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2월 12일 서안의 중국인들
1936년 12월 12일 서안의 중국인들
1979년 12월 12일 한국에서 일어난 하극상 사건, 즉 신군부의 정승화 계엄 사령관 체포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 서울의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때 부상하기 시작한 대머리는 그 후 8년 동안 대한민국을 그 손에 쥐었고 대한민국은 그의 치세 하에서 불의 터널같은 80년대를 통과해야 했다. 1936년 12월 12일 중국에서도 하극상은 있었다. 그러나 이 하극상은 일본 앞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하던 중국이라는 거인을 무릎 털고 일어서게 만들었다. 바로 서안 사변이다.
동북군, 즉 만주 지역 군벌이었던 장학량은 만주 사변 이후 본거지를 빼앗기고 본토로 들어왔다. 30만 여명의 병력을 거느린, 중국 군벌 내에서도 손꼽히는 군벌이었던 동북군의 수장 장학량은 중국 통일 전쟁 와중에 장개석의 편을 들었고, 동북군 깃발을 버리고 청천백일기 (중화민국기) 휘하의 군대로 편입된다. 장개석은 1931년 만주 사변 때 일본 관동군이 만주로 쳐들어오자 장학량에게 저항하지 말고 중국 본토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만약 동북군이 필사적으로 맞섰다면 일본군은 그렇게 수이 만주를 장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북군은 30만, 일본군은 그래 봐야 10만이 넘지 않았다.
장개석의 생각은 만주를 지키려 그 병력을 잃느니 본토로 끌어들여 공산당 소탕을 완료한 후 만주를 수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安內攘外”다. 장학량 이하 수십만 관동군은 “타향살이 몇 해던가 목놓아 불러 보니~~~”를 부르던 조선인들처럼 중국 대륙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자신들이 무찌르고 싶은 적 아닌 공산군과 전투를 치러야 했고 그로 인한 불만은 하늘에 닿았다. 서북군벌 양호성과 함께 짝을 이루어 공산군과 맞서던 장학량은 곧 양호성과 의기투합한다. “총통! 일본군과 먼저 싸운 후에 공산군을 토벌합시다.” 장개석은 듣지 않았고 여러 차례 토벌을 서두르라 독촉하다가 마음이 급했던지 서안까지 날아와서 두 군벌의 등을 떠밀게 된다.
장개석이 서안에 도착한 후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헌병대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몇 명이 죽어나갈 만큼 분위기는 험악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계속 “Go!"를 불렀고 그의 비밀경찰 남의사는 동북군 수뇌부 제거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장학량이 이른바 병간(兵諫) 즉 무력을 동원한 ‘설득’을 단행하니 이것이 서안사변이다. 장학량과 양호성의 군대는 일단 서안 시내의 경찰 책임자와 지방관을 체포했고 서안에 와 있던 남경 정부 휘하의 공군을 무력화한 후 장개석 체포에 나선다. 잠옷 바람으로 도망가 산의 바위틈에 숨어 있던 장개석은 장학량 휘하의 장교에게 체포된다.
여기까지는 익히 아는 서안사변이지만 나는 이 사건의 전후로 보여주는 ‘중국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단 장개석은 체통없이 잠옷 바람으로 도망갔다가 체포됐지만 장개석은 다리를 다쳐 동북군 장교에게 업혀 내려오면서도 뜻을 꺾지 않았다. 동북군 대다수는 장개석, 원수를 앞에 두고 동족을 못죽여 안달하던 이 인간을 인민재판에 붙이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장학량은 여기에 반대한다. “총통의 체면을 살려 남경으로 돌어가야 항일대오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 장개석을 죽여없애고 싶은 사람들은 수십만이었고 장학량 자신 장개석을 살려 두었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장학량은 버틴다.
옛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던 서안은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의 중심이 됐다. 연안에서 주은래가 날아왔고 남경에서는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 득달같이 날아갔다. 스탈린은 장개석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 내리고 있었고 중국의 대적 일본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우여곡절 끝에 8개항의 합의가 도출되지만 장개석은 이를 문서화하는 데 거부한다. “약속은 지킨다. 내 인격을 믿어라.” 인격을 걸고 하는 약속이지만 문서화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 묘한 중국인. 그런데 이 기묘한 약속을 다른 중국인들이 수용한다.
그런데 장개석이 석방돼 난징으로 돌아갈 때 장학량은 극구 그와 동반하겠다고 우겨 함께 돌아간다. 주은래는 서안 공항에서 장학량을 배웅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돌아온 뒤 장(蔣)과 장(張)의 대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사람 같지는 않다. “제가 총통 각하와 함께 온 것은 제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래야 각하가 군율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장개석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 아랫 사람을 다스리지 못한 부덕의 소치로 전례 없는 반란이 일어났다. 귀관이 회개의 뜻을 밝힌 만큼 당국에 원상회복을 위한 대책을 요구하겠다.” 죽인다는 얘긴지 살린다는 얘긴지.... 장학량은 금고형을 선고받지만 다음날 사면된다. 그러나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고 장개석은 그를 패퇴할 때 대만까지 데리고 간다.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이 소련에 있을 무렵에는 장개석은 장학량을 후계자로까지 여겼다고 하며 그 배신감의 발로일까 장개석은 살아생전 장학량을 풀어주지 않는다. 한때 자신을 위협하는 라이벌이었기 때문일까 그 아들 장경국도 그냥 가둬만 둔다. 장학량이 풀려난 것은 그 부자가 죽은 다음이었다. 죽이려면 죽여 벼리지 수십 년 동안 피난가면 데리고 다니면서 가둬둔 기묘한 처신. 이 서안 사변을 둘러싼 중국인들의 행보를 보면 참 중국이라는 나라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숨 걸고 싸우던 적에게 “내 인격을 믿어라”고 우겨대고 그걸 수용해 문서 한 장 없이 보내고 군대를 동원해서 최고 지도자를 체포한 뒤엔 무릎 꿇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빌었다가 처벌을 굳이 받겠다며 자신의 세력을 떠나 험지로 가고 그를 죽이지도 않고 놔주지도 않고 수십 년 그저 가둬 두고만 있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고 경우에 따라 다른 것도 중국인이다. 장학량은 그렇게 살았지만 장학량과 함께 서안사변을 일으켰던 양호성은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기 직전, 장개석의 지령에 의해 일가족이 장개석의 자객에게 몰살당한다. 10살도 안될 딸과 아내까지 모조리 그 뿌리마저 뽑아 버렸던 것이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뭔가 모르다가도 알 것 같은 중국. 그 한 단면이 서안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