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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배경설명(5_2)-파천대마왕 오다 노부나가 두 방에 정리하기

구름위 2012. 12. 2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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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유명한 가신단, 그리고 성격을 알 수 있는 과격한 행동, 주요 가신들의 배신, 노부나가의 용인술(인재론)/용병술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장수들로 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이어서 클릭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다(없는 자료들도 있습니다). 다들 그 당시에는 유명했던 인물이어서 관심을 가지면 좋지만 가쓰이에, 미쓰히데, 가즈마사, 히데요시, 마에다 도시이에 정도만 기억하면 되고 나머지 장수들은 큰 그림에서의 전국시대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하지 못하니까 넘어가도 된다. 

 

 

오다 사천왕

시바가쓰이에(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 가와 가즈마스(?川一益)

 

그림 설명: 시바따 가쓰이에.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했지만 투항을 한 후에는 최고의 맹장으로 충성을 다합니다.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필두 가신

시바가쓰이에(柴田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 가와 가즈마스(?川一益),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또미 히데요시로 개명), 쓰네오(池田恒興),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노부모리(佐久間信盛)

 

교토 부교(京都奉行)

무라이 사다(村井貞勝),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 마쓰이 (松井友閑)

 

사위

가모 우지사(蒲生氏?), 쓰쓰이 사다쓰구(筒井定次),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장남으로 다께다 집안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자살명령을 받는다), 미즈노 다다(水野忠胤), 사지 가즈나리(佐治一成), 니조 자네(??), 마데노아쓰후사(万里小路充房), 다이지 사네히사(?大寺?)

 

측근

스가야 나가노리(菅屋長?), 야베이 에사다(矢部家定),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하세가와 히데(長谷川秀一), 오오쓰 나가마사(大津長昌), 만미 시게모토(万見重元)

 

고쇼

모리 란마루(森蘭丸=森成利,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는다), 모리 보마루(森坊丸), 모리 마루(森力丸), 하시 도라마쓰(高橋虎松), 란마루(伊藤蘭丸祐道)

 

 

구로 호로(?母衣 ? 노부나가의 정예 장수)

삿사 나리마사(?成政), 모리 요시(毛利新助), 가와지리 히데따까(河尻秀隆), 가쓰스(生駒勝助), 쓰다 모리쓰(津田盛月), 하치야 요리따까(蜂屋?), 가와 시게마사(中川重政), 히라이 규에(平井久右衛門)

 

아카 호로(赤母衣 ? 노부나가의 정예 장수)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이노 히사(飯尾??), 꾸또히데(福富秀勝), 나오마사(?直政), 모리 히데요리(毛利秀?), 노노무라 마사시게(?村正成), 이노가즈또끼(猪子一時), 아사이 마사사다(?井政貞), 나가히사(伊東長久), 이와무로 나가(岩室長門守), 사와요시유(佐脇良之), 가나모리 나가치(金森長近)

 

그 밖의 유력 중신

요시따까(九鬼嘉隆), 호소후지따까(細川藤孝), 아라무라시게(荒木村重), 가쓰마사(池田勝正),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쓰쓰이 (筒井順慶), 유안(武井夕庵),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이나바 (?葉一?), 안도 모리나리(安藤守就), 우지이에 나오모(氏家直元)

 

오다 노부나가의 과격한 행동

노부나가는 좀처럼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그의 과격한 결정은 적에게 내려진 것이며, 가신들에 대한 가혹한 행동은 그 다음에 잘 설명되어 있다.

 

1571 9 12. 노부나가는 대군을 이끌고 아사/아사꾸라를 후원한 히에이잔을 포위한다. “수 차례 경고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왕성을 보호해야 할 승려들이 불도의 법을 지키지 않고 음란에 젖어 살며 고기를 먹고 금은재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조정의 중재 때문에 미뤄왔지만 이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산으로 쳐들어가 본당과 21개 부속건물에 불을 질렀다. 승려와 신도 3,000명이 도망을 치려 했지만 어린아이까지 보이는 대로 모두 죽였다. 산채로 끌려온 일반 신도들이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애걸하는데도 모두 목을 쳤다.

 

1573 8. 노부나가는 아사꾸라 요시까게를 쫓아 에찌젠까지 들어가 요시까게를 자결하게 만든 후에 도망친 무사들을 모두 잡아오라고 명령한 후에 100, 200명씩 잡혀오는 족족 모두 목을 베었다.

 

1574 1 1. 신년 인사를 하러 온 가신들과 동맹 다이묘들이 기후 성을 방문한다. 노부나가는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얼굴로 있다가 방문객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후에 미리 준비해둔 좋은 술잔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잠시 후에 쟁반에 담겨 나온 술잔은 지난 해에 토벌한 아사꾸라 요시까게, 아사이 히사마사와 나가마사 부자의 두개골에 금칠을 한 것이었다. 두개골에 술을 담아 마셨다고 한다.

 

1574 7. 노부나가는 이세의 나가시마에 있는 잇꼬잇끼(일향교) 신도들을 3개월에 걸쳐 전멸시킨다. 전의를 상실한 잇꼬 잔당이 항복을 청해오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다른 악인들에게 본보기를 삼겠다라는 대답을 한다. 항복조차 못하게 된 신도들은 밤을 틈타 탈출하다가 1,000명이 붙잡혔는데 그들을 모두 처형한다.

다른 지역의 신도들은 결사항전을 선택하고 본거지인 나가시마 성에서 농성을 하는데, 노부나가는 일부러 공격을 하지 않고 굶겨 죽이려고 한다. 농성 3개월 만에 신도들이 강으로 몰려나와 도망을 치려고 하자 모조리 죽인다.

이세 지역의 잇꼬잇끼 신도들의 민란을 제압하면서 20,000명 이상을 처형하거나 불태워죽였다.

 

1575 8. 노부나가는 4대 가신에게 30,000명의 병사를 주고 에찌젠의 잇꼬잇끼 민란을 철저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노부나가의 분노를 두려워 한 4대 가신은 그 명령을 철저하게 따라 30,000명 이상의 신도가 죽거나 투옥된다.

 

1575 11, 노부나가는 다께다 가쓰요리의 가신인 아끼야마 노부또모가 지키는 이와무라 성을 공격해 노부또모와 그의 아내 쓰야를 강변에서 거꾸로 매달고 찔러 죽인다. 그가 죽이라고 명령한 쓰야는 자신의 숙모였다.

 

1579 12. 아라끼 무라시게와 가신이 모반을 기획했다가 실패하고 처자식을 남겨둔 채 도망친다. 노부나가는 남겨진 인질들의 처형방법과 순서까지 일일이 명령한다.

 

1581년 여름. 아라끼 무라시게의 잔당이 고야산으로 피신하자 이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하지만 오히려 공격을 당하자, 노부나가는 각 지역을 순례하던 고야산 승려와 신자들을 모두 붙잡아 처형한다. 그런 후에도 10월에 고야산을 모두 불태우려고 준비했지만 가신의 배반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581 4. 노부나가는 명소를 구경하기 위해 본성에서 자리를 비운다. 당일 돌아오기 힘든 먼 거리였기 때문에, 성의 시녀들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성 부근의 절에 가 승려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도중에 돌아왔고 마음대로 자리를 비운 시녀들을 모두 죽인다. 이 때에 용서를 빌기 위해 찾아온 주지 승려까지도 죽인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가신들

 

부모자식 간에도 배신을 하는 일본 전국시대였는데 주군과 가신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오죽하면 주군이 옆에 두는 시동은 동성애를 통해 충복으로 키웠을 정도로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고 노부나가도 중신의 배신으로 죽어갈 때에 동성애로 키운 시동 란마루와 죽어갔다.

보통 가신들의 배신은 주군이 가문을 계승하기에 모자라거나 적의 세력이 너무 커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할 경우에 일어나기 마련인데, 노부나가의 경우는 좀 남달랐다. 노부나가가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며 가끔씩 패전을 겪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세력을 확장해나갔고 가신들의 영토나 지위도 급상승했는데도 가신의 배신은 계속 이어졌다. 그만큼 가신을 동반자가 아닌 장기판의 말로 여겼고, 항상 한계상황까지 이용한 후에 뒤도 안 돌아보고 용도폐기시켰기 때문이다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의 모반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를 찾아와 인사를 올릴 때, 자리 끝에 처음 보는 노인이 있었고, 노부나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한 번 하기도 힘든 일을 세 번이나 한 사람이죠. 주군이었던 미요시 가문을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쇼군 아시까가 요시떼루를 시해했으며 최근에는 동대사의 대불전을 태워버렸답니다.” 이 말을 들은 히사히데는 얼굴이 불덩이처럼 타올랐다고 한다.

 

그림 설명: 마쓰나가 히사히데. 전형적인 간웅으로 세 명의 주군을 모셨고 그 중에 두 명을 죽음에 몰아넣었지만 세번째 주군에게는 반대로 죽임을 당합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누군가의 가신으로 있기에는 너무나도 야심이 많았던 사내였기 때문에 그의 모반을 노부나가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히사히데는 1568년 노부나가사 입경하자 가신으로 들어가며 자식 두 명을 인질로 보내고 귀한 다기를 바쳤다. 노부나가는 그의 성품을 알고 있지만 워낙 모사에 뛰어난 인물이라 거두기로 하고 영지만 축소시켰다.

노부나가에 대한 주변 다이묘들의 연합이 구성되고 혼간 사와의 전투로 노부나가가 자리를 비우자, 히사히데는 이 때를 노려 모반을 일으키지만 다른 다이묘들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신의 성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히사히데는 투항을 거부하고 천수각에 올라 일본 최고의 보물이었던 차 솥을 넘겨줄 수 없다며 가슴에 품고 불타 죽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라끼 무라시게(荒木村重)의 모반

무라시게의 부하가 몰래 포위당한 이시야마 혼간 사에 양식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반역의 의심을 받는다. 무라시게는 다른 동료 중신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노부나가에게 변명하려고 하지만 노부나가 공은 시기심과 의심이 많은 주군이니 일단 용서하더라도 반드시 뒤탈이 있을 것이라는 가신들의 만류로 아리오카 성에서 농성을 한다. 그러나 가신들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혼간 사를 후원하는 모리의 수군과 혼간 사에 전멸하자 혼자서 탈출한다.

무라시게는 모리 가문에 의탁했다가 혼노 사 정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에게 다인(茶人)으로 발탁되어 여생을 보낸다.

 

아래는 일본 드라마의 아라끼 무라시게 모반 장면입니다. 일본어이고 전투장면은 뒤에 조금나오니까 그냥 분위기만 보시면 됩니다.  

 

 

아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반란

아께찌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4대 천왕 중 하나였고 시바따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다끼가와 가즈마스, 하시바 히데요시 등과 함께 5대 군단 사령관이었다. 그런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살해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평소에 당했던 원한과 주군에 대한 공포가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노부나가의 다른 가신인 이나바 잇데쓰의 가신이었던 사이또 도시미쓰(齊藤利三)가 미쓰히데의 가신이 되자, 잇데쓰는 노부나가에게 중재를 호소하게 되고 노부나가는 도시미쓰를 원 주군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미쓰히데는 노부나가를 위해 도시미쓰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하자, 긴 얘기를 싫어하는 노부나가가 감히 네가 나를 이기려고 드는거냐?”하면서 마구 폭행했고 미쓰히데는 두들겨 맞으면서 간신히 피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노부나가가 고슈를 장악했을 때에 미쓰히데가 이제 모두 주군의 땅이 되었으니 축하할 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 모두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축하인사를 올리자 노부나가는 나 혼자서 한 일이다. 네 놈이 뭘 했다고 나서는거냐?”라면서 머리를 마구 때렸다고 한다. 귀족 출신으로 원래 노부나가보다 지위가 높았던 미쓰히데에게는 참을 수 없었던 모욕이었다.

 

그림 설명: 미쓰히데를 두들겨 패고 있는 노부나가. 귀족출신에 군단장까지 오른 미쓰히데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림은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이 그림에 심각한 오류가 있군요. 미쓰히데는 대머리여서, 노부나가가 귤머리라고 놀렸습니다. 머리숱이 너무 무성합니다 ^^;

 

결정적인 반란의 계기는 노부나가가 모리가문을 공략하고 그 영지를 가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만약 미쓰히데가 강력한 모리가문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세력을 잃고 유령군단이 되는데도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노부나가가 하야시 미찌까쓰(林通勝)와 사꾸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을 토사구팽시킬 때와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노부나가가 혼노 사에 소수의 친위대만 데리고 예인들을 대접하는 동안, 미쓰히데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한다. 비교할 수 없는 천재성으로 일본의 모든 질서를 파괴시켰던 노부나가는 지나친 독단으로 자신을 파괴시킨 것이다.  

 

혼노 사에서의 미쓰히데의 노부나가 공격은 앞의 동영상에서 자세하게 나오니까 이번에는 아께찌 미쓰히데의 최후 동영상을 올립니다.

노부나가를 죽인 후에 세력이 결집되지 못하고,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전광석화와 같은 대응으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용인술과 용병술

(이 내용은 들녁 출판사의 야망패자의 내용을 보완한 것입니다.)

 

- 상비군의 창설

최신 병기인 화승총의 위력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력과 정보력을 장악한 노부나가의 군사/경제감각은 워낙 유명하니까 여기에서는 넘어가고 용인술과 용병술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노부나가는 일본 최초로 전업병사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창설했다. 흔히들 일본 전국시대를 생각하면 하나같이 갑옷/무기를 잘 갖춘 병사들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병력의 대부분은 전투에 미숙한 농민들이었고 농한기에만 전투를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에스기 겐신을 예로 들면, 그는 자주 관동에 진출했는데, 가을에 자신의 영토인 에찌고를 출발해서 관동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봄이 오면 에찌고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야 다음 해 농사를 짓고 전쟁을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있는 무장도 평상시에는 한 마을의 호족이어서 출진 명령이 떨어지면 자기 마을의 농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주군의 깃발 아래로 집합했던 것이다.

당시 거의 모든 다이묘들이 원정을 오래 떠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천하평정은 거의 불가능했다. 노부나가는 필요할 때에 언제라도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기요스와 고마끼야마 성에 무장들을 이주시키고, 무사를 농지에서 분리시켜 전업병사들로 구성된 상비군을 양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신들의 저항이 뒤따르자, 중심을 아즈찌로 옮긴 후, 노부나가는 오와이레 본가를 두고 있는 무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정원까지 모두 파괴시키는 등의 강제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병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아즈찌에 모여드는 낭인들을 병사로 채용한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농지나 마을에 바탕을 두지 않은 폭력배 무리였지만, 그 중에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중심으로 상비군을 만들고, 상비군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전략을 짜내기 시작했다.

 

- 기동전

일반적인 전사에서의 기동전과는 다른 개념이다. 기동전이라고 하면 기병이나 기계화 부대를 중심으로 펼치는 빠른 전개와 전투를 의미하지만, 기병이 거의 없었던 당시의 기동전은 일년내내 전쟁을 걸어 적을 피폐하게 만드는 의미였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평야의 농민이 중심이었고 조직된 상비군도 돈으로 조직된 군대였기 때문에 충성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와 달리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상비군은 1년 내내 노부나가가 필요로 할 때에 전쟁을 벌일 수 있었고, 장기간 원정을 하거나 대치를 해도 부담이 없었다. 노부나가는 이런 의미의 기동전을 주로 벌였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전투력은 신속한 전진과 후퇴로 보완해나갔다. 어렵게 함락시킨 성이라도 발목을 잡게 되면 바로 포기하고 적에게 넘겨줬다. 대신에 상대가 농번기에 들어서면 쳐들어가 마을을 불태우고 농사를 짓거나 추수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노부나가는 이런 기동전으로 자신의 부대가 가장 약했던 시기에 미노를 8년에 걸쳐 장악해나갔다.

 

- 신분을 고려하지 않은 중용

전국시대 다이묘의 가신단은 친족, 후다이, 도자마, 지키신의 4그룹으로 나뉘어지는데, 친족은 다이묘와 혈연관계에 있는 가신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집단이었고, 후다이는 다이묘의 본거지 주변에 사는 소영주로, 옛날부터 다이묘를 섬겨왔거나 다이묘와 먼 혈연관계의 가신들이다. 도자마는 영지가 확장되면서 새로 가신단에 편입된 사람들로 신잔(신참)이라고도 한다. 지키신은 고쇼(시동), 긴주(시종), 우마마와리(수호 기마장수), 호로(전령) 등 다이묘 직속의 사무라이들이다.

노부나가의 가신단도 이런 구성을 따랐지만, 그는 계층구조에 얽매이지 않고 재능에 따라 사람을 부렸다. 예를 들어 1580년 아버지 노부히데부터 이어진 가로의 우두머리 하야시 미찌가쓰(林通勝)와 중신이었던 사꾸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를 무능하다는 이유로 추방시켜버렸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5개 군단으로 진화하는데, 그 군단장 가운데 3인은 노부나가에 합류하기 전에 유랑생활을 하던 인물로, 하시바 히데요시(도요또미 히데요시로 개명)는 이마가와 요시모또 가문에서 중용되지 못했었고, 아께찌 미쓰히데는 적이었던 아사꾸라 가문을 섬겼었으며, 다끼가와 가즈마사(?川 一益)는 만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고가(甲賀) 닌자 출신이라고 한다. 자신의 군대 대부분을 외부 인재에게 맡겼을 만큼 그는 시간, 소문, 배경, 충성보다 능력을 먼저 생각했다.

 

- 150%의 능력과 노력을 요구

어떤 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MS의 스티브 발머가 비슷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초기의 MS에서는 인력평가를 할 때에 100% 성과달성은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100%는 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사람을 채용했기 때문에 100% 달성은 낙제라는 것이다. 120%는 달성해야 기본이고, 150% 이상은 달성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당장 발휘하는 사람, 또는 최소한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대대로 내려온 중신이라도 바로 폐기처분했다. 하야시 미찌가쓰가 추방당한 이유는 "사재를 너무 많이 축적했다"는 것으로, "네게 넓은 영지를 준 것은 사재를 축적하라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정비하고 더 증강시켜 큰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그 일을 하지 않았으니 노부나가의 가신이 될 수 없다"라고 내쫓았다. 사꾸마 노부모리의 경우에는 5년 동안 혼간 사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5년 동안 특별한 실책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노부나가는 실패보다 무사안일을 더욱 싫어했기 때문에, 실패가 두려워 모험을 하지 않은 노부모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아무리 공적을 많이 쌓았더라도 매년 냉정한 평가를 다시 내렸기 때문에, 군단장의 지위까지 오른 최고의 인물들도 그 스트레스를 못견뎠는데,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경우에는 일본이 통일된 후에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중국(조선을 통한)원정을 제안했고, 아께찌 미쓰히데는 스트레스를 못이기고 결국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용인과 용병술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바로 카리스마 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 보니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감히 맞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중신 중의 중신이었던 시바따 가쓰이에에게 내린 9개조 법의 9조는 노부나가를 우러러보며 그 그림자를 밟아서도 안되고 노부나가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뻗어서도 안된다고 했을까.

이렇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 독재자였지만, 그가 전국시대의 질서를 완전히 깨뜨려 무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에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새 시대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우에스기 왈: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본인이었다면 무척 아쉽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좀 더 빨리 죽었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노부나가가 계속 살아남아 군림했다면 실제로 중국 원정길에 올랐을 것이고, 임진왜란보다 더 빨리,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규모로 침공을 당한 조선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What if....란 소용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좀 더 빨리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다만, 그가 보여줬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언제라도 무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라는 가르침은 배우기 바랍니다. 사람을 모욕해서는 안된다는 교훈도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