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스크랩]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아라!

구름위 2012. 9. 2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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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슬란의 블로그

 

 

1938년 베를린.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의 뒤안에서 연구자 오토 한(Otto Hahn)과 프리츠 스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은 제국의 수도 군부에 그들의 연구 성과를 알린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중성자(Neutron)를 방사(放射)함으로 충격을 가해 우라늄 원자를 분열시키는데 성공했다. 원자시대의 개막이었다.

 

 

 

 

이 소식은 곧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단 하나의 원자가 분열함으로 반 호수(Wannsee)를 일시에 성층권으로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생성된다."

 

독일로부터의 보도를 접한 국제 물리학자 협회는 충격에 휩싸인다. 제어가 가능한 원자 연쇄 반응을 야기시키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가 되었다. 모든 국가가 이 경주에 참여했다. 독일이 승자가 된다면 그 결과는 처참할 터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코 앞에 있었던 것이다. 오토 한은 자신의 발견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궁극적인 대량학살의 무기가 그 발견을 토대로 개발된다면?

 

 

그와는 반대로 파울 하르텍(Paul Harteck)은 군부에 핵 연구의 군사적 가치를 역설했다.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핵물리학 연구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을 제조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소유한 나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적 진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수뇌부는 연구자들의 또다른 성과를 기다려야 했다. 문제는 중성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데 있었다. 원자 핵이 분열한 후 중성자는 너무 빨리 튕겨져 나오고 이것들은 또다른 우라늄 원자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많은 우라늄 원자에 다다르게 하기 위해 중성자의 속도를 줄이는 방법이 꼭 필요했다. 성공한다면 새롭게 생성되는 중성자들은 다시 다른 원자를 분열시키게 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됨으로 급기야는 폭발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물질이 중성자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이상적인 해법으로 중수(重水)에 눈을 돌렸다. 보통의 물과는 달리 중수는 원자 핵에 또하나의 중성자를 가지고 있는 중수소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로 인해 보통의 물보다 무거운 물질이다.

 

중수를 보통의 물로부터 분리하는 방법은 전기분해인데 이 때 거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1 리터의 중수를 얻기 위해서는 32.000 kWh에 달하는 전력이 요구된다. 폭탄을 만들기 위한 원자로에는 최소한 5 톤의 중수가 사용되고 이는 160.000.000 kWh의 전력을 의미한다. 당시 세계의 어떤 발전소도 이만한 전력을 생성해낼 수가 없었다. 단 하나의 예외-노르웨이의 페르모르크(Vermork) 공장-를 제외하고는. 이에 독일 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미국이 이 외딴 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유럽 고지대의 산에 둘러싸인 "Norsk Hydro"는 1939년 말, 세계 최대의 발전소였다. 이곳에서 중수는 하나의 부산물로서 생산되는 물질이었고 언젠가는 의학 연구에 이용될 예정이었다.

 

중수를 만들어내는 복잡한 과정은 처음엔 손실만을 가져왔으나 핵기술의 발전으로 이것을 필요로 하는 곳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그러나 노르웨이인들은 자신들이 원자폭탄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1938년 그 발전소는 183 킬로그램이 넘는 중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세계 유일의 재고였다.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서로 모두 사겠다고 나섰다.

 

 

 

발전소의 소유주는 정확한 용도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팔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원자물리학자 졸리오 퀴리(Joliot-Curie)의 채근으로 프랑스 국방부는 첩보원 자크 아이어(Jaques Allier)를 오슬로로 파견해 이 중요한 증류액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이어는 노르웨이 공장 소유주의 옛 친구였고 사흘 동안의 설득으로 남아있는 중수를 프랑스가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밤 선적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이어는 독일 스파이가 쫓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고전적인 트릭을 이용했다.

 

 

 

 그 프랑스인은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가 출발 직전에 다른 비행기로 갈아탔다. 물론 중수도 그와 같은 비행기 안에 실었다. 독일 공군은 암스테르담행 비행기를 함부르크에 착륙하게 했고 화물칸을 뒤졌으나 원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추격자들이 실수를 깨달았을 즈음 문제의 물건은 이미 파리 졸리오 퀴리의 실험실에 무사히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물리학자에게는 원자 실험을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1940년 6월 14일, 히틀러의 군대가 파리로 들어왔다. 문제의 물건은 안전한 곳으로 다시 수송되어야 했다. 프랑스를 횡단해서 마지막 순간에 보르도와 런던, 캠브리지를 거쳐 미국으로 운반되었다. 183 킬로그램의 중수는 이렇게 간신히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중요한 물질을 두고 벌이는 싸움의 무대는 그러나 노르웨이였다. 1940년 4월 8일 독일군은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노르웨이인들은 페르모르크를 둘러싼 골짜기에서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러나 5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고 발전소 Norsk Hydro는 점령군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새롭게 떨어진 명령은 '생산되는 모든 중수를 독일로 수송하라'는 것이었다.

 

 

발전소가 점령되고 몇 달 동안 독일 물리학자들은 생성되는 중수의 양을 높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압착기로부터 방울져 떨어지는 중수는 밀리리터의 양이었고 베를린의 군부로부터는 계속해서 재촉이 들어왔다. 연내로 5000 킬로그램의 중수를 생산하는 명령에 그 곳에 주둔한 장교들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5톤의 양은 500%의 생산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무리한 요구에 놀란 노르웨이의 공장장은 런던에 있는 영국 비밀정보국(SOE)로 무선을 쳤다. 독일이 원자폭탄을 제조하려한다는 소식에 영국은 경악한다.

 

노르웨이인들은 그 사이 레지스탕스 그룹-오늘날에는 '텔레마르크(Telemark)의 영웅들'로 알려진-을 결성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들의 우방이 원자폭탄 개발 경주에서 이기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12월 전쟁 참전 당시 미국은 자국의 물리학자들에게 '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을 가진 핵무기 개발이라는 임무를 주었다. 군 수뇌부들은 보통의 방법으로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었다. 원자 무기만이 전쟁을 조속한 시일 내에 끝낼 수 있을 것이었다. 3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연구비와 200.000 명의 연구 인력이 동원되어 역사적인 거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독일 물리학자들을 따라잡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 사이 상황이 변했다. 1942년 히틀러의 속전속결에 제동이 걸렸다. 군대는 더 많은 탱크와 탄약을 요구해왔다. 군부는 (최초의 연쇄반응이 성공하기 전에) 실험실 수준의 원자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에 주판을 굴렸고, 독일 핵물리학계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보고했다.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돈을 잃어서는 연구를 계속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로그램에는 파울 하르텍의 "중수의 확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우라늄 분열로부터의 에너지 확보" 및 에리히 슈만(Erich Schumann)의 "무기로서의 핵물리학"등이 올라와 있었다. 이 보고서들은 효과가 있었다.

 


 

"원자분열에 대한 연구 분야는 이제 전 세계에 뿌리를 내렸고 때문에 그 결과물들은 상황에 따라서는 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기술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도 없었던 파괴의 방법을 부여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


1942년 3월,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의 일기 中

 


 

 

물리학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괴벨스의 요구는 그러나 충분한 양의 중수가 확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중수를 생성하는 보다 나은 방법이 개발되었고 그 해 공장에서는 흡족할 만큼의 양을 제공할 수 있었다.

 

 

모든 생산물은 즉시 하이젠베르크의 실험실로  운반되었다. 그 과학자는 동료인 로버트 되펠(Robert Döpel)과 함께 164 킬로그램의 중수와 750 킬로그램의 우라늄을 기본으로 모델 원자로인  "L-IV"를 가동시켰다. 중요한 진일보였다.

 

 

L-IV 실험은 세계 최초로 우라늄 및 산화우라늄과 중성자 감속제의 특정 배열이 더 많은 중성자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원자로를 구축하려면 그에 합당한 충분한 크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것을 증명하고 또한 개선하고자 실험을 속행할 때 큰 폭발이 일어났다. 우라늄 가루가 통에서 흘러나와 중수 및 물과 반응하여 폭발을 일으킨 것이었다. 화재까지 발생했으나 진압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한 첩보원에 의해 런던으로도 전해졌으나 사실 그대로는 아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핵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이것이 원자로 사고를 야기했다,라고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는 행동개시를 할 시기였다. 스코틀랜드로부터 비행기들이 오슬로 방향을 향해 떠났다. 레지스탕스들을 도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비행기들은 노르웨이의 산에 부딪혀 추락했고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생존자들로부터 독일은 페르모르크의 공장 주변을 그린 지도를 입수했다. 계획했던 사보타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체포된 사람들에겐 사형이 선고되었고 처형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이후 Norsk Hydro의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고 생산량은 높아졌다. 중수를 둘러싼 싸움에 대해 히틀러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알버트 스페어(Albert Speer)는 원자 연구 현황에 대해 그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1942년 여름, 군 장관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는 실험을 계속하게 할지의 여부를 결정해야만 했고 그리하여 하이젠베르크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였다.

 

그 물리학자는 어떻게든 세계 최초로 연쇄반응을 성공시키고 싶어했으나 폭탄의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군사적인 용도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다. 핵반응으로 원자폭탄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강조하지는 않았고 우물거리듯이, 그저 덧붙이는 말로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페어가 관심있는 질문은 단 한가지였다. 언제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침착하게 3년에서 5년이라고 대답했고 그것이 끝이었다.

 

 

연구비의 많은 부분이 로케트 제조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베를린의 미팅이 있은 2주 후 V-1의 대량생산 및 V-2의 개발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실험실에서 중수를 이용한 실험은 미약하나마 계속되고 있었다.

 

 

1943년 초, 노르웨이의 지하 조직원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연합군들은 여전히 독일이 핵실험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2월 27일, 조직원들은 몇 달의 힘든 여정을 참아낸 끝에 Norsk Hydro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원들 중 두 사람은 이전에 기술자로서 그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노르웨이인들에게 보복이 돌아갈까 두려워 영국 유니폼을 착용했다. 중수 농축기의 일부와 보관통들을 파괴하고 그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영국과 스웨덴의 언론에서는 이 습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상 작전의 성공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불과 몇 주 후에 파괴된 기계는 복구되었다. 런던은 Norsk Hydro 공장이 다시 정상가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프로파간다를 맡고 있던 괴벨스는 대단히 만족하며 독일이 최신 폭탄을 소유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나는 당시 11월 21일과 22일에 있었던 베를린 대공습에 대해 영국에 반드시 복수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수뇌부에 설명했다. 영국 언론은 다음 날 나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내가 그 곳에서 예고한 새로운 무기가 군부(Rüstungsministerium)가 아닌 선전부(Propagandaministerium)의 작품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왔다. 영국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정보를 주는 것은 내 임무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나는 그들이 우리가 만들지 못할것이라고 믿으면 믿을 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놀라게 하는 것도 하나의 무기가 아닌가."

 

- 괴벨스의 증언 中 -



괴벨스가 의미한 특급 신형무기는 로케트였다. 미국의 사령부는 그러나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1943년 11월 16일 Norsk Hydro에 140대의 폭격기가 접근했다. 30분 동안 페르모르크를 선회한 후 그들은 각각 500 파운드에 달하는 700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곳에 사는 시민들에게는 대재앙이었다. 21명의 시민이 죽었고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미국의 폭탄은 발전소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나 중수 생산의 심장부 부분은 해를 입지 않았다.

 

 

지속되는 공격에 대응해 베를린의 책임자들은 고전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그들은 비축되어 있는 모든 중수를 비밀리에 바깥으로 운반하고자 했다. 50개의 통에 들은 물질이 수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그 중요한 증류액을 여러 핵연구 실험실에 나누어 비치하고자 했다. 특히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노르웨이로부터의 새로운 공급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중수의 질도 저마다 틀려 농축 정도는 1에서 99%까지 가지가지였다. 통 위에 새겨진 번호는 특수 암호로서 그 속에 든 물질의 순도를 알려주고 있었으나 외부인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1944년 2월 20일, 독일 병사들은 이 비밀스런 짐들을 기차 왜곤에 실었다. 공장으로부터 철도는 "맬(Mael)" 로 이어졌고 그 곳에서 왜곤은 페리선 위로 올려질 것이었다. 또 페리는 틴 호수(Tinnsjø)의 맞은 편 티노세트(Tinnoset)로 짐을 옮길 것이었고 그 곳에서 기차와 배로 독일까지 운반될 것이었다.

 

 

 

레지스탕스들은 독일군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들은 수송과정 중의 약점으로 페리호를 주목했다. 폭발이 일어난다면 중수가 든 통들은 400미터 아래의 호수로 잠길 것이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페리를 침몰시킨다면 반드시 사상자가 나올 것이었고 그 작은 마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았다. 그들의 친한 친구나 친척들이 그 위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전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귀뜸을 해준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영국 비밀첩보부에 다시 한 번 물었다. "우리는 결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작전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다시 한 번, 오늘 중으로 확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즉각적인 대응으로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가 보내온 전보는 그들이 바라던 내용은 아니었다. 그 노르웨이인들은 망연자실하게 명령을 읽었다. "페리호를 침몰시키는 것은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수행되어야 한다. 시민 중에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성공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중간기점엔 독일 감시병이 이 중요한 물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추운 밤에 잠시 휴식을 취할 때 공작원들은 소리없이 배 안으로 숨어들었다. 폭탄을 설치할 가장 좋은 장소는 배 뒤 편에 있는 기관실이었고 그 곳까지는 해치로 이어져 있었다. 기차가 맬로 들어오는 동안 그들은 직접 만든 수제 시한 폭탄을 오전 10시 45분에 맞추었다.

 

 

시계가 가고 있는 동안 왜곤은 8시에 페리 위로 올려졌고 53명의 승객들이 탑승했다. 10시에 배가 출발했을 때, 3명의 공작원은 이미 멀리 산 위에 올라 있었다. 10시 44분, 폭발음을 들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고 드디어 배 위에서는 대혼란이 펼쳐지고 있었다. 페리는 침몰했다. 계획했던 대로, 중수는 차디찬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고 18명의 사람이 희생되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중수를 제거하기 위해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

 

 

이렇게 노르웨이 레지스탕스들은 독일로 향하는 최후의 중수 공급을 저지시켰다.

 

 

그 이후에 독일 과학자들이 Norsk Hydro로부터 공급받은 중수는 아마 가라앉지 않고 회수된 중수들이었을 것이다. 순도가 높은 중수는 통에 꽉 채우지 않았고 그 결과 통 안에 공기가 차 있었으므로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주 후 바덴 뷰템베르그(Baden-Württemberg)의 하기얼로흐(Haigerloch)에서 양질의 증류액이 발견된다. 1945년 3월, 미국의 특수부대 ALSOS가 한 성당의 돔 아래에서 주목할만한 실험실을 발견한 것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최후의 순간까지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실험을 계속했다. 중수로 채워진 금속 콘테이너에 664개의 우라늄 조각을 집어넣은 격자형 모델을 만들었다. 연쇄반응 실험의 성공에서 불과 몇 보 떨어진 지점이었다. 미군이 들어오기 이틀 전,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비밀실험실을 떠났고 얼마 후에 영국에 구금되었으며, 1946년 귀국하여 괴팅엔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원장이 되었다.
 



하기얼로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1.5톤의 중수와 우라늄을 가지고 있었다. 750 킬로그램의 농축액만 더 있었더라면 그는 핵 연쇄 반응을 성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750 킬로그램, 오늘날까지 틴 호수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 중수와 정확히 그 양이 일치한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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