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운명을 거부한 부대 [ 2 ]

구름위 2013. 1. 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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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놀라게 만든 빠른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기습 남침으로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엄청난 일이 곧바로 벌어지게 되었는데, 바로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이었습니다.  UN이라는 이름을 빌린 형태이기는 하였지만 미 24사단에서 차출된 스미스 특임대(Task Force Smith)가 전쟁 일주일 만에 1950년 7월 2일 부산에 발을 디디었을 만큼 미군의 참전은 상당히 빨랐습니다. ( 관련글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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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스 특임대 참전 기념비 ]

 

최근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빠른 미국의 개입을 북괴는 물론 전쟁 개시의 주요 당사자였던 소련과 중공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애치슨라인(Acheson Line)으로 알려진 것처럼 미국이 한국을 전략방어망에서 배제하였기 때문에 설령 참전한다하더라도 적어도 3개월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시간이면 남한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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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었고 이 때문에 침략자들은

남침을 하더라도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오판하였습니다 ]

 

하지만 예상을 뒤집은 미국의 조속한 참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속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분명히 미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객관적으로 당시 국군의 전력으로 공산군을 물리치기는 힘들었습니다.  전격 참전한 미군도 처음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만큼 전쟁, 초기 북괴군의 전력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국군이 단독으로 침략자를 격퇴하기는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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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전 초 북괴군의 전력은 국군을 압도하였습니다 ]

 

이처럼 미군의 즉시 참전은 최근 종북세력들이 적화통일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원흉이라 공개적으로 분통해 할 만큼 위기에 몰린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물론 한반도의 분단에 소련과 더불어 미국도 분명히 책임이 많으며 따라서 미국의 참전은 병 주고 약도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다고 미군의 참전이 적화통일을 방해하였다고 분통해 하는 자들의 어이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에도 불구하고 공산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전선은 남으로 계속 밀려 내려갔습니다.  UN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한 방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을 구상하였던 것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당시였을 정도로 빨랐는데, 7월 중 실시 예정으로 블루하트(Blue Heart) 작전을 입안하였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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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가 한강 변 시찰 당시에 인천상륙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하지만 공산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랐고 반면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미군의 준비가 너무 부족하여 작전은 연기되었습니다.  블루하트계획 당시 상륙군으로 예정되었던 부대가 미 1기병사단이었는데 경부축선에서 공산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로 계획된 미 24사단이 오산, 천안, 대전, 금강으로 후퇴하며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자 예정을 바꾸어 7월말 영일만을 통하여 전선에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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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전투 당시의 미 1기병사단 부상병 ]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한 맥아더는 블루하트계획을 대신하여 실시시기를 9월 중순으로 늦춘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을 계획하였고 본토에서 긴급 동원되어 한국으로 이동 중에 있던 미 2사단과 미 해병 1임시여단을 상륙부대로 낙점하였습니다.  하지만 호남 지역이 북괴군에게 돌파당하며 전선이 낙동강으로 축소되자 이들 부대는 곧바로 낙동강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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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7월 미 2사단의 한국 주둔이 개시되었습니다 ]

 

원 주둔지인 워싱턴 주 포트루이스(Ft. Lewis)를 떠나 선도 부대가 7월 23일 부산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8월 24일 사단 전체가 한국으로 이동 전개한 미 2사단도 이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원래 종전이 되면 제일 먼저 철군할 부대로 예정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적에게 무려 4번이나 포위당하였고 그때마다 격전을 치루고 살아났는데, 이런 인연 때문인지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하는 부대가 되었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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