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태평양 전쟁의 저격전
구름위
2017. 1. 8. 10:51
태평양 전쟁의 저격전
- 일본군 저격수들 나무 위에서 기습공격 특징
- 2008. 07. 22 00:00 입력 | 2013. 01. 05 03:58 수정
놀랍도록 정교한 위장술과 결사적인 공격·인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야말로 일본군 저격수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면서 연합군에게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알려졌다.일본의 6.5mm 38식 소총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1905년 군용으로 채택됐고, 보병용 화기가 됐다. 저격용인 97식 소총도 개발됐으며 이 총에는 2.5배율 망원조준경과 개량된 노리쇠 손잡이가 부착됐다.
비록 유럽형 소총보다는 화력이 부족했지만 97식 소총은 약실이 줄어들고 총열이 길었기 때문에 저격술에 적합했다. 그리고 모든 추진 장약이 총열 안에서 완전히 연소하면서 총구의 섬광과 연기를 거의 없앴다. 이 때문에 연합군 병사들은 일본군 저격수의 위치를 찾아내기가 힘들었고, 특히 총성의 방향이 혼동되는 정글에서는 더욱 어려웠다.
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은 99식 소총을 보급했는데, 이 총은 더욱 전통적인 7.7mm(0.303인치) 구경이었다. 저격용 99식 총은 4배율의 스코프가 장착됐고 접철식 다리가 부착돼 더욱 큰 안정감을 줬다. 동남아시아의 정글이나 착잡한 지형에서 벌어진 연합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 저격수들은 근거리에서 쐈다.
그들은 평균 300m 이하의 거리에서 쏘는 정확한 사격술을 중요시했고 사거리는 때때로 100m 정도로 가까웠다.일본군은 항상 부대의 위장술이 뛰어났으며 개개인의 위장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정교하고 완벽한 은신을 위해 그물망을 사용하면 근거리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결사적인 공격력과 인내심은 미군 병사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죽음과 전투에서 보이는 태도는 미군이 그동안 겪어 보지 못한 것으로 일본 저격수를 상대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적은 인내심이 강하고 교활하며 야전 행동술을 잘 배웠고 자살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저격술의 특이한 점은 사격 진지로 정글의 높은 수목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종종 나무 위에 의자를 끌어올려 설치했다. 그리고 저격수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로프로 나뭇가지에 몸을 묶었다. 미군의 공격을 받으면 나뭇가지에 매달려 죽은 체하다 기습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군 저격수에게는 나무를 오르내리기 위한 등산용 로프나 스파이크가 지급됐다.
유럽에서 연합군과 독일군 저격수들은 이처럼 나무를 사용하는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정찰병들이 종종 높은 나무를 사용해 저격수로 오해받았지만, 만약 그곳에서 저격수가 발각되면 꼼짝없이 나무가 죽음의 덫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적어도 일본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적을 유인해 다가오기를 기다리다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잘 조준된 몇 발의 사격을 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자살공격이었다.전장에서 이러한 용기와 희생정신은 당연히 귀감이 됐다. 하지만 전쟁은 대담성보다 신중함이 요구되고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이런 만용이 적에게 공포심을 줄 수는 있었지만 전투 효율성은 없었다.
영국의 저격수 장교인 잴랜드는 훌륭한 저격수의 필수요건 중 하나를 “강한 자기보존 의식”이라고 명확히 주장했다.태평양전쟁 내내 일본군 저격수들은 많은 연합군을 쓰러뜨릴 수 있었고 혼란과 공포심을 야기시켰다.1944년 1~2월 중, 미 제7보병사단이 소탕작전을 시도한 마샬 군도의 크와잘린(Kwajalein) 산호섬에서 미군들은 일본군 저격수의 끈질긴 공격을 받고 큰 난관에 봉착했다. 어느 미군 장교는 당시 전투기록을 이렇게 남겼다.
“산호섬을 놓고 벌인 5일간의 전투 마지막 날, 제32보병연대 F중대는 저격수의 사격을 받아 크게 위축돼 있었다. 병사들은 숨기 위해 더 깊숙이 모래밭을 파고 야자수 잎으로 가리려고 했다. 한 시간 동안 F중대는 산호섬의 끝, 150m도 못 미치는 거리에서 복지부동해 있었다. 차례차례 병사들이 저격수의 총에 맞았고 매번 의무병이 죽음을 무릎쓰고 기어가 후방으로 끌고 왔다. 우리에게 공격의지는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저격수의 공격을 막도록 방호막으로 지원된 탱크가 없었다면 병사들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탱크는 계속 경기관총 사격을 가해 땅을 파헤치며 저격수들을 몰아냈고, 적 벙커를 파괴시키며 결국 산호섬의 마지막 저항도 제거할 수 있게 했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태평양의 돌출된 산호섬이나 멀리 떨어진 뉴기니의 울창한 정글이라 할지라도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다.
정글속의 저격수들
- 미군, 대전차포 투입 일본군에 산탄 공격
- 2008. 07. 29 00:00 입력 | 2013. 01. 05 03:59 수정
“타원형의 방어선 주위에 있는 거의 모든 나무 위에서 일본군 저격수들은 물에 흠뻑 빠져서 도주하는 좋은 미군 표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사거리는 200~400m 정도…. 저격수들의 핏발이 선 눈, 나뭇가지에 고정시킨 총, 그들은 선명한 조준경을 보며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있다. 전 대대가 그곳에서 마치 독립기념일 축제처럼 일본군의 0.25구경(6.5㎜)탄 공격을 받았다.
참호 안에 움츠린 미군들은 전우가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듣다가 결국 이마에 작은 구멍이 난 채 창백한 시체로 변한 전우를 발견하고 울부짓는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정글에서 일본군 저격수의 수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하자 머스켓 방어진지에 배치된 미군부대는 그들을 우선 제거해야 하는 긴급작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됐다.
미군들은 상호 지원 배치를 하고 적을 찾아 정글 속을 수색했다. 두 명의 저격수가 전방에서 작전하면 이를 엄호하기 위해 다른 팀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정찰을 했다. 수색작전 간 제1대대는 37㎜ 대전차포 3문을 투입, 고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캐니스터 산탄을 장전해 저격수가 은거한 나무 숲 속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이것은 나무 윗부분과 저격수 자체를 함께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탄약은 낭비했더라도 부대의 사기를 크게 높일 수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서 해병대의 스나이퍼들은 울창한 정글에서 스코프가 장착된 커다란 저격총을 휴대하면서 많은 곤란을 겪었다. 소총과 탄약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글전투에서는 시계가 없기 때문에 표적 발견시 신속한 대응사격이 필요했다.미군들은 이를 위해 3인조의 저격팀을 만들었고 그중 한 명이 저격총을, 다른 한 명은 M1 카빈이나 톰슨 기관단총 같은 경량 자동화기를, 마지막 한 명은 보다 강력한 0.30구경의 M1918(BAR)을 휴대했다.
톰슨은 약 50m까지의 근거리에서 효과적이었으나 권총탄을 쏘는 탓에 정글에서 필요한 관통력이 부족했고 이 단점을 BAR로 보완했다.미군들은 때때로 영국의 보이스 0.55구경 대전차소총을 사용해 나무 위의 일본군 저격진지를 박살냈다. 그러나 일본군 저격수가 반드시 나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일명 ‘거미 구멍’으로 불린 은거지를 땅에 파고 숨었다.
이것은 깊고 잘 위장된 1인용 참호로 넓은 사계를 가지고 있고, 화염이 적은 6.5㎜ 저격총으로 무장한 스나이퍼가 이곳을 차지하고 있으면 미군이 발견할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미군의 대공세 작전으로 전세는 기울어졌다. 43년 1월, 일본군을 머스켓 방어선에서 격퇴시킬 때까지 일본군들의 저격술은 더 이상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들도 뉴기니와 버마에서도 이와 유사한 전투를 수행했다. 병사들은 일본의 저격수가 결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과 적극적인 대저격전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었다.이 전쟁 기간에 보급의 부족으로 일본군 보병부대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이에 맞춰 영국군은 뛰어난 저격전 성과를 얻게 됐다.
공식적인 보고에 의하면 2개 여단의 저격수 48명이 2주 동안 296명의 일본군을 사살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단 두 명이 전사했고 한 명이 손가락에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태평양 전쟁 중 호주군은 최고의 캥거루 사냥꾼들 중에서 병사를 선발해 훌륭한 저격수로 육성했다. 호주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캥거루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밀한 사격을 해야 했는데, 급소를 정확히 맞히지 못할 경우 값비싼 가죽이 손상되기 때문이었다.
급소에 정확한 사격을 가하면 캥거루가 즉시 죽고 주위가 조용하지만, 만약 상처를 입고 날뛰면 나머지 캥거루 무리들이 모두 도망쳤다.호주군 스나이퍼들은 무거운 0.303인치 총을 사용한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일본군 표적에게 조용히 접근하는 사냥술을 발휘했다. 사냥꾼에서 일약 군대의 저격수로 뽑힌 한 병사는 티모르 섬에서 47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기록을 세웠다.
티모르 섬의 용감한 호주군 독립중대는 일본군에 대해 게릴라전으로 맞서며 4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반면 일본군은 1500명이라는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일본군 지원병력이 티모르에 상륙하지 않으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