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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3/6부) - 격동의 세월,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구름위 2012. 11. 1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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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3/6부)

격동의 세월,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

▲ 동학 농민혁명 전개도 © 편집부
이후 소강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용은 1895년 4월 19일(음력) 종신 유형(流刑)에서 10년 유형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6월 12일(음력)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지식인들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 일본은 1895년 재한일본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은 일본정부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 2대대장 이두황,·3대대장 이진호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 국왕 친위대 부위 윤석우,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 문신 구연수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 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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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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