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영국군의 해외 식민지 저격전
구름위
2017. 1. 8. 11:11
영국군의 해외 식민지 저격전
- 두 명의 영국군 저격수 게릴라 16명 제압
- 2008. 11. 04 00:00 입력 | 2013. 01. 05 04:12 수정
전후 대영제국의 쇠퇴 속에서도 영국군은 이러한 지역분쟁을 주도하고, 식민지로 국력을 전환시키기 위해 일련의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이때부터 많은 해외 오지로 영국군 스나이퍼가 출동했다. 예컨대 세계의 화약고인 중동으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비상사태에 빠진 동남아시아의 정글 속으로 영국군 스나이퍼가 잠입했다.
영국군 최강의 특수공정단(SAS) 스나이퍼들은 자유의 투사로서 말레이시아의 험준한 산악에서 호전적인 부족들과 싸웠다. 중동지역에서는 영국군 저격술이 진가를 발휘했는데, 특히 1950년대 이후 제한전을 벌였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로운 능력을 과시했다. 1958년 영국군 특수공정단이 오만의 술탄을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를 배후로 둔 반란부족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반군들은 이미 높이가 2400m에 달하는 사막의 거대한 자벨 아키다드(Jabel Akhdard) 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산악지대로 투입된 영국군은 정보수집과 고난도의 저격전으로 반군들을 분열시키고 아키다드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의 도파(Dhofar) 반란 후 전개한 영국군의 비밀공작은 마지막 재래식 전쟁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스나이퍼의 정확한 장거리 사격만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역 반군세력과 부족들도 대부분 훌륭한 저격수였다. 그들은 마티니 헨리(Martini-Henry)와 같은 19세기 소총으로 무장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아덴(Aden) 비상사태(1963~1967)에서는 아랍의 게릴라 부대가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지배권을 놓고 영국과 싸웠던 복잡한 싸움이었다. 아덴 시에서 시민폭동이 일어나고 라드판(Radfan)산 곳곳에서 전투가 발생됐다.
아덴에서 겪은 영국군의 가장 뼈아픈 전투는 1967년 크레이터(Crater) 번화가 일대에서 시가지 매복 공격을 당하고 무기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크레이터는 사화산의 분화구에 건설된 시가지로서 거리와 뒷골목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어 아랍국 테러리스트들에게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당시 영국군 제45 해병특공대 스나이퍼들이 크레이터를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바위산으로 잠입했다. 그들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를 잡고 게릴라들의 행동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해병특공대 저격수는 그곳에 은거해 10일 동안 분화구로 정밀사격을 가했다. 이곳에서 두 명의 저격수가 25발을 사격해 테러리스트 11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켰다. 이것은 극적인 성공이었다.
크레이터 시가지 남쪽 건물에는 매우 까다로운 아랍 저격수가 버티고 있었는데, 영국군들이 구스타프 대전차포를 집중 사격해 건물을 붕괴시키고 제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해병특공대 저격수들이 다시 사격을 받아 두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영국 특공대 스나이퍼들은 적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아르길 대대가 7월 4일 아침 일찍 크레이터로 기동해 무저항으로 다시 도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참전한 해병대의 스나이퍼가 자신이 경험한 극적인 저격전을 밝혔다.
“나는 진지에서 몇 시간 동안 계속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여 바위를 녹이는 것 같았고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한 아랍 게릴라가 소총을 들고 모스크 사원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좁은 길로 접근했을 때 조준을 했다. 거리는 약 700m… 탕!’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게릴라는 소총을 떨어뜨리면서 뒤로 넘어졌다. 정확하게 명중시킨 것이다. 그의 주변에 있던 게릴라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다.”
1967년 11월, 영국군이 아덴에서 영원히 철수함으로써 결국 이러한 작전은 별다른 가치가 없게 됐지만 도시환경에서 저격술의 효과에 대한 훌륭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당시 영국군 부대원들은 벨기에의 FN FAL총에 기반을 두고 개발된 7.62mm L1A1 SLR 자동소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SLR총이 우수한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길고 가벼운 몸통 때문에 저격수들에게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그 후 L42Al소총으로 개량해 1980년대 중반까지 영국군에서 사용하게 됐는데 이 총은 표준형 No.4보다 총열이 길고 무거웠으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격시 총구가 안정되고 구식 3배율 MK 32 망원 조준경을 계속해서 소총에 장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수한 저격총이 영국군의 새로운 저격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영국군과 IRA 반군의 저격전
- 기습공격-보복…쌍방 막대한 인명 피해
- 2008. 11. 11 00:00 입력 | 2013. 01. 05 04:13 수정
이로 인해 각 지방이 거의 무정부 상태로 붕괴됐고 영국 육군은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진압작전에 투입되지 않으면 안 됐다. 초기에는 우선 유혈사태를 진압하는 데 주력했으나 1970년에는 본격적으로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아일랜드는 총격전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로 돌변했다. 북아일랜드 반군(IRA)과 영국군의 전투는 보이지 않는 저격전으로 치달았다.
영국군들이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와 런던데리 도로를 이동할 때 IRA 저격수들이 건물 속에 숨어 공격을 가했다. IRA 총잡이들은 영국 정찰병에게 기습사격으로 피해를 준 다음 감쪽같이 사라졌다. 많은 영국군 병사가 이러한 저격전의 희생물이 됐다. 이에 대해 영국군은 남 알마하의 ‘산적’ 마을로 불리는 곳에서 강력한 저격전으로 보복했다.
1972년에는 런던데리에서 가톨릭계 주민이 영국 공정대를 공격했는데 여기에 대해 공정대원이 발포해 민간인 13명이 사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다. IRA는 극렬한 방화와 저격으로 보복했다. 영국군도 유혈폭동을 진압하던 중 16명의 병사가 사망하자 더욱 신중하고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전환했다.
영국군 스나이퍼들은 집요하게 IRA 반군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러자 반군들도 노출된 헌병대나 비무장 병사들, 관광객과 같은 무방비 상태의 손쉬운 목표물로 눈을 돌렸다. 또 도심지에서도 폭탄 테러를 공격의 주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총격전은 지방에서 더 오래 계속됐다. 특히 수색정찰이 어려운 아일랜드 공화당의 성역인 프로방스 국경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다. 관목지대에 숨어 IRA 반군들은 영국 치안부대를 향해 저격을 가했다. 특히 군인과 정부 고관을 저격 대상으로 삼았다. 1979년 8월 28일에는 태평양전쟁 중 대일전의 최고사령관을 지낸 마운트 밧덴 백작이 사망하고, 1984년 10월 12일에는 대처수상이 숙박 중인 호텔이 폭파당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반군들의 폭력이 증가하자 영국군은 도시와 지방 각지에서 정보수집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SAS, MRAF, 그리고 M14 정보부대와 같은 특수부대에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많이 전개했다.
1992년 8월, IRA 반군들이 크로스마그린의 상가 거리에 서 있던 한 영국 병사를 저격함으로써 쌍방의 저격전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11월에는 훼만나의 한 영국 경찰관이 국경을 넘어 날아온 총탄에 맞았는데 이는 한국 DMZ의 북한군 장거리 총격사건과 유사했다. 1993년에는 헌병대 소속의 병사들이 남알마하에서 장거리 소총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사냥꾼 출신인 예전 IRA 반군의 행동과는 달리 이제는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스나이퍼를 투입해 영국군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했다. 영국군 당국도 이러한 사실을 자인했다. “반군 저격수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스나이퍼들이다. 우리는 이들 테러리스트의 고난도 공격에 직면하고 있다.”일부 IRA 반군들은 미제 구경 0.5 인치 바렛트(Barrett) 82모델의 무거운 저격용 소총을 사용했다.
이 총은 빛의 반사를 차단할 수 있는 무기로서 유효사거리가 최대 1마일이 넘었다. 이는 영국 국경경비 헌병대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헌병대의 랜드로버 차와 방탄복은 바렛트 모델 같은 총으로부터 방호력이 부족했다.영국 언론에서는 IRA 저격수의 미제 소총에 결국 미군 특수부대도 당하게 될 것 이라고 비꼬았다.
바렛트뿐만 아니라 레밍턴·우드마스터와 같은 많은 미제 사냥총이 아일랜드에 도입됐는데 영국에서는 IRA 반군들과 미국 무기상들의 이러한 비밀거래를 크게 비난했다. 영국 육군이 전투를 치른 크로스마그린에서는 IRA 반군 지지자들이 ‘스나이퍼의 도시 크로스마그린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플래카드를 써 붙여 영국군 헌병대를 조롱했다.
그러나 반군들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자멸을 초래했다. 그들은 곧 최고 수준의 영국군 스나이퍼들, 커먼웰스(Commonwealth) 부대의 저격수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됐고 결과는 반군들의 참패로 끝났다.오늘날까지 영국과 IRA 반군의 싸움은 34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발생시키고 있지만 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