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베트남 전쟁의 저격전 준비
구름위
2017. 1. 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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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저격전 준비
- 미군, 게릴라전 대비 스나이퍼 집중 양성
- 2008. 08. 26 00:00 입력 | 2013. 01. 05 04:02 수정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에게 베트남은 혼란스러운 전장이었다. 남베트남군(자유월남군)과 미군에 대항하는 적은 교묘한 토착민 베트콩 게릴라들뿐만 아니라 강력한 북베트남군(공산 월맹군)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 월맹군들은 식민지 지배자였던 프랑스와의 수년간 전쟁으로 이미 전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모든 저강도 전쟁에서도 그렇듯이 소규모 총격전에서는 저격술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다행히 미군 부대가 베트남전에서 정예 저격부대를 만든 것은 행운이었다. 미 해병대는 베트남에서 최초로 저격전을 전개했다. 미군 부대는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스나이퍼가 필요했고 직접 장거리사격을 하는 전술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전반적인 저격술의 퇴조 속에서도 그 중요성과 믿음을 잃지 않은 성과였다. 특히 미 해병대의 짐 랜드(J. Land) 소령은 60년에 해병대의 정찰 - 저격수 훈련소장에 보직돼 베트남에서 저격수 교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랜드 소령은 과거 제1차 세계대전의 저격전 주인공인 맥브라이드와 암스트롱이 남긴 피의 경험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큰 교훈으로 여겼다. 그는 저격수의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강인한 정신자세를 강조했고, 베트남전에서는 M1C 저격 소총을 윈체스터(Winchester)70 모델로 바꿀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65년 10월 초부터 해병대 스나이퍼들은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1월 23일에 푸 베이(Phu Bai)에서 해병대 저격팀이 1100m 이상 되는 거리에서 베트콩 두 명을 죽였고 한 명을 부상했다.저격총은 비록 전에 쓰던 구식 M1D소총이 많았지만, 장거리 저격전에서는 높은 정확성을 가진 윈체스터70 모델을 사용했다.
윈체스터 총은 유너틀(Unertl) 8배율 조준경이 장착돼 확고한 장거리 사격용 무기로 인정됐다. 그러나 윈체스터 총에 대한 저격수들의 평가는 여러 가지 불만사항을 갖고 있었다. 시험 결과 개머리판과 몸통조립 및 방아쇠 조절이 어려웠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탄약이 표준품인 7.62㎜ 탄이 아니며 세 가지 형태의 다른 모델로 개발된 소총부품이 서로 호환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따라 미 해병대는 레밍턴 600모델, 700-ADL/BDL모델, 해링턴과 리차드슨 울트라(Ultra) 소총, 그리고 레밍턴 700-40 등 많은 소총에 대한 성능을 재평가했다. 그중에서 레밍턴 700-40이 승자로 떠올랐다. 이 총은 위력 있는 7.62㎜ 탄약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용으로 견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방아쇠 압력을 내부에서 조절할 수 있고 총열의 강선공정이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조준경은 상업용인 레드필드 애큐렌지(Redfield AccuRange)가 가장 적합한 것으로 선택됐다. 이 조준경은 조립이 견고하고, 알맞은 내부 조절 기능이 있으며 600m까지 거리 측정기가 내장됐다. 특히 3배율에서 장거리 9배율까지 배율변동도 가능했다. 67년 봄에 레밍턴 소총이 처음 베트남에 도착하자 점차 윈체스터총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후 레밍턴총은 M40 저격용 소총으로 개량됐고 M40소총 시리즈는 후일 현재의 해병대 저격용 소총인 M40A1·A2·A3 소총으로 업그레이드됐다. 65년에 미 제3 해병사단은 베트남에서 러셀(R. Russell) 대위의 책임하에 스나이퍼 훈련소를 세웠다. 러셀은 해병대 소총 사격팀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가진 베테랑 사수였다.
훈련소 교관으로 선발된 5명의 부사관 중 대표적인 인물은 서른다섯 살의 텍사스 주 출신 랜지(M. Lange)였다. 그는 과거 전국사격대회에서 샌디에이고 팀과 로이드 팀의 우승을 이끈 사격선수였다. 교관들은 최고의 스나이퍼를 양성했고 해병대 예하 부대와 남베트남군을 순회하며 저격기술을 가르쳤다.
제1 해병사단에서도 사단장 닉커슨(H. Nickerson) 소장이 “미 해병대 최고의 스나이퍼를 훈련시키라”는 특명을 저격수 랜드에게 하달햇다. 이제부터 미군들은 정글의 사냥꾼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베트남 정글의 저격전
- 짧은 가시거리·소음 등 저격전에 큰 부담
- 2008. 09. 02 00:00 입력 | 2013. 01. 05 04:03 수정
아니나 다를까 시커먼 위장복을 입은 베트콩 정찰병 한 명이 나타나더니 곧 30여 명의 본대가 조심스럽게 해병대원들 쪽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스나이퍼들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해병대원들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고 숨결이 거칠어졌다.미 해병 제3수색대대로부터 1개 엄호분대를 지원받은 해병대 저격수들은 비록 적이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베트콩 부대를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들은 놀라운 사격술과 노련함으로 적들의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탕!∼ 타-타-타-탓!” 스나이퍼의 첫 발이 베트콩 정찰병 가슴을 강타했고, 이어 또 다른 베트콩이 연달아 쓰러졌다. 사격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른 채 베트콩 정찰대는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다. 해병대원들이 당황한 그들을 향해 침착하게 탄알집을 비워 냈고 베트콩들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불과 10분도 지나지 않아 11명의 베트콩을 사살했고 6명을 부상시켰다. 남은 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자 본격적인 정찰·추격작전이 벌어졌다. 그사이 스나이퍼들은 또 다른 표적을 찾아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1966년 호치민 루트에서 벌어진 이러한 전투는 베트남 전쟁의 대게릴라전에서 저격과 매복전술의 효과를 분명히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정글 속 베트콩 게릴라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미군을 사살함으로써 그만큼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졌다.베트남은 장거리 사격에 기상 조건과 많은 지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격술의 시험장이 됐다. 우거진 정글 속의 전투는 적을 찾을 수 없도록 가시거리가 짧고 소음도 많이 발생했다.
숨막히도록 무더운 날씨와 온갖 해충들, 더구나 강물과 늪지대, 진흙과 오물 때문에 고성능 무기나 탄약을 관리하는 데 큰 부담을 줬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넝쿨이 우거진 곳에서는 미군 병사들의 큰 신장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저격총을 취급하기조차 어려웠다.
단신의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소련제 기관단총과 AK-47 소총을 갖추고 종종 M1 소총이나 칼빈·M16 등 미군의 화기를 휴대하기도 했다. 그들은 숲 속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을 퍼붓고 도주했다. 이른바 ‘히트 앤드 런’(Hit and Run)의 전형적인 게릴라 수법이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저격수들은 소련제 7.62mm M1891/30 모신 나강(Mosin-Nagant) 저격소총으로 무장해 미군을 공격했다. 미군에서 K-44로 알려진 이 총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 공산군 저격수가 사용했던 장비였고, 4배율의 PE 망원조준경 혹은 가벼운 3.5배율의 PU 조준경이 부착됐다.
월맹군 저격수들은 남베트남으로 침투하는 병력과 물자를 엄호하기 위해 이른바 “호치민 루트”로 배치됐다. 베트남의 남북으로 연결된 이 통로를 확보, 혹은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곳은 울창한 정글로 덮인 산악지대로 미군의 공중감시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월맹군이 병력이나 군수물자를 이동시키는 비밀 보급로였다.
이곳에서 쌍방의 스나이퍼들은 정글의 높은 나무나 고지, 땅굴에 은거해 표적을 노렸다. 소련군의 영향을 받은 월맹군 저격수들의 가장 큰 조직은 저격 중대로서 중대본부와 3개 소대로 구성됐다. 예하 저격소대는 주요 전술단위로 월맹군 주력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각 소대의 저격분대는 10명으로 구성, 분대장 외 각 3인조 3개 저격팀으로 편성됐다. 월맹군 저격수는 지역 베트콩 부대에 배속돼 정찰병과 경계병으로 활동했다. 전장에서 월맹군 저격수가 베트콩에게 저격술의 기본훈련을 가르치면 그 대가로 부비트랩 설치나 잠복술에 대한 교묘한 수법을 전수받았다.
특히 베트콩들의 잠복기술은 정글전에서 유용한 공산군 전술이었다.전쟁을 수행하면서 베트남 사람들과 미군 사이의 갈등 즉, 정치적·민족적인 이질감은 결코 극복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대게릴라전에서 중요한 문제였고 전선과 적을 구분할 수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전장에 병사들이 내팽개쳐진 것이다.
또 수목이 우거진 험준한 지형과 기상의 악조건도 키가 큰 서구 병사들의 작전활동을 특히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은 전쟁을 유리하게 끌기 위해 대규모 화력을 운용했으나 공산 적들의 끊임없는 사격과 매복 등, 재래식전투의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황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전과 M16소총의 등장
- 미군 스나이퍼 평균 1.7발로 1명 사살
- 2008. 09. 09 00:00 입력 | 2013. 01. 05 04:04 수정
스나이퍼들의 저격술도 이러한 특성에 맞게 근거리 정밀사격이 보다 강조됐다.미군은 보병용 화기를 개선해 이미 1950년대 말에 구식 M1 소총을 M14총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M14는 중량이 무겁고 자동발사 체계 조작이 불편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M14가 도입될 때, 미군은 이미 가볍고 소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신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유명한 M16 소총으로 5.56mm탄을 발사하는 매우 효과적인 완전 자동사격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200m 이하의 단거리 보병전투 사격용으로 개발된 M16은 플라스틱 재질의 몸통이며 단발 명중률이 높은 훌륭한 소총이었다.1966~67년 베트남에 도입된 M16은 그 후 M16A1과 M16A2로 개량되면서 미군부대와 한국군 및 베트남군의 기본 화기로 계속 보급돼 현재까지 세계적인 소총으로 발전했다.
한국군은 기존 M1소총을 대신하며 북한군의 AK소총에 대적할 만한 신형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에 파병된 부대를 우선 M16으로 무장하게 됐다.군대에서 M16소총의 무장은 즉시 소총사격 훈련의 변화를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미군은 일정한 사거리에서 고정표적을 조준, 사격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새로운 소총이 등장하자 전장 상황과 동떨어진 이러한 훈련방법에 대해 비판이 가해지면서 움직이는 표적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나왔다. 결국 1950년대 중반에 이른바 ‘트레인 파이어’라는 신개념의 훈련 시스템이 도입됐다. 이 훈련은 모의전투 상황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표적에 대한 급작사격에 중점을 뒀다.
그러나 비록 실전 상황을 연출하는 시도는 좋았지만, 이러한 훈련은 고난도 사격술의 필수원리를 고취시키는 데 실패했고 사격 수준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사수의 정신력이나 의지보다는 소총의 성능에만 의존하는 풍조를 유행시켰다.더구나 베트남 전쟁에서 M16 자동소총이 등장하자 이른바 ‘Quick-Kill’ 이라는 급작사격술이 더욱 발전됐다.
사수들은 더 이상 주의 깊게 조준하기보다 많은 탄약을 휴대하고 표적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알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즉, 시간을 끄는 총구 조준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탄약 낭비를 더욱 부채질했고 병사들의 사격정신을 흐리게 했다.또한 실전 상황에서는 많은 탄환을 쏟아 부어도 표적에 명중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1969년에 미국의 총기협회(NRA)에서는 병사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어떻게 총을 쏘는지 신랄하게 비판했다.“단 15m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표적이 갑자기 나타나자 5발 중 4발이 빗나가고 표적은 유유히 사라졌다.”이러한 사격술의 문제점은 1968년 한국의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북한의 무장공비 수십 명을 태운 선박이 동해안으로 야간 침투할 때 해안 경계부대는 근거리에서 박격포 사격과 기관총 및 소총사격을 장시간 동안 퍼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1969년 주문진 해안에서도 해상으로 도주하는 공비들에게 수백 명의 경계부대와 전투경찰, 향토예비군이 집중사격을 해 불과 30여m 떨어진 고무보트를 겨우 침몰시킬 수 있었다.
이때 낭비된 탄약에 비해 성과는 극히 미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장에서 탄약을 낭비하는 것처럼 무모한 짓은 없다. 과거 미군의 전투수행 방식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적을 사살하는 데 발사되는 총탄의 양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한 명의 적 사상자를 내기 위해 평균 7000발이 발사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 수치가 2만5000발로 증가했다.
그러나 전략전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무기체계의 발달과 자동화기의 탄약 낭비성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한 명의 적을 죽이는 데 평균 5만 발 이상의 총탄이 발사된 것으로 증명됐다. 믿을 수 없는 이러한 무모한 비율 때문에 목표물을 중장거리에서 명중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저격수의 필요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스나이퍼가 발사한 탄약과 명중비율은 1.7대1로 거의 비슷했다. 이는 매우 놀랄 만한 통계이기 때문에 저격수들의 자부심이 됐고 원샷원킬(One Shot one Kill)의 전통을 세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