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시대 간척사업

구름위 2012. 9. 2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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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간척사업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농토를 얻기 위해 소규모든 대규모든 간척사업을 벌였고 특히 고려-조선 시대에는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여기서 다룰 것은 조선 시대 숙종 시기 강화도에서 벌어진 간척사업에 대해서입니다. 강화도는 강화도,석모도,교동도 등 세 개의 큰 섬과 주변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석모도엔 7백 헥타르(200만평)이 넘는 평야가 있습니다.(송가평) 이렇게 섬에 평야가 넓은 이유는 3개의 섬 사이에 있는 갯벌을 매워 하나의 섬으로 만들어서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조선 후기 지도를 살펴보면 석모도는 세 개의 섬, 송가도, 석모도,어유정도로 되어 있고 섬과 섬 사이에 니()라고 표기한 갯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 섬의 갯벌을 매워서 석모도라는 섬 하나로 된 것입니다.

 

실제로 토양성분을 조사해보면 1.5m밑으로는 갯벌 성질의 흙이 나옵니다. 이외에도 강화도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간척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중 흥미로운 곳이 조선시대 지리서 <중경지(中京誌)>에는 "마니산 일대는 바닷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곳은 가릉언과 선두포 둑을 쌓기 전 마니산 일대가 바닷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조선후기 지도에는 마니산 일대와 강화도 사이에 배가 지나다닐 수 있는 수로가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결국 간척으로 이 두 섬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측량을 통해서 강화도의 간척지 비율을 확인해보면 무려 1/3이나 차지합니다 120개의 둑을 쌓기 전에는 강화도의 1/3은 바다였던 것입니다 .

 

 

(위에 사진에서 원 안에 있는 것이 석모도이고 아래 사진에는 그 섬이 하나로 합쳐진게 나옵니다 그리고 마니산 일대에 수로가 있는 것도 확인되는데 이것도 나중에 간척이 되면서 사라집니다)

 

이런 간척지를 만들기 위한 둑은 어떻게 건설됬는지를 알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역사스페셜에서는 강화도에 있었던 한 간척사업 기록을 토대로 설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강화군 길상면에는 '선두포축언시말(船頭浦築堰始末)'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선두언 둑 건설을 기념해서 세운 것입니다. 준공일은 17075월 착공은 17069월이고 공사에 동원된 인부는 연인원 11만명이고 이들의 식량으로 2천석이 들었다고 기록돼 있는 상당한 대공사중 하나였습니다.

 

이때 당시 둑 건설을 지휘한 자는 강화유수 민진원(1664~1736)이었습니다(강화산성의 보수 공사를 마무리한 경력도 있습니다)숙종 대에 강화유수를 지낸 민진원은 영조 대에는 정승까지 오르는데,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명성이 자자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둑 공사에 대해서 그의 문집인 <민문충공주의>에 잘 나와있기 때문인데 공사의 계획단계부터 공사 진척 상황, 준공까지의 많은 어려운 일, 실제 공사내용까지 소상하게 적어 중앙 부서에 보고한 것들이 기록되 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선두포 둑 공사는 상당한 난공사임을 알 수 있는데 현재 선두포 둑은 도로로 쓰이고 있고 여러번 보수를 해서 현재 흔적만으로는 당시에 어떻게 쌓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규모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화도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다른 둑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둑의 몸체를 이루는 재료는 갯벌 흙입니다. 이는 갯벌이 모래와 점토가 섞여있어서 건축재료에 적합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풍납토성에도 이런 흔적이 보입니다 물론 단순히 갯벌 흙만이 아니라 여기에 주위에 자라는 염생식물도 섞어서 흙이 잘 뭉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갯벌 흙을 차곡차곡 다져서 쌓으면 내부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위에 돌담을 둘렀습니다

 

선두포 둑의 높이는 최고 15m에 이르고 이 거대한 둑을 쌓기 위해 치밀한 조사 과정이 나오는데 민진원의 기록을 보면 둑을 쌓기 전에 수심을 잰 것이 나오는데 밧줄에 돌을 매달아 수심을 쟀더니 깊이가 2()에서 6~7파에 이르렀다고 하고 1파는 150cm로 잡습니다.

 

(물론 필자의 경우 이 파의 단위가 진짜 150cm인지 의심스러운게 역사스페셜은 척의 경우 주척과 영조척을 구분하지 않고 영조척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영조척은 목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이단위입니다)

 

즉 깊은 곳은 10m가 넘는다는 거죠, 거기에 물살의 세기도 파악했는데, 수세(水勢)가 빠르지 않고 완만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민진원의 기록을 보면 '발패야장조작기계(發牌冶匠造作器械)'언급되는데 이게 무슨 기계인지 모르겠네요

 

무거운 돌을 운반할 때에 대한 방법도 기록이 있는데 "제방을 쌓을 때 마땅히 돌로 쌓아야 하나 갯벌이라 운반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반드시 판자를 깐 뒤에야 돌을 운반할 수 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조선시대 둑을 쌓는 공법이 소개되 있는데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견춘(堅椿),돌을 쌓는 석둔, 그리고 돌을 넣은 망태기를 쌓는 복우(伏牛)등의 방법이 있습니다

 

복우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데 망태 대신에 철사를 쓰는 점이 조선시대와 다릅니다. 또 바닷물에 둑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한대를 쌓아야 한다고 나오는데 한대란 삼각대로 뾰족한 부분이 조수에 맞고 변을 따라 다른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그 힘을 좌우로 나뉘게 하는 것으로 한대의 기초에는 2천근의 큰 돌을 사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한대 말고도 조선시대에는 둑에 난 뿔처럼 직각으로 쌓은 돌담(현대에는 그로인이라 부르는)이 이런 역할을 하여 파도에 둑이 씻겨 내려가지 않게 하고 그로인 안쪽으로 퇴적이 이루어져 둑을 더욱더 안정하게 하는 구조물이 있습니다.(이는 처음에 언급한 송가평에서 확인됩니다)

 

하지만 간척지는 소금기를 머금고 있기에 바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1994년 영산강 유역의 방조제의 간척지의 경우 1년 다음해에 농사를 시작했고 모내기 대신에 담수직파 방식을 선택했는데 모내기는 모를 깊게 심어 그 뿌리가 소금기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덜 깊게 심는 방식인 담수직파(볍씨를 직접 뿌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를 한 것입니다

 

이런 땅에서 소금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한데 이런 물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수문이나 저수시설이 많이 사용됩니다

 

민진원의 기록에도 돌기둥으로 만든 수문에 대해서 나오는데 일단 돌기둥을 만들기 전에 미리 지반조사를 하여 단단한 암반층이 있는 곳을 택하고 돌에 홈을 판 다음 여러 개의 돌을 쌓아서 돌기둥을 만들고 그 홈에 나무로 만든 판자를 설치하여 수문을 만들었습니다

역스에서는 가로 4.5m 세로 6m정도 규모의 수문이라 하는데 이게 영조척 기준인지 주척 기준인지는 모르겠습니다(영조척은 척당 약 30~31cm 주척은 척당 20~21cm정도 됩니다)

 

저수시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존재하는데 물광이라고 하여 논 주위에 큰 웅덩이를 파 물을 저장하는 개인용 저수시설과 겨울무논처럼 용두레 같은 것으로 물을 퍼올려서 겨울철부터 미리 논에 물을 저장하는 방식들이 쓰였습니다

 

또한 민진원은 간척지로 인한 주민들의 불화를 우려하여 미리 조정에 규정을 정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조정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병조판서를 강화도에 보내 의논하게 하였고

 

이에 조정에서 <강화부선두포신언절목(江華府船頭浦新堰節目)>이라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내용을 보면 양반이나 상민을 막론하고 근실하게 영농할 자를 뽑아 경작케 하라”“제언 내의 신개간지는 법전의 규정에 따라 3년까지 세금을 걷지 말라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런 간척지 사업은 국가가 독점하는 사업이 아니기에 서민들도 토지를 원하면 근처의 간척지나 저습지를 대상으로 간척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빛내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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