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2>맥심기관총
구름위
2017. 1. 8. 11:51
<2>맥심기관총
- 2005. 07. 12 00:00 입력 | 2013. 01. 05 01:14 수정
하지만 총의 발사 속도를 높이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그 노력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맥심 기관총(사진)이다. 물론 맥심 이전에도 몇 가지 기관총이 있었지만 본격적 자동 기관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초창기 기관총의 대표적인 존재로는 개틀링식 수동 기관총을 꼽을 수 있다. 이 기관총은 사수가 크랭크를 돌리면 10개 정도의 총신이 중심 축 주위를 회전하면서 총탄이 장전·발사되는 수동 사격 방식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의 하이람 스티븐스 맥심(1840~1916)이 설계한 기관총은 약실의 탄환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 에너지와 스프링·지렛대로 이뤄진 장치의 힘으로 다음 탄환을 장전되도록 하는 자동 사격 방식이었다.
또 기존 기관총들과 달리 총탄을 나란히 연결한 탄띠로 약실에 급탄하는 방식을 채용, 기존 기관총이 갖고 있던 송탄 불능 현상을 크게 줄였다. 거기에 물로 채운 덮개를 총신에 붙이는 수냉식 냉각법을 채용, 과열 문제까지 해결했다.
1885년에 선보인 맥심 기관총은 사수의 별다른 수고 없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분당 650발의 탄환을 쏟아냈다. 물론 개틀링 기관총은 이보다 빠른 분당 1200발 사격이 가능한 개량형을 내놓았지만 40㎏으로 너무 무거운 데다 수동식이라 크랭크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또 사격하는 병사들의 자세가 제한된다는 약점도 있었다. 하지만 맥심 기관총은 엎드려서 쏘는 것도 가능했고 무게도 27㎏으로 가벼워 전장에서의 이동은 물론 분해 정비도 쉬웠다.
맥심은 직접 무기를 들고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였다. 처음 맥심 기관총을 본 오스트리아 장교들은 경악해 이렇게 말했다. “정말 너무나 빨라. 내가 본 것 중 가장 무시무시한 무기야.”
1890년 맥심은 영국·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러시아까지 자동 기관총을 납품하기에 이른다. 이 새로운 자동 화기의 위력을 실감케 한 대표적 교전으로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의 뤼순(旅順) 공방전을 꼽을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은 무려 5만80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런 엄청난 손실은 상당 부분 러시아군이 보유한 맥심 기관총 때문이었다. 심지어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 2정에 의해 일본군 보병대대의 돌격이 저지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맥심 기관총에 의한 대량 살상이 이어졌다. 1916년 7월1일 제1차 솜(Somme) 전투에서 공격에 나선 영국군은 별 성과 없이 하루 만에 무려 5만7470명의 병력을 잃었다. 후일 조사 결과 그중 90%가 독일군 맥심 기관총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맥심 기관총의 출현은 연쇄적인 전술 변화를 가져왔다. 보병이 대열을 갖춰 정면 돌격하는 전술은 완벽한 자살 행위가 됐다. 보병들은 살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으며 참호를 나와 적진으로 돌격하는 보병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공격보다 방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새로운 전쟁 양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에 영국은 방어선을 돌파할 새로운 수단을 강구하게 됐고 결국 전차를 만들어 투입하게 된다. 맥심 기관총이 전차를 만들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