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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최후의 전투 -세키가하라전투

구름위 2012. 12. 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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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AD.1600년, 9월 15일

위치 : 오가키성의 서쪽 세키가하라, 현재의 기후현 세키가하라쵸

-전력비교-

동군:

지휘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조스이, 호소카와 다다오키, 호소카와 유사이, 교고쿠 다카쓰구, 다테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호리 히데하루, 호리 치카요시, 미조구치 히데카쓰, 야마노우치 가즈토요, 아사노 요시나가, 구키 모리타카, 이나바 미치토, 나베시마 나오시게, 도쿠나가 나가마사 등의 다이묘 연합

병력 : 7만5000

서군:

지휘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한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데루모토, 안고쿠지 에케이, 오타니 요시쓰구, 사나다 마사유키, 구키 요시타카, 호리우치 우지요시, 우지이에 유키히로, 키시다 타다우지, 니와 나가시게, 아오야마 무네카쓰, 아오키 가즈노리, 니와 나가마사, 야마구치 무네나가, 오다 히데노부, 다치바나 무네시게,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타케 요시노부, 다가야 시게쓰나, 소마 요시타네, 이와키 사다타카, 오노데라 요시미치, 야마가와 토모노부, 마쓰우라 히사노부, 도다 시게마사, 히라쓰카 다메히로등의 다이묘연합

병력 : 8만3000

특징 :전투중 사가라 요리후사, 아키즈키 다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쓰키 모토쓰나,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이나바 사다미치, 다케나카 시게카도, 가토 사다야스등이 이끌던 2만가량의 병력이 배신



9월 15일, 오전 4 시

– 세키카하라(関が原)로… - "유리한 포진의 서군, 독안에 든 쥐인 동군"

세키가하라의 위치


15일 오전 1시경부터 4시경에 걸쳐서 서군은 꼬리를 물며 세키가하라에 도착, 바로 진을 쳤다.

우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 6000이 코세키촌(小関村) 일대에 진을 쳤고 호코쿠가도(北国街道)를 제압한 후 미쓰나리 자신은 그 북방에 있는 사사오산(笹尾山)에 진을 두게 된다. 이시다 부대의 우측에는 히데요리(秀頼) 휘하 약 2000이 도열해 있었고, 호코쿠가도(北国街道)를 낀 코이케촌(小池村)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1500이 포진하였다.

시마즈 부대의 뒤를 이어 전진했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4000은, 시마즈 부대의 우측에 있는 텐마산(天満山)의 북부에 진을 쳤다. 마지막으로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 1만 7천 여는 텐마산의 앞에 오단(五段)으로 진영을 만들었다.

이 전진부대와 더불어 이미 세키가하라에 포진하고 있던 부대가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서남에 있는 나카센촌(中山村)의 토코강(藤古川)의 대목에는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부대 1500, 토코강의 건너편 기슭의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서는 요시쯔구의 아들 요시카츠(吉勝)와 조카인 키노시타 요리쯔구(木下頼継)의 병력 약 2500여가 있었다.

또한 나카센도(中山道)의 남쪽에 있는 마쯔오산(松尾山)의 산기슭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쯔키 모토쯔나(朽木元綱) 등 4부대, 4000의 병력이 포진. 이 부대는 오오타니 요시쯔구의 지휘하에 있었고,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 마쯔오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만 5천이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난구산(南宮山)의 주변에는 이미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惠瓊),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각 부대를 합쳐 3만 여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동군이 세키가하라에 진군해 준다면 난구산에 포진하고 있는 대부대에 의해 동군은 독 안에 든 쥐가 될 형국이었다. 이에야스가 이 난구산의 부대를 중시여겨,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내응을 확약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서군으로써 세키가하라에 포진한 총병력은 8만 수 천 여. 동군의 총병력보다 1만 명 이상 많았다.
한편, 동군은 4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세키가하라에 진군을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진군 도중 난구산(南宮山)의 동향을 중시여겨 타루이(垂井) 및 난구산(南宮山)의 접경지대에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야마우치 카츠도요(山内一豊),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등 1만 4천을 대치 시키면서 서군의 움직임을 억제하였다.

세키가하라의 위치


15일 오전 1시경부터 4시경에 걸쳐서 서군은 꼬리를 물며 세키가하라에 도착, 바로 진을 쳤다.

우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 6000이 코세키촌(小関村) 일대에 진을 쳤고 호코쿠가도(北国街道)를 제압한 후 미쓰나리 자신은 그 북방에 있는 사사오산(笹尾山)에 진을 두게 된다. 이시다 부대의 우측에는 히데요리(秀頼) 휘하 약 2000이 도열해 있었고, 호코쿠가도(北国街道)를 낀 코이케촌(小池村)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 1500이 포진하였다.

시마즈 부대의 뒤를 이어 전진했던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4000은, 시마즈 부대의 우측에 있는 텐마산(天満山)의 북부에 진을 쳤다. 마지막으로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 1만 7천 여는 텐마산의 앞에 오단(五段)으로 진영을 만들었다.

이 전진부대와 더불어 이미 세키가하라에 포진하고 있던 부대가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서남에 있는 나카센촌(中山村)의 토코강(藤古川)의 대목에는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부대 1500, 토코강의 건너편 기슭의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서는 요시쯔구의 아들 요시카츠(吉勝)와 조카인 키노시타 요리쯔구(木下頼継)의 병력 약 2500여가 있었다.

또한 나카센도(中山道)의 남쪽에 있는 마쯔오산(松尾山)의 산기슭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쯔키 모토쯔나(朽木元綱) 등 4부대, 4000의 병력이 포진. 이 부대는 오오타니 요시쯔구의 지휘하에 있었고,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 마쯔오산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만 5천이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난구산(南宮山)의 주변에는 이미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惠瓊),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의 각 부대를 합쳐 3만 여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동군이 세키가하라에 진군해 준다면 난구산에 포진하고 있는 대부대에 의해 동군은 독 안에 든 쥐가 될 형국이었다. 이에야스가 이 난구산의 부대를 중시여겨,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내응을 확약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서군으로써 세키가하라에 포진한 총병력은 8만 수 천 여. 동군의 총병력보다 1만 명 이상 많았다.
한편, 동군은 4시가 조금 넘어서부터 세키가하라에 진군을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진군 도중 난구산(南宮山)의 동향을 중시여겨 타루이(垂井) 및 난구산(南宮山)의 접경지대에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야마우치 카츠도요(山内一豊),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등 1만 4천을 대치 시키면서 서군의 움직임을 억제하였다.
9월 15일, 오전 5시
- 이에야스 본진,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 진격-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의 상황

동군의 선봉이 되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부대가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오전 5시 경이었다. 후쿠시마(福島) 부대 6000은 텐마산(天満山)의 우키다(宇喜田) 부대와 대치 하였고 쿠로다(黒田) 부대 5400은 텐마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있는 사사오산(笹尾)의 서군에 대비하였다.
후쿠시마 부대의 배후에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 약 2500과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 부대 3000이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부대 2400이 와 있는 상태였다.

또한 세키가하라 북쪽에서 남쪽에 걸쳐 횡일선으로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부대 5000,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부대 3000, 쯔쯔이 사다쯔구(筒井定次) 부대 2900,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부대 3000, 이에야스의 사남(四男)으로 초진(初陣)으로 참가한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義) 부대 3000과 이들을 보좌하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 부대 3600이 도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쿠로다(黒田) 부대로부터 이이(井伊) 부대까지, 제 1선의 배후에는 카네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부대 1100과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 부대 1800이 제 2선을 구성하였고 오다 유라쿠(織田有楽) 부대 약 500과 요시다 시게카츠(吉田重勝) 부대 1000이 제 3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진용이 형성되자, 이에야스는 난구산(南宮山)을 왼쪽 편으로 조망하면서 나카센도(中山道)를 통해서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 진출한 후 그의 부대를 본진으로 하면서 3만 여의 병력을 견고히 했다.

동군의 총병력은 약 17만 5천. 양군의 주력이 세키가하라에 대진하였지만 진형은 산을 배후로 하면서 경사면(傾斜面)으로 포진한 서군이 유리하였다. 메이지 18년에 일본으로 건너 와 육군 대학교 교관을 지낸 독일의 멕켈 참모 소좌는 동서 양군의 진형도를 보자마자 그자리에서 “서군의 승리”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서군의 포진은 동군을 완전히 둘러 싸고 있는 형태로 포위공격을 할 수 있는 태세였기 때문이었다.
오전 8시 – 이윽고 시작된 결전 –


전투직전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서군이었으나 배신하는 부대

- 토쿠가와(徳川) 부대의 선공에 화가 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돌격 -세키가하라도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6시를 넘어서서도 계속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개가 짙어 100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 였다. 이윽고 비가 멈추긴 하였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시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면서 400미터 정도 떨어져 대진하고 있는 동서 양진의 진용이 살짝 옅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최전선을 향해 이동하는 부대가 있었다. 이에야스의 넷 째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와 그의 장인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였다. 불과 30여 명 뿐이었으나 그들은 선제공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동군의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는 남모르게 불만을 품어오고 있었다. 이 전투는 토요토미(豊臣) 은고(恩顧)의 다이묘(大名)끼리의 전투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토쿠가와(徳川)와 토요토미(豊臣)의 대결이었다.

토요토미 은고의 다이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선봉을 끊는다면 토쿠가와의 무위(武威)는 웃음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토쿠가와(徳川)가 선제공격을 취하지 않는다면 후에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의 후견역으로서 선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이 부대는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통과해 최전선으로 향하려고 하였으나 후쿠시마 부대의 카니 사이조(可児才蔵)가 이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선봉은 우리들이다. 선제 공격을 빼앗는 행동은 용서할 수 없다”

우선, 후쿠시마 부대가 서군의 주력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를 공격해 무력화시키고, 그 사이에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부대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를 습격한다는 시나리오가 전 날 밤의 군사회의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이이 나오마사는 그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공(公)은 첫 출진이다. 후학을 위해서 견습을 하는 중” 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전진을 계속하였다. 우키다(宇喜田) 부대의 전면에 도착하자 마자 철포를 쏘면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를 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이 나오마사에게 선봉을 빼앗겨서는 무슨 면목이 서겠는가”라고 격노하면서 말 위에서 군배(軍配)를 휘둘렀다.

때는 오전 8시. 고요하기 그지 없었던 세키가하라가 한 순간에 총성과 함성에 휩싸이게 된 것이었다.

개전 1시간, 사투와 일진일퇴 –

후쿠시마(福島) 부대가 우키다(宇喜田) 부대에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양군의 공격신호를 알리는 봉화가 올랐다. 양군의 장병들은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 같은 함성을 올리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후쿠시마 부대의 공격을 받은 우키다 히데이(宇喜田秀家)에 부대의 선봉 8000을 지휘하고 있던 아카시 테루즈미(明石全澄)는 역으로 후쿠시마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죽어서는 안된다. 공격하라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격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다시 한 번의 반격. 쌍방에 일진일퇴의 격투가 반복되었다.
이시다(石田) 부대에게도 동군의 각 부대가 쇄도하고 있었다. 우선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부대가 이시다 부대의 좌익을 돌파하기 위해서 진격하였다. 이를 저지 하기 위해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중신인 시마 사콘(島左近)이 공격해 왔으나, 사콘이 총탄에 맞으면서 이시다 부대의 제 1선이 무너지고 만다.

여기에 카네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제장이 이시다 부대를 공격해 들어왔다.

서군 대장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목을 베는 것이 이 전투에서의 최대 공훈이라고 생각한 동군의 제장들은 이시다 부대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이시다 부대는 이들을 격퇴하면서 오히려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正) 부대를 괴멸시키고 있었다.

또한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 쿄고쿠 타카토모(京極高知) 부대, 테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부대를 맞이하여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부대는 치열한 응전을 펼치면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루고 있었다.

오다 유라쿠(織田有楽) 부대, 후루타 시게카츠(古田重勝) 부대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부대를 향해 돌격.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던 이이(井伊) 부대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를 향해 진격하였다. 시마즈(島津) 부대는 왠지 돌격은 감행하지 않은 채 진(陳) 안에서만 응전할 뿐이었다.

개전으로부터 한 시간 여가 지났다. 총성과 함성은 세키가하라를 뒤 덮고 있었으나 승패의 형국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난구산(南宮山)에 있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 부대가 측면에서 이에야스(家康)의 본진을 뚫으면 승리한다”

오전 10시 –일진일퇴의 공방-

화가난 이에야스(家康), 초조해 하는 미쓰나리(三成). 형세는 아직 불분명.

전투가 시작되서 2시간이 지난 오전 10시, 전장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투의 형세는 여전히 불명확하였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치열한 사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부대는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부대와 맞서고 있었고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 또한 돌격해 오는 동군을 맞이하여 백병전을 전개하며 용전을 불사하고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부대도 시마 사콘(島左近)이 부상하였음에도 여전히 분전하면서 한 발자국도 물러 서지 않았다.

그러한 격전 속에서 후쿠시마(福島) 부대와 우키다(宇喜田) 부대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후쿠시마 부대는 두 번, 세 번 역공을 받으면서도 마사노리(正則)의 질타에 의해 진형을 다시 가다듬고 반격을 시도하였다. 양쪽 부대가 전진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엄청난 공방전이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파하고 전국(戰局)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서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에야스(家康)는 본진을 모모쿠바리산(桃配山)으로부터 진바노(陣馬野)로 전진시켰다. 그곳은 양쪽 군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본진을 전진시킴으로써 동군을 한 층 더 분발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화가 나 있었다. 서군은 총병력 8만 수 천 여 명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세력은 3만 수 천 여에 불과한데 비해서 동군은 6만이 넘는 군세가 전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쓰나리 역시 화가 나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시다 부대의 근처에 포진하고 있던 시마즈(島津) 부대는 전국(戰局)을 살펴보고 있을 뿐 출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시마즈 부대로 잘못 들어간 서군 병사에게 철포를 쏘기도 했다. 미쓰나리가 참전을 촉구하는 사자(史者)를 보내기도 했지만 쫓겨 나기만 했다.

서군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정오(正午)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반기.

- 봉화가 올랐으나 난구산(南宮山)의 모리(毛利) 일족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마즈(島津)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된 미쓰나리(三成)는 즉시 봉화를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이 봉화는 양군 박빙의 전국을 서군 우세로 이끌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松尾山)에 포진하고 있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 1만 5천과 난구산(南宮山)에 있는 모리(毛利) 일족 부대 약 3만이 동시에 공격을 감행한다면 서군의 승리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이 봉화가 올랐던 것이 오전 11시 경. 난구산(南宮山)에서도 이 봉화가 분명히 확인되었다. 하지만, 전 날 이미 이에야스와 내응을 약속, 전투 불참가를 맹세했던 키츠가와 히로이에(吉川広家)는 봉화 신호를 무시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난구산(南宮山)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히로이에(広家)는 정상 가까이에 있는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부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히데모토 부대는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히로이에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산을 내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봉화를 본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는 사자(使者)를 히데모토(秀元)에게 보내어 전투참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히로이에에게 길을 완전히 차단당한 히데모토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출진하고 싶지만, 히로이에가 병력을 이동시키지 않기에,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는 답장을 받은 에케이와 마사이에도 병력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다.

모리 일족 부대 약 3만은 전장 가까이의 난구산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 명의 병력도 출진시키지 않은 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난구산의 모리 일족의 방관이 세키가하라 전투의 귀추를 결정했지만, 전국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모리 일족이 있었다. 마츠오산에 포진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그 주인공.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처인 키타노 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로 모리 일족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양자였다.

히데아키는 이 전투에서는 서군으로 참전하였으나, 마음은 동군 측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히데아키는 서군의 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을 내려와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한편, 이에야스(家康)에게는 기회를 틈타 서군을 배반, 동군으로 가담한다는 밀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아키가 언제쯤 동군으로 붙을 것인가. 이에야스(家康)와 미쓰나리(三成)의 시선은 마츠오산을 향해 그의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었다.
- 히데아키(秀秋)에게 위협사격을 가하라! -
그러나, 양측의 기대와는 달리 히데아키(秀秋)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군은 계속해서 사자를 보내어 출격을 촉구하고 있었다. 정오를 넘긴 시간, 이에야스(家康)의 초조함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히데아키에게 속았단 말인가..” 라고 탄식할 뿐이었다. 히데아키가 배반하지 않으면 난구산(南宮山)의 모리 일족 부대도 히데아키에게 동조해 동군에게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야스는 결단을 내렸다.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산(松尾山)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

히데아키는 그 때 까지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서군은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겐푸쿠(元服(성년식))를 할 때 까지 관백직(関白職)을 히데아키에게 양도하고 관서(関西) 지방의 일국(一国)을 하사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한 편 이에야스는 이국(二国)을 주겠다는 서약서를 보내면서 배반을 확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아키의 중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平岡頼勝)와 이나바 마사나리(稲葉正成)는 이미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으나 최종 결단은 히데아키에게 있었다.

거취를 결정하기 어려웠던 히데아키에게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은 효과가 있었다. 위협사격에 놀란 히데아키는 즉시 눈 앞의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 부대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고 있던 오오타니 요시쯔구 부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응전하면서 순식간에 히데아키의 부대를 후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배반은 배반을 부르고 말았다.
그 때까지 서군으로서 활약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오카와 스케타다(小川祐忠) , 아카자 나오야스(赤座直保),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 등 5000여 명의 병력이 이에야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 돌진하였던 것이었다. 이 들의 배반은 오오타니 부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히데아키가 부대를 다시 정비해 반격을 시작하였고 여기에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의 부대 등 동군 제장들이 공격에 합류하였다.

이윽고 오오타니 부대가 괴멸되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부대도 측면을 뚫리면서 무너졌고,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도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의 배반으로부터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전국(戰局)이 크게 바뀌고 만 것이었다.

- 도주하는 서군 주력 -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던 서군은 코바야카와(小早川) 부대의 참전으로 인해 동요하면서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오오타니(大谷) 부대의 괴멸에 이어 코니시(小西), 우키타(宇喜田) 부대가 무너지자 승기를 잡은 동군은 이시다(石田) 부대를 향해 노도와도 같은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야스(家康)는 코바야카와(小早川) 부대의 움직임과 함께 자신의 휘하에 있는 3만의 정예 병력을 전선으로 내보내면서 총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이미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후방의 이부키산(伊吹山)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는 “히데아키(秀秋)를 찔러 죽이고 한을 씻겠다”며 선두로 나서려고 하였으나 아카이시 테루즈미(明石全澄)의 필사적인 간언으로 결국 퇴각을 결의하게 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부대는 점점 고립되어 가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분전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미 시마 사콘(島左近)도 없고, 분전하던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가 전사하는 등 이시다 부대도 괴멸되어 갔고 미쓰나리 역시 호코쿠가도(北国街道)를 따라 도주하였다.

오후 2시, 승패가 결정된 전장에는 시마즈(島津) 부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시마즈(島津) 부대, 적중돌파로 전장탈출 시도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미쓰나리(三成)의 출진요청도 거절하면서 자신의 진으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주전장(主戦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장이탈의 기회를 놓친 시마즈(島津) 부대에게 동군이 일제히 공격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요시히로(義弘)는 결단을 피할 수 없었다.

“적의 정 중앙을 돌파해서 전장을 탈출한다”는 계획이었다. 1500여 명의 시마즈 부대 장병들이 하나가 되어 동군을 향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이러한 의표를 찌르는 행동으로 작전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요시히로는 전장을 탈출해 사츠마(薩摩) 무사의 의지를 보여 줄 수 있었다.

그 돌파를 마지막으로 세키가하라의 격전은 동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인이 되는데 큰 한발자욱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