진 경우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문명국가는 페르시아로 기록되고 있다. 사이러스(또는 키루스 Cyrus the Great) 대왕은 두 번이나 이 지역을 침공했었고 기원전 530년에 현재의 시르 다랴(Syr Darya, 중앙아시아의 강)에서 스키타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실제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통치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불분명하다.


기원전 328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덕분에 고대 아프가니스탄의 역사가 조금이나마 알려졌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다리우스 왕을 죽인 그는 박트리아(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페르시아 왕을 자처한 베수스(Bessus, 다리우스 3세의 인척)를 좇아 동쪽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알렉산더는 사이러스 대왕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헤라트(Herat) 부근에서 페르시아 패잔병과 박트리아 기병대를 물리친 알렉산더는 남쪽으로 이동해 (사이러스가 방문했던) 헬만드 강 계곡을 들리더니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힌두 쿠쉬(Hindu Kush)를 넘었다. 추운 겨울을 만난 그의 부대는 동상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다. 

알렉산더의 군대가 힌두 쿠쉬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가 다시 없을 좋은 기회였는데도, 베수수는 옥수스(Oxus 현재의 아무 다랴, Amu Darya) 강을 건너 달아났다. 뒤를 급하게 추격하던 알렉산더는 60km 정도 펼쳐진 사막에서 또 다시 많은 병사를 잃고 만다. 알렉산더는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을 횡단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어느 전투보다 더 많은 병사를 잃었다. 

알렉산더가 옥수스 강을 건너 현재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인 소그디아나(Sogdiana)로 들어서자, 그를 두려워한 지역 주민이 베수스를 넘겨주었지만 알렉산더는 사이러스 대왕보다 더 멀고 큰 제국을 건설하기로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는 자사르테스(Jaxartes)로 진격해 스키타이족을 포위한다. 


이 때에 스피타메네스(Spitamenes)라는 페르시아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발크흐(Balkh)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저항이 시작되었다.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안의 수도 사마르칸드(Samarkand)를 포위하는데, 스키타이족과의 전투에서 발을 뺄 수 없었던 알렉산더는 2,400명의 별동대를 보냈지만 반란군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알렉산더는 급히 군대를 돌려 스피타메네스와 일전을 치르려 하지만, 그리스 팔랑스의 위력을 아는 스피타메네스는 전투를 기피하고 계속 도망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28년 봄에 군대를 다섯 개의 부대로 나누어 사방으로 스피타메네스를 추격했다. 스키타이족에게서 그를 넘겨받은 알렉산더는 록산느(Roxane)라는 소그디안 공주와 결혼을 해 후방을 다진 후에 인도 국경을 넘었다. 당시 인도는 세상의 끝이며 그 다음은 바다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알렉산더는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참혹한 3년을 보낸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인도원정에 극심한 불만을 나타내며 반란기미까지 보였다. 알렉산더는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돌아갔어야 했지만 현재의 발루치스탄(Baluchistan)과 이란의 사막에서 또 다시 많은 병사를 잃었고 자신도 병을 얻어 32세의 나이에 바빌론에서 죽었다. 


그 후 수 백년 동안 외부에서 아프가니스탄을 끊임없이 침공했고 기원전 40년에, 알렉산더가 동쪽에 남긴 마지막 유산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스키타이족에게 멸망했다. 스키타이족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계곡과 산악지대에서 세력을 넓은 파쉬툰족에게 몰려났다. 


7세기, 서쪽에서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나는데 이들은 이전의 침입자와 달리 칼과 함께 코란이라는 책을 들고 나타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은 유일신에 매혹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0세기 말,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 가즈니(Ghazni)에 왕국을 열었고 998년에는 마흐무드가 왕위에 올라 정복을 시작했다. 그는 인도 국경을 넘어 불교와 힌두교 사원을 불태우며 이슬람 개종을 강요했다. 그래서 인도에서 독립한 파키스탄이 이슬람교를 믿게 된 것이다. 

100년 후 힌두 쿠쉬 중앙의 고르(Ghor)에 또 하나의 왕조가 열리지만 사마르칸드에서 세력을 넓힌 호라즘에게 멸망한다. 호라즘의 샤 무하마드 2세는 아프가니스탄 부족을 합병하며 13세기까지 가장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1220년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이슬람 제국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몽골의 징기스칸이 자사르테스 강둑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야만족은 이슬람이나 다른 문명사회에 대해 일체의 존중도 하지 않고 단순한 약탈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들은 적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일반 시민까지 잔인하게 학살했고 등 뒤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했다. 

호라즘을 정복하려던 징기스칸은 발크흐와 헤라트를 포위하고 마구 학살했다. 한 때 위대했던 도시인 발크흐를 지나던 중국인 승려는 개가 짖는 소리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몽골군이 힌두 쿠쉬를 건너자, 호라즘의 잘랄라드 딘 밍부르누(Jalalad-Din Mingburnu)는 전사들을 모아 현재의 카불 북부의 파르완(Parwan)에서 몽골군에 맞섰다. 2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몽골군은 대열을 무너뜨리고 산을 넘어 후퇴하다가 참패를 당했다. 80년 만에 처음으로 몽골군이 패한 전투였다. 

그러나 파르완 전투의 승리는 '피로스왕의 승리(더 큰 위협을 불러와 결국은 패배하는 승리)'로 징기스칸이 직접 힌두 쿠쉬를 넘어왔다. 그는 밤얀(Bamyan) 공격하다가 손자가 화살에 맞아 죽자 밤얀의 개와 고양이 조차 살려두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잘랄라드 딘이 달아나자 징기스칸은 동쪽의 산맥을 넘어 인더스 강까지 추격해 그의 부대를 격파했다. 마지막까지 싸우던 잘랄라딘이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그의 용기를 칭찬한 징기스칸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직후에 죽었고 아프가니스탄은 몽골제국을 분할한 차가타이 한국(Chakatai Khanate)의 영토로 분류되었다. 티무르 렌크(Timur Lenk)가 왕좌에 올라 지중해, 모스크바, 델리까지 정복했고 차가타이 한국의 중심지였던 아프가니스탄은 몰려드는 노예와 재화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1700년 경에 아프가니스탄에도 화약과 총이 전해졌고, 부족민들은 페르시아의 용병으로 참여하거나 인도를 약탈했다. 


1747년에 아프가니스탄에도 중앙정부 비슷한 것이 세워지기는 했다. 아흐마드 셔 두란니가 부족들을 연합시킨 후에 북으로는 옥수스(Oxus), 서로는 페르시아 코라산(Khorasan), 동으로는 인더스 강 근처까지 국경을 넓혔지만 이미 전세계는 제국주의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였다. 유럽롸 러시아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중앙 아시아 왕국을 강제로 복종시키고 있었고 해로가 기존의 실크로드를 대신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더 이상 정치와 경제의 통로가 아니었다. 영국해군은 아프가니스탄 영토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고도 바다를 통해 인도 대륙을 합병했다. 

경제기반이 없는 아프가니스탄은 주변국을 약탈하며 연명했고 아흐마드 샤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부족은 중앙정부의 과세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분열된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강대국의 관심 밖에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로서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1839년에 인도 현지군을 구성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가즈니 전투를 제외하고는 손쉬운 원정이었다. 영국군은 칸다하르와 카불을 순식간에 점령하면서 최초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강대국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이 영국군 초소를 습격하고 수송부대를 매복습격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국인들이 도시에 들어가 있는 것도 못참을 일이었지만 그들이 이교도라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기존의 왕를 몰아내고 슈자 샤 두란니라는 허수아비 왕을 앉혔지만 궁전에서 쫓겨난 아크바르 칸 왕자가 6,000명의 기병과 함께 힌두 쿠쉬를 넘어왔다. 사방에서 저항군을 만난 영국군은 우호적인 부족과 손을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본국의 비용절감 움직임 때문에 수송로를 열여주고 있던 부족에게 더 이상 뇌물을 주지 못하게 되면서 인도로 통하는 크히베르 협로가 막히게 된다. 수송로를 열기 위해 카불 수비대 일부가 도시 밖으로 나왔지만 수송로도 열지 못하고 카불의 영국군은 저항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1842년, 전멸직전에 몰린 카불 수비대는 인도로 철수하겠다는 조건으로 아크바르 칸 왕자와 휴전했다. 4,500명의 병사와 12,000명의 인도 이주민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인도로 향하지만, 산악지대의 아프가니스탄 부족은 이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일주일 동안의 무자비한 사냥 끝에 16,500명의 탈출인원 중 윌리암 브라이돈 박사만이 살아 돌아와 잘랄라바드 요새에 소식을 전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응징군(Army of Retribution)을 투입했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은 영국군이 오기 전에 모두 산 속으로 숨었다. 다시 한 번 영국군은 무저항 상태의 카불을 접수하고 저항을 진압한 것처럼 보였지만 쫓겨났던 왕이 왕좌에 다시 오를 정도로 상황은 엉망이었다. 

1878년 러시아와 세력확장을 두려워한 영국은 카불의 왕궁을 압박했다. 분노한 아프가니스탄 부족전사는 영국군 수송대와 호위대를 공격했고 영국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카불 등의 도시만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진정한 힘은 산악과 계곡지역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이미 그 때에는 이슬람 율법학자가 소집한 전사들이 대병력을 이루고 있었다. 

영국군은 다시 한 번 카불에 몰렸지만 이미 준비를 단단히 해둔 상태였다. 전투에 불필요한 인도 이주민을 데려오지 않았고 후장식(breech  loading) 마티니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해오는 아프가니스탄 부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남부 마이완드(Maiwand) 근처에서 영국군 여단이 아유브 칸이 이끄는 군대에 포위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로버트 장군은 500km를 달려 칸다하르 근처에서 아프가니스탄 부대를 궤멸시켰지만 항상 그랬듯이 주력은 이미 산으로 사라진 후였고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전사들 뿐인 헛수고였다. 영국군은 또 다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그림 설명: 3차 전쟁에서 영국공군이 카불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은 비행기 공격은 야만적이며 명예롭지 못한 전투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원정을 마친 영국은 더 이상 아프가니스탄에 새 국가를 만들거나 오래 내려온 기존질서를 바꾸려 하지 않고, 러시아가 옥수스/아무 다랴 이상을 넘어오지 못하게 억제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원정을 마친 로버트 장군은 본국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던 그대로 두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입니다. 대영제국의 자존심(Amour-Propre)에는 거슬려도 아프가니스탄인이 우리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1919년, 영국은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세 번째로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이 1차대전에서 영국이 큰 피해를 입은 기회를 틈타 옛날의 파쉬툰 영토를 되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국군이 카불을 공중폭격하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는데,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쟁방식이었다. 


 

약 80년 동안 외부와 단절되었던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이 1979년에 침공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소련이 직접 나선 것으로, 이전의 모든 전쟁처럼 처음에는 순조롭게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항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련도 영국처럼 도시는 아프가니스탄의 극히 일부이며 정치군사력은 외곽의 부족들에게 있다는 것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원시적인 아프가니스탄 민족이 전쟁 하나만큼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림 설명: 1989년 2월 13일. 본국으로의 철수길에 오르는 소련군입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분열해있던 부족들은 무자헤딘(Mujahideen, 성전을 벌이는 전사)이라는 명예아래 협력했고 처음에는 파키스탄과 중국에게서 현대식 소총을 원조받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 미국을 통해 중화기로 무장했다.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초토화시켰지만 수 백 만명의 피난민만 만들었을 뿐, 무자헤딘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져갔다. 1986년에 미국이 견착식 스팅거 지대공 미사일을 무자헤딘에게 공급하면서 대반전이 일어나 소련군의 비행기와 헬리콥터 200여대가 격추당했다. 

소련은 무자헤딘을 좇아 파키스탄까지 침공할 수 없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989년 초에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에 카불을 두고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이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부족사회로 이루어진 국가로, 그러나 외세에는 무릎꿇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게 된다.


( 당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국가가

냉전을 벌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엄청난 고급무기를,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산유국은 오일머니를 끊임없이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무자헤딘은 상당히 황당한 행동을 해서 미국을 괴롭혔는데, 분명 파키스탄 피난민촌에서 스팅어미사일 등으로 완전무장을 시켜 보냈는데, 전투를 마치고 돌아올 때 보면 간단한 개인화기 정도만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미군에게 손을 다시 벌리죠. 중화기를 다시 달라고...

무자헤딘은 국가관이 없는 부족민들답게 전투를 끝내고 남는 무기는 아프가니스탄 동굴에 숨겨 놓거나 넘어오면서 파키스탄 무기상에서 팔아먹는 것입니다. 시간이 급하고 무기공급을 대놓고 할 수 없던 미군은 현지 무기상을 통해 이 무기들을 구입해서 팔아먹은 놈들을 다시 무장시켰습니다. 

이렇게 쌓인 무기와 돈이 결국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형군벌을 탄생시켰고 결국 테러의 배후지로 지목받아 미군이 투입되게 된 것입니다. 소련침공 당시에 대학생이던 저는 타임지로 만수르가 군벌을 통합하네 어쩌네 하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아! 소련군은 장난감 부비트랩을 마을 곳곳에 뿌려 아이들까지 불구로 만드는 잔인한 방법을 썼지만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것과 같이 얻은 것 없이 철수합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은 전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전체 인구의 20%에 가까운 5,000,000명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림 설명: 반 탈레반 북부동맹 전사들이 러시아 T-62 전차를 타고 카불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2001년 11월 13일의 일로, 불과 8년 후에 미국과 나토군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게 됩니다.


전쟁영화는 아닙니다만, 상당히 흥미로운 영화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 1975)'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우연한 해프닝으로 알렉산더의 재림으로 오해받은 숀 코넬리가 록산느라는 현지 여성과 결혼을 하지만 정체가 들통이 나서 함께 갔던 인도부대와 함께 원주민의 공격을 받는 모습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pfaDqcf2FA&feature=related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그린 9 중대의 대단한 전투 장면입니다. 러시아가 플래툰과 비슷한 느낌으로 만든 영화로 러시아 현대장비가 많이 등장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hKBe3TiV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