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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2/6부) - 즉위 초기는 대원군의 섭정, 이후 개혁 개방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고종

구름위 2012. 11. 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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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2/6부)

즉위 초기는 대원군의 섭정, 이후 개혁 개방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고종

 

 


즉위 초기

고종의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정에서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대원군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들은 열기구를 본딴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고종의 친정

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음력 9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청의 간섭과 갑신정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온다.

▲ 1884년 촬영한 고종의 최초 사진. 고종은 개혁 개방적인 군주였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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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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