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노비..가격

구름위 2023. 4. 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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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전통 사회는 곧 신분제 사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각기 다른 사회적 특권과 제약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신분 계층이 상하로 연결되어 신분의 위계 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구조는 크게 보아 귀족·양인·천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천인의 대표적 존재가 노비였다.

고대의 노비

우리 나라의 노비제가 어느 때부터 존재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고조선의 법률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부여의 법률에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고 했다.

또한, 20년경 중국 사람 1,500명이 한지(韓地)에 벌목하러 왔다가 잡혀서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것으로 볼 때 원시공동체 사회가 해체되면서, 특히 철기 문화의 전래로 생산력의 증대, 정치 권력의 심화와 함께 노비의 노동력이 중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는 전쟁 포로·특정 범죄자·채무자·극빈자들이 노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전쟁 포로는 정복 전쟁, 특히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노비 공급원이었으며, 이들을 국가 기관이나 참전 장수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노비는 국가 기관이나 개인에게 소유되게 되었으며 국가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의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노비의 대부분은 국가나 귀족들의 전장(田莊)에서 농경에 사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정이 기록된 ≪신당서 新唐書≫ 신라전에 “재상의 집에 노동(奴童)이 3,000이었다.”는 기록은 물론 사노비를 말하는 것으로, 대다수가 외거노비로서 농경에 종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의 노비가 전체 인구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4개 촌락의 총 인구는 442명이었는데, 이 중 노비는 25구(口)로, 전체 인구의 5.6%에 불과했다.

그런데 25구 가운데 19구가 정년층(丁年層)이어서 노비의 대부분이 노동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비가 촌락 전체의 정년층에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노비의 노동력이 부차적·보충적이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노비의 대부분이 정년층이었다는 것은 당시에 솔거노비(率去奴婢)가 부부와 자식을 중심으로 한 가정 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고려의 노비

우리가 노비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 건국 후 최초로 단행한 노비 시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시행이었다.

이것은 호족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956년(광종 7) 귀족들이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조사, 이를 해방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뒤 노비안검법에 의해 해방된 노비 중 불손한 자가 있었으므로 987년(성종 6)에는 다시 노비환천법을 정했다.

[1. 공노비]

고려시대의 노비는 그 이전과 같이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는데, 공노비는 전쟁 포로에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반역·적진 투항·이적 행위 등을 행한 중대한 범죄자나 그 가족 및 사노비가 관몰(官沒)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공노비는 다시 특정한 관서에서 잡다한 노역에 종사하는 공역 노비와 주로 농경 활동에 종사하는 외거노비 또는 농경 노비로 구분된다. 공역노비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아 독자적인 가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으며 비교적 자유스러운 결혼 및 가정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사역 기간은 실제로 10여세의 소년기부터 부담하고 있어 16세부터 국역을 부담하는 양인의 경우보다 부담이 길었으나 60세가 되면 벗어날 수 있어 무기한 부담을 지는 사노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외거노비는 주로 국유지를 경작해 수확 가운데 법정액의 조(租)를 국가에 납부하는 외에 소정의 공역을 부담했다. 공노비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외거노비였는데, 고려 후기로 가면서 공역노비도 점차 외거노비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2. 사노비]

사노비는 상전의 토지·가옥과 더불어 중요한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상속·매매·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부적(付籍)되어 종파·나이·전래, 부모의 신분 등이 등재되었는데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또한, 공과·공역은 없으나 정로제(丁老制)에 의해 파악되고 있었으며 관념적으로 국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부모 중 한쪽이라도 노비면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의 소유권은 1039년(정종 5)에 제정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원칙적으로 모의 상전에 딸려 있었으나 모가 양인일 경우에는 부의 상전에 딸려 있었다.

고려시대 이들 사노비의 주인은 왕족·관직자·권세가·향리·일반 양인 등 신분이 다양했으며, 1호에 1,000구가 넘는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었다.

주인과 사노비의 관계에 있어서 주인은 노비를 죽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을 어떻게 다루든 법의 제재를 받지 않았고, 주인이 국가에 반역을 하지 않는 한 사노비는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다.

혹사에 못 견디어 도망했을 경우, 1049년(문종 3)에 제정된 법에 따라 3회 도망했을 때 자자형(刺字刑)을 가해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이와 같이 사노비의 주인에 대한 복종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주인에 대해 특별히 충성했을 경우 면천의 은전이 베풀어지기도 했다.

즉, 노비가 주인을 대신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거나 삼년여묘(三年廬墓)를 대행해 공을 인정받으면 주인의 보고에 따라 40세 이후에 면천되기도 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는데, 솔거노비는 주인의 경리(經理) 속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공급받으며 무제한·무기한적 노동을 제공했다.

이들은 온전한 가정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고, 재산 소유도 불가능해 노비 가운데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외거노비는 주인의 호적 외에 현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비교적 온전한 가정 생활을 유지하며 실제로 재산 소유도 가능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농경노비로서 대체로는 주인의 토지를 전작했다.

전호(佃戶)로서 그들은 수확량의 일부를 주인에게 조로 바치고, 그 나머지로 가계를 꾸려 생계를 유지했다. 물론, 조 이외에 외거노비는 주인에게 소정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여력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토지를 다시 전작하거나 용작(傭作)해 그들의 경제적인 지위를 높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경제적 처지는 양인전호(良人佃戶)와 비슷했다.

이들 외거노비에 대한 국가의 수취는 전후기를 통틀어 없었으나 고려 말 우왕 때부터 일정한 한도 내에서 수취했으며,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더욱 추진되었다. 이것은 외거노비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그로써 귀족층의 지배를 약화시켜 세력을 억압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후기로 오면서 종래의 귀족들이 시골로 내려와 농경에 주력하게 됨에 따라 솔거노비는 점차 외거노비화해 농경 노비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적으로 증가한 농경노비는 사회적 지위도 점차 향상되어갔다.

그 결과 일반 양인농민들과의 간격도 그 만큼 좁혀들게 되었다. 고려 후기로 오면서 양인 농민들이 유력자에게 투탁(投託)해 스스로 노비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1391년(공양왕 3) 사전 개혁과 동시에 노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노비결송법(奴婢決訟法)만을 정하고 실현을 보지 못했다.

조선의 노비

1388년 8월 먼저 고려왕조의 왕실 및 귀족과 죄인들 소유의 노비를 정리하고, 12월 노비 쟁송의 변송기준(辨訟基準)을 시달한 뒤, 1395년(태조 4) 12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설치하고 1397년 7월 합행사의(合行事宜) 19조를 발표했다.

1405년(태종 5)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永爲遵守奴婢決折條目) 20조를 발표해 노비의 소유권 쟁송, 상속, 양천 신분의 판정 등 사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 노비변정사업을 적극 추진했던 것은 사노비를 공노비로 만들어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신분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1406년에는 공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고려 말 온갖 작폐의 온상이었던 사사(寺社)를 정리해, 전국의 공인 사찰수를 232사로 정하고 그 밖의 2,000여 사를 혁거(革去), 소속 노비 8만여 구를 공노비로 삼아 전농시(典農寺)·군기감(軍器監)·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 등에 분속시키고 이들로부터 신공을 받아들여 제용감(濟用監)의 경비에 보충했다.

이어서 1419년(세종 1)과 1424년 두 차례에 걸쳐 나머지 사사노비를 혁거해 대부분 전농시에 소속시킨 뒤 신공을 바치게 했고, 그밖에 수참(水站)의 수부, 각 도 잔역(殘驛)의 전운노(轉運奴)·급주노(急走奴), 선공감(繕工監)·제색장인(諸色匠人)·동서학당·유후사(留後司)·주군의 급창(及唱) 등에 충역시켰다.

조선건국 초부터 지속적으로 노비변정 사업을 실시한 다른 하나의 이유는 고려 말 권문세가들의 농장 확대로 빚어진 사회·경제적 혼란속에서 피역(避役)의 수단으로 권세가들에게 투탁해 그들의 노비로 위장(僞裝)한 양인을 찾아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 군역 부담자인 양인 수를 늘리기 위한 국방책으로 양천교혼소생자녀(良賤交婚所生子女)에 대해 종천법(從賤法)을 적용, 노비로 삼았던 전통적 노비법을 개정해 1414년(태종 14)부터 이 경우 종부법(從父法)을 적용하도록 했다.

즉 이시기에 양인 또는 사대부의 비처첩소생(婢妻妾所生)이 다수인 점에 착안하여 이들을 종량(從良)시키기 위해 양인 이상 신분의 남자와 천인처첩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부계(父系)를 따라 양인이 되도록 법제화했던 것이다.

노비종부법 실시 결과 양인의 수는 크게 증가했으나 이에 따른 여러 가지의 폐단 때문에 실시 여부를 놓고 논란을 거듭한 끝에 1432년(세종 14) 이를 폐지하고 소생 자녀에게 종모법을 적용하는 종래의 법으로 환원시켰다.

1406년(태종 6)에 집계된 전국의 군정(軍丁) 370,365명은 1454년(단종 2)의 ≪세종실록≫지리지에 692,475명으로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부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 공노비]

조선시대의 노비도 고려시대와 같이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다. 공노비 중에서도 내수사 소속의 내노비는 왕실의 노비라는 뜻에서 궁노비라 했고, 소속된 관아가 행정 기관일 경우 관노비라고 했지만, 역이나 향교와 같이 특수한 관아일 경우 역노비 또는 교노비(校奴婢)라고 불렀다.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공노비는 의무 내용이 노역인가, 현물에 의한 납공인가에 따라 다시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서울에 사는 공노비는 모두 선상노비였으며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에 대해서만 이와 같이 구분되었다.

선상노비는 지방 또는 중앙의 각 관아에 차출되어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해야 했으며, 지방 관아에 입역할 경우 일곱 번으로 나누어 교대했다.

이들에게 별도의 봉족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지방에 사는 선상노비가 경중의 관아에 입역할 경우 두 번으로 나누어 교대했으며, 이들에게 2구의 봉족노비(俸足奴婢)가 주어져 이들은 선상노비의 호수에게 매년 면포·정포 각 1필을 바쳤다.

이들은 온전한 가족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입역 체제 하에서 연령에 해당하는 세 가족을 가진 한 노비 가정이 있다면 경중에 선상노비로 입역하는 호수에게 나머지 가족 2구를 봉족으로 주어서 사실상 두 사람의 의무는 면제되는 것이었다.

즉, 대체로 1호당 1정(丁)의 입역을 기준으로 했다. 경중에 입역하는 선상노비는 ≪경국대전≫에 규정한 각사의 차비노(差備奴)와 근수노(根隨奴)의 정액(定額)에 준해 경중의 각사에 입역되었다.

≪경국대전≫의 경중 각사 차비노와 근수노의 정액을 살펴보면, 경중의 84개 사에 입역하는 차비노와 근수노의 총수는 3,884구이며 문소전(文昭殿)·대전·왕비전·세자궁 등에 390구, 그리고 대군·왕자군·종친, 1품에서 5품까지의 문무관에게 각각 10구에서 1구까지의 근수노가 정액되었다.

또, ≪경국대전≫에는 각 지방 부(府)에 600구, 대도호부와 목에 각각 450구, 도호부 300구, 군 150구, 현 100구, 속현 50구, 그리고 제영은 병사진 200구, 수사진 120구 등 정속원을 규정했다.

초기 ≪경국대전≫에 보면, 납공노비는 신공으로서 노는 매년 면포 1필과 저화(楮貨) 20장, 비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다.

당시 저화 20장은 면포 1필에 해당했으므로 노는 면포 2필, 비는 1필반을 바친 셈이었다. 따라서, 3구의 남녀 장년으로 구성된 노비 가정이 있다면 1년에 5, 6필의 면포를 바쳐야 했다.

이들 납공노비들은 이밖에도 소속 관청의 공궤(供饋)를 부담해야 했으며, 신공의 부가세로서 수전가(輸轉價)와 작지(作紙)를 납입해야 했고, 양인과 같이 공납부담에 따르는 방납(防納)의 폐 등으로 실제 노비의 부담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납입되는 신공은 국가 재정에 있어서 경상비로 중요한 재원이 되었으니, 1485년(성종 16)을 예로 들면 면포 72만 4500필, 정포 18만여 필에 이르고 있다.

공노비의 부담은 선상·납공노비 할 것 없이 양인의 부담에 비해 2배 이상 무거운 것이었다. 그것은 양인의 경우 남자 장정에게만 국역이 부과된 데 비해, 이들의 경우 노뿐만 아니라 비도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중에 사는 공노비는 당연히 선상노비였으나 당시 경중 각사의 노비 가운데 십중팔구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어 이들의 선상은 큰 고역이었으므로 도망자가 잇달았다. 공노비 중 부실(富實)한 자는 비싼 선상대립가(選上代立價)를 치르고 입역의 면제를 받고자 했다.

이러한 풍조에 따라 가난한 노비까지도 눈앞의 고역을 피하기 위해 후일의 파산은 생각지도 않고 선상대립가를 치르고 입역의 면제를 받으려 했다. 이에 따라 대립가는 날로 높아져 노비 신공의 몇 배가 되는 면포 15필까지 된 예도 있으며, 선상된 노비는 어찌할 수 없는 가난한 노비들뿐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선상에 따르는 여러 가지 폐해를 막기 위한 규정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즉, ① 이들의 천적은 매 20년마다 정안(正案)을, 매 3년마다 속안(續案)을 작성해 의정부·형조·장례원·각사·본도·본읍에 비치하도록 하였다.

② 도망노비를 검거하지 못한 관리와 이를 알고도 소관인(所管人)에게 알리지 않은 자와 이웃은 제서위율(制書違律)로 논죄하며, 만약 도망해 중[僧尼]이 된 자는 장 100을 때린 뒤 주변 작은 읍의 노비로 삼고, 스승 되는 중은 제서위율로 논죄한 뒤 환속시켜 충역한다.

③ 도망한 노비를 고하면 매 4구 중 1구는 상으로 준다. 고역을 피해 일이 적은 곳으로 가려 한 자와 관리로서 청탁을 받아 옮기도록 협조한 자는 장 100을 때리고 도(徒) 3년에 처한다. 선상하지 않은 자는 장 80을 때리고 추후에 입역하도록 한다.

④ 관리로서 뇌물을 받고 타노비로 대역하게 한 자는 장 100을 때리고 작은 고을의 역리로 삼는다.

[2. 사노비]

한편, 사노비의 경우 한 가호의 노비가 그들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그 상전으로부터 독립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가에 따라 전자를 솔거노비 또는 가내노비라 하고 후자를 외거노비라고 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공노비는 거의 대부분 외거노비의 범주에 속한다. 솔거노비는 독자적인 가계나 재화 축적의 기회, 행동의 자유 등이 주어지지 않았고 일부는 주인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대부분 하인으로서 잡역 및 농경에 최대한 사역되었다.

이들은 고공(雇工)과 더불어 상전의 호적에 기재되었으며 조선시대 노비 가운데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이에 비해 외거노비는 주인의 직접적인 부림에서 벗어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납공공노비의 경우와 같이 상전에게 매년 신공을 바쳐야 했다.

이들은 주인 또는 타인의 토지를 전작해 대략 수확의 반을 전작료로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경우에 따라 재화 축적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들은 생활면에서 양인 전호와 비슷했고, 이들 외거노비가 전체 노비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가옥·토지뿐만 아니라 노비를 소유한 예도 있고, 또한 주인의 농장 관리인이 되어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매우 높은 자도 있었다.

조선 전기 농경에서 노비 노동의 수요는 양반 귀족층의 농장 소유의 발달과 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사전 개혁 이후 위축되었던 그들의 농장은 세종 때부터 확대, 발전해 여기저기 넓은 농장을 소유하고 노비들을 농장에 투입해 경작하게 했다.

그 가운데에는 수 천의 노비를 거느리는 광대한 농장이 경영되기도 했다. 태종 때의 홍길민(洪吉旼), 세종 때의 안망지(安望之)의 처 허씨(許氏), 문종 때의 유한(柳漢) 등은 1,000여구의 노비를 소유했고, 성종 때의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은 무려 1만구 이상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들은 대부분 주인의 농장에서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농장에서 노비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 정도였다.

또한, 양반들의 농장이 발달됨에 따라 농장주들은 그들의 권세를 빙자해 국가로부터 사노비에 부과된 요역이나 공부의 면제는 물론 전조도 가볍게 징수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그리하여 이들 노비에게 부과되었던 요역과 공부까지 더해 부담해야만 했던 양인들은 그들의 과중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농장에 투탁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로써 노비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경에 종사하였다. 당시 노비 가운데에는 농업 이외에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경공장(京工匠)이나 외공장(外工匠)의 대부분은 공노비였으며, 사노비 가운데에는 상업에 종사해 부상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 노비 중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한 노비의 비중이 매우 낮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 사노비들은 대체로 양반·양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었지만 능력 여하에 따라서 엄청난 재력을 보유할 수도 있었다.

성종 때 8천여 석을 보유한 진천(鎭川)의 사노 임복(林福)은 자신의 네 아들을 종량(從良)하기 위해 2천여 석을 국가에 납곡했으며, 남평(南平)의 가동(家同) 또한 그의 아들을 종량하기 위해 2천 석을 납곡의 의사를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대토지의 사유화 경향이 심화되어 가는 15세기 말 이후 농장주 가운데에는 귀족·사족·관인·양인과 더불어 천인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의 경우 천인·노비들도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노비는 상전의 입장에서 볼 때 고려시대와 같이 가옥·토지와 함께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는 가옥·토지의 경우와 같이 노비의 매매 뒤 물릴 수 있는 기한을 매매 뒤 15일로 정했고, 100일 내에 관청에 신고해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규정했다.

또한, 노비가 상전의 재산인 우마와 동일시되었던 것은 우마매매한(牛馬賣買限)과 동일한 조항에서 취급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노비 제도가 문란했던 고려 말 우마의 값만도 못해 말 1필의 값이 노비 2, 3구에 해당했으며, 1398년의 기록에 당시의 노비 가격은 비싸야 오승포(五升布) 150필 값인데, 말 1필의 가격은 400∼500필에 이르렀다. 노비의 가격을 15세 이상 40세 이하는 400필, 14세 이하 41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하기로 했다.

그 뒤 ≪경국대전≫에는 나이 16세 이상 50세 이하의 장년 노비의 값을 저화 4.000장, 15세 이하 50세 이상은 3,000장으로 규정해 상등마값 4,000장과 비슷하게 정했다. 이로 볼 때 조선 건국 이후 노비의 가격은 대체로 등귀했다고 하겠다.

한편, 사노비가 공노비로 되기도 하고 공노비가 사노비로 되기도 했다. 수많은 노비를 소유한 자가 대역죄(大逆罪)를 지었을 경우 국가는 엄한 벌로 다스리고 가산(家産)을 몰수함으로써 공노비로 삼았다.

또 사노비가 국가에 큰 공(功)을 세웠을 경우 국가는 면천방량(免賤放良)해 줌으로써 농공행상하는 대신 소유주에게 상당공노비(相當功奴婢)로 보상해 사노비가 되었다.

원칙적으로 노비는 성씨(姓氏)를 가지지 목하고 이름만 있으며 외모도 양인과는 달리 남자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어[창두적각 蒼頭赤脚] 흔히 노비를 창적이라 부른 것은 여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노비의 상속에 관한 원칙은 1405년의 ‘영위준수노비결절조목 20조’를 기초로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이에 의하면 먼저 노비 상속의 대원칙으로 부모가 생전에 분배하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자녀의 생사에 관계없이 급여하되, 분배할 노비가 적을 때는 적자녀에게 고루 급여하고 만일 나머지가 있으면 승중자(承重子 : 長孫으로 조상의 제사 등을 받드는 자식)에게 우선해 급여하고, 또 나머지가 있으면 장유의 순서로 지급하며 적처의 자녀가 없으면 양첩의 자녀순으로 지급하기로 규정했다.

또, 부모의 노비는 적자녀에게 평분하며 승중자에게는 5분의 1을 더해 주고, 양첩 자녀에게는 7분의 1을, 천첩 자녀에게는 10분의 1을 급여하도록 규정했다.

만약 이 규정에 따라 35구의 노비를 적자녀 3명, 양첩 자녀 1명, 천첩 자녀 1명에게 상속할 경우 적자녀 가운데 승중자에게 12구, 나머지 적자녀 2명에게 각각 10구, 양첩자에게 2구(적자녀가 12구일 경우 2구임.), 천첩자에게 1구가 배당되는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이 밖에도 ① 적자는 없고 적녀가 있을 경우, ② 적자녀가 모두 없는 경우, ③ 자녀가 없는 적모의 경우, ④ 자는 없고 여만 있는 적모의 경우, ⑤ 양첩녀만 있을 경우, 천첩자녀만 있을 경우, ⑥ 의자녀(義子女)의 경우, ⑦ 양자녀(養子女)에 대한 상속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대체로 적 자녀·양첩 자녀·천첩 자녀는 각각 분배에 차등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자·여의 차등은 없고 다만 승중자와 중자(衆子)의 차등이 있는 것은 후사를 중요시한 때문이었다.

사노비와 상전의 관계에 있어서 상전은 노비에 대해 어떠한 형벌이라도 가할 수 있으나 죽일 때에는 해당 관청에 신고해 허가받도록 규정했다.

만일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비를 죽일 경우, 곤장 60대와 도형(徒刑) 1년 또는 곤장 100대의 형벌에 처한 외에 피살된 노비의 가족은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소속을 바꾸어주는 조처를 취했다.

또한, 노비는 상전이 모반 음모가 아닌 이상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으며, 상전을 관에 고해 바치는 것은 도덕적으로 강상을 짓밟는 것으로 간주되어 교살에 해당하는 중죄로 규정했다.

한편, 동일한 상전 소유의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는 공노비의 경우 선상노비와 납공노비가 쉽사리 교체되듯이 서로 교체될 수 있었다. 솔거노비가 외거노비로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외거노비가 상전의 요구에 따라 가족 전부 또는 가족의 일부가 솔거노비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3. 인원]

조선시대 노비 수에 대해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1406년에 사사노비 8만여 구가 속공(屬公)된 뒤, 1417년의 정유정안에는 공노비만 11만 9602구(노 5만 9585, 비 6만 17)로 집계되어 있다.

따라서, 1406년 이전의 공노비 수는 약 2만여 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1439년(세종 21) 21만 수천구, 1461년(세조 7) 20만여구로 조사되었으며, 1484년(성종 15) 35만 2565구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 무렵 전국 호구는 100만 호에 340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어 성종 때의 공노비 35만여 구는 전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된다. 또 이 때 한명회(韓明澮)는 공천 가운데 미추쇄자(未推刷者)가 10여만 구 있고, 지금 공사천구(公私賤口) 중 도망해 숨어사는 자가 100만 구라고 했다.

당시의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전체 인구를 400만∼500만으로 추정하고, 그 가운데 공사노비를 150만으로 보아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4. 특징]

우리 나라 노비제의 특성은 사회적·법률적 처지가 보다 가혹했던 데에 있으며, 이와 같은 가혹성은 그들에 대한 세전법(世傳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노비세전법은 고려시대부터 계속되어 조선시대에도 부모가 모두 노비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 가운데 어느 한편만이라도 노비신분이면 자녀는 노비가 되어 대대로 노비로 삼았다.

이에 대해 유형원(柳馨遠)은 “중국에 비록 노비가 있으나 모두 범죄자로 몰입(沒入)된 자이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남에게 고용된 자뿐이며, 그 족계에 의해 대대로 노비로 삼는 법은 없었다. 죄도 없는 자를 노비로 삼는 법은 옛날에도 없었고, 죄를 지어 노비가 된 자라도 후사에게까지 형벌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또한 이익(李瀷)도 “노비라는 이름은 은나라시대부터 나타난 것인데, 기자(箕子)는 그 제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나 은나라시대에도 세전의 규정은 없었다. ……(중략)…… 우리 나라의 노비법은 천하에 없었던 것으로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百世) 괴로움을 받게 된다.”고 하면서 그 부당함을 들어 폐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노비세전법은 고려시대 이래 동색혼(同色婚)을 원칙으로 해 종모법(從母法)을 적용해 왔으나, 실제로 양천교혼(良賤交婚)이 성행함에 따라 예외로 노와 양처 사이의 소생에게 종부법(從父法)을 적용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신분뿐만 아니라 소유권을 가리는 판정 법규로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하에서 사노를 소유한 상전은 심지어 양녀와의 결혼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군역을 부담하는 양인 인구가 갈수록 감소하고 사노비만 증가하매 국방 정책과 관련해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사상에 입각해 중부사상(重父思想)을 제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액을 확충하기 위해 1414년부터 양인의 공사비 소생에 대해 종부법을 적용, 종량하도록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양인과 창기(倡妓)와의 소생도 종부법을 적용하도록 했고, 이들 천처첩(賤妻妾)의 자녀들에게도 재산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이의 실시 과정에서 각종 폐단이 나타났다.

즉, 공사비들은 그의 노부(奴夫)의 소생을 종량시키기 위해 양인간부(良人奸夫)의 소생이라고 신고해 실제 아버지가 뒤바뀌는 등, 제한 없는 종부법 시행은 공노비의 감소와 인륜의 혼란을 가져왔고 당초에 뜻한 바 중부사상과도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이의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이 일어나자 군액 증가를 위해 이들에게 종량을 전제로 보충대에 입속시키는 등 편법을 적용하다가 세조 때부터 고려 이래의 세전법으로 환원되었으며, 이를 ≪경국대전≫에 법제화했다.

[5. 여러가지 면천 방법]

노비와 상전의 구별을 마치 땅과 하늘로 비유하던 조선시대 노비들의 면천의 길은 원칙적으로 차단되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특별한 경우 면천 종량된 예가 있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 때 압록강변에 사군, 두만강변에 육진을 설치하고 실변책(實邊策)으로 남도인의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응모하는 양인·향리·노비에게 각각 토관직(土官職)을 제수, 면역·면천 종량의 특혜를 약속했다.

또, 1467년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해 출전한 관군의 무기와 군량이 부족하자 이의 조달책으로 노비로서 궁시(弓矢) 4바리[馱]를 전진(戰陣)에 운반한 자와 공사노비로서 50석을 납곡한 자는 면천방량(免賤放良)하도록 했다.

이러한 예는 국가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때때로 취한 임시 조처로서 간주되어야 하겠지만, ≪경국대전≫에는 평상시에도 노비로서 공을 세우면 면천 종량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실제 노비가 모반 사건에 공을 세워 면천 종량된 예, 열녀 또는 효자로서 면천된 예가 있다.

이러한 경우 면천종량된 자가 사노비인 경우 방량으로 인한 재산상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는 그 상전에게 공노비로써 보상했다.

[6. 결혼]

이 밖에도 ≪경국대전≫의 규정에는 양반과 비첩 사이의 소생에 대해 일정한 법적 수속을 거쳐 속량하도록 했다. 즉, 종친 남자와 천인 처첩 사이의 소생 자녀는 아무런 제한 없이 양인이 되었다.

그러나 문무관·생원·진사·녹사·유음자손(有蔭子孫) 및 적자손(嫡子孫)이 없는 자의 첩자손 승중자는 아버지가 장례원(掌隷院)에 신고하면 장례원에서 사실을 조사하고 문서를 병조에 이관시켜 보충대의 군역을 치른 뒤 잡직에 임용되어 양인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 경우 면천 종량의 조건으로 아버지는 건강하고 연령이 비슷한 다른 노비를 국가에 바쳐야 했다. 이와 같이 노비 신분은 엄격하게 세전되었고, 노비로서 양인이 되는 길은 거의 막혀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득세한 자의 천첩 소생으로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는 많았다.

고려 말 예부상서가 된 정문(鄭文), 대사성이 된 김승인(金承印),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된 이준창(李俊昌), 고려조에서 지신사정당문학(知申事政堂文學)을 지내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된 권중화(權仲和) 등은 그러한 예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비록 양반의 천첩 소생이라 하더라도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묶여 한품수직(限品授職) 되었으며, 생원·진사과나 문과에 응시할 수 없어 벼슬하지 못했다.

[7. 관계 진출]

노비는 공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노비의 경우 천인들의 관직인 문·무잡직(文武雜織)에 나아갈 수 있었다.

문무 잡직으로 액정서(掖庭署)·공조(工曹)·교서관(校書館)·사섬시(司贍寺)·조지서(造紙署)·사옹원(司饔院)·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선공감(繕工監)·장악원(掌樂院)·소격서(昭格署)·장원서(掌苑署)·도화서(圖畵署) 등 관서에서 자물쇠 관리, 각종 물품 제조, 서적 인쇄, 화폐 제조, 종이 제조, 요리사, 바느질, 말 기르기, 무기 제작, 건물 수리, 악기 연주, 제수품 제조, 정원 가꾸기, 그림 그리기 등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 불리는 하급기술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또 무반 잡직으로 파진군(破陣軍), 대졸(隊卒), 팽배(彭排), 금군(禁軍), 각 영(營), 기보병(騎步兵), 승문원(承文院), 교서관, 도화서 등 관서에서 근사(勤事)·정(正)·기총(旗摠)·대장(隊長)·대부(隊副)·대정(隊正)·영(領) 등의 군사직에 종사했다.

이들 잡직에 종사하는 천인들은 일반 문·무산계와는 달리 종9품에서 정6품까지 별도로 규정한 동·서반 잡직 산계를 받았는데, 잡직에서 정직(正職)으로 임명될 때는 한 산계를 낮추었다.

또한 80세 이상의 노비에게 양인과 마찬가지로 영직(影職, 명예직)인 노인직(老人職)을 주었다. 특이한 예로 세종 때 동래(東萊)의 관노 장영실(蔣英實)은 재주를 인정받아 면천되었다.

그리고 1424년(시종 6) 물시계를 제작한 공로로 정5품에 오르고, 이어서 간의(簡儀)·혼천의(渾天儀)·앙부일귀(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각종 천문·과학기기를 설계, 제작하고, 갑인자(甲寅字)와 인쇄기를 제작한 공으로 종3품에 올라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았다.

또 숙종 때 재상집 가노 반석평(潘碩枰, ?∼1540)은 주인의 사랑을 받아 글을 배우고 아들없는 사대부가에 양자로 입양되어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쳐 예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역임했다.

[8. 납속]

조선시대 노비제가 다소 해이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로서, 극도로 악화된 재정 때문이었다. 1553년(명종 8) 혹심한 재해를 당한 경상도 지방의 기민을 정부의 힘으로 구제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민간에게 납속할 것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50석 내지 100석을 한도로 국가에 납속한 자에 대해 국가는 사족(士族)에게 관직 제수, 죄인에게 면죄, 공사노비에게 면천 종량의 은전을 베풀었다.

이러한 사례가 있은 뒤 계속되는 재난과 변방의 소요 때문에 진제곡(賑濟穀)과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납속제는 계속 실시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납속제 실시는 절정에 도달했다.

전란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경기·황해도 조도어사별사목(京畿黃海道調度御史別事目)을 정해 서울 수복을 위한 명군의 군량 조달책으로 작전 지역내에서 500석을 모속(募粟)·모운(募運)한 공사노비에게 상으로 면천 종량시켰다.

그 뒤 전란이 장기화하자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 모속관(募粟官)을 파견하고 모속 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 모속관들은 공사노비로서 납속한 자에게 지급하기 위해 많은 노비면천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어느 곳에서나 노비들은 모속관에게 납속하고 면천첩을 구득할 수 있게 되었다.

1593년에는 납속 사목을 발표하고 모속을 하였는데, 이때의 납속량은 15석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임진왜란 중 공사노비 가운데 이 정도의 재력이 있는 자는 제한없이 면천종량되었다.

[9. 군공]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고 군사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군공이 현저한 자에게 논상하는 군공 절목을 제정했다. 이에 의하면 공사천으로서 1급을 참수하면 면천,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에 입속, 3급이면 허통(許通), 4급이면 서반(西班) 6품직인 수문장의 관직을 제수했다.

또, 참수 이외의 방법, 예컨대 사살(射殺)과 같은 방법으로 군공을 세운 자는 살적 4명을 참수 1급에 준하도록 했으며, 전사한 노비의 아들에게 1명에 한해 면천의 특전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자라는 군사를 노비로써 충당하기 위해 공사천 무과를 실시해 합격한 자는 우림위에 입속하도록 했고,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해 양인뿐만 아니라 공사노비도 양인과 동등하게 응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도 참수 3급이면 무과에 응시해 합격자에게는 즉석에서 홍패를 발급했는데, 이 때 합격된 자 가운데에는 활을 충분히 쏘지도 못하는 사람이 들어 있을 뿐더러 천민도 많이 포함되어 공사노비의 면천 종량뿐만 아니라 사환의 기회까지 주어졌다.

임진왜란 중 천인 백운상(白雲常)은 군공으로 3품직인 훈련정에 기용되었으며,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천첩자인 홍계남(洪季男)은 호서 지방을 보전한 공으로 수원판관 겸 경기도조방장으로 기용되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중 노비의 인력과 재력을 동원, 수취하기 위해 납속·군공에 의한 공사 노비의 면천 종량이 광범위하게 실시됨에 따라 양인과 천인의 간격은 좁혀지고 구별이 애매모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중 신설된 훈련도감은 사족·양인·노비의 세 신분으로 혼합, 구성되었으며, 속오군(束伍軍) 또한 양천혼성군으로 천민의 노비가 실제로 양역인 군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의 도감규식(都監規式)에 따라 시재(試才)에 의해 면천 종량되거나 2대 이상 양역에 종사함으로써 법제에 따라 양인이 되었다.

[10. 속오군]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조직된 속오군은 조선 후기 핵심적인 지방군이 되었는데, 수는 1636년(인조 14) 8만 6000여명, 1681년(숙종 7) 20여만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점차 양인들은 쌀 20말[두]씩 바치는 수미법(收米法)을 적용해 제외되었다가 영조 중엽부타 속오군의 구성에서 양인은 빼고 천민만으로 편성되어 1745년의 ≪속대전≫에는 천예군(賤隷軍)으로 규정했다.

조선시대 양·천신분 판정에 있어서 신천양역(身賤良役), 즉 천민신분으로 양역에 2대 이상 종사한 자는 양인으로 간주하도록 하는 규정에 따라 속오군에서 군역을 치룬 공사노비의 양인화가 성행해 노비 수 감소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만성적인 적자 재정에 시달리던 조선 후기 정부는 적자 재정을 메우고, 감소추세에 있는 양인 군정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1655년(효종 6) 전국적인 노비추쇄사업(奴婢推刷事業)을 실시했다.

각사(各司) 노비안에 등재된 공노비수는 19만여 명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신공을 납부하는 노비는 2만 7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머지 16만이 넘는 은루자·불법 종랑자를 찾아 이들로부터 신공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선 각사 노비의 실수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사업이었다.

물샐틈없는 계획과 노비추쇄도감절목을 정하고 노비 추쇄를 실시한 결과 당초 10만 명 이상의 실공노비(實貢奴婢)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겨우 1만 8000여 명의 은루자(隱漏者)를 찾아내는데 그쳤다. 조선 후기 노비들의 은루·불법 종량이 성행하고 신분제가 동요되고 있던 일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재정난·기근 등으로 납속제를 수시로 실시하매 공사노비들로서는 현실적으로 그들이 종량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는 셈이었다. 이와 같이 사회 변화의 추세에 따라 종래 법제로서 이들을 기속하고 있던 노비 법규도 차차 변화해, 1667년(현종 8)에는 납공노비의 신공을 반 필씩 감해 노 1필반, 비 1필로 했다.

1755년(영조 31)에는 다시 반 필씩 감해 노 1필, 비 반필로, 또 1774년에는 비의 신공은 없애고 노에게만 1필을 부과하였다. 이로써 1750년 균역법 실시 이후 양인의 양역과 그 부담이 동일하게 되었다.

또, 이 무렵에는 종래 법으로 엄하게 규제했던 양천교혼이 성행했으며, 이 경우 소생 자녀에 대한 신분 결정에도 변화를 보였다. 즉, 1669년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 집권층은 노의 양처소생에 대해 종모법을 적용, 종량했다.

물론 이때의 주장은 노비 제도 자체에 대한 개혁을 위해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양역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강조한 주장이었다. 이로써 전통적인 노비세전법에 큰 변화를 보인 것은 괄목할만한 사실이다.

노의 양처 소생에 대한 종모법의 적용은 그 뒤 서인·남인의 집권이 교체될 때마다 계속 번복되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 환천, 1681년 종량, 1689년 환천했다가 1731년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17세기 이후에 나타난 경제상의 변화, 즉 농업 생산의 발달, 상품·화폐 경제의 진전, 수공업 및 광업의 발달은 종래의 신분제와는 달리 또 다른 사회 계층의 변화를 초래했다. 경영형 부농과 서민 지주, 상업 자본가와 임노동자, 그리고 자영 수공업자 등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1. 신분 변동]

이로써 종래의 사회 구성을 변질시켜 종래의 양반들 가운데에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잔반(殘班 : 실세가 없는 이름 뿐인 양반)으로 전락하기도 했으며 자영농, 심하면 소작전호(小作佃戶)로까지 되었고, 상업·수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어 이들은 노비를 거느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반면에 부를 축적한 노비들은 부력을 이용해 신분을 상승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납속을 통한 방법 이 외에도 부패한 관리와의 결탁하에 호적을 고쳐 유학(幼學)·진사를 모칭하거나 몰락 양반의 족보를 매입해 환부역조(換父易祖 : 조상의 계보를 바꾸는 것)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분상승을 꾀했다. 몰락한 상전에게 속전을 지불하고 양인이 되어 도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러한 사회 변화와 더불어 1745년의 ≪속대전≫에는 사노비의 경우 100냥, 즉 쌀 13석의 속전을 지불하면 면천종량할 수 있도록 그 값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노비는 언제든지 노비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에서 사노비뿐만 아니라 공노비의 유지도 어려운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오히려 이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편이 실제적으로 나을 정도였다.

또한, 18세기 후반에는 ‘노비’라는 명칭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이것은 노비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을 뜻하고, 엄격했던 신분 제도가 붕괴될 시기가 온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 변화의 추세에 따라 1801년(순조 1) 수렴청정을 맡은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내수사·각궁방·각사노비안(各司奴婢案)을 모아 돈화문 밖에서 소각하였다.

이 때 양인 신분을 얻게 된 내시노비는 내수사 각 도노비, 영흥·함흥 양 본궁노비(本宮奴婢) 및 선희궁(宣禧宮)·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용동궁(龍洞宮)·영빈궁(寧嬪宮)에 속하는 각 도노비들이었으며, 그 수는 3만 6974구였다.

그리고 각 사노비는 종묘서·사직서·경모궁(景慕宮)·기로소·종친부·의정부·의빈부·돈녕부·충훈부·이조·호조·예조·형조·성균관 등 34개사에 속하는 각 도 노비 2만 9093구로 도합 6만 6067구가 면천 종량되었다.

이와 같은 조처는 신분제의 붕괴를 조정 스스로가 인정한 것이었고, 장기간에 걸친 노비들의 신분 해방을 위한 투쟁의 성과였다. 그 뒤 1886년(고종 23) 하교를 내려 노비 세습제의 폐지를 명했으며, 이어서 노비 소생의 매매 금지와 자동적으로 양인이 될 수 있는 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사가노비절목을 제정했다.

1894년에는 군국기무처에서 제출한 진의안에 따라 고종은 문벌·반상의 등급을 폐지할 것과 귀천에 구애 받지 않고 인재를 발탁할 것, 그리고 공사노비를 일체 폐지할 것 등을 명해 실시하도록 했다. 이로써 신분제의 폐지와 함께 노비제 또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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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초기 노비의 종모법과 종부법」(이성무, 『역사학보』 115, 1987)
  • ・ 「고문서를 통해본 노비의 경제적 성격」(이영훈, 『한국학보』 9, 1987)
  • ・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적 지위」(이성무, 『한국사학』 9, 1987)
  • ・ 「조선시대 노비제연구동향」(권연웅, 『제5회 국제학술회의논문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 ・ 「정창원 소장 신라장적에 나타난 노비」(김종준, 『역사학보』 123, 1989)
  • ・ 「조선후기 공노비의 신분변동」(김상환, 『경북사학』 12, 1989)
  • ・ 「조선시대 사노비 일연구」(김용만, 『교남사학』 4,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