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4>화이트헤드 어뢰
구름위
2017. 1. 8. 11:53
<4>화이트헤드 어뢰
- 2005. 07. 26 00:00 입력 | 2013. 01. 05 01:16 수정
1822년 프랑스의 앙리 조제프 페그장 대령이 만든 작렬탄이 군함의 생존성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각국은 그 대비책으로 선체에 철판을 두른 함선, 즉 장갑함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1859년 프랑스가 가장 먼저 장갑함 르 글루와르를 취역시키자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영국 출신 기술자 로버트 화이트헤드(1823~1905)가 책임자로 있던 피우메 조선소에 르 글루와르에 대적할 수 있는 장갑함의 건조를 발주했다.
화이트헤드는 이후 몇 년간 장갑함 사업에 관여하면서 장갑함의 아래쪽은 철갑이 얇아 방어력이 취약하다는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1864년 은퇴한 오스트리아 선원 지오반니 드 루피스가 찾아와 자문을 요청했다. 그는 폭발물을 싣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 적함의 옆면에 부딪쳐 폭발하는 작은 배를 만들었는데 그 배의 키 자루와 연결된 기다란 밧줄로 배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 루피스의 폭탄배는 태엽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배의 진행 속도가 느리고 항속거리도 짧았으며 적에게 들키기도 쉬웠다. 결국 화이트헤드도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고 드 루피스는 이후로 폭탄배의 발상을 포기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이 폭탄배 어뢰의 발상에 빠졌다. 장갑함의 설계에서 얻은 경험에 비춰 볼 때 수면 아래쪽으로 어뢰를 접근시켜 수면 밑에서 폭발시키면 철갑이 얇기 때문에 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폭발보다 더 효과적인 데다 수면 밑으로 접근시킨다면 적은 폭탄배가 다가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866년 12월, 마침내 시험 가능한 대략적인 어뢰의 원형이 완성됐다. 어뢰의 양옆에 달린 두 개의 지느러미가 물밑에서도 균형을 유지시켰고 압축 공기를 이용한 추진 장치도 충분히 강력했다. 시험 결과 화이트헤드의 어뢰는 그런대로 잘 작동했지만 일정한 심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어뢰는 너무 자주 수면으로 떠오르거나 아예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2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물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수압이 증가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화이트헤드는 수압으로 조정되는 밸브가 지렛대를 통해 어뢰 뒤쪽 끝에 달린 심도 조절판을 조절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화이트헤드가 이때 만든 어뢰는 길이 약 4m, 지름 36cm에 8㎏의 다이너마이트를 탄두로 하며 무게 약 135㎏, 속도는 6노트였고 사정거리는 180~640m였다. 시험이 재개되고 결과에 놀란 각국은 앞다퉈 어뢰를 도입했다. 어떤 배라도 화이트헤드의 어뢰만 있으면 장갑함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878년 1월25일, 러시아군이 발사한 두 발의 어뢰에 맞은 터키의 증기선 한 척이 2분도 안 돼 흑해에 침몰한 사건은 화이트헤드 어뢰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이로스코프가 어뢰의 방향타를 조종하도록 하는 장치를 개발, 명중률을 더욱 향상시켰다.
화이트헤드가 죽기 5개월 전에 막을 내린 러일전쟁(1904~1905) 당시의 쓰시마(對馬) 해전에서 일본의 어뢰정들은 러시아 전함 두 척과 다른 여러 장갑함을 격침하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이후 어뢰는 계속 개량 과정을 거쳐 여전히 현대에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무기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