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몽골 제국`(Mongol Empire)

구름위 2014. 6. 7. 10:15

 

1 개요

2 편제

 

몽골군의 편제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원조비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비사에는 천호제를 비롯하여 중군과 좌우군의 편성, 케식텐 등에 대한 기록이 존재한다. 비사가 보이는 오기나 전반적인 모호함에 비해 이 부분은 매우 세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현대의 연구도 거의 전적으로 비사에 의존하고 있다. 아마도 칭기스 칸이 몽골을 통일하면서 군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기 때문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함인 듯 하다. 애초에 비사에서 몽골통일을 다루는 지면이 90% 이상이다.

2.1 천호제

아르반(아르밧) 1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자군(자굿) 1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밍칸(밍갓) 1,0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투멘(투멧) 10,000명 정도의 병사를 공출 가능한 집단.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206년으로 테무진의 몽골 통일이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몽골고원의 부족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이합집산을 계속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새로운 편제인 천호제였다.

군제는 투멘 단위로 운영되었는데, 일례로 원조비사의 기록에 의하면 칭기스 칸이 몽골고원을 통일했을 당시 몽골의 병력을 95 밍갓으로 잡고 있다. 즉 당시 몽골이 동원할 수 있었던 총 병력은 이론상으로 9만 5천 명에 상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투멘의 정원이 꽉 차는 일은 드물었고 티모시 메이[북조지아 대학의 역사학 교수]에 의하면 대개 60% 정도의 인원만을 유지했다고 하기 때문에 이 추정에 따른 수정치는 대략 5만 7천 명 가량이다. 당시 몽골 고원의 인구는 100만 명 내외로 추정된다.

1250년 무렵 몽케 칸 시절에는 원 본국의 정규군이 90 투멧, 일 칸국이 22 투멧, 킵차크 칸국의 43투멧을 비롯하여 거의 백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이들은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 넓게 퍼져 있으며 동해에서부터 흑해까지 달하는 지역을 지켰다.

십호장은 백호장의 지휘를 받고 백호장은 천호장의, 천호장은 만호장의 지휘를 받고, 마지막으로 만호장은 칸의 지시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직속 상관의 명령만을 따르도록 되어있다.

10명이 모인 단위인 아르반은 강한 결속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례를 제외하면 병사는 자신이 소속된 아르반을 옮길 수 없었으며, 전투 중 적에게 사로잡힌 병사는 해당 아르반의 동료들이 구출해야 했다. 연대책임이 적용되어 탈주자가 나왔을 때는 해당 아르반의 구성원들이 모두 참수당하는 등 공동운명체적인 성격도 있었다.

50명이 모인 집단인 렌도 있었다. 이는 군대가 움직이던 최소 단위로 추측된다.

많은 투르크계 유목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몽골군도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신체 건강한 15 ~ 70 세의 몽골 남성은 모두 군역의 의무를 졌으며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시에 소집되어 싸웠다. 물론 징집병이라고해서 이들을 정주민족의 징집병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목축과 수렵 등 유목민족의 일상은 농경민족에 비해 전투기술과 연관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들어 몽골인이 대단을 했지만 몽골군이 정예병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며 존 마슨 스미스 주니어(john masson smith jr)가 대표적이다.

2.2 케시크(keshig)

 

칸의 호위부대를 말한다. 초기에는 수백 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수가 늘어나 나중에는 만 명 단위가 된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정원 자체가 늘어난 것도 있지만 케시크들이 합류할 때 자신의 수행원들을 대동한 것도 있다.


칸의 막사는 기본적으로 사병들과 약 500m 간격을 두고 세워졌다. 이는 화살의 사정거리의 2배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로 아마도 암살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케시크들은 여기에 칸과 함께 주둔했다. 활을 들고 수행하는 코로치와 칼을 들고 수행하는 울두치가 있었으며 일부는 바토르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의 숙영지에는 경계임무에 사용되는 개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케식의 임무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개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케시크들이 따로 있었다. 사람 한명당 2마리의 맹견이 할당되었으며 이렇게 사육되는 개들의 수는 수천에 달했다.

구성원은 몽골의 귀족과 피정복지의 지배 계급이 주를 이루었다. 기본적으로 칸의 막사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부터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갔다. 이들은 군 내부에서의 세력을 넓혔고 통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형성했다. 피정복민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는 인질로서의 의도가 강했고, 민족통합정책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3 바토르

 

돌격 임무를 맡은 결사대. 최정예 전사들과 죄수들로 구성되었다. 잘못을 범한 병사는 그에 대한 처벌로 바토르에 편성되기도 했다. 이 경우 결사대에서 3 ~ 4 회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아야 본래의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2.4 탐마(tamma)

 

정보를 수집하고 정복지를 관리하기 위한 소수 정예부대. 탐마에 소속된 대원을 탐마치(타마친)라고 하며, '탄마(tanma)'라고도 불렀다. 초창기 이들은 몽골족 전체 병력 중에서 차출된 일종의 파견부대였다. 목적은 점령지에서 몽골족의 통치를 유지하거나 가능하면 확장하는 것이었고, 초기에는 대체로 스텝지대와 정주(定住)사회으 경계지대에 주둔했다. 정규군이 아니어서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편성되었는데, 1250년대 훌레구가 페르시아아 이라크를 치러 갈 때 형인 대칸 몽케가 '탐마' 군대를 내주었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이자 일칸국의 관료였던 주베이니의 서술에 따르면, 이 '탐마' 부대는 활용가능한 몽골족 병사 10명당 2명을 뽑아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2여기까지의 서술은 영국인 역사가 데이비드 모건(D.O.Morgan) 교수의 저작이며 국내에 번역된『몽골족의 역사』(모노그래프, 2012)를 참고했다.] 후기로 갈수록 순수 몽골족으로만 구성되었던 규칙이 약해져 점차 정복지의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2.5 케리크

주로 농경민족으로 이루어진 병사들로 방어를 담당하는 보병이다. 몽골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몽골인만으로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게 되자 피정복민들을 군대에 받아들였다. 투르크-몽골계의 유목민족들은 경기병 체제의 몽골군에 빠르게 동화될 수 있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인원들은 대부분 케리크가 되었다.

주 구성원은 한족을 비롯한 농경민족이었으며 슬라브민족들도 대거 있었다. 초기에는 기병 중심으로 운영되던 몽골군이었으나 점차 보병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후로는 이들에 대한 대접도 좋아졌다. 한족 보병들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이례적으로 고급 지휘관으로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2.6 카라우나스(Qaraunas)

 [이 부분 전체의 서술은 데이비드 모건 교수의『몽골족의 역사』 137~138쪽에서 발췌하거나 부분적으로 고쳐서 썼음을 밝힌다]

 

페르시아 동부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조직적인 약탈을 일삼던 집단. 그 유명한 마르코 폴로도 1272년 이들과 조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들 부대는 '탐마'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고타이 칸의 치세에 최초로 파견되어 인도와의 국경지대에 주둔했다. 그들은 몽골의 다양한 부족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사실상 새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부족'이었다.


13세기 페르시아 사료(史料)에 따르면 '카라우나스'는 대개 일칸국의 적대세력으로 묘사된다. 이는 '카라우나스'에 일칸국의 경쟁자인 킵차크칸국의 장군이 지휘하는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훌레구가 페르시아-이라크 원정을 단행할 때 대칸 몽케가 '탐마'로서 군대를 뽑아 훌레구에게 주었는데, 킵차크칸국에서도 전통에 따라 일부 병력을 지원했다. 훌레구의 정복이 끝난 뒤, 각자의 영토 경계를 놓고 두 칸국끼리 분쟁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킵차크칸국에서 차출되었다가 살아남았던 이들 병력이 '카라우나스' 부대와 합류해 일칸국의 배후를 교란했던 것이다. 계속된 전쟁 끝에 일부 '카라우나스'는 결국 일칸국에 항복했지만, 나머지는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칸국에 귀순해 계속 일칸국을 적대했다.

2.7 기타

 

러시아인으로 이루어진 보병 돌격대도 있었는데, 이들이 몽골인 기병보다 우수한 장비를 지급받기도 했다. 대부분은 공성전의 전열에 내세워 총알받이로 썼지만.


케리크 이외에도 많은 피정복민들이 몽골 군대에 편입되었다. 중국측의 기록에는 몽골군에서 순수 몽골인은 소수이며 나머지는 전부 피정복민의 군대였다는 내용이 있다. 여진거란은 중장기병으로, 한족과 아랍인 기술자들은 공병부대에 소속되었다. 심지어 근교에서 잉글랜드인 기사가 척후 임무를 보았던 기록도 존재한다.[아마도 십자군의 일원이었다가 안티오키아 쯤에서 합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생포되어 끔살당했다]

3 병참(兵站)

병참이나 전략전술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몽골인이 아닌 이방인들의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남송인인 조공(趙珙)이 남긴 몽달비록(蒙鞑备录), 팽대아(彭大雅)와 서정(徐霆)의 흑달사략(黑韃事略) 등 중국측 기록을 비롯하여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Divisament dou Monde),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의 몽골여행기(Ystoria Mongalorum) 등 유럽인들의 기록에서도 많은 부분을 참고하고 있다. 공통점이라면 대부분 견문록이라는 것인데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몽골군이 가진 특징을 그들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묘사했다.

3.1 병참선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병참을 유지하지 못하면 전투를 벌일 수 없고, 근거지에서 멀어질 수록 병참선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런 점에서 몽골군의 원정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바투의 서방원정군은 근거지인 몽골고원에서 6,000km 이상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그것도 육로로! 과장 좀 보태서 지구 반바퀴 떨어진 곳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는데, 산업혁명 이전의 군대로서는 거의 불가사의급이다. 13세기 중반의 전선은 한반도에서부터 동부 유럽(!)에 이르렀다. 직선거리로 대략 8,000km에 달하며, 이정도의 전선이 역사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후 러시아 제국이나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자급했으나 원정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현지에서 조달하는 비율이 늘어났다. 현지의 자원을 수탈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악마같았다. 피정복민들에게 조공과 식량, 목초지를 요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철저하게 파괴했다. 또한 포로를 대량으로 확보해 노동력으로 부려먹거나 화살받이용 돌격대에 써먹었다.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피정복민들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본대의 전력이 소모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원정을 계속하면서 병력이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투의 원정군은 볼가 불가르와 쿠만족(킵차크)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서 약 5만 ~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징발했다. 러시아와 중국 문헌에는 공통적으로 1명의 몽골 병사당 10명의 현지인 포로를 잡아와 부역에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법 외에 보급로를 통해 물자를 운반하기도 했다. 주요 거점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병참기지로 삼는 한편, 장인과 수공업자들을 이주시켜 보급품을 조달하게 했다. 정주민족의 수공업자들의 기술을 인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종 군수품을 생산하게 했다. 오고타이 시대에 역참이 정비되면서부터는 100리마다 역을 두었다. 물자를 수송할 때는 말과 낙타가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100kg 이상의 짐을 지고 하루에 수십km를 이동하기도 했다.

3.2 식량

 

주식은 쿠루트라고 하는 말젖이었다. 모든 병사는 분말 형태로 된 마유를 지참하고 다녔으며 먹을 때는 물에 풀어 마셨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는 4~5kg 정도의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유지가 물에 뜨는데 이것은 걷어내어 버터를 만들고 남아있는 액체를 마셨다고 한다.


종마를 사용하지 않고 거세마와 암말을 선호했는데 수유기에 들어간 암말 2필이 생산하는 마유는 병사 1명이 5달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물론 망아지를 굶기지 않을 때의 일이다) 징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을 떠나기 전 병사들로 하여금 암말을 관리해서 전쟁기간 동안 말젖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암말은 병사들의 식량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말의 를 먹었다고도 했다. 병사 1명 당 5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조금씩 섭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의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비상시에만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불어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행군 중에는 간소하고 소박하게 식사했으며 불을 쓰지 않는 음식만으로도 10일을 행군할 수 있었다고 썼다.

가축을 데리고 다니며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몽달비서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전쟁을 할 때 양떼와 함께 이동하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들로서도 다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곡식도 먹었다. 존 데 플라노 카로피니[13세기에 교황의 사절로 몽골을 방문했던 이탈리아인. 돌아와서 '몽골여행기(History of Mongols)'라는 책을 썼다.]는 이들이 겨울철에 기장으로 만든 죽을 먹었다고 한다. 매우 묽어서 죽이라기보다는 국에 가까운 상태였다. 겨울철은 말젖이 나오지 않는 시기로 마유 이외의 다른 식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것이다. 피정복민의 군대를 위한 식량으로서도 곡식은 필요해서, 오고타이 시대에 정비된 역참에는 곡물을 갖추어 놓아야 했다.

행군 중에는 종종 수렵이 행해졌다. 네르제라고 불리우는 전통 사냥방식은 포위섬멸전의 모의전 형식을 띄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형태로 측면에서부터 사냥감을 에워싸 차례로 화살로 쏘아 잡는 방식이다. 이는 유목민족의 전투훈련인 동시에 식량확보 수단 중 하나였다. 몽골군이 목초지에 거점을 마련한 후에는 주변을 샅샅히 뒤져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데 사냥 역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다. 이들이 사냥한 짐승은 중앙 아시아의 마못을 비롯하여 들개, 늑대, 영양 등 다양했다. 노획물은 국을 끓여서 모든 병사가 나누어 먹고, 일부는 남겨서 보존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보존식의 대표는 보르챠라고 불리는 물건이 있다. 과장스러운 언급에 의하면 소 한마리의 고기를 말려서 소의 방광에 넣은 물건이다. 먹을 때는 뜨거운 물에 보르챠를 약간 덜어서 불린 다음 먹는다. 다만, 맛은 몽골인들도 비상식량으로 쓸 정도로 맛대가리가 없다. 따라서 비상시나 흉년이 아니면 절대로 기본 방식대로는 먹지 않았고 어떻게든 향채향신료를 구해서 뿌린 후에나 먹어야 했다.

여담으로 몽골인의 식습관은 프랑크인들에게 어지간히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카로피니는 몽골인들이 말의 태반과 , 를 먹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고[6], 이는 다른 유럽인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튜 패리스[7]는 몽골인들이 인육과 피를 먹고 살아가는 족속이라며 거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여담이지만 패리스에 의하면 타타르인들은 괴물이라서 인간의 생피를 마시는데 먹을 피가 없으면 흙탕물을 마셔서 갈증을 달랬다카더라...

유럽인들의 기록에는 말안장 밑에 고기를 깔아 발효시켜 먹었다는 타타르 스테이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이 훗날 햄버거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몽골이나 중국측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3.3 무기

 

카르피니는 몽골 군의 군장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몽골군은 다음과 같은 장비를 소지해야 했다. 좋은 활 2~3 개, 화살이 가득 찬 화살통 3개, 도끼, 밧줄, 투구와 흉갑이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사는 휘어진 외날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제국이 어느 정도 정비된 13세기 중반의 일이고 13세기 초 급격히 팽창해 가던 몽골군이 어떤 장비를 썼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공통적인 의견은 그들의 주무기가 활이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경기병이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는 각궁이었다. 짐승의 뿔과 힘줄, 나무 등의 재료를 이어붙여 만든 복합궁으로 살상력이 뛰어난 위력적인 무기였다. 각궁의 최대 사거리는 약 300m 정도였지만 실전에서는 150m 미만에서의 사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의 기마사격을 카라콜과 비슷한 형태의 것으로 보았는데, 이 전술에서 전열은 적 부대의 50m까지 근접하기도 했다.

활을 쏠 때 다른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손에 깍지를 꼈다. 이는 시위에 손을 베지 않기 위한 것으로 활을 당기는 것을 좀 더 수월하게 해 주었다. 유럽의 활과는 달리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매겼는데 이렇게 할 경우 명중률이 좋아진다고 한다.

화살은 60개 정도를 휴대했으며, 장인이 만든 것도 있으나 병사 개개인이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길이는 2피트 정도로 프랑크인들의 화살보다 길었다. 화살촉은 쇠, 강철 등 금속제 이외에 짐승의 뼈나 뿔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렇게 만든 화살들은 전부 용도가 달랐다. 예를 들어 폭이 좁고 뾰족한 화살은 갑주관통용이었고 폭이 넓은 화살은 갑옷을 입지 않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한 것이었다. 촉을 뭉툭하게 만든 살은 생포해야 하는 적을 쏠 때 사용되었다.

금속제 갑옷을 입기도 했으나 대개는 층상형으로 만든 가죽갑옷이 선호되었다. 이는 만들기 쉬웠던 까닭도 있으나 층상형 갑옷이 화살에 대해 높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몽골인들이 갑옷을 입은 건 아니어서 후위의 부대원은 펠트로 된 외투만을 걸치기도 했다. 그래도 투구만큼은 금속제를 써서 강철로 만든 후에 동을 입혔다.

많은 피정복민들의 무기를 받아들였다.(때문에 "활을 제외하고는 전부 빼앗은 무기들이다" 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괄목할만한 부분은 공성무기의 발달이다. 13세기 초 몽골군에게는 공성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았으나 13세기 중반 이후 중국으로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공성무기가 크게 발달했다. 투석기와 노포, 높은 누대가 동원되었으며 특히 남송과의 전쟁에서는 아랍인들이 만든 신형 투석기가 활약했다.

3.4 목초지

 

목초지는 식량이나 무기 못지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른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도 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목민족 사이의 전투에서는 서로의 목초지를 확보하고 빼앗는 것이 중요했다. 농경민족의 농지를 황폐화시키고 그 자리를 목초지로 만드는 일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아군의 병참을 확보하면서 상대의 생산력을 저하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원정에 동원되는 병력의 규모는 사용 가능한 목초지의 면적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동력을 살려 제 힘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했는데, 병사 1명이 5 ~ 6 필 정도의 말을 소유했다. 이들을 먹여살릴 초지를 찾는 것은 사람이 먹을 식량 못지않게 중요했을 것이다.

적당한 목초지를 찾지 못할 경우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말의 수가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지휘관들은 병사 1명 당 사용하는 말의 수를 줄일 것인가, 아니면 작전에 투입할 인원을 줄일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아시아에 도착한 몽골군은 만족할 만한 목초지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일 칸국의 기병들은 점차 전형적인 아랍의 중기병처럼 변해갔다. 말 5필 이상을 운용하는 경기병 중심 체제에서 1필이나 2필만을 데리고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돌격병의 비중이 늘어났다고 한다.

3.5

 

몽골인들 사이에서 말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식량을 제공해 주고 이동수단이 되며 전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말은 사람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다.


몽골의 병사는 2 ~ 3 마리에서 6 ~ 7 마리까지 말을 소유했고 전장에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항상 최고의 상태인 말들을 탈 수 있었다. 숙영지에는 말을 관리하는 부대가 따로 있었다. 이들은 마초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가장 먼저 텐트를 쳤다. 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모든 병사들은 적어도 2 필의 말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숙영지 사이의 거리를 벌려 띄엄띄엄 야영에 들어갔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그래야 말을 끌고 다니기 쉬우니까. 정주민들이 먹이던 콩이나 귀리 등의 곡식은 잘 먹이지 않았고 주로 풀을 먹게 했다. 곡식은 몽골에서 귀하기에 말에게 먹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에게 주로 풀을 먹일 수 밖에 없다.

프랑크인들이 힘센 종마를 선호한 것에 비해, 몽골인들은 유순하고 지구력이 좋은 거세마나 말젖이 나오는 암말을 골랐다.

칭기스 칸 대까지 말은 몽골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나 오고타이 칸은 몽골마를 외부로 반출하는 것을 금했다.

4 전략 전술

 

전력전술 역시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비사에는 '끌 전법'에 관한 대목이 나오지만 은유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4.1 작전회의

 

원정 계획은 씨족 집회인 쿠릴타이에서 결정되었다. 1년을 기준으로 볼 때 초봄에 대략적인 계획을 잡고 5월의 집회에서 모든 족장들이 모여 구체적인 목표를 결정한다. 쿠릴타이가 끝나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부족민들과 세부적인 전략을 짠 뒤, 더위가 가시기 시작하는 8월에 모여 출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규모 원정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원정은 연 단위로 준비기간을 잡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바투의 유럽 원정은 2년에 걸쳐 준비되었다. 먼저 스파이를 풀어 적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동경로를 확인하여 곳곳에 우물을 판다. 원정군이 지나갈 곳에서는 가축을 방목하거나 풀을 벨 수 없다. 아예 들어가는 것도 안된다.

4.2 군영설치

 

군영은 적을 감시하기 좋고 기상현상으로부터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고지대에 지어졌다. 조공의 기록에 따르면 성 안에 주둔하지 않고 항상 성 밖의 초원에 넓게 퍼져 숙영했다고 한다. 군영 사이의 거리는 매우 넓었는데 이는 말을 방목하기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군영은 따로 있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2필의 말을 항시 곁에 두었다. 초병들은 목패를 교환하는 것으로 인수인계를 했고 암호는 자신들이 속한 부대의 지휘관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영이 한 번 세워진 뒤에도 위치를 옮기곤 했는데 속임수로 적을 교란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때는 군영을 옮기되 처음 세운 위치에 밝힌 불들을 그대로 남기고 조용히 이동했다. 날이 밝은 후에도 끄지 않았다.

행군을 할 때에도 밀집하지 않고 산개한 상태에서 이동했다. 언제나 척후를 보내 적의 매복과 기습을 경계했다. 원조비사에는 "설령 1렌의 인원이라도 이동할 때에는 척후를 보내 주위를 살펴라"라는 구절이 있다.

4.3 초원전술

 

몽골군의 야전전술은 다소 거칠게 비약하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나눌 수 있다. 척후병을 활용한 정보수집, 전장선택권 유지, 산개대형 유지와 소규모 부대의 유기적 움직임, 이를 바탕으로 한 포위섬멸전, 각종 기만전술이 그것.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동력과 지구력이다.


원조비사에는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195절에는 군대를 다룰 때 "카르가나[8]처럼 나아가고, 호수처럼 나아가며, 끌처럼 나아가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끌 전법에 대한 내용으로 보통 초총행(草叢行), 해진립(海陣立), 착전(鑿戰法)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게 무슨 소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애초에 원조비사 자체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은유적이고 모호한 표현들이 많은데 이 구절도 그 중 하나다. 대개 초총행과 해진립은 산개전술과 집단전술로, 착전법은 돌격전술로 추측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제각각이다. 그리고 나름대로의(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근거도 갖추고 있다.

흑달사략에는 기병전술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강 이런 내용이다.

먼저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우고 불리할 때는 싸우지 않았다. 빠르게 적의 허실을 파악할 수 있고 적은 수로 대군을 포위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봉대(돌격대)에 의지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선봉이 나서지 않고 전원이 일제히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항상 산개 대형을 이루어, 보병을 상대할 때는 대오를 갖추고 기병과 싸울 때는 갖추지 않았다. 적의 움직임에 반응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많은 수가 몰려왔다가 적은 수고 몰려오고, 모였다 흩어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벼락처럼 돌진했다. 높은 곳에서 관망하다가 기병대가 돌격하는데 공격으로 적이 흔들리지 않으면 연이어 재차 돌격했다. 적의 좌우 배후에서 포위한 후 일시에 공격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으면 가축들을 돌진시킨다. 허장성세를 부리거나 심리전을 펼치기도 한다. 거짓패배 후 매복으로 적을 섬멸한다. 패배한 적의 수장은 반드시 추격하여 사로잡는다.

몽골군이 야전에서 남송보다 월등히 강했기에 어느 정도 감탄스러운 어조가 묻어나지만 기본적으로 몽골군이 기동력을 이용한 전방위 타격전술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첫 구절은 유목민족들의 군대가 흔히 보여주는 전장선택방식인데 기동력을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전장선택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후퇴를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마르코 폴로의 말과도 일치한다.

대부분의 유목민족과 마찬가지로 몽골군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군사활동을 개시했다. 이 시기는 정주민족의 수확철이기 때문에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아져 병력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군세가 강한 적과 싸울 때 지연전술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아예 적과의 교전을 하지 않는 방법이다. 소규모의 병력만 남기고 본대를 일정 거리에 철수시킨 후 적이 병력을 줄이면 빠르게 되돌아와 공격하는 방법이다.

첩보활동은 가장 기본적인 전술인 동시에 철저하게 지켜졌다. 척후병은 본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정보를 수집했는데 주로 현지인을 사로잡아 적의 허실을 파악했다. 적병의 수와 위치, 식량의 위치와 양, 목초지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이들은 본영에서 이틀 거리까지 앞서 나가 정보를 수집했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정면충돌을 최대한 피했고, 적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역시 스웜 전술의 기본적인 방식으로 출혈이 큰 백병전은 최후의 일격으로 남겨두고 그 이전에는 원거리에서의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이 백병전을 벌이지 않고 적의 주위를 맴돌며 사격했다고 한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군이 탄막을 형성하는 집중사격으로 적을 제압했다고 보는데, 이 전술은 16세기 유럽의 카라콜과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의 자군을 5개로 나누어 2개 아르밧씩 짝지운다. 이 중 4쌍(8 아르밧)이 활을 쏘고 1쌍(2 아르밧)이 돌격을 준비한다. 먼저 궁기병들은 긴 타원을 그리며 적에게 접근하고 시간차로 전위의 부대가 적에게 사격을 가한 후 물러난다. 그 자리를 뒤따르는 2 아르밧이 채우면서 적에게 접근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계속 화살세례를 퍼붓는 것이다. 사격은 조준사격이 아닌 특정 지역을 목표로 한 탄막을 형성했으며 일반적으로 1시간의 사격에서 화살통의 화살 60개를 소모했다고 한다. 적의 대오가 무너지면 대기하고 있던 2개의 아르밧이 돌격하여 접근전으로 마무리한다.

이 전술은 기마사격에 대한 개인적인 기량 외에도 각 자군과 아르밧이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쓸 수 없는데 그만큼 훈련이 잘 된 군대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통상적인 전술에서도 중장기병이 운용되었으며, 이때 궁기병과 돌격병의 비율은 약 4 : 1 정도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기마사격 뿐 아니라 보사(步射)를 하기도 했다. 조공에 의하면 방패를 찬 돌격병들이 적을 향해 돌격하다가 말에서 내려 화살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 발을 쏘고 난 후 두번째로 쏠 때에는 반드시 적진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근거리에서의 조준사격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만큼 위력도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군의 포위섬멸전을 살펴보려면 평시에 이루어졌던 사냥인 네르제(바투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전시에 이루어지는 포위전의 모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사냥으로 특히 칸이 참여하는 사냥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사냥에 참가한 몰이꾼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사냥감을 몰아넣고 포위망이 형성되면 칸이 화살을 쏘는 것을 시작으로 사격을 가했다. 실수로 사냥감을 놓치면 벌을 받았는데, 이로 알 수 있듯이 네르제는 거의 군사훈련에 준하는 행사였다. 페르시아의 역사가인 주바이니는 몽골인들이 안장과 말 사이에서 나고 자라며 평생을 사냥감을 쫓으며 산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몽골인들은 저절로 전투하는 법을 알게 된다고도 했다.

전장에서의 포위전은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몽골군은 중군(바라군 가르)과 좌익(제운 가르), 우익(콜 가르)으로 포진했고 중군이 적과 교전하는 사이 좌우익이 소규모 부대로 갈라져 적을 포위했다. 포위망이 완성되면 사방에서 WAAAGH!!하는 함성과 동시에 적을 공격해 혼란에 빠뜨렸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상대할 때는 일부러 혈로를 터줘서 달아나도록 한 뒤 기습하기도 했다.

산개대형을 유지하며 소규모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전술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의미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에 기동력과 조직력을 더해지면서 대단히 무서운 군대가 되었다. 중국인은 이를 두고 수백수천이 일시에 움직였다 흩어진다고 표현했다.

적의 군세가 강할 때에는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위장퇴각은 유목민들이 즐겨 사용하던 전법이었다. 적과 접전을 벌인 후 패배한 척 달아나다가 매복한 군사들과 함께 적을 일시에 습격하는 방법이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군은 후퇴할 때에도 계속 화살을 날려 적을 향해 돌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위장퇴각은 자칫하면 진짜 패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조직력을 필요로 한다.

4.4 공성전술

 

공성은 주로 4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성무기로 성벽을 직접 공격하고, 갱도를 파며, 성벽 아래를 파내려가 붕괴를 유발하고, 사방에서 사다리를 걸어 병사들이 올라가는 방식이 그것이다.


공성무기로 노포, 투석기 등을 사용했으며 화약을 쓰기도 했다. 화전을 쏘거나 쇠로 만든 폭탄, 나프타 단지 등을 투석기로 발사했으며 바그다드 공성전에서는 투사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근처의 야자수를 잘라 불을 붙여 쐈다. 남송과의 전투에서는 아랍인들이 만들어낸 회회포로 한족의 견고한 요새를 때려부쉈다. 이미 소이탄 형식의 폭약이 사용되었고, 연막과 악취를 동반한 무기도 있었다. 이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악마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더욱 더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몽골군의 공성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피정복민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이다. 몽달비록에는 큰 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근처의 마을과 도시들을 먼저 공략하고 병사 1명당 10명의 포로를 확보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연대기와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그렇게 잡혀온 포로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들은 각자에게 부과된 풀과 땔감, 흙, 돌을 모아와야 했으며 공성전의 가장 위험한 작업에 투입되었다. 성벽 아래의 해자를 메우고 참호를 파야 했는데, 아무리 많은 수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일하는데 굼뜬 자는 주저없이 죽였다고 한다.

여러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법은 적을 패닉에 빠뜨리고 지원군을 차단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적의 움직임을 종잡을 수 없게 된 수비대의 지휘관들이 각자의 담당구역을 방어하는데 전념하는 사이 몽골군은 재빠르게 작은 거점들을 각개격파한 후 남아있는 요새들을 고립시켰다. 이런 방식은 대량의 피난민을 발생시켜 적에게 공포감으로 인한 공황을 일으키는 효과도 있었다. 난민들은 공포를 확산시키는 한편 적의 식량사정을 더욱 어렵게 했다.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로 적의 성내에 투하해 흑사병으로 성내를 초토화시키는 작전도 썼다.

4.5 군율

 

더 세련되어진 면은 있으나 몽골군의 전술은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족들이 기존에 써오던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티모시 메이는 엄격한 군율을 들었다.


유목민의 군대는 강하지만 병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 아닌 전리품의 획득에 있었다. 따라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노략질에 몰두하다 적의 반격을 받아 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징기스 칸은 개인 차원에서의 약탈을 엄금했다. 적과의 교전에서 승리한 후 모든 병사는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자신의 자리에 없거나 전리품 앞에 멈춰있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원칙적으로 약탈은 금지대상이었고 전리품은 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일부는 몽골고원의 수비대에게까지 전해졌다. 분배되는 전리품은 주로 옷감이었으며 비단과 모시를 받았다. 공을 세운 전사는 칸에게 청하여 훈장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때 훈장을 만들 금과 은은 자비로 마련해야 했다.

약탈이 허락되는 경우에는 명령에 의해 규칙적이고(...)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병사들은 약탈할 집을 골라 화살을 꽂아둠으로써 그 가옥이 자신의 몫임을 알렸다.다만 이렇게 약탈이 허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개전 초기의 공포전술을 위해서, 혹은 저항이 심한 거점이거나 항복했다가 배신한 도시에 한했다.

5 몽골의 적대국

5.1 유목민족

 

몽골인들이 가장 경계한 대상은 자신들과 비슷한 튀르크계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은 몽골군과 거의 동일한 전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복속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고, 복속된 후에는 빠르게 몽골군에 동화되어 갔다.


이들은 몽골군과 거의 동일한 작전체계와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부족민들은 경기병으로 징집되었고 층상형 가죽갑옷과 활로 무장했으며 기동력을 활용한 초원전술과 기만전술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칭기스 칸이 몽골에 도입한 천호제는 원래 케레이트 부족의 편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1186년 테무진이 칸으로 즉위했을 당시 몽골고원에는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등의 부족들이 난립해 있었다. 테무진은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케레이트의 옹칸(토그릴)의 군사를 빌려 그의 산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케레이트의 군사를 빌려 타타르, 메르키트, 나이만 등 경쟁자들을 패퇴시키는 한편,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도 구축해 나갔다. 옹칸과의 사이가 틀어져 고립되었던 적도 있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겼고 케레이트를 역습해 승리하고 오랜 숙적인 자무카를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사실상 몽골 통일을 완수한다. 1206년 칭기즈 칸으로 즉위한 후 나이만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원조비사는 몽골통일 과정을 부족들의 이합집산에 의한 연대세력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비사는 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몽골통일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술적인 측면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나이만족과의 전투에서는 끌 전법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몽골군의 전술에 대한 묘사로, 바로 '끌 전법'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천호제를 도입하여 편성된 군대로 초총행(草叢行), 해진립(海陣立), 착전(鑿戰法)을 전개하여 나이만을 쓰러뜨렸다는 기록.

더불어 비사는 세력이 약했던 칭기스 칸의 군대가 사용했던 기책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기만하기 위해 화톳불 수를 늘린다던가, 비전투원을 말에 태워 병력인 것처럼 위장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화가 존재한다.

몽골통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칭기즈 칸 항목 참조.

5.2 금나라

 

금나라는 1211년 개전한 이래 1234년 멸망할 때까지 20여년 간 몽골과 싸웠다. 이 기간 동안 몽골은 호라즘 원정(1219년), 유럽 원정(1229년), 고려 원정(1231년) 등 많은 정복사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더불어 전쟁을 시작한 군주인 칭기스 칸이 사망(1227년)하는 일도 겪었다. 그야말로 몽골의 국운을 건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스 칸은 금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때 몽골인들의 국민정서를 이용했다. 금나라는 유목민족들에 대해 이간책을 사용하는 한편, 세력이 강한 부족에게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들을 통제해 왔다. 몽골의 암바카이칸은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혀 금나라로 압송되어 살해당했고, 후손들에게 복수를 명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인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3세기 몽골고원의 자원은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크게 감소했다. 특히 주요 수출품이었던 말의 숫자가 줄어들어 재정이 적자상태가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경기부양책이 필요했다. 여기에 몽골통일이라는 정치적으로 전례없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 에너지를 대외적으로 쏟아부을 사업이 필요했다.

금나라의 주력은 여진족으로 이루어진 중장기병으로, 이들은 12세기 동북아를 제패한 강군이었다. 그러나 수 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정착생활로 인해 금군의 주력은 여진기병에서 한족보병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개전 초기의 패배로 많은 수의 기병을 상실했으며, 목장과 목초지를 빼앗기면서 기병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금군은 야전에서는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나라가 20년에 걸쳐 몽골에게 항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강한 국력과 견고한 요새에 있다. 당시 금나라의 인구는 4천만에 육박했고, 이는 몽골의 40배에 달했다. 화북을 상실한 이후에도 화남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수행해 갈 수 있었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성채를 효율적으로 공략하지 못했고, 중국의 요새들은 견고했다. 때문에 야전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적의 거점을 공략하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초원에서의 전투에만 익숙했기 때문에 요새거점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고, 승리를 거두고도 전리품과 세폐만을 받고 철수하여 금나라가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1208년 금나라의 장종이 사망하고 위소왕이 즉위했다. 칭기스 칸은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그 해 가을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금나라 영내로 쳐들어갔다. 야호령에서 벌인 첫 접전에서 몽골군은 그야말로 악귀처럼 싸워 대승을 거둔다.[이는 칭기스 칸의 정신교육이 효과를 봤다는 것을 뜻한다. 몽골의 바토르들은 화공을 당해 갑옷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불을 끌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적에게 돌격했다고 한다.] 이어 회화보에서도 금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거용관을 점령하면서 금군에 대한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1212년과 1213년에도 재차 침입하였는데, 3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로 만주와 요동을 비롯한 화북지방을 접수했다. 가장 큰 이득은 금나라 북부에 있던 목장을 점령함으로써 충분한 양의 말과 목초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거란족들의 협력을 얻어 부족한 병력을 대거 증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13년 위소왕이 암살당하고 선종이 즉위했다. 선종은 수도를 연경(베이징)에서 개봉(카이펑)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했고, 이에 자극받은 칭기스 칸은 1214년 국경지대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트집잡아 다시 남하한다. 이 전쟁에서 연경이 함락되었고 금은 화북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상실하였으며, 거란을 비롯하여 여진에 복속되었던 이민족들이 몽골에게로 돌아섰다.

1217년 칭기스 칸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무카리는 낙양과 장안을 공격했는데, 우회로를 이용하여 견고한 성채였던 두 도시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개봉공략에 실패하면서 이번에는 금나라가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1219년 몽골이 호라즘과의 전쟁을 시작하자 금나라는 군사를 모아 옛 영토를 탈환하기 시작했고, 연경 이남의 강역 대부분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무칼리는 1223년 금군과의 전투 도중 병사했다.

1223년 선종이 남송의 자객에게 피살당하고 애종이 즉위하자 몽골과 남송이 다시 금나라를 공격했다. 선종이 수복한 영토는 이때 다시 몽골에게 넘어갔고, 남송이 양자강을 넘어 공격해 왔다. 몽골은 서하를 경유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1227년 서하원정 도중 칭기스 칸이 사망하자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금나라는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공세를 감행, 다시 연운 16주와 서경을 수복한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려던 본래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했다.

1228년 오고타이는 위수에서 대승을 거둔 후 장안을 공격했다. 애종은 강화를 요청했고 오고타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잠시 군세를 정비하더니 종이짝처럼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한다. 이번에는 부대를 대규모로 쪼개서 세 방면에서 개봉을 압박했다. 툴루이는 하남, 사천 남부 방면으로 우회하여 남쪽으로부터 북진했고, 테무게는 산동과 하북으로 갔다. 오고타이의 본대는 산서성을 지나 황하로 내려왔다. 개봉은 고립되었고 몽골군의 악명에 내몰린 피난민들은 수도의 식량사정을 지옥으로 내몰았다. 금나라는 남송을 공격하여 식량을 탈취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금나라의 멸망의 기로에 놓였다.

1228년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기병대가 몽골기병을 패퇴시킨다. 야전에서 금나라가 몽골을 이긴 것은 1211년 개전 이래 거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완안진화상은 몽골군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다. 가히 금나라판 악비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로, 몽골측의 기록에도 유능하고 절개있는 장수로 묘사될 정도다.

1230년 오고타이가 본격적으로 원정에 나섰다. 완안진화상은 툴루이와의 전투에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툴루이는 계속해서 한수를 건너 한중을 점령하며 남부에서 깽판을 쳤고 금군이 이를 막기 위해 남하하자 이번에는 오고타이가 직접 하중으로 내려왔다. 툴루이는 오고타이와 합류하여 개봉을 포위한다. 금군은 진천뢰 등 화약무기를 동원하며 항전했고 몽골군은 노포로 응전했다. 1233년 5월 개봉이 함락되었고 애종은 탈출했다.

애종은 1234년 채주로 피신, 이를 몽골과 남송군이 추격했다. 전황이 기울자 애종은 노상에서 황족인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도하고 자결했다. 완안승린은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황위에 오른지 하루가 채 못돼서였다.

5.3 호라즘 왕조

 

티모시 메이는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보여준 작전수행능력을 그야말로 완벽했다고 평한다. 몽골군이 오트라르에 나타난 후 사마르칸트가 함락되기까지는 채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1218년 오트라르의 영주 이날축이 몽골의 캐러반들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가 되었고 호라즘과 몽골은 전쟁에 돌입했다.

개전 당시 호라즘의 총 병력은 수십만에 달했다. 주력은 타지크족 보병과 투르크족 기병이었으며 특히 캉글리족과 킵차크족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호라즘 최강의 군대였다. 맘루크와 굴람 연대도 보유하고 있는 등 객관적으로는 결코 몽골군에 뒤지지 않는 군세였다. 더불어 몽골과 호라즘 사이에는 키질쿰 사막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단이 움직이기에는 위험요인이 많았다. 무함마드 2세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통해 몽골인들이 야전에는 강하지만 공성에 서툴다는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 술탄은 당연하게도 성채에서 수비에 치중하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일설에 의하면 무함마드 2세는 과거 몽골군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 오랑캐놈들과는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카더라.] 실제로 금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개봉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킨 바 있었다.

문제는 몽골군이 과거의 몽골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부터 몽골인들의 악명높은 공성전술이 빛을 발하게 된다. 동시다발적인 공격으로 적의 거점을 고립시키고 공포전술을 사용하여 내부로부터 무너뜨렸다.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동원했고 투석기와 공성추, 누대 등 대규모 공성병기를 도입했다. 하나의 거점이 무너지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고, 이는 소문을 타고 부풀려져 공황을 일으켰다.[ 이 소문은 계속 부풀려지며 서쪽으로 이동해 결국 프랑크인들에게까지 닿게 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몽골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 또한 금나라와 달리 호라즘은 정복활동을 막 끝낸 후 아직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중국의 정교한 관료제와 지방통치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분산된 각각의 군대 및 요새들의 공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호라즘이 승리할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수세에 몰리게 되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때문에 몽골군은 각각의 요새들 사이를 마음껏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술탄도 곧 이 사실을 깨달았으나 전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있었다.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1219년 오트라르에 도달한다. 칭기스 칸은 "지휘관은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날축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5개월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이에 내부의 성채로 옮겨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성채도 뚫렸고 사로잡힌 이날축은 칭기스 칸 앞에서 끔살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금을 녹인 물을 눈에 들이붓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오트라르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사마르칸트에는 약 10만의 수비병력이 있었다. 칭기스 칸은 사마르칸트를 공격하기에 앞서 주변의 거점들을 모두 함락시켰다. 1220년 3월 부하라가 함락되자 사마르칸트는 고립되었다. 부하라의 포로들은 공성전의 최전열에 내몰려 화살받이가 되었다. 수비군이 반격에 나섰지만 위장퇴각 전술에 걸려 한 번의 전투에서 5만 명의 병력이 궤멸되었고, 무함마드는 기병을 보내 사마르칸트를 구원하려 했으나 모두 패했다. 도시는 포위된지 닷새만에 함락되었다. 수비군은 몽골군에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성문이 열린 후 모두 살해당했다.[몽골군은 전투가 벌어진 후 항복해 오는 자는 신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편에서 싸울 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이 적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항복하거나 초반에 항복한 자들만 받아들였다] 야사에 의하면 칭기스 칸으로부터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라는 명이 있었고 이는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무함마드 2세는 달아났으나 제베수부타이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1220년 12월 카스피해 연안에서 병사했다. 잘랄 웃 딘이 뒤를 잇는다.

다음 목표는 아랄해 남쪽에 자리잡은 수도 우르겐치였다. 우르겐치의 성벽은 견고했고 주민들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시가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은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함락된 후 주치가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문에 주치가 도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고도 한다. 공성의 진척이 늦어지자 칭기스 칸은 주치와 차가타이를 잘라버리고 오고타이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221년 4월 우르게쥐가 함락되자 주민들은 저항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고, 살육을 피한 주민들도 몽골군이 제방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 익사했다.

툴루이는 1221년 2월 서쪽의 메르브를 공략하여 학살을 자행한 후 더욱 더 서쪽에 있는 니샤푸르로 향했다. 칭기스 칸의 조카가 이곳을 공격하던 중 사망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살해당했다.

잘랄 웃 딘은 1221년 몽골군이 철수한 우르겐치로 돌아와 술탄으로 즉위하고 몽골과의 항쟁을 계속했다.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야전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호라즘이 몽골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지막 승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던 칭기스 칸이 본대를 이끌고 내려와 잘랄 웃 딘의 군대를 궤멸시켰고 근거지인 가즈니를 완전히 파괴했다. 잘랄은 포로로 잡힐 위기에 빠졌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해 인도로 달아났다.

5.4 러시아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군은 카스피해까지 진출, 루스 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221년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2개 투멧(12,000 ~ 20,000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아닌 정찰대 정도였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간만 보고 물러났다. 그러나 1229년 바투의 원정대는 십수만 내외로 추정될 정도의 대군이였고[몽골인 3만에 현지에서 징발된 병력을 합쳐 7~8만 정도가 현재의 추정치이다.] 루스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당해 약 200년 간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13세기의 러시아는 슬라브인들이 세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은 힘들어보였다. 이들의 주력은 민병대로 구성된 보병(스메르디)이었고, 방패와 도끼, 창, 활,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루스 보병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갑주가 부실했기 때문에 화살에 매우 취약했다. 영주들은 드루지나라고 부르는 용맹스러운 중장기병군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전사적 역량을 전술적으로 승화시키기에는 공국들의 전술적 역량이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도시에는 성곽이 없었다. 대부분 목책으로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공성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킵차크 지역에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20년에 이미 수부타이는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칸을 죽였다. 이때부터 킵차크인들은 몽골과 원수가 되었다. 살아남은 킵착인 중 하나였던 코텐은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루스로 달아났다.

1221년 수부타이와 제베는 카스피해 남부(현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조지아 왕국의 게오르그 4세의 군대와 격돌했다.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정면충돌을 피해서 경기병을 보내 위장퇴각으로 적을 개활지로 끌어내 포위섬멸했다. 같은 해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그루지야군을 패퇴시킨 후 코카서스 산맥을 넘었다.

코텐은 인맥이 있던 루스의 공국으로 넘어가 대공과 귀족들을 충동질했다. 대공들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결국 1223년 키예프를 중심으로 남부의 18개 공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몽골을 치기로 했다.[몽골군과 달리 루스연합군의 규모는 파악이 어렵다. 20세기 초 무렵에는 8만 이상까지도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3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키에프의 연대기에 의하면 전사자만 1만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후대의 기록으로 갈수록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 전투는 현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가강에서 벌어졌다. 몽골군은 처음에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라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군은 몽골군과 싸울 의도가 없다고 속인 후 기습해 후발대 약 천여명을 살상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본대와 맞붙게 되자 역시나 위장퇴각전술에 휘말린다. 몽골인들은 지속적으로 퇴각해 루스군을 본토에서 최대한 격리시킨 후 칼가강에서 우회, 킵차크족을 공격해 물리첬고, 달아나는 킵차크 인들이 후방의 루스군과 충돌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대로 반격, 루스군까지 괴멸시켰다. 키예프 대공은 후방의 진지에서 패잔병들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철수도 못하고 포위, 항복후 처형당했다 이 와중에도 드루지나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은 몰살당했다. 코텐은 살아남아 헝가리로 도망쳤다.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야전병력이 사실상 궤멸되었고 이때 수부타이는 분열된 루스의 공국들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다만 그와 제베가 거느린 군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루스에 대한 정보만을 가지고 귀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에 대한 루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바로 이 1223년으로 이후로는 단 한번도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물론 2차 침공 때의 루스 제후들이 1차 때보다 멍청하고 이기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정보력에서 우세였던 몽골군이 루스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거점을 두들겨댄 탓에 공황상태에 빠진 대공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바투의 원정은 1235년(혹은 123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투의 원정군은 출발시에는 3만 내외였으나, 볼가강의 볼가-불가르 왕국을 무너뜨리고 킵착족들을 흡수한 후에는 약 7~8만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20만 이상이었다는 설도 있음) 1237년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공국이 가장 먼저 갈려나갔고 로스토프, 유리에프, 야로슬라보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1238년 노브고로드를 치기 위해 몽골군이 움직였을 때 루스 북부에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었다. 토르초크에서의 민병대의 선전으로 바투가 노브고로드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을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몽골군은 후방에 위험을 놔둔 채로 퇴각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으나, 루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 뜨고 흘려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1239년에는 러시아 남부의 키예프를 함락시켰다. 키예프는 단단한 성벽으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할리츠키 휘하의 수비병력도 잘 싸웠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했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키예프가 무너지자 남부 루스 전체가 무너졌고 여력이 있는 귀족들은 제 한몸을 살리려고 동유럽으로 내뺐다. 남아있던 백성들이 몽골군에 맞섰으나 엄청난 희생자를 낸 끝에 모두 제압된다. 살아남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했다.

5.5 카프카스

 

아나톨리아 동부와 카프카스 남부지방들이 차례대로 점령을 당하거나 아직까지 전쟁을 치루거나 조공을 받치는 와중에
1250년이후 조지아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항전에 돌입했고 디바트 나린을 선봉하여 3년동안 긴 전쟁을 치뤗고 그 이후 다비트 데메테르 2세와 다비트 8세에서 까지 전쟁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게오르기 5세 대왕시대에 들어서서 결국에 몽골을 완전히 캅카스지방 밖으로 몰아냈고 120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의 조지아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게되었다.


비슷한시기의 인구시나 체첸지방을 여러차례 공격햿고 지금의 러시아도 힘들어하는 이들 전투민족들은 2~3차례의 전면전 공격에도 특유의 게릴라공격으로 버텨내고 더이상 침략의 의미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몽골제국은 고개를 돌리고만다.

5.6 동유럽
다비트 데메테르 2세 왕(1270~1289)과 다비트 8세 왕러시아에서 달아난 코텐은 킵차크족 생존자들을 규합해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하지만 몽골은 수만명이나 되는 투르크족들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더불어 헝가리 평원에 광대한 목초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투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력은 중장기병이었다. 흔히 유럽인들이 몽골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프랑크족의 기사단은 막강한 돌파력을 갖춘 강군이었다.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기사단의 돌격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 같아서 언제라도 적을 향해 쏘아져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의 철갑은 화살에 대해 뛰어난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몽골군에게 연전연패하고 말았는데, 몽골군이 이들을 상대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화력덕후가 되어서 노포, 투석기, 불화살 등 더욱 더 강력한 투사무기로 기사단을 쓸어버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교우위라고 할 수 있는 기동력을 살린 위장퇴각, 포위섬멸 등 초원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적의 약점을 찌른 것이다.

바투는 군대를 넷으로 나누었다. 바투의 목표는 헝가리였다. 바이다르는 북쪽으로, 구유크는 남쪽을 경유하도록 했고, 카이두는 폴란드와 독일로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카이두의 병력이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들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로 달아났다.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고 타타르인들이 이들을 살육하는 동안 시민들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행하며 피난민을 발생시키고 공황상태를 야기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이두는 드로츠와프를 우회하여 슐레지엔으로 향했고, 1241년 그곳에서 동유럽 땅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다. 슐레지엔의 하인리히 대공은 몽골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각지에 원군을 요청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했고 보헤미아왕으로부터 원군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보헤미아군보다 먼저 카이두가 도착했고 하인리히는 보헤미아군의 도움없이 싸워야 했다.[몽골의 병력은 1개, 혹은 2개의 투멧으로 8,000~20,000이었고, 폴란드 측은 역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제임스 채임버스를 비롯한 사가들은 하인리히의 병력을 대략 25,000 내외로 추정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4,000~8,000 정도였다는 주장도 제시되고 있다] 4월 9일 양군은 레그니차 평원에서 격돌했고, 몽골군은 위장퇴각에 이은 포위전술로 폴란드군을 전멸시켰다. 하인리히공은 전사했고 전투에 참가한 기사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일설에 의하면 성당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의 병력 또한 참여했다고 하는데, 특히 튜튼기사단의 참전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다만 당시 하인리히는 그야말로 모을 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달달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소수나마 참여가 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심지어 광산의 광부들을 무장시켜 전장에 내보낼 정도였다. 이 광부들은 포로로 잡혀 바투의 사유지에서 부역에 시달리게 된다.

훗날 발슈타트 전투로 명명된 이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나름대로 의의를 가지는데, 기동력과 조직력의 우위를 살려 화력과 개인 단위의 전투능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특히 2차대전 이후 미군이 기갑부대를 기동력 위주의 체제로 개편하기 시작했을 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사례로 종종 채용되었다. 더불어 중장기병의 갑주를 둔하고 무능한 겁쟁이들의 산물로 치부하기까지 했지만 상술했다시피 프랑크인들의 기사단이 그렇게까지 무능한 군대는 아니었고 오히려 매우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다만 몽골군에게 발린 것만은 사실. 몽골군 또한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다는 점(통상 20~40%)도 고려해야 하나, 이시기까지 몽골군의 돌격병은 유럽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가벼운 경장기병에 가까웠고 운용면에서도 유럽인들의 충격기병과는 많이 달랐다. 또한 카이두는 폴란드군을 포위한 후 화약무기를 쏟아부었는데, 이 무기는 연기와 악취를 일으켜 기사들이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은 "몽골인들은 말 뿐만 아니라 용까지 길들이고 있는 악마들이다"라는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하인리히공이 전사한 장소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9세기 프로이센은 이 수도원을 군사학교로 만들었고 600년 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숱하게 강의했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1241년 벨라 4세의 군대와 교전했다. 몽골군은 페스트 근처를 약탈하며 헝가리군을 자극했고, 프레드릭 공작이 이를 격퇴했다. 이후 벨라 4세는 몽골군 전위대를 격파하며 사요 강까지 군을 전진시켰다. 4월을 전후로 헝가리군은 사요강까지 진출하였는데, 헝가리군은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강 건너편에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본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과거에는 양쪽 모두 7, 8만 이상으로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부터는 2만 5천 ~ 3만 정도로 잡고 있다. ] 벨라 4세는 어찌되었든 근처에 몽골군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급품 수레를 사슬로 연결하여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였고, 몽골군 척후병들이 도강을 유도하는 데에 끌려가지 않았다.

4월 11일, 헝가리군은 별동대를 보내 야간에 7km를 전진해 몽골군 진지를 기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새벽, 몽골군 또한 헝가리군 진지에 야간 기습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넜고, 양군은 사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직전에서 맞부딪친다. 활을 겨냥할 수 없는 야간인데다 먼저 강을 건너 배수진 상황에 처한 몽골군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한 헝가리군과 맞서 싸우는 상황에 처해 결국 다리를 내주고 철수했으며, 헝가리군은 다리를 점거한다.[이때까지도 헝가리군은 몽골의 본대가 온 걸 모르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했던 칼만 왕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벨라 4세에게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투는 그 사이에 별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도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계획을 바꾸어 수부타이가 별동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강을 건너 헝가리군 본영을 공격하고, 그 사이 바투는 남은 부대로 다리의 헝가리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투가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탓에[이것 때문에 나중에 바투가 수부타이에게 "그대가 미적거린 탓에 내 부하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라고 불평했다. 그러자 수부타이는 "그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빨리 움직인 거겠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바투는 자신의 실책이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 헝가리군과 정면대결을 해야 했다. 게다가 군을 둘로 나눈 탓에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헝가리군의 석궁에 대응해 바투는 7대의 투석기(혹은 노포)를 동원하였으며, 전 병력을 동원한 벨라 4세의 맹공에 바토르 30명과 부관인 바카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수부타이의 별동대가 도착해 후방을 찔렀고 몽골군이 불화살로 응전하자 헝가리군은 포장마차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피해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바투는 몽골군의 장기인 추격섬멸까지 포기할 생각도 했으나 수부타이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 포장마차진지까지 공격, 마찬가지로 공성무기까지 동원해 이를 겨우겨우 파괴하였고[헝가리군은 보급에 쓰인 수레를 쇠사슬로 연결해 진지를 구축했는데, 상당한 방어력이 있었다. 포장마차를 공격하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은 몽골군은 이를 하나의 요새로 간주하여 공성무기를 동원해 공략했다. 포장마차는 헝가리군에게 효과적인 방호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행군속도를 떨어뜨린 양날의 검이었다]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여 헝가리군의 도주를 유도한 후 끝까지 밀어붙여 궤멸시켰다. 헝가리군은 우골린 대주교가 전사하고 칼만 왕자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벨라 4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다.[여담으로 코텐은 몽골군이 도착하기 한참 전에 죽었다. 벨라 4세가 그를 중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위협을 느낀 기득권층에게 살해당한 것. 이에 분노한 킵차크인들은 헝가리 땅에서 한바탕 분탕질을 친 뒤 비잔티움 제국으로 쳐들어 갔다...]

그 이후 몽골군은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 제2제국을 다음 상대로 삼았고 벨라4세가 크로아티아 협공해서 다시한번 몽골과 전쟁을 벌이지만 크로아티아는 사실상 패전하엿고 벨라4세의 탈출은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도우면서 몽골군대는 계속해서 추궁에 들어가고 이러면서 약탈과 학살이 점차 커진상황에서 몽골제국이 급작스럽게 후퇴를 하게된다
비슷한 시기에 불가리아도 침공에 들어갔고 가뜩이나 이반 아센 2세의 사망이후로 급속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결국 쇠퇴하기에 이르럿고 불가리아를 전반적으로 황폐화시키려고는했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엿고 킵차크칸국에게 조공을 받치는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안가서 아비일로신의 계시로 몽고놈들을 격퇴시키겠다라며 의용군을 조직하여 진짜로(!) 몽골국은 도나우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점차 안정에들어가기시작했다.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부를 정찰하며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1242년 돌연 헝가리에서 철수함으로써 고금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본국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벌어진 후계자 계승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유럽인들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고, 결국 자신들이 이 침입자들을 격퇴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이 사관은 이후로도 수백년을 이어져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 오스트리아의 노이슈타트에서 50명의 기사와 20명의 석궁병이 몽골군을 격퇴한 사건을 들어 "몽골인들은 프랑크인의 무용을 두려워 해 물러났다!!! 우리가 쫓아낸 거다!!!"라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는 잘해야 개그, 심하면 정신승리 취급이지만 뭐 기번은 18세기 사람이니까 무리도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의 주류사관도 나중에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거고...

여담으로 유럽인들에게 있어 몽골군은 어느 날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13세기 초엽에는 프레스터 존 떡밥과 엮여 '동방의 기독교 국가'에 대한 환상이 널리 처졌으나 바투의 원정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추론해내려 했다. 예를 들어 독일 지방에서는 그들이 동방박사들의 후예라는 설이 퍼진 일이 있었다. 1164년 십자군에 참가했던 기사들이 '동방박사의 유골'로 추정되는(신빙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인골을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지금 동방에서 온 무리들은 그들의 후손이며 탈취당한 선조들의 유골을 되찾으로 온 것이라는 얘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유골을 돌려줘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또한 몽골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며 유대력 5천 년을 맞아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유럽인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풍문도 있었다.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던 이야기는 역시 "이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이며,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악한 존재"라는 식의 소문이었다. 편집증적인 (그리고 진위 여부가 심히 의심되는) 몇몇 기록에는 이 악마들이 벌이는 광란의 살육과 그들의 소상한 취미에 대한 서술[예를 들자면 노파의 고기를 특히 좋아한다든가, 기독교인 처녀를 사로잡으면 진미인 가슴살은 대장한테 바치고 나머지 몸통은 졸병들끼리 나누어 먹는다든가...]까지 곁들여져 있다. 좀 구체적으로 설정을 짜면,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옥의 문을 열고 무저갱에서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나타났으며 말세가 임박하였다.(...)는 종말론으로 까지 번지게 된다.

실은 이런 주장들의 상당수는 교묘한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재생산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유대인에 대한 낭설은 몽골인들을 막아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나 민심을 선동하여 유대인 세력을 억제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만약 몽골이 원정을 멈추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 몽골군이 서진을 계속했다면 동유럽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먼저 스텝 초원지역이던 동유럽과는 달리 서유럽은 산맥들이 얽힌 지역이며, 동유럽은 헝가리 외에는 체계적으로 잡혀 있던 나라가 없고 분열과 위태롭기만 하던 나라들뿐이라 상대적으로 몽골군이 흔들기 쉬웠지만 서유럽은 당장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잉글랜드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몽골이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고, 튜튼기사단과 같은 정예병들과는 아직 맞붙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몽골군은 분열된 공국 투성이었던 러시아와는 다르게 헝가리에게도 고전하기도 했다.

5.7 남송

 

남송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오고타이 칸의 시대부터였다. 1234년 몽골과 남송의 공동작전으로 금나라가 멸망하자 두 제국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235년 시작된 전쟁은 1276년(혹은 1279년)까지 무려 40여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이 사이 몽골은 4명의 칸이 그 치세를 보냈고 남송도 5명이나 되는 황제가 제위에 올랐다.


남송의 군대는 대부분 보병으로 역시 야전에서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남송군은 금나라나 호라즘, 러시아군이 그랬던 것처럼 요새화된 근거지에서 방어위주의 전략을 폈다. 송의 수비군은 요새 근처의 농경지를 지키는데 주력했는데, 경작지와 식수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급자족하며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아예 행정부를 들어다 산성으로 옮기기도 했다. 대군을 이끌고 회전을 치러봐야 발리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한족은 산악지형에서 소규모 게릴라전을 펼쳤고 이는 확실히 효과를 봤다.

지형도 문제였다. 회수 남쪽에는 수많은 하천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는데, 남송의 수군은 이 물길을 따라 보급선을 이어갔고, 수군이 빈약했던 몽골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몽골군은 어느 지형에서건 질병에 대한 내성이 강한 편이었지만 고온다습한 강남의 기후에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남송의 저력은 엄청난 인구와 넘사벽의 경제력에서 나오는 쇼미더머니였다. 끝도 없이 병사와 전쟁물자가 쏟아져 나오고 계속해서요새가 건설되었다. 나중에는 몽골이 대이국(大理国, 현재 운남성 동부에 있던 나라)을 경유해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자, 남송이 이들의 예측경로를 따라 계속 요새를 건설해 나갈 정도였다. 반면 몽골은 1235년 개전 초기부터 중국과 유럽 원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세계 각지에서의 원정과 황족들 사이의 내전으로 국력이 한 곳에 모이지 못했다.

이에 몽골군은 금나라 출신의 한족 투항자들을 내세웠다. 중국 남부에서 자신들의 경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보병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한족의 케리크는 1234년 거란족 장교 휘하 3투멧이 편성되면서 본격적인 주전력으로 발돋움했다. 이어 1235년에는 악명높은 흑군(黑軍)이 창설되었고 1236년과 1241년의 추가 징집으로 바탕으로 약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된다. 본래 케리크 출신의 군인은 진급에 제한이 있었으나 남송과의 작전에 투입된 한족 장교들에게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위로 승진할 기회가 주어졌다. 더불어 수군을 육성하여 적의 수군을 견제하도록 했다.

5.8 셀주크와 시리아

 

아제르바이잔의 무간에 원정 본부를 설치한 몽골군은 바이주 노얀의 지휘 아래, 1242년에 셀주크조 영내에 진입해 에르주룸을 점령하고 약 70,000의 주민을 학살했다. 이로써 몽골군의 셀주크조 침략이 시작되었다. 당시 바바의 반란으로 인한 내분과 동부 전선의 군대가 내란 평정에 동원된 관계로 셀주크조의 저항은 미미했다. 술탄 케이후스라브 2세는 용병을 포함한 50,000에서 80,000에 달하는 군대로 시바스로 향했다. 이때, 몽골군도 약탈을 자행하며 진격해 왔기 때문에 1243년 시바스 동부의 쾨세다으 평원에서 양군이 맞부닥쳤다.


이 전투에서 술탄은 전통적인 척후-유인-매복-기습이라는 전략을 버리고 평원 대결을 시도함으로써,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에 역습을 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술탄 주력 부대가 몽골군 몰래 쾨세다으를 철수하자 몽골군은 본격적인 셀주크 공략에 나서 시바스, 카이세리, 에르진잔 등 중부의 주요 도시를 완전 초토화시키고 무간의 본부로 돌아갔다. 이후 룸 술탄국은 몽골의 봉신국으로 사실상 공중분해되어 몽골이 임명한 꼭두각시 칸만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한편, 1253년(실질적으로는 1256년) 남정에 나선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킴으로써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지막 칼리파를 살해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 모술의 아타벡 바드르 앗 딘 울루와 파르스의 아타벡 아부 바크르의 항복을 받고 저항하는 마이야파라킨을 본보기로 약탈하였다. 그리고 에데사를 거쳐 알레포를 2주만에 함락시킨 후 이에 겁을 먹고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치던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 안 나시르 유수프를 생포했다. 자신만만해진 훌라구는 카이로의 술탄에게 복속을 요구했으나 사천지방에서 전사한 몽케 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향길에 오른다.(하지만 몽골로 돌아가진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훌라구는 투르크족 출신의 부하인 키트부카에게 1 ~ 2 투멧의 병력을 남겨주었다. 키트부카는 시리아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나아가 이집트군과 대치했다. 이집트는 맘루크의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다.

5.9 맘루크

 

몽골군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병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켜 육성한 군대다. 주로 중장기병으로 활약했으며 무기로는 창과 칼, 철퇴를 사용했다. 궁술에도 뛰어나 충격기병 이외에 궁기병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튀르크족 출신이었던 덕에 기마술에 능했고, 유목민족들이 구사하던 초원전술에도 익숙했다.


1260년 6월 양군은 갈릴리 근방의 아인잘루트에서 맞붙었다.[양측의 병력은 각각 2만 내외였다.] 바이바르스는 술탄 쿠투즈와 함께 계곡에 병력을 숨긴 후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 몽골군을 유인하여 개발살냈다. 몽골군은 전멸했으며 지휘관인 키트부카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군이 대포를 사용해 몽골군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전투는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몽골이 여기서부터 더 이상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계가 없을 것만 같던 훌라구의 서정은 시리아에서 막혔다. 몽골군이 패한 싸움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설욕전을 펼쳐 정복사업을 완수해 왔는데  이집트에서는 이를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의 기나긴 싸움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훌라구의 후예들은 일 칸국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으며, 북쪽의 킵차크 칸국과도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승리자가 된 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맘루크를 공격했으나 모두 쳐발렸다.

맘루크들이 악명높은 몽골군을 상대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들의 군사력에 있다. 13세기의 맘루크는 최강의 정예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군이었으며 동방의 몽골군과 서방의 십자군을 모두 격퇴한 바 있다. 몽골군 역시 강한 군대였으나 기본적으로 일반백성들을 무작위로 징발한 징집군이었기 때문에 오직 전투기술만을 갈고 닦아온 맘루크에 비해 전투력면에서는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호라즘의 굴람이나 유럽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맘루크에게는 그들과 달리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병사들도 명령에 따라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 정도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방면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에는 대규모 군단이 상주할만한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다른 군대에 비해 많은 수의 말을 거느렸기 때문에 이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초지가 필요했다. 맘루크는 국경지대의 초지들을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을 들고 나왔고 몽골군의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맘루크는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십자군은 이집트의 이슬람 세력과 적대하고 있었으나 키트부카가 아크레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바람에[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몽골군은 프랑크인들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키트부카의 혈육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키부카가 시돈을 공격하게 된 것. 근데 몽골이 제의한 동맹이라는 게 사실상 복속을 요구한 조건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이슬람인보다 몽골인들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된다. 아인잘루트 전투를 앞두고 쿠투즈의 군대는 아크레 근방에서 야영하며 보급을 받았으나 십자군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1295년 일 칸국의 내전을 끝낸 가잔 칸은 이러한 요소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여러 제도를 개혁하면서 토지와 군제에도 손을 댔다. 부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과거 다수의 말을 유지하며 기동력을 활용하던 경기병 체제에서 말 한 두 필에 의지하며 싸우는 전형적인 아랍세계의 기병처럼 바꾸려고 했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봤는지 1299년에는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재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잔 역시 맘루크에게 패했고 다마스쿠스는 1년만에 다시 이집트군의 손에 떨어졌다. 1302년에는 다시 한 번 몽골-프랑크 동맹을 맺기 위해 교황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씹혔다(...) 결국 1303년에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재개했지만 역시나 또 발렸고 이후로 몽골인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넘보지 못했다.

5.10 베트남
베트남은 몽골과의 전투에서 쩐흥다오의 활약으로 방어에 성공한다. 훗날 미군과 상대할때 사용했던 게릴라전술과 청야전술을 통하여 몽골군을 저지하였고, 또한 풍토병에의해 몽골은 큰 피해를 입어 공격에 실패한다.


5.11 남아시아 유라시아에서 가장 몽골군에대한 위험과 두려움이 없던 끝판왕들.
인도지방도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수도없이 승전하였다.


일전의 징키즈 칸이 인더스 강을 넘어 본격적으로 인도지방을 정벌하려하엿지만 꿈 속에서 시바신의 위협으로 쫄아서 안넘어간것일뿐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 몽골이후의 차가타이 칸 까지 몇십년의 걸쳐서 정벌을 시도햇지만 단 한번도 정복하지못하였다.

기본적으로 델리술탕왕조가 가로막고있던 시절이엇고 각각 연대별로 노예왕조 할지왕조 투글루그왕조(모굴리스탄과는 다르다!)들이 여러차례 국경지대에서 격파했고 끝끝내 몽골은 넘어서지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