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고구려대수당전쟁사 .../고·수 전쟁

구름위 2012. 12. 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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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고·수 전쟁

1. 고·수 전쟁의 원인

1) 수의 대외정복정책

수(隋)가 6세기 말경에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통일정권을 수립하자, 한족(漢族) 집단내부에 팽배한 패권주의가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밀려오게 되었다.

수 문제(文帝)는 즉위 초부터 '북수남공정책(北守南攻政策)'을 추진하여 남방 변경세력들을 제압하고 통일제국의 위세를 과시한 다음, 그 관심을 북방으로 돌리어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무력 침공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는 수가 그들의 안전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집단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북방지역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이 지역을 평정하여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수 왕조의 항구적인 안정기반을 구축하려는 야망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수는 북방 변경지역 최강의 세력인 돌궐(突厥)에 대하여 이간정책(離間政策)으로 그들 종족 상호간의 분열을 조장함과 아울러 10여년동안 무력침공정책을 병행한 결과, 마침내 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돌궐은 수의 이간정책으로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西突厥)로 양분되어 서로 대립하는 형세에 놓이게 되었는데, 서돌궐은 내분이 발생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동돌궐은 수의 무력침공에 굴복하여 그 속국이 되었던 것이다. 수는 이와 같이 하여 6세기 말경에 북방 최대의 적대세력인 돌궐을 제압함으로써 북방 변경세력의 위협 요인을 제거하고 일단 안정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 동북부의 접경 지역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高句麗)는 수가 돌궐을 제압하기 이전까지 동돌궐과 제휴하여 수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이 사실은 수가 동돌궐을 복속시킨 후에도 적지 않은 불안 요인으로 상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를 제압하려 하는 수와 이에 대항하는 고구려 간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수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 남조(南朝)의 진(陳)과 대립하고 있을 때 고구려는 수와 통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진과도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외교를 전개함으로써 수의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러던 중에, 수는 진을 멸망시켜 통일 과정에서 양성된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고구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수 문제 초부터 추진되어 온 남방세력과 돌궐정복정책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취해진 조치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수 문제의 고구려 침공을 시발점으로 하여 양제(煬帝) 대에 이르기까지 전후 4차, 15년에 걸쳐 고·수 양국이 그 국력을 기울여 상쟁하는 고·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2) 고구려의 전선 배치

고구려는 광범위한 영토를 방위하기 위해 변경의 중요지역에 토성(土城)이나 석성(石城)을 축조하고 이를 요새화하였다. 평지는 주로 토성을 축조하여군사를 주둔시켜서 그 지휘관으로 하여금 행정과 군사(軍事) 문제를 관장하게 하였으며, 군사 작전상 중요한 지점에는 산성(山城)을 쌓아 각종 장비와 군량을 비축함으로써 평지에 축조된 성곽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대륙 및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요하(遼河)의 한 지류인 훈하(渾河)와 태자하(太子河)를 따라 그 이동지역 요소요소에 군사 거점을 확보하고 이들 지역에 군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역을 구분하는 자연 장애물인 요하 연안에는 하류지역의 회원진(懷遠鎭)과 중류지역의 무려라성(武 邏城) 등이 공수 양면에 있어서 전초기지의 주요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변경지역의 요새들은 침공 세력의 우선적인 점령 목표가 되었으며, 이의 점령 및 확보 여하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나는 관건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적 요새들은 주로 요하의 지류인 훈하와 태자하 이동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요서·요동 지역은 요하를 경계로 삼아 대치하는 형세를 취하였다. 전방에는 요하와 훈하, 태자하를 두고 후방에는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어지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배후에 두고 형성된 거점 중심의 점선점령(點線占領)의 형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동만(遼東灣) 입구의 요하 하구지역에 위치한 안시성(安市城)을 시작으로 하여 동북쪽으로 이어진 서안평(西安平), 백암성(白巖城), 목저성(木底城)과 동북단의 남소성(南蘇城) 등은 중요한 교통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전술상의 요지에 위치하여 해당지역의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하여 서남쪽 요동만 입구에서부터 대규모군사 거점도시인 안시성을 중심 거점으로 한 안시주(安市州)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동북쪽 요양(遼陽) 부근에는 백암성을 중심거점으로 한 백암주(白巖州)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두 거점은 회원진(懷遠鎭)에서 오골성(烏骨城)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수도(首都)로 진입하는 통로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수도 방위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훈하를 따라 백암주 북쪽에 위치한 개모주(蓋牟州)는 신성(新城)을 그 중심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신성은 평야지대에 축조된 평지성(平地城)으로써 그 서북쪽 전방에는 역시평지성인 무려라성이 연결되어 있었고, 후방에는 목저주의 중심 거점인 목저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신성은 개활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대부대에 의한 포위 공격에 매우 취약하였다. 따라서 그 전방과 후방에 위치해 있는 무려라성과 목저성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신성과 목저성은 무려라를 경유하여 고구려의 옛 수도인 즙안(輯安)에 이르는 통로상에 위치한 군사거점 도시였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427년(長壽王 15)에 평양 동북방 대성산(大聖山) 부근으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까지는 이 두 거점이 수도에 이르는 제1,2관문으로 수도 방위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무려라에서 요하와 훈하를 도하하여 개모주를 통과하면 목저주에서 즙안에 이르는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른바 북로(北路)는 신빈(新賓)을 거쳐 개활지를 통과한 후 동진하여 통화(通化)에 이르고, 다시 계곡을 따라 남진하면 곧바로 즙안에 이르는 비교적 평탄한 길로서 대규모 병력의 이동도 가능한 통로이다. 반면에 남로(南路)의 경우는 신빈에서 동남진하여 환인(桓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평탄한 도로가 계속되다가, 환인에서 즙안에 이르는 사이의 도로는 험준한 산악과 계곡을 경유해야 하는 험로의 연속이었다.

그 밖에 목저주의 복쪽지역에도 주로 북방민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고구려 특유의 산성들이 다수 축조되었다. 이 성곽들은 중요한 군사거점이 되었는데, 길림(吉林) 북방의 용담산(龍潭山)에 이르기까지 여러 요충지에 고르게 축조되어 송화강과 연결됨으로써 국경선(國境線)으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고구려는 요하와 그 중요 지류의 동안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갖춘 요새들을 배치함으로써, 중국 대륙 지배세력의 무력 침공에정면으로 대항할 태세를갖추었다. 따라서, 이러한 고구려의 전선 배치는 중원(中原)의 패자로 등장하여 중국대륙의 동북지역으로의 영토 확장 야욕을 품고있던 수에게는 최대의 장애물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3) 고구려의 요서지방 공격

고구려는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서 요동지방과 송화강 유역 일대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을 자국의 세력권안에 흡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됨에 따라 이들 지역에 구축된 중요한 군사 거점들을 중심으로 효과적인 지역방어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돌궐족(突厥族), 북주(北周)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어, 요동지방 일대에 대한 고구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그들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이를 계기로 하여 고구려는 국내의 정치적인 안정기반을 구축하여 6세기 전반기의 침체된 정국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수의 이간정책에 말려든 돌궐이 동·서돌궐로 분열되자, 동돌궐이 고구려에 제휴를 요청해왔다. 수의 통일세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고구려와 동돌궐은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일치되자 수를 공동의 적대세력으로 인식하고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양대세력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 수의 고구려에 대한 침공 위협도 줄어들게 되었다. 고구려는 수의 침공위협이 감소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동북만주 지역의 말갈족(靺鞨族)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6세기 후반기경, 말갈 세력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들어와 고구려로부터 자치적 생존권을 인정받은 대신에 그 반대급부로서 군사·경제적으로 고구려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갈족 중 송화강 유역의 말갈 세력은 고구려에 복속을 거부한 채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들을 무력으로 압박하여 세력권 안에 넣으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이러한 움직임은 수의 대북정책에 필연적인 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수는 동북 변경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세력확장을 좌시할수 없다는 판단하에 고구려에 대한 무력 침공 기도를 노출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 문제는 일단 고구려의 감정을 자극하지않기 위하여 외교적인접근을 통하여 고구려 국내의 정세를 탐지한 다음에 대 고구려 정책의 향방을 결정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수 문제는 590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군사적 움직임을 상세히 정탐하도록 하였으나, 수 문제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고구려측에 간파되어 수의 사신은 연금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는 고구려의 태도에 대하여 더 한층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수가 무력으로 고구려를제압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는 30여 년에 걸친 평원왕(平原王)의 치세(559∼589)를 통하여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국력을 충실히 다져온 터였으므로, 그 뒤를 이어서즉위한 영양왕( 陽王: 590∼617)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수세적 방위태세를 지양하고 공세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적극적인 방위전략을 강구할 수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수가 영토 확장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동북만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대응 전략으로서 수의 북방정책 추진 거점이 되고 있던 영주(營州 : 조양)지방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도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고구려는 590년에 파견된 수의 사절에 대한 답례로 591년과 그 이듬해에 연속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수의 대 고구려 정책의 향방을 탐지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597년에 파견한 사신을 마지막으로 하여 그 동안 수집된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따라 선제공격으로 대 수전략의 기틀을 잡기 위해 수의 요서지방 변경 최대 요충지인 영주를 침공하였다.

598년 2월,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족으로 편성된 기병 1만명을 직접 지휘하여 영주를 공격하였다. 영주 지역에 배치된 수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수의 북방 진출기도를 사전에 봉쇄하거나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이와 같은 기습적인 침공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영주는, 수가 요서지방에 진출함에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지였다. 따라서 수는 이곳에 총관부(總管府)를 설치하고 영주자사(營州刺史)인 위충(韋沖)을 총관으로 겸임 발령하여 그 휘하에 정예병력을 배치하고있었다. 영주총관 위충은 말갈·거란·해(奚) 등 중국 변경 유목민족의 습성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대적하는 전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으므로 문제가 이를 발탁하여 영주 총관부의 총관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영양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요하를 건너 회원진(懷遠鎭)-흑산(黑山)-북진(北鎭 :광령)-의현(義縣)을 경유하여 요서지방의 영주로 진격하였다. 이때 수의 영주총관 위충은 이미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즉각적인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침공군은 영주지역까지 진입하는 동안 요하를 비롯하여 요동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많은 하천을 도하하고 넓은 저습지대를 통과하여 침공 목표인 영주지역에 도달하였을 때는 이미 장병의 사기와 전투력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위충의 군사들은 장거리 행군으로 피로에지친 고구려군에게 총공격을 가하였다. 수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고구려군은 일대 타격을 입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요서지방 공격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수를 자극하는 사태롤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수 문제는 이를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무력침공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2. 고·수 전쟁의 경과

1) 제 1차 고·수전쟁

(1) 수군의 침공계획

고구려가 6세기 후반 이후, 동북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등의 일련의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수는 이에 대하여 촉각을 곤두세운 채 고구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598년 2월에 고구려가 말갈 기병 1만을 주력으로 하여 요서지방의 영주(營州)를 침공하자, 고·수 양국간의 무력대결은 계속 확대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수는 진(陳)과의 통일전쟁을 끝낸 지 불과 10여 년 밖에 경과하지 않았으므로 전투경험이 있는 다수의 장정(壯丁)들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수는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과업을 완수한 직후에 대폭적인 군제개혁 을단행하여 군적(軍籍)을 민적(民籍)에 편입시켜 군민합일(軍民合一)의 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수는 제 1차 고구려 침공을 단행할 무렵에 이미 50여만 명의 정예 부병과, 모병(募兵)에 의해 즉각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민간인 집단을 보유한 군사 강국이었다.

수 문제는 고구려의 영주 침공을 응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구려에 대한 무력 침공을 단행할 것을 결심하고, 그 해(598) 2월에 대 고구려 원정군을 편성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수 문제의 제 5자인 한왕(漢王)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임명하고 그 아래에 야전지휘관은 50여 명의 행군총관(行軍總管)을 배치한 수륙군(水陸軍) 30만 병력 규모로 편성되었다. 수륙군 30만중 수로군(水路軍)은 6천명으로 수군총관(水軍總管) 주라후(周羅 )가 그 지휘를 담당하였다. 행군총관이 지휘하는 육로군(陸路軍)은 단위부대의 병력 규모를 일반적으로 6천명(보병 4천명,기병 2천명)으로편성하였던 바, 그 편제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원정군 편성에 이어 수 문제는 589년에 그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수여한 바 있는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上開府儀同三司 遼東郡公)'의 작위를 박탈한다는 조서(詔書)를반포하여 단호한 결전 태세를 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에 수의 원정군은 행군원수인 한왕 양량과 왕세적의 지휘하에 출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50여 명의 행군총관이 통제하는 육로군은 그 해 6월까지 중국 동북변경지방의 최대 전략도시인 만리장성 이남의 탁군( 郡 : 북경)에 속속 집결하여 각종 장비를 점검하면서 출전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6천 수로군은 수군총관 주라후의 지휘를 받아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래(洞萊 : 액현)에 집결하여, 출항준비를 갖추었다. 수의 수로군은 동래에서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넌 다음,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선과 한반도 서해안의 대동강 어귀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요소요소에 정박하면서 육로군에게 군수품을 지원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당시 수의 육로군은 영주총관부 관할하에 있는 요서지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후방으로부터의 육로 수송을 통하여 군량을 비롯한 기타 군수품을 조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국경인 요하를 넘어서 요동지역에 돌입한 이후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군수품의 조달은 육로를 통한 수송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므로 해상으로부터의 공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로군으로 하여금 육로군이 요하를 도하한 이후부터 해상(海上)을 통하여 군량을 비롯한 각종 군수품을 공급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598년 2월부터 4개월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그 해 6월에 탁군을 출발하여 원정길에 올랐다. 고구려 원정군은 탁군을 떠나 동진하여 임유관(臨 關)에 이르자, 그로부터 진로를 바꾸어 북상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동북진을 계속할 경우, 대릉하(大凌河)와 요하의 여러 지류(支流)가 합류하여 형성된 '요택(遼澤)'이라 일컫는 광범위한 저습지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이 지역을 약간 우회하는 통로를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유관에서 북상하기 시작한 원정군은 영주(營州)의치소인 유성(柳城 : 조양)에 이르러 일단 전열을 정비한 다음, 연군(燕郡 : 의현)을 거쳐 서쪽으로 진출한 다음 요하의 본류(本流)를 도하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때 요하 중하류 일대의 일기는 이미 7월을 전후한 시기에 도래하는 우기(雨期)를 맞이하여 지극히 불순한 상태였다. 따라서, 수의 육로군은 이와 같은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에 잠긴 습지를 강행군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하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는 보급선(補給線)의 연장과 지형 및 기상의 불순으로 말미암아 군량의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여 대병력이 결식(缺食)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 군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전염병마저 만연하여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자, 병력의 손실이 증가되면서 침공군의 전투력도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이에, 수군의 수뇌부는 전투력이 크게 약화된 현재의 상황에서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전군에 퇴각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행군원수 양량의 부대는 요하 부근에서, 행군원수 왕세적의 군대는 유성(朝陽)지역에서 각각 그 진로를 바꾸어 탁군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해상의 경로를 통하여 보급품을 수송하던 수군총관 주라후의 선단도 요동반도 남단 근해상에서 불시에폭풍을 만나 대다수의 선박이 침몰함으로써 당초의 임무를 포기한채 선수를 돌려 동래로 퇴각하고 말았다.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장마와 폭풍우 등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육로군과 수로군 공히 8할 내지 9할의 병력을 손실한 채로 제1차 고·수 전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고구려의 대응

고구려는 한족(漢族)과 북방민족(北方民族)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하의 지류인 훈하와 태자하 이서지역에 다수의 요새(要塞)를 집중적으로 구축하였다. 석성(石城)이나 토성(土城)으로 축조된 이들 요새는 요동반도(遼東半島) 남단에서 요하하구에 이르기까지의 중요지역에 축조된 다른 요새들과 연결되어강력한 전선지대(戰線地帶)를 형성하였다. 고구려는 적이 요서지역으로부터 요하를 건너 쳐들어올 경우, 요하 하구에서 동북쪽으로이어진 이 전선을 제1방어선으로 삼아 완강한 방어전을 전개한다는 전략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어서 제1방어선이 돌파되어 적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향해 진격할 경우에 대비하여 압록강 하구에 이르는 주요 기동로(機動路)의 인후부에 해당하는 백암성(白岩城)·오골성(烏骨城)·박작성(泊灼城) 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적의 침공 기도를 분쇄한다는 종심방어전략(縱心防禦戰略)도 대비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대북방 방위태세를 갖추고 있던고구려는 598년 2월에 말갈 기병 1만명을 주력으로 하여 요서지역을 공격한 직후부터 수의 대대적인 보복공격이 전개될 것을 예견하고 그에 대하여 방위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요하 본류 부근의 적 예상침공로인 회원진(懷遠鎭)과 그 상류지역의 통정진(通定鎭) 일대에 다수의 소규모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적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민(民)과 군(軍)이일체가 되어 일전을 불사한다는 결의를 굳히고 훈하와 태자하 이동지역에 구축된 여러 대성(大城)과 소성(小城)에 군량과 무기를 추가로 비축하여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7월을 전후하여 시작되는 장마는고구려군에게도 적지않은 피해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았다.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우기와 그에 따라 발생되는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예상 외의 변수(變數)가 생길 우려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수나라 양측은 모두 전쟁의 승패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적절한 피전책(避戰策)을 통하여 전력 손실을 최소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심대한 전투력의 손실을 입은 수의 원정군이 수륙 양면에서 일거에 퇴각하여 되돌아가자 고·수 양국은 일단 전면전쟁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수의 원정군이 퇴각하자, 고구려는 수의 적의(敵意)를 약화시키기 위한 외교적 책략의 일환으로 수에 사신을 보내어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 수에 파견된 고구려측 사절 일행은 수 문제에게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공격한 사실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여, 원정의 실패로 손상된 수의 국가적 체면을 세워 줌으로써 그들의 악화된 대고구려 감정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외교적 기도가 주효하여 수가 고구려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고구려 원정군을 해체함에 따라 전쟁을 억제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단 제1차 고·수전쟁이 종식되고, 양국간에는 일시적으로 평화관계가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2) 제 2차 고·수 전쟁

(1) 수군의 침공계획

수가 598년의 제1차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직후, 고구려측의 화해를 위한 사절 파견을 계기로 하여 일단 양국간에 외교관계가 재개되자, 고·수 양국은 서로 사신을교환하면서 종전과 다름없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의 조야(朝野) 일각에서는 또다시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여 이를 무력으로 굴복시키자는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주전론(主戰論)은 당시의 명망높은 유학자인 유현(劉炫)이 제기한 반전논의(反戰論議)인 '무이론(撫夷論)'과 대립하였다. 유현이 무이론에서 '고구려 정벌의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여 반전 여론을 고취시킨 결과 문제 재위 말년까지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고 고구려와의 평화관계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문제의 뒤를 이어 양제(煬帝: 605∼616)가 즉위하면서부터 수는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되었다. 문제의 제2자인 양제는 그 형인 황태자 양용(煬勇)의 페위를 계기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604년에 즉위하였다. 양제가 즉위한 후에도 수와 고구려는 문제 때와 다름이 없이 한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607년8월, 양제가 돌궐 지역을 순행(巡行)하다가 돌궐 추장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처소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조우하게 된 것을 계기로 고구려와 수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수를 견제하고자 극비리에 동돌궐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양제가 이곳에 당도하여 이와같은 고구려의 저의가 노출되자, 수 양제를 수행하고 있던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는 다음과 같이 건의하여 고구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추궁을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고구려는 원래 중국에서 기자(箕子)를 봉했던 지역입니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모두 이곳을 중국의 군현으로 통치해 왔었는데, 지금은 중국에 복속하지않고 스스로 이역(異域: 독립국)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선제(先帝 : 수문제)께서 이를 정벌하려고 생각하신지 오래였습니다만, 양량(楊諒 :제1차 고·수전쟁 당시의 행군원수)이 무능하여 원정군이 출정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폐하의 치세를 맞이하여 이를 공취(攻取)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키지 않고 그냥두어서야 될 일이겠습니가? 마침 그 사자가 돌궐에 와서 계민(啓民 :돌궐 추장 계민가한)이 온 나라를 들어 중국의 왕화(王和)에 복종하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에 따른 위구심(危懼心) 또한 적지않을 것입니다. 이 틈에 사자를 위협하여고구려 왕을 입조(入朝)하도록 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에 수 양제는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우홍(牛弘)으로 하여금 고구려 사자에게 다음과 같은 통첩을 전하여 고구려 국왕의 입조를 촉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고구려에 대한 무력정벌도 불사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나는 계민가한이 성심껏 중국을 받들기 때문에 몸소 그의 처소에까지 온 것이다. 명년(608)에는 탁군( 郡 : 북경)에 갈 예정이니, 너는 귀국하는 날 너희 국왕에게 아무런 의심도 하지 말고 빨리 와서 입조하여 계민처럼 중국의 보호를 받는 예우를 입도록 하게 하라. 만약 너희국왕이 입조하지 않을경우에는 계민가한을 거느리고 너희 나라를 정벌할 것이다."

수 양제의 이와 같은 위압적 통첩에도불구하고 고구려는 이를 일방적으로 묵살한 채로 수의 조공국(朝貢國)인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여 수에 대한 간접적인 무력시위를 벌였다. 따라서, 이후로부터 고·수 양국간에는 외교적 교류가 단절된 채 전운(戰雲)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 양제는 돌궐과 제휴하여 수를 견제하려는 고구려의 기도를 저지하고 제 1차고구려 침공의 실패에 따라 실추된 자국의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재차의 침공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수는 이미 607년부터 양제의 명령에 따라 대대적인 신무기 개발 작업에 착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바 있었다. 특히 북방민족의 기병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어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북방으로의 진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608년부터 서북 지역의 토욕혼(吐谷渾)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여 이듬해(609)에 이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토대로 하여 대 북방민족 전쟁에 자신감을 얻게 된 수 양제는 610년에 전국에 고구려원정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탁군(북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릉하 이서지역의 노하진(瀘河鎭)과 요하 이서지역의 회원진(懷遠鎭)에는 원정기간동안 소요될 군량을 집적시키고 부유층 백성들에게 전마(戰馬)를 상납하도록 징발령을 내려 출전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듬해(611) 2월부터는 양제자신이 탁군으로 거처를 옮기어 전쟁 준비상황을 직접 감독하면서 결전 태세를 굳혀나갔다. 이어서 양제는 유주총관(幽州總管) 원홍사(元弘嗣)를 산동반도의 동래(萊州)에 급파하여 해안에서 전선 3백 척을 신속히 건조하도록 명령하고,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 :회수) 이남지역에 서 수수(水手 : 수병) 1만 명과 노수(弩手)3만 명을, 영남(嶺南 : 광동·광서) 지방에서 배찬수(排 手 : 단창병)3만 명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남(河南)·회남(淮南)·강남(江南) 지역에서는 융거(戎車 : 전차) 5만 량(輛)을 제작하여 고양(高陽 : 하북 고양)에서 천막 등을 싣고 탁군으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7월에는 다시 양자강·회하 이남지역의 인부와 선박을 동원하여 여양(黎陽 : 하남 준현)과 낙구(洛口 :산동 제남)지역에 보관중인 군량을 탁군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612년 1월에 이르기까지탁군 일대에 집결한 고구려 원정군의 총 병력수는 1백13만3천8백명으로서'2백만 대군'으로 대내외에 선전되었다. 이들은 각 군을 전투 기본 단위로 하여 편성되었는데, 군의 예하에는 전투부대로서 보병 4개 단(8천명)과 기병 4개 단(4천명) 이외에 치중대 4개 단(8천명)으로 편성되었다. 각 단은 구성원의 갑옷과 기치(旗幟) 등의 빛깔에 따라 구분되었으며, 1명의 편장이 이를 지휘하였다. 보병단의 편장은 각각 2천명의 군사를, 기병단의 편장은 각각 1천명의 군사를 지휘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군(軍)의 총사령관인 대장(大將)은 도합 2만여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셈이었다. 그 편제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각 단의 하위제대인 대(隊)는 보병과 기병이 동일하게 각각 1백명으로 편성되었으나, 보병과 치중대의 1단에는 각각 20개 대(2천명)가 소속되었으며, 기병 1단에는 10개 대(1천명)가 소속되었다.

한편, 각 군에는 적의 항복을 접수할 수항사자(受降使者) 각 1명씩이 별도로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소속군의 최고지휘관인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고 오직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투항자를 위무(慰撫)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와 같이 독특한 체제로 편성된 군은 좌군 12군과 우군 12군으로 모두 24군이 편성되었다. 그리고 각 군은모두 고유한 진군로(進軍路)를 부여받고 있었는데, 각 제대별 편성과 진군로 및 지휘관계는 다음과 같다.

좌군

제1군 육군 누방도(鏤方道 : 遼寧省 遼陽) 우둔위대장군 맥철장(麥鐵杖)
제2군 육군 장잠도(長岑道 : 遼寧省 瀋陽)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제3군 수군 명해도(溟海道 : 鴨綠江 河口)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
제4군 육군 개마도(蓋馬道 : 安東 通化) 좌둔위대장군 토만서(吐萬緖)
제5군 육군 건안도(建安道 : 安東 孤山) 미상  
제6군 육군 남소도(南蘇道 : 安東 新賓) 좌후위대장군 단문진(段文振)
제7군 육군 요동도(遼東道 : 遼寧省 遼陽)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제8군 육군 현도도(玄 道 : 遼寧省 鐵嶺)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
제9군 육군 부여도(扶餘道 : 遼寧省 昌圖) 좌광록대부 왕인공(王仁恭)
제10군 수군 조선도(朝鮮道 : 平壤) 금자광록대부 주법상(周法尙)
제11군 육군 옥저도(沃沮道 : 臨江·長白)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
제12군 수군 낙랑도(樂浪道 : 平壤) 우익위대장군 우중문(宇仲文)

우군

제1군 수군 점선도( 蟬道 : 平壤) 우어위호분낭장 위현(衛玄)
제2군 수군 함자도(含資道 : 漢江 流域) 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
제3군 수군 혼미도(渾彌道 : 平壤) 광록대부 이경(李景)
제4군 수군 임둔도(臨屯道 : 漢江 流域) 미상  
제5군 육군 후성도(候城道 : 遼寧省 瀋陽) 섭좌무위장군 번자개(樊子蓋)
제6군 수군 제해도(提奚道 : 平壤·義州) 미상  
제7군 육군 답돈도( 頓道 : 熱河省 朝陽) 우효위장군 사상(史祥)
제8군 육군 숙신도(肅愼道 : 遼寧省) 태복경 양의신(楊義臣)
제9군 수군 갈석도(碣石道 : 平壤) 우무후장군 조재(趙才)
제10군 수군 동이도(東 道 : 漢江 流域) 전 조군태수 어구난(魚俱難)
제11군 수군 대방도(帶方道 : 漢江 流域) 미상  
제12군 육군 양평도(襄平道 : 遼寧省 遼陽)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이와같이 하여 고구려 침공을 단행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완료한 수 양제는 612년 1월에 다음과 같은내용의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고구려 침공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전 군에 출동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제 고구려가 거만하고 공손하지 못하니 육사(六師 : 천자의 군대)를 나누어 여러 갈래 길로 함께 진격할지어다. 나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환도성(丸都城)에서 말에게 풀을 먹이고, 요수(遼水 : 요하)에서 군대를 사열할 것이니라. 이번 원정에서는 죄를 지은 괴수만을 처단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을 것이니 이 뜻을 선포하여 널리 알릴지어다."

수의 고구려 침공군은 612년 정월 초순부터 각 군간의 간격을 40리 정도로 유지하면서 하루에 1개 군씩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선두부대가 출정을 개시한지 40여일 만에야 최후미 부대의 출발이 완료되었으며, 그 행군대열은 무려 9천 6백여리에 이르렀다. 그리고 천자인 수 양제를 호위하는 군단인 어영(御營)은 내(內)·외(外)·전(前)·후(後)·좌(左)·우(右)의 6군으로 구분 편성하여 원정군 대병력의 후미를 따라서 출발하도록 하였는데, 그 대열의 길이가 80여 리에 달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598년의 제1차 침공로와 동일한 임유관-유성(朝陽)-회원진 통로를 따라 3월 중순경에 그 선두부대가 요하(遼河) 서안에 도착하여 요하 동안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군과 강을 사이에 둔 채 대치하게 되었다.

(2) 요하전투

수 양제는 출장하는 제장(諸將)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시를 내려 작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번 정벌은 학정에 시달리는 백성을위무하고 죄인을 토벌하 기 위함이요, 공명(功名)을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다. 제장 중에 혹시라도 경무장한 군사로 적을 기습한다거나 단독으로 싸워 개인의 공명을 세워 상을 받으려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대 군의 진법(陣法)이 되지못하는 것이다. 그대들은진군시에 3개 도(道)로 나누어서 나아가되, 어느 부대가 공격을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반드시 3개 도의 부대가 상호 정보를교환하고 협력할 것이 며, 결코 경솔하게 단독으로 진격하여 패망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 라. 부대의 기동과정지는 일체 나에게보고하고, 회보(回報)를 기다린 다음에 실행에 옮길 것이며,독단적으로 실행하지 않도록 하라."

수 양제가 직접 지휘하는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612년 3월 중순 에 요하 서안(西岸)의 회원진에 당도하였다.그러나 요동성(遼東城)에서 요하로 진출한 고구려군은 요하 동안(東岸)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군은 고구려군의 방어선 전면을 우회 하여 요하 하류지역으로일부 병력을 은밀히이동시켜 이곳에서 불시에 도하작전을 감행하여대안(對岸)에 교두보를확보한다는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에 따라 양제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우 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하류 지역에서둘러 부교(浮橋)를 가설할 것을 명령하였다. 수군은 양제의 부교 가설 명령이 있은 지 수일만에 요하 하류의 3개소에서 부교 가설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러자, 수 양제는 좌군 의 제1군 총사령관인 우둔위 대장군(右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과 호분낭장(虎賁郎將) 전사웅(錢士雄)의 부대로하여금 도하 작전을 감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수군은 준비된부교를 강물 위로 연결시켜 강 동쪽대안으로의 접안(接岸)을시도하였다. 그러나 수군이 준비한 부교는 1장(丈 : 10척)정도나길이가 짧아서 대안 의 상륙 예정 지점에 접안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군은 수군의 도하부대가 부교를 접안시키지 못한 채 부교 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을 타 부교를향해 궁시(弓矢) 사격 을 퍼부어 맹렬한 공격을가하였다. 그러자 부교에있던 수군들 가운데에서 날싸고 용감한일부 젊은 병사들은물속에 뛰어들어 고구려군과 대항하면서 요하 동안으로의 상륙을 시도하였다. 수군 장수 맥철장과 전사웅은 전투에 뛰어들어 결사적으로 독전하였다. 그러나 수군은 끝내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하지 못한 채 다수의 사상자만 내게 되었다. 제1군 총사령관인 맥철장과 호분낭장 전사 웅·맹차(孟叉) 등의 맹장(猛將)들이 혼전중에잇달아 전사하고, 수군은 여지없이 참패하고 말았다. 이 도하작전에서 수군이 의외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자, 수군 수뇌부는 전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일단 퇴각 명령을 내려 도하부대를 철수시키고, 부교도 철거하여강 서안으로 거두 어들였다. 이로써 수군 도하부대와 고구려의요하 수비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는 일단 고구려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당시 요하 동안에 배치된 고구려군은 요동성에소속된 요하 수 비군이었다. 고구려군도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적지 않았으나, 천 연 장애물인 요하와 그 주변 일대의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수군 의 도하 부대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초전에서 고구려군이수군의 도하기도를 저지하는 데에 성공을 거둠에따라 고구려군은 요동성을비롯한 요동지방 일대의 제성(諸城)이 전투태세를강화할 수 있는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수군의 도하부대가 일단 도하공격 기도를 유보하자, 요하 동안의 방어진지를 재정비하고 대안에 있는수군 진영의 동 태를 주시하면서 차후 다가올 결전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수군 진영에서는 최초의접전에서 맥철장·전사웅·맹차 등 주요 장수들이 잇달아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고구려군의 항전 태세가 의외로 굳건한 것을 알자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은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에 걸치는 20여일 동안 일체의 군사작전 을 중지한 채로 차후의 전투에 있어서의 대책 수립에 골몰하지 않 을 수 없었다. 20여 일이 경과하면서 수군의 후속부대가 계속하여 요하 서안과 그 후방 일대에 속속 도착하여 포진하면서, 수군의 군세가 왕성해 지기 시작하였다. 이에따라, 수군의 침체되었던분위기가 다소 회복되자, 수 양제는 또다시 대규모의 도하작전을감행할 것을 결심하고, 소부감(少府監) 겸 섭우둔위 장군(攝右屯衛 將軍)인 하 주(何稠)에게 추가로 부교를 대량 제작하여 도하작전 수행에 차질 없이 조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수일 후에 부교제작이 완료되 자, 수군은 일제히 도하작전을 재개하면서압도적으로 우세한 전 력으로 요하 동안의 고구려군 진영을 압박하였다. 고구려의 요하 수비군은 당초에 수군을 요하 서안에 20여 일 동 안 묶어 둠으로써 소기의목적을 달성하고, 그후에도 계속해서 요하 방어선의 경계태세를 강화하면서 또 다시 닥쳐 올 수군의 도 하작전을 저지할 태세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절대 우 세한 수군이 총력을 기울여 도하작전을 재개해오자 끝내는 고구 려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요하 수비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1만여명의 사상자를내고 요동성으로 퇴각하였다. 수군도 이 도하작전을 통하여수많은 사상자를 내었 다. 그러나 그들은 이작전에서 일단 고구려군의요하 방어선을 돌파한 뒤, 요하를 건너는 데 성공하고 곧이어 요동성 공략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3) 요동성 공방전

수 양제는 요하 전투에서 고구려군의방어선을 돌파하고, 일단 요하를 건너는 데 성공하자, 이를 최초의 승리로 간주하고 논공행 상을 통하여 관계장병들을격려하였다. 아울러, 이원정에 함께 참전한 돌궐족의 추정 처라가하(處羅可 )와 서역(西域)의 고창국 (高昌國)의 국왕 백아(佰雅)를 불러 요하 동안의 전장(戰場)을 구 경시키면서 그들에게 원정군의 위세를 은근히 과시하기도 하였다. 요하의 도하에 성공한 수군은 요하를 건너자 곧바로 요동성으로 진군하여 4월 하순부터 요동성에 대한포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 였다. 이와 동시에수 양제는형부상서(刑部尙書) 위현(衛玄)을 비롯한 관계관들로 하여금요동지역 주민들을위무하도록 하고, 이 지역에 수의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10년간 부역(負役)을 면제 해주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때 양제는 요동성 서남쪽에 주변 둘레 120보(步) 규모의 육합 성(六合城)을 세우고 이곳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전군을 직접 지휘 하였다. 이 육합성은 607년에 내려진 양제의신무기 개발 지시에 따라 발명된 것이었다. 이성은 요하 도하작전에서사용된 부교 제작을 담당하였던 소부감 하주가 개발한 조립식 성곽으로서 야전 에서는 주로 기병부대의 기습 공격에 효과적으로대응할 수 있는 방어용 영채(營寨)의 일종이었다. 고구려 군민들이 방어하고있던 요동성은 고구려전국의 60여 대성(大城) 중 하나로 요하의 지류인 태자하(太子河) 중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서남쪽의 안시성(安市城)과동북쪽의 신 성(新城)을 좌우에 끼고 있는 관계로 수도평양을 지향하고 있는 수군 진공로의 인후부를 제압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로서, 고·수 양국군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전략적 요지였다. 이 요동성은 평지에 축조되어 내성(內城)과외성(外城)으로 구 분되는데, 그형태는 모두장방형(長方形)이었다. 내성에는 정 치·군사등의 업무를 관장하는행정부서(行政部署)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외성에는 일반 백성들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동성의 내성은 외성의 중앙부에 위치하지 않고, 외성 후편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축조된 것으로서 그곳에는 외부로 통하 는 1개의 성문이 있었다. 따라서, 요동성의 내성에는 외성을 거치 지 않고 곧바로 외부와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성과 외성 사이에도 1개의 통용문이 있었으며, 외성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성문은 1개가 있었다. 이와 같이 요동성은 모두 3개의 성문이있었으나, 외부로 직통 할 수 있는 성문은 내성과 외성에 각각1개씩 설치되어 있었으므 로 성 내부에서 외부와 직통하는 2개의 성문만 봉쇄하면 외부로부 터의 진입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이점을지니고 있었다. 더욱 이, 이 요동성은 요동지방 최대의 전략거점이었던 관계로, 다량 의 무기와 50만 석의 군량이 비축되어 있어 외부의 지원이 차단된 상황에서도 장기간 농성(籠城)을 계속 하면서 적의 군사적 활동을 억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군의 요동성에 제1방어선의 주력부대를 배치하여 이곳에서 초전에 수군의 침공을 저지할 결의를 굳혔던 것이며, 수 군도 전력을 기울여 이를 공취(攻取)하여 요동지방 전역을 석권함 으로써 대고구려전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을 기도하였던 것 이다. 수군은 4월 하순부터요동성의 동·서·남쪽 3개방면에 주력 (主力)부대를 배치하여 포위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요동성 내 의 고구려 군민들도 성문을 완전히 봉쇄하고경계 태세를 강화하 면서 장기적인 농성작전(籠城作戰)에 돌입하였다.수적인 면에서 군사력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입장에서는 수성전 술(守城戰術) 위주의 장기농성을 계속하다가 적측의 예봉(銳鋒)이 둔화되고 경계태세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적 인 공격을 가하는 소극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대 책이라는 판단하에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한편, 요동성 부근 일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야영을 하면서 공 격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수군 진영에서는이미 보급선(補給線)이 지나치게 확장되어 군량 공급이 원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기 (雨期)가 시작되기 이전에작전을 종료해야 한다는부담을 안고 있었으므로 속전속결을 위한 공성작전(攻城作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수군 공성부대는 공격실시 과정에 있어서 빈번히 작전상의 결함을노출시키게 되었으며,그때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고구려군의 기습적인 출성공격(出城攻擊)을받게 되 었다. 수군은 정예부대인 부병(府兵)을주력으로 하여5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요동성 공격작전을개시하였다. 양제의명령에 따라 607년부터 신무기의 발명과제작에 동원되었던많은 기술자들이 종군하여 전쟁에서 필요한무기들을 현지에서직접 제작하였다. 특히 서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문개 와 하주 등은 무기제작 기술이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제작조달한운제(雲梯)·충차(衝車)·화차(火車)·발석차(發石車) 등과 같은 각종 공성무기들이 사용되었다. 수군 공성부대는 우선 성문을 파괴하거나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 리는 데 주력하였다. 요동성 주변의 곳곳에 운제를 설치하여 요동 성 내부의 대응 태세를 감시하면서, 발석차로 다량의 돌을 성안으 로 날려보내어 고구려군민들의 방어 태세를와해시키고자 하였 다. 이와 아울러 충차와 화차로는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문을 소각 시키는 입체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이에 대응하여 철질려(鐵 藜 : 마름쇠)를 성벽 주위에 집중적으로 매설함으로써 수군공성부대가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그리고 성에 접근하는 밀집부대에 돌멩이를 날려보내어 심대한타격을 가할 수있는 포차(砲車)를 성 위와 성 안의 요소요소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최초로 수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고구려 군민들은먼저 수군 공 성부대의 후미에 대하여포차에 의한 투석과궁시(弓矢) 공격을 감행하여 그 전열을 교란시켰다. 또한, 수군 공성부대의 선두대열 은 성벽 바로 밑까지 접근하면서부터 철질려에걸려들어 많은 부 상자를 내게 되자 그들의 공성무기인 충차와화차를 제대로 공격 에 활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수군은 6월초순까지 수 차례에 걸쳐서 이와 같은 공격을 반복하여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마다 성벽에 기어올라 보지도 못한 채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공격작전은 아무런 진척도 없이 시일만 지연되었다. 한편, 요동성 내의 고구려 군민들은 수군의 포위 공격에 무력으 로 맞서 대응하면서도 일면으로는 적의전의(戰意)를 약화시키기 위한 외교적 책략을 적절히 구사하였다. 즉, 고구려군측에서는 수 군의 공세가 강세를 보여 성의 수비가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고 판단될 때에 지체없이 수군 진영에항복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그 공격 기세를 완화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이와같은 책략이 주 효하여 수군의 공격이 완화되면 고구려군은 이틈을 이용하여 재 빨리 전열을 정비하고 무너진 성곽을 복구하는 등 방위 태세를 한 층 강화하였던 것이다. 당시 수군 공격부대의 장수들은 이미양제로부터 '원정기간 중 의 독단행위를 금지한다'는 엄명을 받은 바있었다. 그러므로 그 들은 요동성의 고구려군이 항복 의사를 표명해올 경우에도 그에 따른 기민하고도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수가없는 처지였다. 모든 상황을 양제에게 일일이 보고하여 그에대한 지시가 내려진 뒤에라야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수항사자(受降使者)가 고구려측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 전후 왕복 교섭에는상당한 기간이 소요되 었다. 그러나 요동성내의 고구려 군민들은 그 사이에 태도를 돌변하여 수비 태세를 강화한 다음, 항복을 거부한 채오히려 수군에 기습 공격을 시도하였다. 항복을 미끼로 한 고구려군의 이와 같은 기만 술책은 두세 차례 나 되풀이되어 수군 진영의 공세를 이완시킴으로써 요동성을 지탱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한 반면에 고구려군의 술책에 말 려들어 요동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수차의결정적 기회를 놓치게 된 수군측은 예기(銳氣)가 둔화되어 시일이 장기화될수록 성을 함 락시킬 가능성은 희박해져 갔다. 수 양제는 뒤늦게서야 고구려측의 지연술책을간파하고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가 공성작전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수군은 2개월이라는 장기간 동안 계속된고착상태를 해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수군 진영에서는 더 이상원정군의 전 병력을 요동성 한 지역에만 묶어둔 채로 장기전을 전개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심하게 되었다. 이에 수 양제는 요동성 남쪽 가까이에나아가 고구려 군민들의 방위 태세와 주변 지형을 지접 정찰한 후 장수들을 소집하여 다음 과 같이 질책하였다.

"내가 도성(都城)에 있을 때 그대들은모두 나의 친정(親征)을 원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바로 내가 그대들의참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구나! 내가 여기에 온것은 바로 그 대들의 처사를 보고(죄있는 자의) 목을베기 위함에서이다. 그대 들은 이제까지 죽기가 두려워기꺼이 힘을 다해싸우지 않았다. 그대들은 내가 진정으로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

수 양제는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불과 수 리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행궁(行宮)인 육합성을 옮기고 몸소 전투현장에 나아가 제 장(諸將)들을 독려하는 가운데 수 차례에 걸쳐총력을 기울여 공 성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수양제의 진두 지휘에의한 요동성 공격으로도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함으로써 수군의 요동성 공략 작전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양제는 앞서 원정군이 출정할 무렵에 합수(合水 : 감숙 경양)의 수령인 유질( 質)과, 제6군총사령관 단문진(段文振)이 건의한 계책인 '속전속결(速戰速決)의 단기전'을 상기하고 기동성 이 뛰어난 일부 정예병력을 고구려의 수도평양으로 신속히 진출 시켜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고구려 국왕의 항복을 받아 낸다는 새 로운 전략목표를 세우고서둘러 그에 따른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4) 평양 부근 전투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있어서 수로군(水路軍)의 역할을 중시 하였다. 그리하여 611년2월에 유주총관(幽州總管)원홍사(元弘嗣)에게 명하여 산동반도의 동래(내주) 해안에서 전선 3백척을 건 조하도록 하고,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이남지역에서 수수 (水手 : 수병) 1만명을 차출하여 이를동래에서 출정준비를 완료 한 후, 탁군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총 24군 규모의 고구려 원정군을편성함에 있어서도 좌 우 각 12개 군씩 편성하면서, 13개 군을 육로군(陸路軍)으로 편성 하고, 나머지 11개 군은 수로군으로 편성하였다. 당초에 좌군에서 3개군, 우군 8개군을 각각 수로군으로 편성하였으나, 그중에서 좌 군의 제12군과 우군의 제1군·제2군·제9군 등 4개군은 다시 육 로군의 별동부대(別動部隊)에 편입되었으므로 실제로는 그 나머지 7개군만이 수로군의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던바, 그 편성은 다음과 같다.

수로군 구성

좌군 제3군 수군 명해도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
좌군 제10군 수군 조선도 금자광록대부 주법상(周法尙)
우군 제3군 수군 혼미도 광록대부 이경(李景)
우군 제4군 수군 임둔도 미상  
우군 제6군 수군 제해도 미상  
우군 제10군 수군 동이도 전 조군태수 어구난(魚俱難)
우군 제11군 수군 대방도 미상  

612년 정월, 탁군에서 좌 제12군과 우 제1·제2·제9군 등 수로 군 4개 부대가 육로군의 뒤를 따라요하를 지향하여 동북진하고, 나머지 좌 제3·제10군과 우 제3·제4·제6·제10·제11군등 수 로군 7개 부대는 동남진하여 산동반도의 동래로 집결하였다. 그리 하여 이들 수로군은 좌 제3군과 제10군을 주력부대로 하고 나머지 군을 지원부대로 편성하여 육로군과 서로 호응하면서 수륙 양면에 서 협동작전을 추진해나가게 되었다. 이로써수로군은 598년의 제1차 고구려 원정에서 군량과 기타 군수품 수송을 담당하였던 단 순한 지원부대의 역할이 아닌 육로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하는 전투 부대로 그 임무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수의 수로군은 출정준비가 완료되자 산동반도의 동래를 떠나 묘 도열도(廟島列島)를 따라 동북진하여 요동반도의 남단으로 항진하 였다. 그런 다음, 요동반도 남단의 해안을따라 동진을 거듭하여 압록강 하구에 이르자, 진로를 남으로 바꾸어 대동강 하구를 향하 여 항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수로군이 이동한 항로(航路)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왕래 하는 각종 선박들에게 전통적으로 이용되어 온 뱃길이었다. 이 뱃 길은 그대로 해상통로를 거쳐서 한반도 서해안과 연결되어 백제나 신라·왜(倭)와 통할 수있는 안전한 해상교통로로서 각국간의 문화 교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의 수로군은 산동반도에서 서해를 횡단하여대동강으로 직진 하여 고구려측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지름길을택하지 않고, 비록 항해거리가 길어서 고구려측에 이동상황을발각당하기는 쉬우나, 비교적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이북방해안선을 연하는 통로를 따라서 대동강 하구까지 이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수의 육로군은 4월 하순에 요동성에대한 포위망을 구축 한 이후 여러 차례의 거듭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완강 한 저항과 교묘한 지연술책으로 말미암아6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이렇다할 전황의 진전이 없이 요동지역 일대에대군의 발이 묶이 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익위 대장군(右翊衛 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로군의 선단(船團)은 대동강 하구의 남포(南浦) 부근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 해안 일대에상륙하여 평양으로 진공 할 준비 태세를 갖추기시작하였다. 수로군의 이와같은 대동강 진출은 육로군이 요동지역에 돈좌(頓挫)되어 평양성을향하여 출 발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수로군이 일방적으로 감 행한 독단적인 군사행동이었다. 대동강 하구 연안의 하안지역에 상륙한 수로군은 서둘러서 부대 를 재편성하여 출동준비를완료하자, 요동성공방전에서 고전을 하고 있던 육로군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단지 협동작전에 용 이한 지역을 선점한다는 목표하에 평양성을 향하여 육로로 진군하 였다. 내호아의 수로군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향하여 동북진하 던 도중, 고구려군은 평양성으로부터 불과 1백여리 떨어진 곳에서 수군에게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고·수 양군 사 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고구려군은이 전투에서 기습적인 선제 공격으로 내호아군의평양성 진출을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인하여 오히려 패퇴당하고 말았다. 수로군 총사령관인 내호아는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지척의 거 리에 두고 고구려군과의 첫 전투에서 승리를거두자 자만심에 빠 져 차기작전을 서두르기시작하였다. 내호아는자신이 지휘하는 수로군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속단한 나머지 육로군과의 협동작전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기로되어 있던 당초의 계획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호아의태도에 대하여 수로군부사령관인 부총관 (副總管) 주법상(周法尙)은 당초에 계획된 바대로육로군의 도착 을 기다려 평양성을 전후에서 협공할 것을 주장하면서 내호아에게 독단적 행동을 자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내호아는 초전에서 의 승세를 타고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군할것을 고집하여 양자간 에는 의견이 상충하게 되었다. 결국내호아는 주법상을 대동강구 의 정박지에 잔류시켜 전함의 경비를 담당하도록 한 다음, 자신은 4만여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고구려군 수뇌부는 최초 접전에서 내호아군의 전력을 탐지 한 결과를 기초로 하여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리 하여 고구려군측에서는 초전에서 쉽사리 승리한 나머지 사기가 높 아져 있는 내호아군을 공격에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해들인 다음에 기습공격으로 타격을 가하여격퇴시킨다는 작전계획을수립하였 다. 이에 따라 고구려군은 정예병을 선발하여결사대를 편성, 이들 을 평양성 외곽의 비어 있는 사찰(寺刹)일대에 매복시켜 일전을 결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사찰을 중심으로그 외곽 일 대에 군사를 배치한 후 별도의 1개 부대를내호아군의 진출 예상 로 전면에 배치하여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면서 그들을 매복지역까 지 유인해들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호아군은 고구려군과의 접전이 시작되자당초의 계 획대로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는 고구려군의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아무런 의심도 없이고구려군 정예부대가 매복해있는 지점으로 대군을 이끌고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사찰경내까지 진입한 내호 아의 대군은 광범위한 사찰 내부 구석구석과 그 부근 지역 일대까 지를 수색하면서 거침없이 약탈을 자행하였다. 내호아군이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한 지역 일 대를 포위하여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 결사대는 내호아군이 방심 한 채 무질서하게 약탈에여념이 없는 틈을 타사방에서 일제히 기습공격을 가하였다. 내호아군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큰 혼 란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공격을받게 되자, 전 열이 흩어져 통제력이 마비된 상태에서속수무책으로 우왕좌왕하 다가 섬멸적인 타격을 입게되었다. 헤아릴 수없으리만치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에 수로군 총사령관인 우익위 대장 내호 아마저 구사일생으로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와탈출할 정도 로 수군은 참패를 당하였다. 내호아군이 막대한 사상자를 낸 끝에 가까스로 고구려군의 포위 망을 벗어나 그들의 정박지로 퇴각을개시하자, 고구려군은 일단 전열을 정비한 후에추격전을 전개하였다.고구려군 추격부대는 패주하는 내호아군의 후미를쫓아 대동강 하구의남포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미 내호아의 패전부대는 정박지에 잔 류하고 있는 주법상부대와 합류하여 강력한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군도 일단 추격을중지하고 수군과 대치하면 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수의수로군과 고구려군 사이의제2차 전투는 고구려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고 그로부터한동안 양군 사 이에는 서로 형세를 관망하는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후, 8월 중순경에 이르러 우익위 대장내호아는 우문술의 육 로군 별동부대가 살수 전투에서 고구려군에대패했다는 전황보고 와 함께 퇴각명령을 전달받고 서둘러대동강구를 빠져나왔다. 이 로써 수나라의 수로군은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막대한 장비와 인 명만을 손실하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로 산동반도의 동 래(東萊)로 돌아가고 말았다.

(5) 살수전투

수 양제는 612년 4월 하순부터 6월 상순에 이르기까지 요동성에 대한 포위 공격작전을 계속하였으나, 2개월 동안이나 전황의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수양제는 진중에서 병사(病死) 한 좌후위 대장군단문진(段文振)의 유언을 상기하고그에 따른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좌 제6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좌후위 대장 단문진 은 요하에 도착하기 전에 진중에서 병사하였는데, 죽기 직전에 양 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고구려 전략을헌책(獻策)한 바 았 다.

"고구려군은 그 술책이 변화무쌍하니, 항복을 제의해 올 경우에 도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지 마옵소서.그리고 공격작전 수행간에 는 1개 거점의 공략에집착하지 마시고 주야로강행을 거듭하여 오직 평양성을 목표로삼아 수륙양면진공작전을 단행하십시오. 평양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거점들은 저절로붕괴될 것입니다. 한 곳에서 시일을 오래 끌다 우기(雨期)가 다가오면 군량보급의 수송 로가 끊길 것입니다."

수 양제는 이와 같은 단문진의 유언에 따라 요동성에 대한 공격 을 그대로 계속하되, 한편으로 일부정예부대로 별동부대(別動部隊)를 편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고구려의수도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성을 점령하는 계획으로전환하였다. 그리하여좌·우 24개 군(軍) 중 좌군에서 제2·제7·제8·제11·제12군을선발하고 우 군에서는 제1·제2·제9·제12군을 선발, 이를 별동부대로 편성하 고, 좌익위 대장 우문술의뛰어난 지략을 인정하여그로 하여금 전군을 총지휘하도록 하였다. 제대별 진공방향과 지휘부서는 다음 과 같다.

별동부대 구성

좌군 제2군 육군 장잠도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좌군 제7군 육군 요동도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
좌군 제8군 육군 현도도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
좌군 제11군 육군 옥저도 우익위장군 설세웅(薛世雄)
좌군 제12군 수군 낙랑도 우익위대장군 우중문(宇仲文)
우군 제1군 수군 점선도 우어위호분낭장 위현(衛玄)
우군 제2군 수군 함자도 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
우군 제9군 수군 갈석도 우무후장군 조재(趙才)
우군 제12군 육군 양평도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수 양제는 고구려 침공 초기까지'고구려군이 제아무리 많을지 라도 그 형세가 우리 1군(一軍)을 당하지 못할 것이어늘, 내가 이 렇듯 대군으로 정벌하니 승리하지 않을수 없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수 양제는 요하전투와 요동성 공격전에 서 구태여 부병(府兵)으로 구성된 정예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 는 판단하에 모병으로 구성된 병력을주공부대(主攻部隊)로 동원 하였다. 그러나 수 양제가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요하 전투와 요 동성 전투에서 수군은 전략상으로 모두 차질을빚어 오랜 시일과 허다한 병력 및 물자를 낭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 양제는 초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시행착오를 교훈으로 삼 아 별동부대를 편성함에 있어서는 그동안요하와 대릉하(大凌河) 하류 부근에 주둔하면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있던 정예 부병을 동원하였다. 9개군으로 된30여만 명 규모의별동부대는 대릉하 하류의 노하진(瀘河鎭 : 금주)과 요하 하류의 회원진(懷遠鎭 : 요 중)에서 평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별동부대는 군사와 군마(軍馬)가 각각 1백일분량의 식량과 무 기, 그리고 갑옷, 천막등을 한꺼번에 지급받아휴대하였다. 그 무게는 1인당 3섬(石) 이상이나 되어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 게 과중한 분량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식량과장비를 유기할 우려 가 있었다. 별동부대의 총사령관인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은 '누구든지 식량을 버리는자는 목을 벤다'는엄중한 군령(軍令)을 내려 식량을 유기하는 행위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숙영지에서 막사 밑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식량 의 일부를 묻어 버림으로써상관의 단속을 피하였다.이에 따라 30만의 별동부대는 고구려의수도 평양에 접근하기훨씬 이전인 출발 초기의 단계에서부터 모두 심각한 군량난으로 시달리지 않으 면 안되었다. 한편, 수군 별동부대 30만이 압록강 서안에 당도하여 도하 준비 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고구려의영양왕은 대신(大臣) 을 지문덕(乙支文德)을 수군 진영에 파견하여 적정을자세히 탐지한 연후에 그 대책을 강구하기로 복안을 세웠다.이에 따라, 을지문 덕은 출발에 앞서 수군 진영에 항복의 뜻을 통고하여 그들을 안심 시킨 다음, 수행원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 다. 한편, 우중문은 별동부대를 이끌고 출정할 당시에 양제로부터 '만일에 고구려 국왕이나 대신을지문덕을 만나게 되면그 즉시 생포하라'는 밀명(密命)을 받은 바 있었다. 그리하여 우중문은 을 지문덕이 그들의 진영 안에 들어오자 즉시그를 포박하여 감금하 려고 하였다. 그러나위무사(慰撫使)로 참전한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이를 반대하여을지문덕은 무사히 수 군 진영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않아서 우중문은 을지문덕을생포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고, 이미 귀로에 오른 을지문덕에게 급사(急使)를 뒤쫓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 다시 한 번 와 주기 바라오."

그러나 을지문덕은 급사의 전언(傳言)을 묵살하고서둘러 압록 강을 도하하여 평양성으로 귀환하였다. 그러자 수군 별동부대 진영에서는 그제서야고구려측의 항복을 위장한 군정(軍情) 탐지 술책에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 따른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러나 수군진영의 제장들간에는 의견 이 상충되어 전진과 후퇴, 두 가지 방안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립 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좌익위 대장군우문술을 비롯한 제장들 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즉시 철군할 것을 주장하면서 우중 문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은 을지문덕 일행을 추격하여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하면서 철군을 주장하는 우문 술과 제장들을 질책하였다.

"장군은 수십만 대군의 위세를 가지고서도이 보잘것없는 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대하시려오. 나오 이번 전역(戰役)에서 성공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소. 왜냐 하면 옛날의 유능한 장수들은 모든 일을 독단으로결정할 권한을 가지 고 있었으나, 지금의 우리 형편은 그렇지가 않을 뿐 아니라, 사람 마다 이렇듯 모두의견이 다르니, 어떻게적을 이길수가 있겠 소."

수군 진영의 제장들은 양제로부터 전군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있 는 우중문이 끝까지 전진할 것을 주장함에 따라 더 이상 반대의사 를 주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군별동부대는 우중문의 주장 대로 을지문덕 일행의 뒤를 추격하여 압록강을건너 고구려 경내 로 깊숙히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을지문덕은 수군 진영 방문을 통하여 수군의 정황을 면밀 히 관찰한 결과, 수군 진영에는 엄정한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않고 있으며, 무리한 강행군에 식량난까지 겹쳐서군사들의 사기가 극 도로 저하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러한 사정을 적절히 활용 하면 수군을 용이하게 격파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을지문덕은 수군 진영의 식량 부족현상을 가중시키기 위하여 일면 접전, 일면 후퇴라는 양면전술로 수군 별동부대를 고구려 영 내 깊숙히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수군 별동부대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한시바삐 점령하기 위 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을지문덕의 뒤를 추격하였다. 그러나 고 구려의 청야작전(淸野作戰)으로 말미암아 식량을 확보할수가 없 어서 수군의 전투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문술의 좌 제2군을 선두로 한 수군의 추격부대는 을지문덕 의 후미부대를 공격하여 빈번히 승리를거두자, 그들 별동부대가 안고 있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간과한 채 경무장(經武裝)으로 신속 히 이동하면서 점점 깊숙히 고구려 영내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수군 별동부대는심지어 하루에 일곱차례나 싸워서 일곱 차례 모두 승리한경우도 있게 되자 자만심이자못 고조되 어, 진중에서는 승세를 타고속전속결(速戰速決)로 전국(全局)의 대세를 판가름해 버리자는 여론이 비등하게되었다. 수군 추격부 대는 의주(義州)-선천(宣川)-박천(博川)-살수(薩水 :청천강)-안 주(安州)지역을 연하는 경로를 따라 7월 초순 무렵에 평양성 북쪽 30여 리 지점의 신점(新店) 부근에 이르러 일단 추격을 멈추고 부 근의 산악지대와 그후사면인 순안(順安) 남쪽지역에 군사들을 분산 배치하였다. 이에 을지문덕은 평양성 북방 20여리 지점의 원현(院峴) 좌우측 산악지대에 정예부대를 배치하여 수군 추격부대와불과 10여리의 간격을 두고 대치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을지문덕은 수군 별 동부대 사령관인 우중문의 진중에 다음과같은 내용의 오언시(五言詩)를 지어 보내어 은근히그 무모한 진군을풍자하고 철군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천문을 알았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마저 통달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거든 이제 그만 멈추심이 어떨고

그러나 우중문은 을지문덕에게 답서를 보내어오히려 고구려군 측에 조속히 항복할것을 촉구하였다. 한편,을지문덕은 우중문 진영에 사자를 보내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당초에 추격전을 반대 하고 철군을 주장한 바 있는 최선두의추격부대 지휘관인 우문술 의 진중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보내어 거짓 항복의사를 표명함으로써 교묘하게 적을 기만하려고 하였다.

"만약(그대들이) 군사를 철수시킨다면, 왕(영양왕)을 모시고 행 재소(行在所 : 수 양제의 임시 처소)로 황제를배알하러 갈 것이 다."

을지문덕의 항복의사를 표명하는 서신을 접수한우문술은 고구 려군측의 항복의사를 접수한 그 자체만으로서도 일단은 수군의 체 면이 세워진 것이라고 간주하여 자신의 독자적판단에 따라 철군 을 결심하였다. 우문술은 그동안의 강행군과 식량의 부족으로말미암아 군사들 이 극도로 지쳐 있을 뿐 아니라, 평양성부근의 지세(地勢)와 적 정(敵情)을 정찰한 결과 고구려군이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견고 하게 수비하고 있어서 쉽사리 함락시킬 수없다는 판단하에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이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 해안 을 따라 항해하여 대동강에 도착하기로 한 수로군(水路軍)과의 연 락이 두절되어 수륙양면 작전이 불가능해진당시의 상황하에서 우문술은 신속한 철군만이 수군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책이 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군 추격대는 좌익위 대장군우문술의 지휘하에 고 구려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사주 경계에효과적인 방진(方陣) 대형을 유지하면서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수군 철수부대는 7월 하순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그북방의 살수(薩水)를 도하 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서둘렀다. 한편, 고구려군측에서는 철수하는 수군에게 일대 요격을 가하기 위하여 이미 안주지역의 청천강 상류 일대에은밀히 군사를 배치 하여 수공작전(水攻作戰)을 전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살수 상류의 강폭이좁은 지역에 임시로제방(堤防)을 급조하고 이곳에 강물을 최대한으로 저수(貯水)하여 수군철수부대의 도하 작전을 교란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7월 하순, 수군 철수부대는 살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수군 철 수부대의 중간대열이 강폭 5리나되는 살수를 절반쯤건너 강심 (江心)에 이르렀을 때 살수 상류지역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상류를 막고 있던 제방을 일거에무너뜨려버렸다. 순식간에 강물 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한창강을 건너고 있던수군 철수부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휘말려들어 강을 이미 건너기 시작한 군사 들의 대부분이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도하중인 수군 철수 대열에 이와같이 수공을 가하 는 한편으로 후미의 추격부대로 하여금 미처도하하지 못한 수군 의 후미부대에 공격을 가하도록 하였다.그리하여 그때까지 도하 하지 못하고 있던 수군철수부대는 원풍리(元豊里)·장흥리(長興里)·원흥리(元興里) 일대 3면에서 매복하고 있던고구려군의 기 습공격을 받고 섬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살수를 도하할 당시의 수군 철수부대는 이미 식량난이 악화되어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진깊숙히 들어와 고구 려군의 포위망 속에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공포감으로 인하여 사기 마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일단 고구 려군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삽시간에 전군의 대열 이 무너져 다시 수습할 수 없응 지경의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철수부대의 후미를엄호하던 좌 제8군 사령관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은무너지는 대오를수습하기 위하여 좌충우돌하면서 분전을 계속하다가 고구려군의 난전(亂箭) 과 시석(矢石)의 집중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밖의 군 사들도 대부분이 변변히 응전조차 해보지 못한채로 난군중을 우 왕좌왕하다가 살수의 급류에 휩싸여 여지없이 궤멸되고 말았던 것 이다.

이와 같이 수군 철수부대는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작전에 밀 리어 섬멸적인 타격을 입고 가까스로 일부패잔병을 수습하여 압 록강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고구려군은 수군이 지리멸렬 상태에서 박천-정주-선천로를 따라 북상하자그 후미를 놓치지않고 바싹 추격하였다. 수군은 쉴사이 없이 계속되는 고구려군의 끈질긴 추격에 시달리 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4백여 리 길을 강행군하여 의주 남쪽 30 리 지점의 백석산(白石山 : 백마산) 부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 구려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압록강을 건널 수가 있었다. 우익위 대 장군 설세웅(薛世雄)이 지휘하는좌11군의 엄호하에고구려군의 추격내에서 벗어나 가까스로 압록강을 건넜으나, 이곳에서 요동까 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허다한 도망병과 낙오병이 속출하여 최종적 으로 요동성의 본대에 합류한 병력은 3천여 기에 불과하였다. 결국, 요동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향하여 진군한 수의 별 동부대 30만은 고구려군의 유인 및 반격작전에말려들어 그 전투 력이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별동부대의 참담한 패배에 충격을 받은 수양제는 당시의 상황 으로서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 리고, 전군에 철군 명령을 내려 준비가 완료되자 8월 25일을 기하 여 본국으로의 철군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1백만이넘는 수의 원정군을격퇴하여 제2차 고·수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고·수 전쟁에 서 고구려가 거둔 이와 같은 승리에 대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 며 역사가인 안정복(安鼎福 : 1712∼1719)은 그의 저서인「동사강 목(東史綱目)」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쟁의 승패는 군 병력의 다소에달린 것이 아니고, 장수의 능력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다.전진(前秦)이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동진(東晉)을 침공했을 때 사현(謝玄)이8만 밖에 안되 는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 단 한번 싸움에 전진군을 궤멸 시키니, 이는 진이 유능한 장수를기용하여 임기응변으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수 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강성한 군사력과 부강한 국력이 전진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양제는 전국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총력을 기울였 다. 고금을 통하여 이와 같이 대규모의 병력을동원한 예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고구려로서는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애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을지문덕은 몹시 혼란 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침착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기회를 틈타 전력을 다해 적을 공격하여 마치 마른나뭇가지를 분지르고 썩은 나무등걸을 뽑아 제치듯이 적을 궤멸시켜 수양제가 패전하고 돌 아가게 함으로써 그를 온 세상의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렸다... 문 무를 겸전한 뛰어난 재능과 지용을 두루 갖춘 자가 아니라면 뉘라 서 이런 장한 일을이룩할 수 있었겠는가...후세에 이르기까지 (외적이) 우리나라를 강국으로알고 감히 함부로침범하지 못한 것은 을지문덕이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

3) 제3차 고·수 전쟁

(1) 수군의 침공계획

수 양제는 제2차 고구려 침공에서 100만이넘는 대군을 동원하 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참패를 당하자 철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나 수 양제는 612년 8월에 철군하면서 제3차 침공을 계 획하고 무려라성(武 邏城)에 일부 병력을 잔류시켜요하 중류지 역에 대한 감시체제를강화함으로써 이를 차후에전개할 고구려 침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무려라성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조직으로서 요동군(遼東郡)을 두고, 군사조직으로는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여군정(軍政)을 실시함으로써 미구에 전개할 고구려 침공작전에대비하고자 하였 다. 무려라는 요하 중류의 요서지역에 설치된고구려군의 감시소가 있던 곳이었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요하를건너 변경지역으로 들 어오는 자들을 감시하고, 그와 동시에수의 정치·군사적 동향을 정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수 전쟁때에 고구려가 군 사들을 철수시킨 후로 이곳은 수의 수중에들어가 그들이 고구려 침공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양제는좌둔위 대장군(左屯衛大將軍) 토만서(吐萬緖)로 하여금 좌 제4군을 거느리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수비하면서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도록조치하는 한편,여양(黎陽)·낙구(落口)·태원(太原) 등지에 비축되어 있던 군량을 요서지역의 망해돈 (望海頓 : 금주) 일대로 이송하였다.그리고는 섭좌무위 장군(攝左武衛 將軍) 번자개(樊子蓋)를 탁군( 郡 :북경)의 유수(留守) 로 임명하여 우 제5군을 거느리고 전쟁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한편, 수 양제는 그해(612) 9월에 제2차고구려 침공에 참전한 주요 장수들의 패전 책임을 물어 그들의관직을 삭탈하고 서민으 로 강등시켰다. 특히, 우중문이 진중에 찾아온 을지문덕을 생포하 려고 하였을 때 이를 만류하였던 위무사 유사룡(劉士龍)은 참형에 처하여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총력을 기울인 제2차 고·수 전쟁에서 수가 참패 를 당하게 되자, 전쟁 물자의 과다한 징발로말미암아 경제적 파 탄에 이르게 된 일부농민들은 조정에 대한 불만을표출하여 수 제국에 정면으로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수의 정국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내외적 으로 수제국의 위신이 실추되어 양제는 통일제국 황제로서의 권위 에 커다란 손상을 입게되었다. 이와 같이급변하는 국내정세를 수습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수양제는 제3차 고구 려 침공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동시에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제는 613년 정월에 조서(詔書)를내려 전국의 정예 부병(府兵) 30여만 대군을 탁군(북경)으로 집결시키도록 명령하는 한편, 요동의 고성(古城)을수축하여 이곳에군량을 이송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출정 기간 동안태자(太子) 양유(楊侑)로 하여금 국정을 처리하도록 하고,형부상서(刑部尙書) 위현 (衛玄)에게 태자를보좌하도록하였다. 이어서 2월에는 제2차 고·수 전쟁에서의 패전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하여 서민으로 강등 시켰던 우문술(宇文述) 등의 죄를 사면하고 그들을 재기용하여 군 사 지휘권을 다시 부여하였다. 한편, 수 양제는 측근의 신하들에게 고구려 침공 계획을 논의하 도록 지시하면서, 제3차 고구려 침공에 대한자신의 의견을 다음 과 같이 피력하였다.

"하찮은 나라 고구려가 우리 대국을 모욕하였다.우리 군의 위 세가 이제 바다를 메우고산을 옮기는 일이라도 충분히해낼 수 있거늘, 하물며 고구려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은 다음과 같이 양제가 직접 전선(戰線)에나아가 진두 지휘하는것을 만류하였 다.

"수천 근(斤) 무게의 위력을 지닌 활은 생쥐를잡는 데에 쓰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하여 만승(萬乘) 천자의몸으로 욕되게 변방 에 거동하시어 하찮은 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

그리고 태사령(太史令) 유질(庾質)도 양제의 질문에대하여 곽 영과 동일한 내용의 반대의사를 표명하여 양제의 친정(親征)을 만 류하였다. 그러나 수 양제는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자신의 친정만이 승 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단언하면서 친정 결의를 거듭 천명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수 제국 내부의 불안한정국을 감안하여 수도 대 흥(大興 : 장안)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제반 대책을 수립 하였다. 613년 3월 초, 수 양제는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을 출발함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을여양 (黎陽)에 파견하였다. 양현감에게는여양을 거쳐탁군에 이르는 운하(運河)인 영제거(永濟渠)를 이용하여 군량을 수송하도록 임무 를 부여하고, 후방으로부터의 군량 수송에 차질이 없도록 할 것을 각별히 당부하였다. 이처럼 출정기간 동안의 수고 경비와 군량수송을 위한 만전의 대책을 강구한 후, 수양제는 그해 4월에 대군을이끌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변경지역으로진입함으로써 마침내제3차 고·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때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이 지휘하는 주공부대는 제2차 침 공 당시와 동일한 유성-의현-회원진을 연하는 통로를 거쳐 요하를 건너 요동성(遼東城)으로 진출하였다. 수군의주공부대가 요동성 에 이르러 포위태세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인5월 중순, 선두부대 인 전군(前軍)으로 가장 먼저 탁군을 출발한 왕인공(王仁恭) 부대 는 요하의 지류인 훈하(渾河) 서안을 따라동북진하여 훈하 중류 지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었다.

(2) 신성 공방전

고구려의 신성은 제2차고·수 전쟁무렵에 무려라(武 邏)의 감시소를 폐쇄한 이후로 서북 변경의 가장중요한 군사 거점으로 서 국경 감시소의 임무를겸하고 있었다. 더욱이양제가 재침을 염두에 두고 무려라에 군진(軍鎭)인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고, 행정구역으로 요동군(遼東郡)을 두어 그 부근의광범위한 지역을 여기에 편입시킴으로써 강력한 군정(軍政)을 실시하게된 이후로 신성의 중요성은 크게 증대되었다. 고구려동북 변경지역 개모주 (蓋牟州)의 중심 거점인신성은 훈하 중류의평야지대에 축조된 평지성(平地成)으로서 요하 중류 서안의 무려라에 설치된 수의 통 정진과 대각(對角)을 이루면서, 고구려의 옛도읍인 국내성(國內城)에 이르는 두 갈래 통로인남로(南路)와 북로(北路)의 관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신성의전력을 크게 강화하였 고, 수는 이를 주목하여 부차적인 공격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수 양제는 신성의 군사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주 공부대가 요동성 공격에 주력하기 위하여는 신성의 고구려군을 현 지에 고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양제는 왕인공군으로 하 여금 이를 포위 공격하도록 하였다. 왕인공은 제2차 고·수 전쟁 당시에 좌제9군을 이끌고 참전한 바 있는 장수로서, 수군이 고구려군에게 참패하고 요하를 건너 퇴 각할 때 추격부대와 접전을 벌이면서 본대의 도하작전을 엄호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귀국 후에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가 되고, 수 양제가 제3차로 고구려침공을 개시하자, 이 번에는 전군(前軍)이 되어 신성 공략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 다. 왕인공의 별군은 수많은 요하 지류가 교차하는 평야지대를 경유 하여 출발한 지 2개월 반만인 5월 중순에야 신성 부근에 당도하였 다. 수의 별군이 신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첩보를 입수한 고구 려군 수뇌부는 성을의지한 수세적인 작전보다는출성하여 성을 등진 채 적과 일전을 결하는 공세적 작전이 더 효과적인 대응방법 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고구려군은 신성 밖의 평지에서 전투대형을 갖추고 왕인공군과의일정한 간격을 둔채 대치하여 결전의 시기만을 기다렸다. 고·수 양군의 이러한 대치상황은 얼마 아니되어끝이 났다. 왕인공군의 선제 공격으로 양군 사이에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수장(隋將) 왕인공은 정예 기병으로 전투부대를재편성하여 보병 위주로 결진(結陣)한 고구려군 진영을 공격하여기선을 제압하였 다. 고구려군은 수군 기병부대의 뛰어난 기동력에 밀려 진지를 유 린당하게 되자, 별다른 대적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 져 성내로 후퇴하였다. 신성 밖의 초전에서 수군의 공세에 밀려패퇴한 고구려군 수뇌 부는 이후로 수군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장기적은 농성작전을 계속하여 적의 예기(銳氣)를둔화시키면서 전열을재정비한다는 방침을 정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왕인공군과의접촉을 단절한 채 오직 방어에만 전념하였다. 이에 수의 왕인공군은신성에 대한 포위태세를갖추고 신성과 주변지역과의 연락을 완전히차단하였다. 이로써수군은 당초의 목표대로 고구려군을 신성에 고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3) 요동성 공방전

613년 5월 중순, 수 양제는 원정군 주공부대로 하여금 요동성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리면서, 제장(諸將)들에게 상황에 따라 임기 응변할 수 있는작전 재량권(作戰 裁量權)을부여하였다. 제2차 고구려 침공 당시, 양제는 장수들에게 일체 재량권을 부여하지 않 고 작전에 관한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한 다음에 자신의 지시에 따 라 실행하도록 하였던 바,제반 작전에 차질을초래하여 그것이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이와 같은 보완조 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제2차 고구려 침공 당시의 요동성 공격에 이어 불과 1년여 만에 재차로 요동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수군은, 개전 초기부터 저돌 적인 공격으로 일관하였다. 장방형(長方形)으로 되어 있는 요동성 은 이미 1년 전의제2차 고구려 침공을 통하여요동성을 공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와 군사들을 중심으로한 정예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요동성의 방위 태세는수군이 제2차침공을 포기하고퇴각한 612년 후반기부터 재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각종 전투장 비와 병력이 증강 배치되어 전력의강화가 이루어지고, 대대적인 성곽 보수공사를 완료함으로써 1년여의 기간동안에 수군 주력부 대의 진로를 차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새로서의 면모를 구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대규모의 군사력을기반으로 한 수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대응하여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 바 있는 포 차(砲車)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성루(城壘) 위의 사방에 배치하고, 그에 필요한 석편(石片)도 충분히 확보하여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 추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수성작전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질 수가 있었으며, 제2차 고·수전쟁 때와 같이 적의 예기를 둔 화시키기 위하여 항복의사를표시하는 등의 외교적기만 전술은 다시 사용하지 않고 완강한 수성 자세로 일관하였다. 한편, 수군은 요동성을 완전히 포위한상황에서 다양한 종류의 공성기구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제2차 침공당시와 동일한 방법 으로 공세를 가하여 단기간내에 성을 함락시키고자 전력을 경주하 였다. 수군은 공성기구인 비루(飛樓)를 요동성 외곽의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고구려 군민의 수성태세를 탐지하면서 상황 변화에 알맞 게 수시로 그 공격방법을 변화시켜 가면서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비루는 고가사다리 위에 망대(望臺)를 얹어놓은 수레로서, 망대 표면에 널빤지와 쇠가죽을덮어 궁시 사격으로부터보호를 받는 안전한 상태에서 성의내부를 감제(瞰制)하거나,궁시로 성안을 공격하면서 장착된 사다리를 성첩(城堞)에 걸어 성벽을 넘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성장비였다. 그리고 수군은 땅굴을 파는 장비를 동원하여 비밀리에 침투조를 성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지도(地道 :갱도)' 굴착작업을 진행 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제2차 침공 때에도사용되었던 전통적 공 성장비인 운제(雲梯)·충차(衝車)들도 작전에 동원함으로써, 공중 (空中)과 지상(地上) 그리고 지하(地下)에서 동시에입체적 공성 작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수군의 요동성 공격 작전은 5월 중순경부터 20여일 동안에 수 차에 걸쳐서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나요동성의 고구려 군민 들은 민(民)과 군(軍)이 총동원되어 수성작전(守城作戰)에 전력을 기울였다. 수군의 제2차 침공당시 무려 3개월에걸친 장기간의 수성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바 있는 고구려 군민들은 그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하면서잘 버텨 나갔 다. 고·수 양군 사이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장기간 계속되자, 수 양제는 전투 현장에 직접 나와서선전(善戰)을 독려하였다. 이때 수군의 침투조는 높이15장(仗)의 사다리로 된공성기구인 충제 (衝梯)의 끝에 올라가 요동성을 넘어들어가려고 기도하였다. 그 러나 요동성 위의 고구려군은 단병접전(短兵接戰)으로이들을 모 두 떨어뜨렸다. 수군의 일개 병졸인심광(深光)이라는 자는 충제 에서 추락하기 직전 재빨리 사다리의 밧줄울움켜잡고 다시 사다 리로 기어올라가 용감히 싸웠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양제는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기고 즉석에서 조산대부(朝散大夫 : 종5품)의 품 계(品階)를 수여하는 파격적인 표창을 하여 전군의 선전을 독려 하였다. 수 양제는 자신이 진두에 나서 독려함에도 불구하고 6월이 되도 록 요동성이 함락되지 아니하자, 높이 10장 (仗)내지 15장에 이르 는 요동성을 공략함에 있어서는 종래의전통적인 공성장비만으로 서는 공성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수 양제는 조속히 새로운 전술을 구상하여이를 공격작전에 활용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수군은 포대(布袋) 100여만 장을 만들어, 그 속에 흙 을 채워 넣은 다음, 이것을 쌓아 올려 이른바 어량대도(魚梁大道) 라는 임시 성루(城壘)를 축조하기 시작하였다.이 어량대도는 너 비가 30여보(步)로서, 높이는 성벽과 같았으며, 성벽과 수직을 이 루도록 설계되었다. 수군은 어량대도의 축성작업에 전군을 동원하 여 단기간내에 이를 완공하였다. 그리하여 수군은 성벽과높이가 같은 어량대도위에서 요동성 위의 고구려군을 마치 지상에서 접전하는 것과 같이 공격할 수 있 게 되었다. 또한 어량대도 축성작업의 완료와함께, 좌우 양측에 각각 4개의 바퀴를 부착하여 종래의공성기구에 비하여 안전성을 제고시킨 대형 이동식 고가사다리차인 팔륜누거(八輪樓車)를 어량 대도의 좌우 양측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수군 공성부대는 요동 성의 성벽보다도 높은 위치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유리한 공격 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이와같은 새로운 공성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수군의 부산한 움직임을 내려다보면서 동요하기 시 작하였다. 어량대도의 축성과팔륜누거의 제작배치가 완료되면 대대적인 공성전투가 벌어질 것이 확실한상황에서, 장기간의 고 립방어에 심신이 지쳐버린 고구려 군민들은 더욱큰 불안감에 휩 싸여 사기가 크게 저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군이 요동성에 대하여 대대적인공격작전을 결행하기 직전에, 수 양제는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수군측 수뇌부는 사안의중대성에 비추어 어량대 도와 팔륜누거에 의한 요동성 공격작전을 중단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이 반란은 후방 지역인 여양(黎陽)에서 영제거(永濟渠)를 통하여 운하로 군량을 수송하는 중책을 부여받고 있던 예 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의 주도하에일어난 것이었으므 로, 군량 수송에도 커다란차질을 가져다 주게 되었던바, 수군 진영에서는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서둘러 철군을해야 한다는 주 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양현감은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이미'운하 연안에 도 둑떼가 횡행하여 군량 수송에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를 내세워 고 의로 군량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수군 진영은 양현 감의 반란기도가 노출되기 이전부터 극심한 군량난에 시달리고 있 었다. 또한, 고구려 원정에 종군하고 있던 조정의 고관들은 그 가 족이 모두 양현감의 반란군이 공격목표로 삼고있는 동도(東都 : 낙양)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수군 진영 수뇌부의 여론은 양제에 게 철군의 결단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나 수 양제는 제2차 고·수전쟁에서의참패로 말미암아 실 추된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고, 국내의 반전여론(反戰輿論)을 무마 시키기 위하여 불과 1년 만에 제3차 침공을결행하지 않을 수 없 었던 상황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요동성의함락을 눈앞에 두고 쉽사리 철군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수 양제는 한동안 철군을 주저하면서결단을 내리지 못하 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양제의 측근에서 요동성 침공작전을 지휘 하고 있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수군진영을 탈 출하여 요동성의 고구려군측에 투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곡사정은 반란을 일으킨 예부상서 양현감과 평소에 친분이 두터 운 사이였으므로,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받을 것을 두려워 하여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에 곡사정은 은밀히 수군 진영 을 빠져나와 고구려군 진영에 망명하여 수의 국내 정세와 수군 진 영의 동향을 상세히 전하고,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도 제보 하였다. 요동성내 고구려 군민들은 곡사정의 요동성 망명을 계기로 사기 가 크게 충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잠시나마 침체되었던 항전 결의들 다시금 가다듬고 수성태세를 재정비강화하는 등, 수군에 게 마지막 타격을 가할 결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병부시랑 곡사정의 고구려 망명에 큰 충격을 받은 수 양제 는 그제서야 비로소 철군을 결심하고, 6월28일 밤에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진중에 은밀히 철군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수군은 전병력이 필수적인 개인장비와 최소한의 식량을 휴 대하고 야음을 틈타 황급히 철군을개시하였다. 수군은 고구려군 이 그들의 철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위장하기 위하여 군사 들의 천막과 기치(旗幟)·창검(槍劍)은물론 대부분의군수품과 병기, 공성장비들을 그대로방치해 둔 채숙영지를 빠져나갔다. 이는 최고의 군사기밀을 담당하고 있던 병부시랑이 고구려 진영으 로 탈출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수 없다는 판단에 의 해서 취해진 기도비닉(企圖秘匿) 조치였다. 따라서,수군이 막대 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여 제작한 제반 장비와 무기 및 군수품은 결과적으로 고스란히 고구려군의수중에 들어간 셈이되고 말았 다. 이와 같이 긴급한 상황하에서 황급히 철군을개시한 수군의 사 기는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그들의 철군 개시와같은 시간에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이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자, 수군은 고 구려군의 추격전이 시작되는 것으로 오인하여행군대형조차 제대 로 갖추지 못한 채 여러 갈래의 길을통해 분산하여 앞을 다투어 퇴각하기에 급급하였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곡사정의 제보로 수군이철수를 개시하기 이전에 이미 그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곧바 로 출성(出城)하여 수군 철수대열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고구려군 은 수군의 대부대가 철수하는 데에는 다소의시일이 소요될 것으 로 예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공 세로 전환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의 여유가필요하였기 때문에 수 군의 철수대열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고구려군은수군의 계략에 말려들어요동성을 잃게 될 만일의 사태를 상정(想定)하여 적의 동태를 재확인하고 우군의 공격 태세가 완비될 때까지 출성공격을 자제하고있다가 정찰 기 병들을 사방으로 풀어서 이틀 동안 적정을탐지한 후에야 비로소 적의 위장 술책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정예군사 수천 명으 로 수군의 철수대열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 추격부대의 주력은 수군 철수대열의 후미부대와 100여 리의 간격으로 은밀히뒤를 따르면서 기습공격으로수군에게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수군의 주력부대 가 요하의 도하를 완료하고 그 뒤를 이어서 도하를 시도하는 후미 부대가 도하를 개시하자, 고구려군은 비로소맹렬한 공격을 가하 였다. 수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강을 건너기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에 고구려군의 공격을감당해 내지 못하고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섬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이와 같이 요동성을 성공적으로 방어 하여 수군 주공부대를 고착시켜 그 예기를 둔화시켰을 뿐 아니라, 철수하는 수군 대열의 후미를 엄습하여 통렬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수 양제의 고구려 정복 야욕을 또 한번 여지없이 좌절시켰던 것이 다.

4) 제4차 고·수 전쟁

(1) 수군의 침공계획

수의 제3차 고구려 침공 기간 중에 반란을주도한 예부상서 양 현감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써 평소 양제의두터운 신임을 받 고 있었으므로 제3차 고구려 침공작전 수행에 있어서 군량을 수송 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양제의학정(虐政)과 계속되는 외정 (外征)으로 말미암아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불만이 고조되자, 양 현감은 이를 호기(好機)로판단하여 6월초에 여양성(黎陽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양현감이 여양에서 기병(起兵)하자, 반란군 병력은 삽시간에 10 만 대군으로 불어났다.그리하여 반란세력은한때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을 위협하였다.그러나 경조내사(京兆內史)로서서도 (西都 : 대흥)에 주둔하면서수도방위의 임무를 맡고있는 위현 (衛玄)이 7만 대군을 낙양으로 급파하여이들과 공방전을 벌이면 서 가까스로 낙양을 지탱하고 있는 상황에서우문술 등이 이끄는 고구려 침공부대가 급거 귀환하여 낙양 공방전에 가담하자 비로소 반란군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여 8월초순에는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후, 반란 동조자 3만여 명을 처 형하고 그들의 가족과 재산을 몰수하여국가에 귀속시키는 한편, 죄상이 경미한 6천여 명을 귀양보내는 선에서 일단이 사건을 매 듭지었다. 그러나 양현감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이와비슷한 형태의 반 란이 꼬리를 물고일어나, 수의 정국은혼란상태가 계속되었다. 양제는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였 으므로 그해 12월에는 대부분의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다. 또 한 반란에 연루된 자들을모조리 극형에 처하고 그가족과 가산 (家産)을 몰수하는 등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일반 백 성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수양제의 강경대책에 비례하 여 더욱 고조되어 갔다. 양제는 613년 말경에 이르러 대부분의대규모 반란세력들이 진 압되자, 이를 정국이 안정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이듬해인 614년 2월 초에 조서(詔書)를 내려 조정의 문무 대신들로하여금 자신의 고 구려 원정 계획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은 모두 이 전쟁에반대하여 양제와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며칠이 경과하도록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고 시일을 지연시켰다. 이에 양제는 중신들의 의견 상달을 기다 리지 않고 독단으로 제4차 고구려 침공을 결정,2월 하순에 조서 를 내려 이 사실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수의 고구려 원정군은 3월 중순에 고양(高陽)을 출발하였다. 그 러나 고양에서 탁군( 郡 : 북경)에 이르는 동안에수 많은 도망 병이 발생하였다. 수군 수뇌부에서는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하순경에 임유궁(臨 宮)에이르러서야 비로소 체포된 도망병들을 군문(軍門)에 효수하는 등 강압적인 대 책을 시행함으로써 도망병의재발을 방지하려고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일시적으로 도망병의 숫자를 줄이는 효과가 있기는 하였으 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양제가 북평에 도착하던 4월 하순부터는후방 각지에서 반란세 력들이 또 다시 고개를 들기시작하였다. 이들은 '천자(天子)'· '황왕(皇王)'등을 자칭하면서 조정에 불만을 품고있는 백성들을 끌어 모아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결과 일부 세력은 10만의 무리를 이끄는 대규모 반란세력으로 발전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그들 반란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는 조정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흡사 무정부 상태와 마찬가지의상황이 되기도 하 였다. 이에 양제는 좌효위대장군(左驍衛 大將軍)굴돌통(屈突通)을 관내 토포대사(關內討捕大使)로 임명하여반란세력을 토벌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요사태가 심각한 지역에서는군사들이 중앙정부 의 출동 명령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집결하는 것조차 기피하는 경 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반란세력의 수중에 들어가있는 지역의 경우에 있어서는 군내의반란세력을 토벌하기 위한군사는 물론 고구려 원정군조차도 그 통과가 용이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수립된 작전계획에 많은 차질이 야기되었다. 그리고군사가 집결지로 이 동하는 과정이나, 집결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도망병이 속출함으로 써 원정군의 병력수는 크게 줄어 들 수밖에 없었다. 양제는 탁군에서 군사들이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이미 3개월 가량이나 시일을 지체하다가 7월 17일에야가까스로 요동성 공격 작전의 전초기지라 할수 있는 회원진(懷遠鎭)에도착하여 요하 지류를 건너 요동성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수로군(水路軍)은 우익위 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 (來護兒)의 지휘 아래 산동반도의 동래(내주)에서정예 전투부대 를 편성하여 출동준비를갖추었다. 수로군총사령관인 내호아는 앞서 시도된 수 차례의 고구려 침공작전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을 커다란 수치로 여긴 나머지 고구려에 대하여강렬한 적개심을 품 고 출전하였다. 내호아의 수로군은 동래를 출항하여 2차침공때와 동일한 항로 인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따라 요동반도 남단에 이르러 비사성(卑奢城)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비사성은 요동반도 남단의 대흑 산(大黑山) 산록에 위치한 성곽으로서 요동반도 남단 해안선을 따 라 한반도 서해안 지역으로 연결되는 연안항로의해상 관문인 동 시에 해상과 육상을 이어주는 육상교통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수군이 비사성을장악하고 이곳에서전열을 정비하여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서사면(西斜面) 통로를이용하여 동북진할 경우에는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요동성의 서남쪽에 이를 수 있었 다. 그리고 이곳에서 천산산맥 동남단의육로를 이용하면 압록강 구의 구련성(九連城)·박작성(泊灼城)·오골성(烏骨城) 등과 연결 될 수 있고, 다시 이곳에서 압록강을 도하하면고구려의 수도 평 양성에 이르는 지름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다. 내호아군은 요동성으로 진출한 육로군(陸路軍) 주력부대의 상황 에 따라서 차기 행동방략을 결정하기로 하고, 우선 비사성을 함락 시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2) 고구려의 군사적 대응

고구려는 612년부터 시작된 수의 대규모무력 침공에 당면하여 침공군을 국경지역에서 물리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국경지역의 천연 장애물인요하와 천산산맥 을 이용하여 대수방어선(對隋防禦線)을 구축하고, 이를 거점 중심 으로 운용하여 군사력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였 다. 고구려는 남쪽으로 국경을 접한백제·신라와 소규모의 무력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수 전쟁 당시 이들 양국이 모두 고구려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군사력을보유하고 있지는 못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군사적 역량은 대수 전선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요동지방남부의 안시성으로부터동북부의 요동성·백암성(白巖城)·신성(新城)·목저성(木底城), 그리고 북 단의 남소성(南蘇城) 등의주요 거점에 정예부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전략이 주효하여 제2차 및 제3차 싸움에서 고 구려는 수군의 예기를 둔화시켜 침공기도를 저지할 수가 있었다. 614년 7월, 수군의 제4차 침공을 받게 된 고구려는 일단 요동성 에서 적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하여, 앞서 싸움에서 체득한 교훈을 거울삼아 요동성의 대비 태세를 더 한층 강화시켰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대수 응전태세는육로군의 예상 진출로상 에 집중되었던 만큼, 상대적으로 수로군에 대한 방어 태세는 취약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내호아의 수로군이 7월초순에 동래항을 떠 나 중순경에 비사성 앞바다에 이르렀다.내호아군이 일제히 비사 성 앞 해안지대로 상륙을 개시하자, 비사성의 고구려군과 수군 사 이에 일대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고구려 방어군은 연안항로 의 해상 관문을 엄중히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내호아군의 상륙기도 를 조기에 포착하고,이들의 상륙을 저지하려고하였다. 그러나 비사성은 요동성과 같은 대성(大城)이 아니었으므로소수의 자체 방어 병력으로서 내호아의 수로군 대부대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군은 내호아의 수로군과 해안에서 단 한 차례의 접전 끝에 비사성으로 퇴각하여 성문을 굳게닫고 수세에 들어가 적의 동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해안에서 고구려군을 제압하고 비사성 앞 해안에 상륙한 내호아 군은 비사성 내의고구려군이 군세가 미약하여자신들의 진출을 저지하거나 후방을 차단하여 작전에 차질을 초래할 만한 위협세력 이 될 수 없다는판단 아래 그 존재를치지도외(置之度外)한 채 곧바로 평양성을 향해 진군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와 같은 정보에 접한 고구려군수뇌부는, 내호아군의 저돌적 인 군사행동을 고구려 방위 태세에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 대응전략 수립에 부심하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군 수 뇌부는 그들이 요동성을 비롯한 육로군 주공부대의 예상 진출로상 에 군사력을 집중하여 결전준비를 갖추고있었으므로 내호아군이 비사성을 교두보로 하여 평양성으로의 진공을기도하는 예상외의 사태에 즉응하여 방에태세를 재편하기에는 이미 시간적 여유가 부 족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 한 비상수단을 서둘러 강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고구려 조정은 양국의 주력부대가 요동성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야욕을 약화시키고 철군 의 명분을 제공할 수 있는 외교적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3) 고구려의 외교적 대응

고구려는 수의 국내 정국이 극도로 불안정하여 내란(內亂) 상태 에 직면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대수외교(對隋外交)의 유리한 전환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전후 4차에 걸쳐이루어진 고·수 전 쟁을 통하여 중국 대륙의 통일왕조이며 군사강국이었던 수는 정 치와 경제가 파국에 이를 정도의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소, 고구 려는 수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있는 상황을 계기로 하 여, 국력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군사적 대결을 지양하고 외교 적 수단으로 대수관계를 해결하려는 방안을모색하기에 이르렀 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수제국 내부 정세의추이를 관망하면서, 그 들에게 철군의 명분을 제공하여 수군이 스스로 변경지역에서 물러 가게 할 수 있는 외교적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수 양제의 고구려에대한 적대감을 약화시 키고 양국의 대립 관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비상수단으로서 고구 려에 망명해 있는수의 병부시랑 곡사정을송환하기로 결정하였 다.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고구려 조정은 7월하순에 양제가 머물 고 있는 회원진으로 사절단 일행과 함께곡사정을 포박하여 압송 하였다. 수 양제는 회원진에서 고구려 사절단을 접견하고 영양왕이 보내 는 예물과 함께 화의(和議)를 요청하는 서신을 접수하였다. 수 양 제는 국내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전국적으로 130여 지역에서 대 소의 반란세력이 창궐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하에서 진퇴를 결정짓 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던 차에 고구려가그간의 무력충돌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양현감 반란사건의 주요 연루자인 곡사정마 저 송환하자 여기에서 철군의 명분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수 양제는 전군에 철군 명령을 하달하고, 비사성에 고구려 군과 대치하면서 평양성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고 있던 내호아의 수로군에 대해서도 전령을 급파하여 철군 명령을 하달하였다. 614 년 8월, 수 양제는 곡사정을 압송하는함거(檻車)를 앞세우고 회 원진에서 철군을 개시하였다. 한편, 고구려에 대하여 강력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수로군의 지 휘관 내호아는 이 시기를 설욕전 전개의 호기로 판단하고, 양제의 철군 명령을 전달받고도 이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양제 가 고구려의 외교적 기만 술책에 말려들어 이와 같은 명령을 내려 기 된 것이므로, 자신이 이끄는수로군이 단독으로라도 평양으로 진군하여 고구려를 굴복시킴으로써 그간의 패전으로실추된 수의 권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철군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수로군 소속의 제장(諸將)들은 한결같이 철군 명령에 따 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수로군이단독으로 평양성을 공 격하여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킨다는 보장도없을 뿐 아니라, 만약 작전에 실패할 경우에는 명령에 불복한 죄로 극형을 받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였으므로 내호아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장들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내호아도 할 수 없이 철군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수로군도 8월 중순경 에 비사성을 떠나 동래항으로 회군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외교적인 방법을 통하여 수의 제4차 침공을 물리치고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던 것이다.

3. 고·수 전쟁의 결과

1) 수군의 패전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여 한족의 통일왕조를 건국한 수(隋) 는 초기의 '북수남공정책(北守南攻政策)'이성과를 거두자차츰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상 황하에서 고구려 영양왕( 陽王)이 1만여 명의 말갈(靺鞨) 기병부 대를 이끌고 요서지방을 공격하자, 수는 이를 빌미로 삼아 대대적 인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수 문제는 동북 아시아 지역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통일제국의 권위를 천하에 널리 과시한다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 에 달성하려는 야심을 품고 당시 중국 대륙 동북지역에서 군사 강 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고구려를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수륙 30만 대군으로 편성된 수의 제1차 고구려 침공은 총사령관 인 문제의 다섯째 아들 한왕(漢王)양량(楊諒)이 지휘하였다. 그 리고 수로군(水路軍)은 육로군(陸路軍)과는 별도로 산동반도의 동 래(東萊)에서 수군총관(水軍總管) 주라후(周羅 )의지휘하에 출 전 준비를 갖추었다. 이들 수로군은해상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수송부대의 임무를 띄고 있었으므로 자체 방호수단 외에는 별도의 전투 기능을 갖추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 침공군의주력부대는 육로군이었던바,그들은 598년 2월부터 4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6월에 탁군(북경)을 출발하여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들 육로군이 요하 부 근에 이르렀을 때인 7월과 8월의 요하지역에는 이미 우기(雨期)가 다가와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에,수군은 악천후를 무릅쓰 고 '요택(遼澤)'이라는 저습지대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수군은 군량 수송이 원활하지 못하여 대 군이 굶주림에 허덕이게된 데다가 전염병의만연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전반적인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갔다. 결국 수군 수 뇌부는 더 이상의 손실을막기 위하여 퇴각을 결정하지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수의 육로군은 선두부대가요하에서 기수를 돌려 철군하게 되었고, 수로군은 요동반도 남단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다수의 선박과 장비 및인원을 손실당하는 많은 피해를입은 채 동래항(東萊港)으로 귀환하였다. 수군은 제1차 고·수 전쟁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지역의 지형이나 기상 등을 전혀고려하지 않은 채 로 저돌적인 공격을시도하였다가 뜻밖의 자연재해를 맞이하게 되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막대한 전투외적손실을 입고 고구려 침공작전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후, 고구려와 수의 국교 정상화가이루어져 양국간에는 원만 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604년에 양제가 즉위한 이후로도 우호적 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던중, 607년 8월돌궐 지역을 순행하 던 양제가 돌궐 추장의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조우하게 되자,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접촉하는 저의를의심하게 되고, 급기야 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제2차 고·수 전쟁을 일으 키게 되었다. 양제는 610년 총동원령을 내리고 이듬해(611) 2월부터는 자신의 거처를 수도 대흥(長安)에서 탁군(北京)으로 옮겨이곳에서 전쟁 준비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좌우 각각 12개군, 도합 24군으로 편성된, 수륙 100만 대군이 612년정월부터 요동지역으로 출발하 였다. 좌 제3군과 제10군을 주력으로 한강력한 전투부대로 편성 된 수로군도 제1차 침공때와 마찬가지로동래에서 출항하여 출정 길에 올랐다. 이때 고구려군은 수의 육로군을 요하에서 물리쳐 도하를 저지하 였다. 수군은 제1차 도하작전에 실패하여 주요 장수들이 전사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20여일 동안에 전 열을 정비한 후에 재차도하작전을 강행한 결과,많은 사상자를 내기는 하였으나 도하에 성공함으로써 고구려 경내로 진입할 수가 있었다. 요동성(遼東城)의 고구려군은 4월에 수군의 공격을 받아 포위된 상황에서 수성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수군의 진출을 억제하였다. 따 라서, 수군은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이지역에서 대부대의 발 이 묶이게 되었다. 그 결과 수군은 그 대응방안으로서 정예 별동부대(別動部隊) 30 만을 편성한 다음,이를 곧바로 평양성으로진출시켰다.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는 별동부대는 고구려의대신 을 지문덕(乙支文德)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평양 교외까지빠른 속 도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수군 별동대는 상황이 불리한 것을 깨닫 고 7월 하순에 퇴각을 개시하였다. 고구려군은 수군이 살수(淸川江)를 도하하는 도중에 수공(水攻) 을 가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편,이에 앞서 고구려군은 수의 수로군을 평양 근교에서 패퇴시킴으로써 수군의 수륙양면 진 공계획을 무산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수 양제는 이와 같이 수륙양로군의 주력부대가 고구려군에게 패 퇴하자,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요동성의포위를 풀고 그 해 8월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613년 4월, 수 양제는 제3차 고구려침공을 단행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별군인왕인공(王仁恭) 부대로하여금 훈하 중류에 위치한 신성(新城)을 공격하도록 하여고구려군을 신성에 고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수의 주공부대는 요동성을 포위하고 각종 공성장비들을 동 원하여, 지상은 물론 공중과 지하의 세 방면으로 입체적인 공격작 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민들은 일체가 되어 성을 방어 하는 데 성공하였다. 20여일이 지나도록 성을함락시키지 못한 수군은 어량대도(魚梁大道)와 팔륜누거(八輪樓車)를이용한 새로 운 공성전술을 동원하여 성을 일거에 함락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성 준비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고, 총공격이 개시될 단 계에 이르렀을 때,수의 국내에서는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어 난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의 망명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더욱 급 박해진 수군은 대부분의 전투장비를 그대로 두고 개인장비와 식량 만을 휴대한 채 6월 하순에 야음을 틈타서둘러 본국으로 철군하 고 말았다. 따라서, 수군은 20여 일간의 요동성 공방전에서다수의 병력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공성장비와 보급품들을 전장에 유기한 채 퇴각함으로써 제3차 고·수전쟁에서도 참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수 양제는 제3차 고구려침공에서 아무런 소득없이 철군하여 양현감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는데에 주력하였다.그리하여 그해 12월까지는 양현감을 비롯한 대부분의 반란세력들을소탕하고 일 시적으로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세 차례의 고구려 침공 으로 인한 대규모의 인력동원과 그 실패에 따른국민적 불만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614년 3월, 수 양제는 고구려에 대한 제4차 침공을 결심하고 전 국에 동원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4월부터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 세력들이 재봉기하여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으므로 출정 군 사들이 대량으로 대열을 이탈하거나 집결이지연되는 등, 고구려 원정 준비는 출발 단계에서부터 많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수와의 군사적 대결국면을 정치·외교적 타협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방안을 강구한 결과,양제가 회원진 (懷遠鎭)에 당도하였을 때 화의(和議)를 요청하는 사절단과 함께, 고구려에 망명중이던 곡사정을 송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양제는 국내에서 내란상태가 재연되어 철군의 필요성을 절 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철군 명분을찾지 못하여 진 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고구려가 화 의를 제기하자 양제는 즉시 이를 수락하고서둘러 철군을 개시하 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의 고구려 침공은 대군이 동원되고, 이동과 철수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만 입은 채로 4차 고· 수 전쟁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뛰어난 수성전술(守城戰術)로 성을 굳게지키면서 공 성부대에 불리한 기상조건이 도래하기를 기다려 수군의 전열이 약 화되는 틈을 타 이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지연전술(遲延戰術) 을 채택하였다. 반면에,수는 매번의 전쟁에서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변경 요새에 대한 포위공격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번번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시일만 보내다가 끝내는 스스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의 고구려침공은 문제의 제1차침공(598)에 이어 양제 때에 이르러 612년부터 614년까지 매년1회씩 4차례나 계속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단 1개의성곽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한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 었던 것이다.

2) 수 제국 통치질서의 붕괴

수는 4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 때마다 수십만내지 백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전과도 올리지 못 한 채 수많은 사상자만 내게 되자 전몰장병 가족들의 원성이 극 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제3차 고·수 전쟁과제4차 고·수 전쟁 때에는 직접 원정에 참가하는 군사들의 대열에서조차 염전사상(厭戰思想)이 팽배하여 집단적으로 소집에 불응하고 출정을 기피하거 나 행군 도중에 군문(軍門)을 탈출하는도망병이 속출하였다. 그 밖에, 일반 백성들도 과중한 부역(負役)을회피하기 위하여 고향 을 떠나 유랑(流浪)하는 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도망병과 유랑민(流浪民)들은 도적떼와 합류하거 나 깊은 산속에 은거하면서, 수 양제의 빈번한 외정(外征)과 그에 따르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불만세력 으로 성장하였다. 도적의 무리와 작당한 자들은 양제의 외정 실패 로 말미암아 국내의 기강이 해이된 틈을 타 약탈을 자행하면서 세 력을 신장하여 일부 지역의 행정을 마비시켰다.뿐만 아니라, 양 곡 보관 창고인 관창(官倉)이나 의창(義倉)을 열어서 그동안의 과 중한 군량 징발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곡식을 나누어 춤으 로써 민심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양제는 날로 급증하는 도망병의 발생을방지하기 위하여, 체포 된 도망병들을 극형에 처하였을 뿐 아니라그 가족들에게도 연대 책임을 물어서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따라 서, 죄에 연좌되어 처벌을받은 가족들은 물론일반 백성까지도 양제의 이와 같은 가혹행위에 대하여 깊은 원한과 불만을 품게 되 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 도처에서 반란세력들은 양제의 학정을 비난 하는 구호를 내걸고 수제국의 타도를 외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양 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백성들도 서로 앞을 다투어 반란세 력에 가담하였다. 그 결과 반란집단의 세력과 규모가 급격히 성장 하여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수의 거듭되는 외정에 따른 장정(壯丁)의 징발과 과중한 양곡의 부담으로 말미암은 피해는 출정부대의 이동 경로 인근지역에 거주 하는 주민들에게 극심하게 파급되었다. 특히 산동(山東)·하북(河北) 2성(省) 일대의 주민 피해가 극심하여이곳이 대규모 반란세 력의 핵심적인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하여중국 대륙의 동부지역 에서 616년에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 발발하였는데, 반란세력은 순 식간에 황하(黃河) 이북의 하북지방에 소속된여러 군현(郡縣)들 을 석권하고 '하(夏)'라는 국호를 사용하는정권을 수립하기까지 하였다.

남방지역의 경우, 최초로 613년 반란세력이 봉기하였으나, 그해 말경에 왕세충(王世忠)의 군대가출동하여 토벌에성공함으로써 일단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616년부터또 다시 전국적으 로 반란이재발되어, 반란세력이강소(江蘇)·안휘(安徽)·강서 (江西)·광동(廣東)·호남(湖南) 지방의 광범위한지역을 점유하 자 중앙정부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강남지방을통제할 수가 없 게 되었다.

관중지역(關中地域)에서도 614년부터대규모 반란이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반란집단은 북방 변경지역으로 세력을 뻗쳐나가 해당지역의 국경 수비군과 대치하였다. 또한 산서(山西)·섬서(陝西) 등의 변경지역에서도 돌궐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일부 세력들 이 반란을 일으켜 제각기 '왕(王)'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네 차례의 고·수 전쟁과 그 실패의 여파로 말미암아 수의 정국 이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자, 주변 이민족에대한 수의 통제력 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되어 있던 돌궐족은 적극적인 자세로 수의 영향력하에서벗어나려고 기도하 였다. 특히, 동돌궐은 수가 고구려 침공에 주력하고 있는 틈을 타 615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의 변경지역을 침공하여과거에 수의 영 토로 편입되었던 그들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의 수는 고·수 전쟁에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돌궐의 움직임에 대처할 여력이없었다. 정세변화에 힘입은 돌궐은 일부 변경지역을 손쉽게 점령하여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 기도 하였다. 그러나수가 제4차고·수 전쟁이끝난 이듬해인 615년에 이세민(李世民)군을 접경지대에 파견하여대돌궐 공세를 강화하자 돌궐은 다시 군사행동을 자제하면서 수제국 내부에 확 산되어 가고 있던 내전 상황의 추이를 관망하기 시작하였다.

수제국이 거듭되는 내우외환으로 말미암아 곤경에 빠져 있을 무 렵인 617년 5월, 산서 태원(太原 : 진양) 지방에서는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이 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수 황실의 인척으 로 양제와는 이종사촌(姨從四寸)간인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은 태원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의 전·현직 문무관들을 포섭하여 대 장군부(大將軍府)를 조직한 다음, 617년 7월에 3만 군사를 이끌고 수도인 대흥(장안)을 향하여 이동하였다. 도중에 수군(隋軍)이 이 들의 진출을 저지하려고하였으나 이연군의 적수가되지 못하였 다. 이연의 반란군은 쉽사리 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대흥을 점령 하여 양제의 손자인 양유(楊侑)를 명목상의황제(皇帝)로 추대한 후, 화북지방 일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와 같은 정국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남당의 강도(江都 : 양주)에서 여전히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 양제가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 해되자, 수 왕조는 건국된 지불과 40여 년 만에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 향상

수는 중원의 패자( 者)로서 초기의대외정책인 '북수남공정책 (北守南攻政策)'에 성과를 거둔 뒤, 북방으로 관심을 돌려 적극적 인 대북방정책을 전개하기시작하였다. 이와같은 대북방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동북아시아의 군사 강국인 고구려와의 무력 대 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수는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기 이전에 북 방 변경지역의 돌궐·거란·토욕혼 등과 같은 이민족 집단을 세력 권 안에 넣기 위한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통 일왕조의 막강한 군사력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통일왕조로 등장한 수의이러한 군사적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그에 대처하기 위한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수의 대규모 침공군이 장거리를 기 동한 후에 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점에 착안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장기 농성(籠城)을 계속하면서 적의예기(銳氣)를 둔화시킨 다음 부단한 정찰 활동과 신속한 공격 및퇴각 등의 작전을 적절 히 혼용함으로써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한다는 계획을 세우 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략 구상에 따라 고구려는요하 이동의 요충지대에 군사력을 집중시켜 이곳에 수군 주력부대를고착시킴으로써 그들 의 침공작전에 차질을 초래하도록 강요하였다.수의 침공군을 장 기적으로 요동지역에 고착시켜 내륙 진출을 저지하는 고구려의 지 연전술(遲延戰術)과 7월을 전후에서 도래하는요동지역의 기상조 건 변화로 말미암아 수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수군은 이러한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두 차례(제1차 및 제 2차)나 침공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지연작전에 발이 묶여 주력부대 가 변경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제3 차와 제4차 고·수 전쟁때에는 국내 정세의혼란으로 말미암아 이렇다할 공격조차 해보지도 못한채 물러갈 수밖에없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그들이 당초에 수립한 바의대수전략 계획을 성공 적으로 완수하여 군사 강국인 수의대군을 물리침으로써, 고·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수는 4백여 년에 걸친 중국사 상 최장(最長)의 분열시대를 마감하고 무력으로 중원을 평정한 군 사대국이었으며, 제2차 고·수 전쟁 이후 제4차 고·수 전쟁에 이 르기까지 세 차례모두 양제가 친정(親征)을단행한 전쟁이었으 나, 단 한차례도 승리하지 못했다는점에서 고구려인들의 사기가 크게 고양되고, 그와 동시에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도 새롭게 인식 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20여년 동안 수와 무력대결을벌인 결과 최후의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수의 멸망과 함께새롭게 형성된 국 제질서 속에서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