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비잔틴-러시아 전쟁; 바이킹 대전

구름위 2012. 12. 11. 15:23
728x90

  비잔틴-로마와 키예프 공국과의 관계는 830, 860, 941년에 있었던 크고 잦은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대체로 우호 교린의 시대가 시작된......듯싶었습니다. 양국 간의 무역은 945년에 체결한 조약에 따라 제법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러시아 상인들에 의한 교역으로 러시아는 그 부와 문명 수준에 있어 상당히 발전하였으며 이들 러시아 상인들은 남북무역뿐 아니라 바랑고이 인들과 러시아 용병들에 대한 은행 업무까지 담당하였습니다. 키예프 인들은 정교회의 충실한 신봉자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로스인들(러시아인들)은 저 멀리 북쪽의 스칸디나비아에서 옮겨온 노르만 인들의 한 분파였으며 바랑고이 인들로 대변되는 강력한 전력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966년 말 혹은 967년 초, 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963-969)가 파견한 칼로키노스라는 파트리키오스(품계)가 루스의 통치자인 스뱌토슬라프에게 1,500 파운드의 금(=108천 노미스마타)을 제공하면서 불가리아를 대신 정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니키포로스 2세는 불가리아에 대한 공물 지불을 귀찮은 것으로 여기고 전쟁을 야기했지만 더불어 불가리아의 산림과 구릉지대를 넘나드는 것은 질색이었던 까닭에 벼룩 잡으려 초가삼간을 태우는 짓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스뱌토슬라프는 그렇지 않아도 불가리아의 차르인 보리스 2세가 휘하의 보야르(제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터라 이 기회에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계획하여 총 6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결집되지 못했던 불가리아 제국은 루스 인들에게 참패하며 그대로 붕괴되었습니다. 차르 보리스는 포로가 되어 수도인 프레슬라프에 연금당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르카디우폴리 전투, 970년 초봄(클릭하면 커집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로마 제국에 피해를 끼친 불가리아가 큰 낭패를 당했다고 좋아하기에는 루스 인들의 세력이 너무 강성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969년 니키포로스 2세가 주살되자 곧이어 루스 군이 트라키아로 밀고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970, 루스 인과 불가리아, 페체네그, 마자르로 구성된 대군이 발칸 산맥을 넘어 남하하였으며 필리푸폴리를 유린하여 총 2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말뚝에 꿰어 참살하였습니다. 초봄, 스클레로스 장군이 지휘하는 10,000 내지 12,000명의 제국군이 아르카디우폴리에서 이민족 대군을 방어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스 연합군의 수가 제국군의 5배 내지 6배였으므로 거짓 퇴각의 전술로 페체네그 군을 본대에서 떨어트려 매복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루스 연합군 본군은 크게 충격을 입고 제국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도주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많은 손실을 입어야 했습니다. 루스 군은 발칸 산맥 이북으로 퇴각하였으며 요안니스 치미스케스 황제는 내부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71, 준비를 끝낸 요안니스 1세는 아시아에 있던 군대를 유럽으로 옮겼으며 보급품과 공성 기계를 모으면서 3만 혹은 4만 명의 병력을 통솔해 발칸 산맥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제국 함대는 도나우 강으로 진입하여 루스 군이 북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습니다. 당시 루스 점령군은 불가리아 인들의 반란에 직면해 혼잡한 상태였고 아르카디우폴리(970) 전투 이후 임시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기강이 해이해져 발칸 산맥에 수비대도 배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직 완만한 봄이라고 할 수 없는 부활절 주간에 기습적으로 출병한 제국군은 기습적으로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대 프레슬라프에 공성하기 시작합니다.

 

971, 로마인들의 반격(클릭하면 커집니다)

 

  프레슬라프의 방어 지휘자이던 스판겔은 휘하의 불가리아 출신 주둔군과 루스 군을 규합해서 막고자 하였으나 413, 그러니까 한 달을 못 버티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볼모로 잡혀있던 불가리아의 차르 보리스 2세도 구출되었습니다. 한편 제국군의 북진 소식을 들은 스뱌토슬라프 대공은 불안한 나머지 300명에 달하는 불가리아 귀족(보야르)들을 모두 처형시켰으며 각처의 요충지에 배치된 불가리아 주둔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제국군에 투항하였습니다. 제국군이 도로스톨론에 도착할 무렵, 루스 군도 성 밖으로 나와 전투를 준비하였습니다. 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후 치미스케스 황제는 중무장 카타프락토이 부대에게 적을 돌파하도록 지시했으며 순식간에 전황은 로마인들에게 기울었습니다. 루스 인들의 진형은 급격히 무너져 성채로 퇴각해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포위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도로스톨론 주변. 말 그대로 당시 스뱌토슬라프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도라스톨론 성채 뒤편으로 흐르는 도나우 강에는 300척의 제국 함대가 그리스의 불까지 장착하고 퇴로를 막고 있었으며 성 밖에서는 공성 무기로 쉴 새 없이 성벽을 두드리는 육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루스 군 2천 명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급품을 모으기 위해 잠깐 나갔다 오기도 했고 몇 번이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돌파 시도를 했으나 번번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포위된 지 65일이 되던 7월 말, 스뱌토슬라프는 요안니스 1세에게 항복하고 다시는 제국에 칼을 들이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채 물러가야 했습니다. 포위가 끝나 귀환하게 된 루스 군은 약 22천명. 포위 직전까지도 6만에 가까운 전력을 보존하던 상황이었으니 루스 군이 얼마나 뼈저린 패배를 당했는지는 분명한 일입니다. 그나마 무사히 빠져나간 스뱌토슬라프 대공조차 페체네그 인들이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으며 살해하면서 루스 군이 94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야심차게 준비했던 원정은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987-8년 사이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와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결혼한 이후-988년도의 전쟁은 그 양상이 1043~1046 전쟁과 유사하며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전자가 후자를 잘못 기억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양국간 교류와 우호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루스 인들은 어디까지 노르드, 곧 바이킹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남쪽에 엄청난 부가 축적된 도시를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이를 언제까지나 노리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기의 어떠한 전쟁이나 모두 그렇듯이 최후의 전쟁은 조금은 사소한 문제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콘스탄디누폴리에 주재하고 있있던, 상당히 저명한 러시아 상인이 수도의 주민과 설전이 붙더니 마침내는 격투를 벌인 끝에 러시아 상인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1043년의 일이었습니다. 콘스탄디노스 9세는 만족할만한 보상을 제안했지만 당시 루스 인들의 지도자이자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대공은 이 사태를 그냥 넘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러시아인들이 콘스탄디누폴리에서 거래하면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취함으로써 부의 원천을 취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지 생각됩니다. 안 그래도 이들은 이미 미하일 4(1034-1041)가 제위를 가져간 것을 구실로 원정을 준비하려다가 미하일 4세가 죽는 바람에 거의 2년가량 연기한 상태였습니다.

  대공 야로슬라프는 북쪽 해양에 위치한 섬들에 있는 자신의 동맹까지 동원하여 바이킹 대군을 동원합니다. 스킬리체스 연대기에서는 10만이라고 합니다만 실제 콘스탄디누폴리 해안에 나타난 함대를 감안해보면 최대 4~5만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대군은 모노킬라(Monoxyla)라고 하는 통나무배로 수송되었습니다. 한편 콘스탄디노스 황제는 제국 각지의 모든 러시아 상인들과 군인들을,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먼 거리에 있는 군관구로 옮겨 포로로써 감시하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10세기 슬라브 인들의 모노킬라. 통상 40~70명의 인원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장군의 대규모 반란이 진압되면서 걱정을 하나 덜은 콘스탄디노스 9세는 조칙을 내려서 러시아 군의 침략에 응전할 군을 규합하게 하였습니다. 러시아 함대가 마니아케스의 반란이 끝나자마자 도착했기 때문에 당장 이를 저지할 함대도 없었고 결국 수도에 있었던 전함과 상인들을 동원하여 긴급 방어 함대를 급조하였습니다. 매우 불리한 상황이지만 바이킹들의 함선이 매우 작은 종류의 함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 괜찮은 조건이었습니다. 여기에 함선마다 가득히 그리스의 불을 적재하였기 때문에 믿을 구석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1043, 전쟁의 시작

 

  한편 키예프를 떠난 러시아 함대는 중간 기항을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중간에 위치한 바르나에 기항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당시 바르나를 방위하고 있던 장군은 5년 후 이베리아(1048, 카페트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카타칼로노스 케카우메노스 장군이었습니다. 결국 남의 나라를 침공하던 와중에 그 나라 항구에서 쉬어가려던 키예프 인들은 바르나 주변을 약탈하려다가 카타칼로노스의 군에 쫓겨 함대로 퇴각하였으며 곧이어 항구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분노에 찬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수도 콘스탄티누폴리를 향해 항해하였습니다.

  이 함대가 보스포러스 해협에 나타날 무렵, 황제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외교적인 타협을 시도하였습니다. 제국의 사절은 원안대로 살해된 상인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제시하면서 장기간 유지된 평화를 깨지 말라고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은 이 사절단을 무례하게 대접하였으며 평화의 대가로 원정에 동원된 병사 1인당 3파운드의 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3파운드의 금이라면 216노미스마타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동원된 군이 4만 명이라고 해도 800만 노미스마타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정부 1년 예산이 약 600만 노미스마타로 추정되는 것을 고려하면 그저 전쟁의 명분을 찾는 데만 의의가 있는 이 제안에 어이를 상실한 제국 정부는 이에 답변하지 않았으며 양측은 일전불사를 다짐했습니다.

 

1043, 파로스 전투

 

  러시아 함대 400척이 마침내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진입하자 황제는 육군을 배치해 해안 지대를 경비하게 하여 러시아 군이 상륙해 분탕질을 하는 것을 막도록 조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마침내 군을 출동시켰습니다. 러시아 인들이 함대 대형을 정리할 무렵 황제와 프셀로스는 근처의 언덕에 올라 이 모든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야로슬라프 대공은 자신의 함대를 1자 형태로, 한쪽 해안선에서 다른 쪽 해안선에 이르는 형태로 정리하여 공격 혹은 방어를 준비하였습니다. 엄청난 함대가 이런 대규모 기동을 선보이는 자체의 광경도 충분히 경악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요일은 거의 다 가고 있었는데 러시아 군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대형을 벗어나지도 않는 것을 파악한 황제는 바실리오스 테오도라카노스 장군에게 세 척의 전함을 택해서 적들에게 사격을 가해 전투하게끔 유인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바실리오스는, 그러나 자신감이 있었는지 대뜸 적의 대열 한가운데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번거롭게 앞길 가로막지 말고 저리 비켜!"

뭔가 오버레이 되는 것이 있지만 그냥 넘어가지요 ㅎㅎ;;

  무모하게도 적 대열의 중앙으로 돌격해 들어간 세 척의 드로몬 함은 그리스의 불을 난사하여 순식간에 7척의 적함을 불살라버렸으며 3척은 선원들과 함께 그대로 격침시켜버렸습니다. 이어 바실리오스는 용감하게 적함으로 뛰어내려(드로몬 함은 모노킬론 함보다 키가 큽니다) 선원들을 제압하고 함선을 장악해버렸습니다(벌써 전과가 440명 내지 770명이군요;;). 세 척의 전함으로 꽤나 성공적인 공격이 이루어지자, 황제는 다른 함선들에도 신호를 보내 적을 밀어붙이도록 지시합니다.

  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향해 진격하자 이미 세 척의 분견대에 잔뜩 질려버린 러시아 함대는 다시 큰 피해를 입고 대형을 무너뜨린 채 황급히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지에 상륙한 군대마저도 일패도지하며 함대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 때마침 불어 닥친 바다폭풍으로 러시아 군은 완전히 퇴각해버렸습니다. 황제가 바실리오스와 스콜라이 기병대 사령관 겸 시종장인 니콜라오스에게 타그마타 2개 연대(8천명)와 헤타에레이아(용병대)의 지휘를 맡겨 해안을 이틀 가량 더 경비하도록 조치하긴 했으나 성공적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격퇴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야심찬 원정에서 패퇴하고 귀환 중이던 러시아 함대는 또다시 바르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카타칼로노스 장군의 군대와 만나게 되었으며 대 참패를 당하였으며 800명의 포로가 수도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역사가들은 바르나에서 또 폭풍을 만난 것으로 대체해버렸는데, 이 역사가들이 제시한 바르나에서의 사망자 수가 15천이라 하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지는 더 물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전면적인 파괴로 치달은 로마-키예프 관계는 1044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케르손-오늘날 러시아 세바스토폴- 점령 이후 2년이 지난 1046년에 마침내 회복되었습니다. 1043년에 포로로 잡혔던 러시아 인들이 모두 방면되었으며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인 흐셰볼로드 1세와 콘스탄디노스 황제의 딸인 아나스타시아 공주가 결혼하였습니다. 이 부부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크는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2세가 되었습니다. 극적으로 회복된 양국 관계에 단 하나 차이라 하면, 더는 해상 무역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바이킹의 군세를 여유 있게 무찌른 로마인들이 이제 좀 발을 뻗어보고 평화를 누리려던 찰나...... 웬걸요. 1046년 겨울, 일단의 페체네그 인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면서 더욱 심각한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