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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국군기무사(1)

구름위 2014. 2. 10.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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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聖域)이 된 최강의 권력기관

국군보안사령부는 해방 후 한국의 현대사에서 최강의 권력기관으로서 때로는 국민 위에, 때로는 정당 위에, 때로는 군부 위에 군림하여 왔다. 특무대-방첩대-보안사로 그 이름은 바뀌어져 왔지만 1개 사단 규모도 안 되는 이 부대는 두 명의 대통령, 세 명의 정보부장, 두 명의 육군참모총장 두 명의 여당대표, 두 명의 여당사무총장을 배출하였다. 2대에 걸친 군사정권 지배층의 가장 큰 인력공급원이 보안사였다. 보안사는 정권을 만들고 안기부는 그 정권을 조종하였다.

보안사의 첫째 존립목적은 군부의 쿠데타 방지라고 한다. 그러나 12·12사태 때 보안사는 쿠데타를 스스로 주도하였다. 보안사의 두 번째 임무는 방첩이다. 보안사는 수많은 북한간첩들을 체포함으로써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여순 반란사건 직후의 숙군 수사 때부터 간첩조작의 산실이라는 비난도 꾸준히 받아왔다.

어떤 법에도 쓰여져 있지 않지만 보안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치사찰이었다. 「정국안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글이 보안사의 역사책「대공30년사」에도 나올 정도로 보안사는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정치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정보부는 공화당을, 보안사는 민정당을 만들었다. 결국 보안사는 존립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임무를 수행하여 왔다.

최근에 터진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은 관행화 된 월권적 임무수행 방식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회는 빠른 속도로 선진화·민주화 돼 가는데 보안사는 아직도 수구적 생리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실槿構?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월권적 목적달성에는 필연적으로 탈법적인 수단이 따르게 된다. 고문·도청프락치….

이런 수단이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성역화 된 군부대 내의 밀실에서 이뤄져 옴으로써 이 조직의 체질로 굳어져 버렸다. 이번 폭로사건을, 그런 생리를 바꾸는 계기로 활용만 한다면 보안사는 민주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군 정보기관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보안사는 한 번도 제대로 정화돼 본적이 없는 유일한 정부기관이다.

1980년 공직자 숙정 때 정보부에선 약3백 명이 쫓겨나고 세무서장·경찰서장의 약3분의 1이 정화되었지만 보안사는 무풍지대였다. 국보위백서는 5천4백여 명의 숙정자 중 약29%인 1천5백여 명이 사정기관 공직자였다고 자랑하였지만 보안사를 숙정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정의의 기준은 무너졌고 다른 사정기관에 대한 보안사의 우월 의식과 성역의식만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오직 한 사람의 눈치만 봐

보안사가 해방 후 최강의 권력기관일 수 있었던 것은 독재자가 정권안보를 위한 감시기관으로 이 조직을 사물화해 온 데다가 군이라는 최강의 물리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독재자)로부터의 권력과 밑(군)으로부터의 물리력을 아울러 갖추었기 때문에 보안사는 정보부 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가진 기관이 되었다. 정보부가 천장에 매달린 잘 익은 사과라면 보안사는 끈질긴 잡초였다.

10·26사건으로 정보부를 뒷받침하던 독재자의 권위가 사라지자 보안사는 간단하게 정보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10·26사건-12·12사태-5·17-광주사태로 이어지는 격동기에서 수많은 사건을 기획하고 해결하며 수습해갔다. 보안사의 추진력은 목표가 주어지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 이 부대 특유의 분위기에서 나오고 있다.

해내고 만들어 내는 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이 부대는 수사권과 정보수집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에는 「수사권을 가지면 정보수집이 쉽다」는 안이한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 바탕에는 정보를 위협으로 수집하고 수사를 정보수집의 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약점을 이용한 정보수집에 익숙해지면 정보기관의 수집력과 판단력은 절대로 향상되지 않는다. 정보와 수사를 함께 하면 권력기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정보·수사를 겸한 소련의 KGB 와 정보만 맡은 CIA의 차이가 그것이다.

이종구(李鍾九)국방장관은 『일개 이등병이 나라를 뒤흔드는 사태를 개탄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은 보안사의 한심한 정보관리였다. 권력에 한 눈이 팔려 있는 사이에 이 부대의 존립근거가 한구석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사는 정보·수사 뿐 아니라 육·해·공군의 수사·정보채널을 통합함으로써 구조적으로 견제를 받지 않는 기관이 돼버렸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보안사령관은 직속 상관인 국방부장관을 따돌리고 대통령에게만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시만 받아왔다. 5공화국에 들어서는 법적으로 보장된 안기부의 보안사 감사도 유명무실해짐으로써, 그리고 국회와 언론도 보안사를 성역으로 방치함으로써 보안사는 여전히 한 사람-대통령에게만 충성을 바치면 되는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의 눈치만 보면 되는 조직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기 마련이다. 보안사의 42년 역사를 관통하는 이 조직의 행동규범은 정의도, 법률도 아닌 오로지 권력이었다. 「법이 이성보다 강하고, 권력은 법보다 세며, 하늘은 권력보다 강하다」(非理法權天)는 말 그대로 보안사는 이번 사건으로 권력 위에 있는 하늘, 즉 민심(민중의 힘)의 무서움을 깨닫게 도리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보안사의 독특한 생리는 그 탄생과정에서부터 이미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친일헌병·경찰의 온상

보안사의 역사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이해 5월27일 육군정보국 내에 특별조사과(제3과)가 창설되었다. 한국에 있던 미군의 제971 CIC파견대는 각 연대 정보과에 근무하던 장교 및 간부 33명을 불러 올려 방첩관계 교육을 시킨 다음 특별조사과를 방첩대(SIS)로 개칭, 여기에 배속시켰다. 초대 방첩대장은 박정희(朴正熙)소령과 동기생(육사2기)이던 김안일(金安一)대위였다. 여순 반란사건 직후 방첩대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가면서 국군내부에 침투한 남로당조직의 색출작업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방첩대는 네 차례의 숙군 작업을 통해서 1천3백여 명의 군 내 좌익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 숙군 작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이가 김창용(金昌龍) 당시 1연대 정보주임(뒤에 특무과장·특무부대장)과 친일헌병 경찰출신이었다.) 이들의 무리한 수사로 억울한 희생자가 많았음을 「육군전사」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방첩대가 창설 초기에 벌써 독립운동가들을 괴롭히던 친일경찰·헌병출신들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은 그 뒤 이 부대의 성격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김안일(金安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숙군 작업으로 전문 수사요원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어 경찰관들을 특채하게 되었다. 수도청 사찰과 형사들과 일제헌병 출신들이 수십 명 들어왔다. 경찰 출신들은 주로 일제시대부터의 경험자였다. 노엽(조선군 헌병출신), 이진용(일제 경찰관 출신), 도진희(일제 경찰 출신), 장보형(조선군 헌병 출신), 장복성(일제 경찰출신)같은 이들이 이때 방첩대로 들어왔다』

노엽씨는 해방 때는 조선군사령부 원산헌병대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의 계급은 특무조장(지금의 준위). 한국인으로는 헌병대에서 가장 높게 오른 사람이었다. 85세로 지금 여의도에서 살고 있는 그는 원산에서는 주로 대소(對蘇) 방첩업무에 종사했고 독립운동가의 탄압은 본 임무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육군정보국 방첩대는 6·25전쟁이 나자 그해 10월 21일 육군 특무부대(CIC)로 독립하였다. 초대 부대장은 김형일(金炯一)대령이었고, 김창용(金昌龍)은 경인지구 CIC대장으로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였다가 특무부대장으로 승진했다.

용공조작의 기술자 김창용(金昌龍)

김창용(金昌龍)은 1916년 7월에 함남 영흥에서 났다. 1937년에 그는 북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대의 군속이 되었다. 사환의 일을 보면서 온갖 궂은 일을 성실하게 하여 3년 뒤엔 관동군 헌병보조원이 되었다. 그 뒤 헌병하사관이 된 그는 주로 항일중국인 조직을 파괴하는 정보수집 업무에 종사, 많은 실적을 남긴 듯하다. 해방 뒤 그는 북한에서 전범취급을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다고 한다.

김창용(金昌龍)은 숙군 수사, 그리고 6·25 전쟁 중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직통채널을 확보했다. 이것이 그가 발호 할 수 있게 만든 힘의 원천이 되었다. 김안일(金安一)씨는 김창용(金昌龍)을 이렇게 평했다. 『반공의식이 투철했고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두 가지 단점이 있다. 공 앞에서는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을 용공으로 모는 버릇이 있었다』

용공조작의 원조가 된 김창용(金昌龍)은 그 조작의 기술자로서 친일경찰·헌병출신들의 도움을 받았다. 친일경찰과 헌병 출신들은 해방 뒤 늘 불안했다. 권력의 향방에 대한 취각이 예민한 그들은 권력자의 신임만이 생존의 지름길이란 사실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신임을 받으려면 기술자로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없는 사건도 만들고, 무고한 사람도 공산당으로 몰아야 했으며 그러 자니 고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창용(金昌龍) 특무부대장의 측근에서 그의 머리와 손발이 되어준 이들(영관급·지구대장급·처장급·고급 문관급)은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잇는데, 관동군·만주군 헌병 출신자, 조선군헌병 출신자, 그리고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들이었다. 그는 관동군 헌병학교 동기생들을 많이 썼다. 이상무(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김인측, 김광진, 최기원, 박노승, 이영호, 곽홍진 같은 장교들이 그의 동기생으로서 관동군 및 만군에서 헌병으로 있었던 이들이다.

관동군 헌병의 선배로서는 최일엽, 공병술, 공병익, 이옥봉, 이대섭 등을 측근에서 부하로 부렸다. 일제 경찰 출신으로는 도진희, 고영섭(청진서 고등계 출신), 장복성, 조병진(고등계 출신), 최석범(만주국 경찰), 계종운(고등계 출신), 최창화 등을 중용했다. 조선군 헌병 출신으로는 노엽, 염희춘, 허태영, 장보형 등이 있었다. 특무대에서 특히 부정적 기능을 많이 한 것은 취조를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 출신자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특무대에서 일했던 金모 당시 수사관은 『고등계 출신자들은 조작이나 고문에 대해선 양심이 마비된 것 같았다. 고문을 통해서 피의자와 한판 승부를 하여 자백이란 걸 받아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이 김창용(金昌龍)의 용공조작 실상은 1956년 1월31일 그가 암살 당함으로써 백일하에 드러났다. 두 부하를 시켜 金을 죽인 이는 허태영(許泰榮) 대령이었다. 조선군 헌병 출신이긴 했지만 허태영(許泰榮)은 김창용(金昌龍)과 같은 질의 인간은 아니었고, 정의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정보부로 넘어간 친일파

허(許)대령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강문봉(姜文奉) 중장은 군법회의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내가 일선 지휘관이었을 때 나의 부대에 파견된 특무대원은 소련의 케페우처럼 행동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이상훈(李相薰) 전 국방장관이 퇴임하면서 『장관이 보안사를 장악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다.

독재자의 사물처럼 돼버린 보안사는 한 번도 군의 지휘계통 하에 놓여본 적이 없다. 1971년 8월에 육군보안사령관이 된 강창성(姜昌成)소장은, 전임자인 김재규(金載圭)가 업무를 인계하면서 『매일 청와대에 서류보고를 올리되, 중요사항은 의전비서관을 통해서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 육군총장과 국방장관에게는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고할 것』이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姜사령관에게 『정보보고는 총리를 거치지 말 것』을 직접 지시하더란 것이다. 5·16 뒤 중앙정보부가 발족하자 특무대 출신들이 많이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고문과 조작의 기술도 건너갔다.

예컨대 특무대 취조관 고영섭(高永燮)씨는 일제 때 함흥·신의주에서 고등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사냥했던 이였다. 그는 조봉암(曺奉岩) 사건수사에도 참여했다. 曺奉岩에게 북한 공작금을 대준 사람으로 지목돼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양명산(梁明山)은 재판정에서 高고문관으로부터 당한 고문을 생생하게 진술했었다. 高육문관은 정보부로 넘어가 신문관으로 일하다가 몇 년 전 죽었다. 육군 특무대는 4·19직후인 60년 7월20일 육군방첩부대로, 1968년 9월23일에는 육군보안사령부(해·공군은 보안부대)로, 1977년 10월 7일에는 각 군 보안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로 변천해 왔다. 이름은 바뀌어도 초기의 생리는 전통으로 굳어졌다.

「대공 30년사」 2백31면에는 「양이섭(梁利涉)은…상해 임시정부산하에서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던 자로서…」라는 표현이 있다. 독립운동을 범죄활동처럼 설명한 이런 표현은 보안사 인맥의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반공이 민족이나 민주보다 우선하는 가치체계가 돼 온 조직 속에서 일제 헌병·경찰출신자들은 그 기술로 해서 존경을 받으면서 최근까지 건재하였다. 이들에게는 독립운동가와 반정부활동가는 다 같이 골치 아픈 존재란 점에서 구별이 되지 않았다. 특무부대 시절 이 부대의 용공조작에 단골로 걸려들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었다.

쿠데타 예방기관의 쿠데타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은 『쿠데타를 막아야 할 보안사가 정보채널을 독점한 채 역적모의를 하고 있었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2·12사태는 지금도 그대로인 보안사의 잠재적 위험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것은 군부를 독점적으로 감시하는 기구가 쿠데타의 주체가 될 때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10·26사건 뒤 전두환(全斗煥)의 보안사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변신, 정보부·경찰·검찰·헌병을 장악하고 대 민간 사찰 활동을 부활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수사권뿐 아니라 정보망까지 독점해 버렸던 것이다.

12·12사태 그날 밤 보안사는 전군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각 지구 보안부대를 활용하여 육군본부라는 적법한 지휘계통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독재자에 의해 2원화 되었던 군의 지휘체제는 이날 그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전두환(全斗煥)은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정치적 사생아였다.

이날 보안사에 앉아서 쿠데타작업을 지휘했던 것은 쿠데타를 막는 전담 부서인 보안처장 정도영(鄭棹永)준장이었다. 이날 밤 간첩을 잡는 게 고유 임무인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들은 鄭총장의 측근들에게 선제사격을 한 뒤 그를 납치해 와 물 고문 시키는 일을 했다. 이런 공을 세운 수사관들은 지금도 보안사에 근무중이다. 이들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는 일종의 건국공로자로 초청을 받아갔다.

명예를 생명으로 삼고 있는 군인 사회에서 부하가 현역총장을 물 고문한 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할 것이다. 이것은 보안사의 생리가 돼 온 권력지상주의가 진정한 군사문화까지도 오염시킨 경우이다. 정승화(鄭昇和)씨는 회고록에서「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자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고 썼다.

일단 명령만 떨어지면 인륜을 무시한 행동까지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보안사의 생리다. 끝가지 육본의 적법한 명령에 충성하다가 부하의 총격을 받았던 정병주(鄭柄宙)특전사령관은 강제 예편 당한 뒤 자택에서 보안사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에 살던 張장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역모를 했다고 오해하여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었다. 그 2년 뒤에는 서울대학생이던 아들이 그의 할아버지 묘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비극을 겪었다. 張씨에 따르면 보안사요원들은 좁은 집에 들어와 같이 기거하다시피 하면서 부부간의 대화까지 캐묻더라는 것이다.

지휘권 2원화로 군기 문란

보안처장은 장교들에게는 보안사령관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으로 통한다. 장교들의 동향에 대한 신상기록을 관리함으로써 승진·전보 등 인사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보안처는 누구를 장성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장성이 되지 못하게 할 힘은 갖고 있다. 전국 보안부대도 보안처가 관할하고 있다. 군단, 관구별로 설치된 지구 보안부대장은 대령 급이다. 최근에 기자가 어느 군단장을 인터뷰하러 갔더니 군단 보안부대장이 배석하였다. 군단장들은 중요회의뿐 아니라 사적인 모임 때도 아예 보안부대장을 합석시킨다.

이재전(李在田) 전 대통령 경호실 차장(중장예편)은 『나는 한 번도 보안부대장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영관급 보안부대장들이 장성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 자체가 군기를 흐트려 놓는 짓이다. 부하들이 군단장에게 건의할 일이 있어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12·12사태 직후 신 군부는 군부 내의 풍토쇄신 6개항 중 하나로서 보안부대의 월권금지를 결의했으나 5·17이후에는 지켜지지 않더라고 한다. 보안부대장의 인사권이 그 부대의 지휘관 손에 있지 않다고 해서 대령이 중장과 맞먹는 행동을 함으로써 단일화돼야 할 군 지휘계통을 어지럽혀 온 결과는 12·12사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국가의 군대를 제외하고는 선진국의 문민통치하 군대 치고 지휘계통이 우리나라 처럼 통째로 2원화 된 나라는 없다고 한다. 보안사 역사상 쿠데타 음모를 적발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1965년 5월 박인도(朴麟道/2군단 포병사령관)·원충연(元忠淵) 대령(정훈학교 부교장)이 반 박정희(朴正熙)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당시 육군 방첩대(부대장 윤필용(尹必鏞))에 검거된 것이다. 육군방첩대 출신인 李모 중령이 朴대령의 지원요청을 받고 방첩대에 제보했던 것이다.

1973년 강창성(姜昌成) 육군보안사령관은 朴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윤필용(尹必鏞)수경사령관과 그 계열의 장교들을 독직혐의로 구속하였다. 이 수사는 정규육사출신들의 사조직인 하나회 수사로 확대돼 많은 장교들이 옷을 벗거나 좌천되었다. 그러나 하나회의 지휘부인 전두환(全斗煥)씨 등은 수사에 협조적이었고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이 감싸주어 온전할 수 있었다.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그 뒤 다시 수도권 부대로 돌아와 12·12사태 때 결정적 역할을 했다.

朴대통령은 보안사로 하여금 수경사와 정보부를 견제·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보안사와 수경사의 패권다툼은 1212사태와 윤필용(尹必鏞) 사건으로 결판이 났다. 尹必鏞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한 김재규(金載圭)의 보안사 직원들을 내쫓을 정도였고, 12·12사태 직전에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은 보안사에 위협적인 존재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