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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주역 국군기무사(2)

구름위 2014. 2. 10. 16:20

정치수사와 대공수사가 섞여

서빙고 수사분실의 증축·개축을 지시한 사령관은 나중에 전부 이곳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 보안사가 권력자의 통치기구로 활용되다가 보니 정승화(鄭昇和/방첩부대장 출신) 김재규(金載圭/보안사령관 출신) 윤필용(尹必鏞/방첩부대장 출신)씨 등 3명은 과거의 부하들로부터 혹독한 수사를 받았다. 1972년 10월 유신 때는 강창성(姜昌成) 장군이 지휘하던 육군보안사가 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연행, 가혹한 조사를 했다.

1980년 5·17뒤에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조사를 대공처가 주도하였다. 간첩을 수사하도록 만들어진 보안사 대공처가 그런 정치적 수사에까지 손을 댐으로써 보안사 수사관들의 생리는 인권이나 적법절차를 경시하는 쪽으로 굳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을 정해놓고 두드려 맞추는 수순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수사는 합법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할 수사풍토를 망치기 때문이다. 보안사 사건에서 조작이란 비난이 많이 나오는 것은 일반수사까지도 정치수사 식으로 하는 게 버릇으로 돼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안사는 수사관들을 운용하면서 일반사건 수사와 대공수사를 구별하지도 않고 있다. 1982년에 이(李)·장(張) 어음사기사건이 터지자 전(全)대통령의 지시로 보안사는 이철희(李哲熙)씨의 운전수 등 관련피의자들을 신문하였다. 형사소송법을 무시하고 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의 수사까지 떠맡도록 한 권력층의 보안사 운용방식은 보안사 직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월권적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윤석양(尹錫洋) 이병이 폭로한 민간인 사찰자 1천3백여 명의 명단에 대해서 국방부는 「전시나 비상시에 보호 또는 차단하기 위한 자료」라고 해명했다가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해명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수사기관에서 쓰는 「보호」라는 말은 경찰서 보호실 처럼 감금과 격리를 뜻한다. 이 자료는 간첩용의자나 전과자 자료도 아니고 적어도 수만은 넘을 국가요인 자료도 아닌 반정부적 경향의 인물들에 관한 것이다.

이 자료를 수사부에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구나 도주로까지 그려져 있었다는 것은 이 자료가 유사시의 예비검속대상자 명단이었음을 추리케 한다. 더구나 대공처는 5·16과 5·17때 두 차례 예비 검속을 실천한 경험이 있다. 5·16 뒤 육군 방첩대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조직, 혁신계 인물 및 사상전과자 약3천3백 명을 예비 검속하였다. A, B, C 등급으로 분류하여 A, B등급은 입건 조사한 뒤 각 지구 계엄고등군법회의에 송치하였고 C급은 훈계·방면하였다(「대공 30년사」) 5·17 하루 전에 보안사 대공처는 전국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동시에 검거할 「예비검속자 명단」을 나눠주었었다.

1·19 민간사찰 금지조치

보안사 사람들 사이에서 「1·19조치」로 통하는 게 있다. 1978년 1월19일을 기해 보안사의 대(對) 민간사찰이 금지된 것을 이른다. 이 조치안을 기안한 것은 당시 정보부 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金淇春)씨(현 검찰총장)였다. 1·19조치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전방사단의 한 대대장이 통신병을 데리고 월북한 사건이었다. 현지 보안대가 그 대대장의 사소한 과오를 지나치게 추궁하여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월북의 이유로 밝혀졌다. 朴대통령이 대노하자 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보안사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대민 사찰금지 안을 기안하도록 김기춘(金淇春)국장에게 시킨 것이다. 내무부, 검찰 등 다른 부서에서도 이 조치를 환영하였다.

10·26사건 이후에 실권을 잡은 보안사 대공처 간부들 사이에서는 그때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金씨를 잡아넣자는 얘기가 진지하게 거론되었다. 대공처의 이학봉(李鶴捧) 중령이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으면 金씨가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보안사에서 1·19조치를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민간부문에 대한 사찰이 중단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보안사는 대민사찰 기구인 정보처를 방산처로 개편하여 방위산업체의 보안업무를 맡도록 함으로써 인력을 흡수하였다. 이때 보안사를 퇴직한 요원들 중 10여명은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부리던 사설 정보대(대장 이규광(李圭光))에 취직하였다. 이때 정비된 보안사의 조직과 기능을 국군보안부 대령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대공30년 사」수록).

제3조(하부조직)
①사령부에 제1처, 제2처, 제3처, 제5처, 제6처, 제7처와 비서실, 감찰실, 자료 처리실, 경리실, 본부사령실, 병기근무대 및 통신근무대를 둔다.
②사령부는 그 예하에 군부를 관할하기 위하여 국방부 연락관실, 육군본부 해군본부 및 공군본부 보안부대와 군사령부 보안부대, 군단 보안부대, 관구 보안부대, 사단 보안부대를, 기능별 보안지원을 위하여 통신 보안부대를, 부대원 교육을 위하여 보안교육대를 둔다.
③제1처장 제2처장 및 제3처장은 장관급 장교 또는 영관급 장교로, 기타 처실장 및 부대장과 국방부연락관실장은 영관급 장교로 보한다.

제4조(사무분장) 사령부 구성 조직의 사무분장은 다음과 같다.
1·제1처(보안처)
가·국방부, 국방부직할부대 및 기관과 각급 부대에 대한 인원, 시설, 문서, 통신자재 보안지원 나·군사첩보의 수집처리 다·경호경비 라·보안제도 및 교리연구
2·제2처(방산처) 가·군수업체 및 국방부장관의 조정감독을 받는 기관에 대한 인원, 시설 및 문서보안지원 나·군수업체 관련첩보의 수집처리 다·군수업체 보안제도 및 개선자료의 제공 라·군수업체 및 국방부장관의 조정감독을 받는 기관의 파업, 선동 또는 파괴행위의 예방 및 분쇄
3·제3처(대공처) 가·군 및 군과 관련 있는 간첩 기타 정보사범의 검거처리 나·대 간첩작전 기술지원
4·제5처 가·기획업무 예산편성 및 집행조정규제 나·심사분석 군사감사업무 다·작전 편제 교육 및 정훈업무 라·부대 발전책 연구
5·제6처 가·부대병력 유지 나·인사관리 다·사기앙양 및 유지 라·보건업무 마·군기 및 질서유지 바·인사행정 업무
6·제7처 가·군수보급 운영 재산관리 나·시설계획 및 부동산 관리 다·영선 병기업무 계획감독 라·일반통신운영 지원
7·비서실 가·사령관에 대한 행정적 보좌 나·의전업무
8·감찰실 가·부대자체 보안업무 나·부대예방 감찰 및 조사업무
9·자료 처리실 가·존안자료의 관리유지 나·자료지원 및 회시
10·경리실 가·세출예산의 집행 및 결산업무 나·휘하부대에 대한 자금지원
11·본부사령실 가·사령부 사병의 인사행정 및 군기유지 나·사령부 내의 안보 방공 방화 교육훈련 및 경계 다·사령부 장병에 대한 복지의료 군수 지원 라·사령부 시설관리
12·병기근무대 병기 및 근무지원
13·통신 근무대 유무선통신 근무지원

재일 동포와 납북어부들이 표적

10·26사건 직후 전두환(全斗煥) 합수본부장은 최(崔)대통령에게 건의하여 대통령령으로 된 국군보안부대령을 고쳐 대민 사찰업무를 부활시켰다. 그래서 정보처가 되살아나고 권정달(權正達) 부산지구보안부대장이 처장으로 전보되었다. 이 정보처는 그 뒤 국보위조직·민정당조직·개헌작업·언론인숙청·언론사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정권의 산실이 된 10·26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병력은 4백97명이었다. 보안사가 3백76명, 헌병 79명, 경찰 37명, 검찰 8명, 정보부 6명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보안사에서 근무했던 한 장교출신 인사는 이런 소감을 밝혔다.

『고참수사관들일수록 아주 편견이 많습니다. 반정부와 반국가를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빨갱이로 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보안사가 간첩수사의 주된 공략표적을 재일동포로서 모국에 유학 온 학생들과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어부들에 두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민족적인 비극입니다. 재일동포 학생들은 사상적인 터부가 없는 곳에서 자랐고 그런 환경에서 인간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을 국내인과 같은 기준으로 취급한다면 국가보안법에 안 걸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납북어부들이 북쪽에서 견문하고 온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아 수사를 시작하기도 하는데 작은 약점을 그럴 듯하게 꾸미면 다 간첩단이 되지요, 간첩 잡은 이에게 포상하는 제도도 없애야 합니다. 쓸데없는 경쟁으로 억울한 일들만 생깁니다.』

장기수 가족모임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1백60여명이 회원인데 정말 간첩행위를 한 이는 20% 쯤 될까요? 나머지 80%는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 같아요. 5공화국 때는 보안사에서 조작한 사건이 가장 많은 것 같고, 고문의 정도도 보안사가 가장 심한 것 같습니다. 보안사 간부출신인 한 5공주도 세력인사에게 솔직한 견해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리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공작이 변화하는 데 따라 대응하다가 보니까 재일동포 학생 등을 수사 대상으로 삼게 되었지 처음부터 조작하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입북=간첩」이란 등식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사이에 보안사는 북한의 간첩 남파 예상자 사찰에 총력을 기울였었다. 월북자가 있는 가족, 납북 어부, 6·25때의 국군포로 등이 사찰대상이었다. 이즈음부터 일본을 통한 우회침투가 활발해지자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중점적인 사찰대상이 되었다. 북한이 포섭대상자를 공산주의 활동자와 그 연고자에서 「사상 온건자」로 전환하자 보안사는 그들이 접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5천여 명의 지식인·학생·교수의 신상정보를 분석하여 50여명의 간첩을 색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사는 또 「대공처 공작과를 부활시키고 대일 공작계를 신설, 3백84명의 공작근원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김영작(金榮 作), 김철우(金鐵佑) 등 30여명의 간첩들을 일망타진하였으며 75년부터는 교포유학생을 대상으로 7백37명을 선발하여 공작활동을 전개, 강종헌(康宗憲) 일당 등 20여명의 간첩을 색출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대공 30년 사」)

이 기술에는 의문이 났다. 보안사가 간첩으로 기소한 김영작(金榮作), 김철우(金鐵佑)씨는 재판과정에는 일본 유학 중 일본을 통해 북한에 간 사실은 시인했으나 간첩활동을 한 사실은 부인했다. 이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金榮作씨는 보안사 인맥의 추천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金鐵佑씨는 포항제철 부사장직에 까지 올랐다. 그들이 진짜 간첩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안사의 수사분위기는 「입북=간첩」의 등식이다. 힘없는 피고인들은 이 등식에 따라 장기수가 되고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은 곧 사회로 복귀한 사례가 더러 있다는 얘기다.

**표 <간첩 검거자 비교> 삽입

경쟁심리가 조작의 토양

사건의 규모면에서나 우리 대공 팀의 활동면에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대 사건이었다」(「대공30년사」고 보안사가 「우리 대공팀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대공 활동사에서 찬연히 빛날 공적으로서 자랑하고 있는 것은 「학원침투 서승(徐勝)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총련에 연고자가 있는 K라는 공작원을 보안사가 대북 역 공작에 이용하여 성과를 거둔 사례였다. 보안사는 K를 일본으로 밀항시켜 조총련 공작원의 안내로 북한에 들어가 대남 간첩교육을 받고 오도록 하였다.

이 K와 접촉하려는 고정간첩 강창구(姜昌玖)를 체포했고, 姜을 전향시킨 다음 일본으로 보내 재일동포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오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잡힌 것이 재일동포 유학생 서승(徐勝)·서준식(徐俊植)형제였다. 이 형제는 큰형 서선웅(徐善雄)의 주선으로 북한에 다녀왔었다. 법정에서 두 사람은 입북사실은 인정했으나 간첩사실을 부인하고 수사 중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양심수로 유명해졌다.

간첩수사에서 고문과 조작 등 무리를 빚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사기관끼리의 경쟁의식이다. 경찰이나 안기부가 간첩검거 발표로 대통령의 칭찬을 받으면 보안사령관은 아래로 압력을 넣게 된다. 대공처장 등 간부들은 간첩수사 실적에 따라 승진에 큰 영향을 받게 되므로 실적을 올리는데 열심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가 간첩 체포자에 대한 포상제도가 미끼로 작용한다. 이 포상금은 형이 확정되기 전에 지급된다. 수사관들의 과욕과 강박관념은 무리한 수사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를 견제해주는 것은 안기부와 검찰의 통제, 국회와 언론의 감시이다. 5공 때는 보안사의 힘 때문에 이런 견제는 전무상태였다. 역대 군사정권 관리 층에서는 반정부운동이 강화되면 간첩사건을 적기에 터뜨려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70년∼81년의 5공 출범기, 1984∼86년의 민주화 운동시기에 간첩사건 발표가 많았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간첩이 그렇게 타이밍을 맞춰 잡혀 주지 않는 한 간첩수사의 정치적 의도는 조작의 토양이 된다. 궁여지책으로 이미 잡아놓은 간첩을 그런 정치적 타이밍에 맞추어 발표하는 예도 많았다. 냉전논리 속에서 「간첩은 고문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었다는 것도 보안사의 무리한 수사풍토를 온존시켜 온 중요한 조건이었다.

수사관 입장에서는 간첩이 아닌 사람도 일단 간첩으로 몰아놓으면 무리를 할 수 있었고, 언론이나 야당의원들까지도 간첩 혐의자가 받았다는 고문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문제는 수사와 재판을 해 봐야 간첩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간첩을 고문하는 게 아니라 (간첩으로 확실하면 고문할 필요가 없다) 간첩 비슷한 사람을 고문하게 되는 것이다.

나종인(羅鍾寅)씨 사건의 의문

보안사는 1981년쯤에 체포한 남파 간첩으로부터 「나경애라는 여자 간첩이 고향에 다녀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나경애라는 이름만 갖고 전국의 호적을 뒤졌으나 그럴 듯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경혜」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해서 그쪽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781번지 나석균씨(사망)의 장녀가 나경혜(1932년 생)였다. 나경혜는 6·25 전에 월북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공처 수사관들은 근 4년간 이 가족들을 미행하다가 별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사건을 깨기로 했다. 「깬다」는 것은 혐의자들을 일단 연행하여 조사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나경혜 씨의 동생 나종인(羅鍾寅)씨(52) 서울에서 삼화엔지니어링 이라는 단단한 전자 자동제어기 수입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84년 10월 5일에 영장 없이 연행돼 약 70일간 서울시 송파 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羅씨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다니던 1960년, 그리고 제대 뒤인 1965년에 남파된 누나를 따라 북한에 갔다가 왔으나 간첩 활동을 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번의 월북은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대상이 되지 않았다. 나종인(羅鍾寅)씨는 보안사가 자신을 계속범으로 만들기 위해, 羅씨가 업무 차 일본을 드나든 것을, 일본에 있는 임갑순이란 북한공작원에게 첩보를 제공하기 위해 잠입한 것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안사는 영장 없이 구금했던 羅씨를 84년 12월말에 일단 귀가시켰다. 보안사는 羅씨에게 20년 전 월북했을 때 안내한 사람을 찾으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넉 달간 羅씨는 「공포에 질려 정신나간 사람처럼 돼」기억을 더듬으면서 서울근교를 헤매고 다녔으나 성과가 없었다. 보안사는 1985년 4월초 羅씨를 구속, 간첩죄로 기소했다. 羅씨는 검사 앞에서, 또 1심 판사 앞에서는 자백했다가 징역15년이 선고되자 2심에서는 검사와 보안사에 속았다면서 범죄혐의사실을 부인했으나 상고가 기각되었다.

그는 지금 5년째 대구교도소에서 살고 있다. 상고심 변호인 이범열(李範烈)씨는 『일본에 산다는 임갑순을 붙들지 못한 상태에서, 또 임이 북한공작원이란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법원이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李변호사는 또 『영장 없이 구금조사를 받고 귀가한 피고인의 몸무게가 13kg이나 줄어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작성된 조서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李변호사는 평소에 『간첩사건재판에서 7년 선고가 나면 나는 사실상 무죄선고로 본다. 판사가 수사기관이 겁이 나 무죄인 줄 알면서도 양형을 낮추는 정도밖에 못하기 때문이다』고 말하곤 하는 이다. 한 판사출신 변호사는 『우리 판사들 중에는 「이북 갔다오면 빨갱이다」는 단순한 논리를 갖고 안이한 판결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식의 반공주의로서 자신의 오판을 자위하는 것이다』고 했다. 한 현직판사는 『간첩사건 재판에서는 자백이 원칙을 무시하고 수사기관에서의 자백만 갖고 ㅇ죄선고를 하는 관행이 있어 왔다』고 시인했다. 수사기관에서의 그 자백이 장기불법구금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오판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여섯 달 뒤 검거 발표

그런데 재미있는 자료가 하나 발견되었다. 보안사 대공처에서 간첩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공소보류로 풀려난 뒤 2년간 보안사에 수사관으로 채용돼 일했던 재일동포 김병진(金丙鎭)씨가 일본으로 돌아가 쓴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5계 수사관들에 따르면 羅씨는 『지독한 놈』이었다. 한겨울 알몸으로 밖에 내놓고 얼어붙게 해도 자백을 안 했다고 한다. 고추물을 먹여도 안되고 전기에 달아보아도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일단 羅씨를 석방했다. 羅씨는 어느 회사와의 거래전화를 일본어로 했는데 그 감청 테이프를 내가 번역했다. 상거래 이야기 말고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羅씨는 다시 연행되었다. 5계는 羅씨를 「계속범」이라고 조서를 꾸며 송치하였다」

이런 우연의 일치로 봐 羅씨가 불법감금과 고문을 당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그러나 재심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고문한 이들이 먼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 羅씨의 부인 김유자(金有子)씨는 『그 뒤 회사는 망하고 저는 심장과 간에 병을 얻었다』면서 『남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을 보안사 직원들이 협박하여 재판정에 못 나오게 했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남편이 일시 풀려난 뒤 공포에 떨던 때가 가장 괴로웠다. 다시 끌려갈 때 자꾸만 뒤돌아보던 남편의 모습이 선하다』면서 『수십 명의 친척들이 조사 받았는데 시누이와 시동생이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보안사가 羅씨 검거를 언론에 발표한 것은 85년 11월1일이었다. 그는 그해 5월에 이미 기소되었는데도 여섯 달을 묵힌 것이다. 보안사는 발표문에서 북괴는 고향방문단 교류 등 남북대화에 응하면서도 대공경각심을 해이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보안사령관은 이번에 국방장관이 된 이종구(李鍾九)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