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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식민지 전쟁 -1

구름위 2013. 12. 18. 09:26

북미 식민지 전쟁 - 1689년 ~ 1763년 

 

 

 

윌리엄 왕 전쟁

 

 

1685년에 프팔츠 선제후 카를 2세의 사망과 더불어, 상속을 둘러싸고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주장한 상속권 계승에 대항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했다. 네덜란드 총독이던 빌럼 3세가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잉글랜드 왕국도 후에 이 동맹에 참가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누벨 프랑스와 1686년에 뉴 잉글랜드 자치령으로 구분된 영국인 식민지 북부와의 사이에 긴장이 높아갔다.

뉴 잉글랜드와 일로코이 연방은 누벨 프랑스와 아베나키 동맹을 상대로 싸웠다. 일로코이 인디언족은 경제면에서 중요한

모피무역을 지배하고 있어 1680년부터 프랑스와 적대관계였다.

 

잉글랜드의 강한 권유도 있어 일로코이족은 누벨 프랑스와 서쪽의 부족과의 교역을 중단시켰다. 누벨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뉴욕 서부의 세네카족을 습격했다. 이에 뉴 잉글랜드는 일로코이족을 지원하여 누벨 프랑스의 라시느를 습격하게 했다.

뉴 잉글랜드와 아카디아 사이에서도 경계를 둘러싸고 같은 긴장이 높아졌다.

 

누벨 프랑스는 이 경계를 메인의 남쪽에 있던 케네벡 강에 있다고 정했다. 메사추세츠(당시 메인도 포함)의 잉글랜드 식민자들이

아카디아에 식민지를 확장하자 누벨 프랑스는 스스로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를 메인의 가장 큰 3개의 집락에 세웠다.

첫째는 케네벡 강 유역, 둘째는 페노부스콧 강 유역, 그리고 마지막은 세인트 존 강 유역이었다.

 

아카디아의 5개 인디언 부족은 필립 왕 전쟁을 통해 아베나키 동맹을 만들고 뉴 잉글랜드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와 군사면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다. 대동맹 전쟁이 발발한 1689년, 페노부스콧 족을 선두로 한 아베나키 동맹은 잉글랜드 식민지로의 공격을

개시하여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6월에 수 백명의 아베나키족과 페나코크족이 칸카마거스와 메산두윗을 거느리고 뉴 햄프셔 주의 도버를 공격해 주민 약 20명을

살해하고 29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 29명은 노예로 팔렸다. 사코에서도 4명이 죽었는데 이들의 습격에 대응하여 24명의 중대가

소집되어 유해수거 및 인디언들의 추적에 나서게 했지만 인디언들과의 싸움으로 4분이 1이 전사하고 말았다.

 

1689년 8월에 장 번샘 더버티 생 카스텐과 루이 피에르 뒬리 신부가 아베나키의 전투집단을 거느리고 페마킷트(현재의 메인 주 브리스틀)

를 공격하여 요새를 파괴했다. 잉글랜드에 있어서 페마킷트의 함락은 큰 아픔이어서 아카디아와 뉴 잉글랜드의 경계선은 메인의

칸조(팔머스)까지 후퇴했다.

 

뉴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벤자민 처치에게 아카디아를 공격하게 했다. 윌리엄 왕 전쟁의 사이, 처치는 4개의 뉴 잉글랜드

습격대를 거느리고 아카디아인과 아베나키 동맹과 싸웠기 때문에 메인을 포함해 아카디아의 원정을 반복했다. 1689년 9월 21일에

첫 아카디아 원정에서 처치와 250명의 군세는 팔머스에서 붙잡혀 있던 잉글랜드 식민자들을 적의 손에서 구했다.

 

아베나키 동맹족의 반격에 의해 처치군은 21명이 전사했지만 처치의 방어는 효과를 거두어 인디언들을 물리쳤다. 그 후 처치는

무방비의 잉글랜드 식민자를 남겨두고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에 카스텐이 이끄는 400명의 프랑스, 인디언의 부대가

서몬폴즈(현재의 메인 주 버윅)를 파괴한 후 팔머스로 돌아갔는데 로얄 요새의 전투에서 팔머스의 모든 잉글랜드 식민자들을

학살했다.

 

그 후 처치는 여름이 되자 팔머스의 마을로 돌아가 시체를 수습했다. 로얄 요새의 함락으로 인해 메인의 인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보복하는 일이 사라져 뉴 햄프셔의 경계를 공격하게 되었다. 윌리엄 핍스 경이 지휘를 맡은 뉴 잉글랜드군은 보복으로

아카디아의 수도였던 포트 로열을 공격했다. 이것이 1690ㄴ녀에 시작된 포트 로열 전투였다.

 

핍스는 7척으로 구성된 잉글랜드 함대에 736명의 뉴 잉글랜드 병사를 태웠다. 아카디아의 총독인 드 메네발은 이틀간의 전투 후

조건부 항복을 했다. 이로 인해 주둔대는 교회에 감금되고 메네발 자신도 자택에 유폐되었다. 뉴 잉글랜드군은 포트 로열의 요새를

파괴한 후 포트 로열의 주민들을 교회에 가둬놓고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충성선언을 하게 했다.

 

핍스는 물러갔지만 6월에 뉴욕에서 다시 잉글랜드 군함이 출격해 마을을 잔혹하게 파괴하고 수병들은 방화, 약탈을 일삼았다.

뉴 잉글랜드군이 다시 물러가자 당시 아카디아의 총독인 조셉 로빈느 드 뷰퐁은 수도를 보다 안전한 내륙의 나슈워크 요새로 옮겼다.

이곳은 1699년에 포트 로열이 수도로서 복구되기 전까지 아카디아의 중심지였다.

 

1690년 9월 11일, 처치는 두 번째의 아카디아 원정을 위해 3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카스코 만에 도착했다. 그의 임무는

아베나키 동맹에게 점령당한 뉴 잉글랜드의 페제푸스콧 요새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처치는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인디언의

부락을 공격해 쫓아냈다.

 

처치와 뉴 잉글랜드 병사들은 7명의 인디언을 죽이고 9명을 끌고갔다. 며칠 후 아베나키 동맹의 부족이 보복으로서 처치군을

습격해 7명의 병사를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월리엄 왕 전쟁 중, 포스트 로드 연안에 있던 80채의 식민자 가옥과 통나무집이

늘어서 있던 웰즈 마을이 1691년 6월 9일에 습격당했다.

 

습격한 자는 족장인 모크사스가 지휘하던 200명의 인디언들이었다. 민병대 대위였던 제임스 콘버스와 병사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요새 안에 있던 조셉 스트앨러 중위의 주둔대를 수비했다. 다른 족장이던 마드카운드는 이듬 해 계속하여 뉴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인디언들은 철수하면서 인근의 배 한척을 붙잡아 거기에 타고 있던 선원을 모두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1692년에 시작되자

약 150명의 아베나키족과 튈리 신부가 요크, 잉글랜드계 식민자를 약 300명 정도 살해하고 포로로 잡은 뒤 마을을 불태웠다. 이것은

캔들머스의 학살로 불리워졌다.

 

1692년에 처치의 세 번째 아카디아 원정이 이루어져 그는 450명의 병사를 이끌고 페노푸스콧을 습격했다. 그리고 타노콕을 공격했다.

1693년에 뉴 잉글랜드의 프리깃 함이 다시 포트 로열을 공격하여 12채의 민가와 3개의 곡식창고를 불태웠다. 1694년 7월에 프랑스인

장교였던 클로드 세바스티앙 드 뷰와 아베나키 족장 모신이 이끈 250명의 아베나키족은 뉴 잉글랜드의 취락인 뉴 햄프셔의 더램을

공격했다. 그 후 1696년 8월에 뷰는 생 카스텐과 함께 페마킷 전투를 일으켰다.

 

1696년에 누벨 프랑스와 아베나키 동맹은 생 카스텐과 피에르 르 모이느 디벨뷰의 지휘하에 7월 14일에 메인의 페마킷을 공격했다.

이 보복으로 처치는 4번째의 아카디아 원정에 올라 시그넥트 협곡의 아카디아 부락을 공격하고 당시 아카디아의 수도였던 나슈워크

요새에도 공격을 가했다.

 

1689년 8월에 1,500명의 일로코이족이 누벨 프랑스의 총독인 데농뷰의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라시느의 프랑스계 주민취락을 공격했다.

데농뷰를 대신해 누벨 프랑스의 총독으로 취임한 루이 드 보드 드 프롱테낙은 논더거의 일로코이족 취락을 공격했다. 그리고 누벨

프랑스와 인디언 동맹은 1690년에 뉴욕의 잉글랜드 취락을 공격해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다.

 

1690년에 메사추세츠에 누벨 프랑스군이 침략하자 포트 로열을 공격하던 윌리엄 핍스경은 9월에 퀘벡으로 이동했다. 이 때

누벨 프랑스의 함대가 출동했는데 누벨 프랑스의 총독인 프롱테낙은 뉴 잉글랜드측의 전략을 탐지하여 병력을 퀘벡의 방어에

집중시켜 핍스의 군대를 격퇴했다. 그 후 프랑스는 포트 로열을 탈환하고 현지의 인디언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일로코이 연방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의 힘이 약한 것에 고민했다. 1693년과 1696년에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은 일로코이족의

부락을 휩쓸며 작물을 모두 황폐화시켰다. 1697년의 평화교섭 체결 후 일로코이족은 잉글랜드 식민자들과 헤어져 1701년까지

누벨 프랑스와 독자적으로 전투를 치루었다. 1701년에서야 몬트리올에서 프랑스와 일로코이족의 화목이 성립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합은 허드슨 만에도 영향을 미쳤다. 매년 모피교역소의 약탈과 재약탈이 반복되면서 1686년에는 디벨뷰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몬트리올에서 육로로 허드슨 만으로 이동해 무스, 루퍼츠, 올버니 등의 교역소를 점거했다. 윌리엄 왕 전쟁

발발 후 쌍방은 해전도 일으켜 1697년 9월에 허드슨만 해전에서는 디벨뷰의 펠리컨호가 단독으로 3척의 잉글랜드 군함을 격침시켰다.

 

디벨뷰는 요크를 포위해 함락시키고 이곳을 부르봉 요새로 명명했다. 후에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프랑스가 제임스 만, 잉글랜드가

요크를 확보할 예정이었지만 요크의 함락으로 인해 프랑스가 요크, 잉글랜드가 제임스 만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점거로 인해

요크에서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본 잉글랜드측에서는 불만이 매우 컸다.

 

1697년의 레이스웨이크 조약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의 전투는 일단락되어 양 식민지의 경계는 <전쟁 전의 상태로>돌아갔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부부의 사후, 메리 2세의 동생이던 앤이 즉위했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쥬공 필립이 스페인의 왕위를 이어 스페인과 프랑스가 맺어지자 유럽 및 식민지에 파급될 영향에

잉글랜드는 전전긍긍했다.

 

이것은 다시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로 이어지게 되어 <앤 여왕 전쟁>으로 발발하게 된다. 일로코이족은 유럽인을 상대로 한 전쟁에

거부감을 가져 양측 모두 선물로 회유했지만 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의 대립

 

 

1700년 11월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자 차기 왕위를 둘러싸고 1701년에 스페인왕 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엔 유럽의 소수 강대국간의 경쟁에 지나지 않았지만 1702년 5월에 영국이 스페인과 프랑스에게 선전을 포고하면서

전쟁은 확대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전투는 이러한 강대국의 식민지를 둘러 싼 경쟁으로, 이러한 불협화음은 영국 식민지 가운데서도

남서부의 캐롤라이나 식민지와 북부의 메사추세츠 직할식민지 및 뉴펀들랜드 섬(당시의 뉴펀들랜드 섬은 허드슨 만에서

무역과 새로운 식민지의 개척전선이었다)처럼 북부 및 남서부의 경계지방에서 가장 현저하였다.

 

영국 식민지 중 버지니아 식민지 및 뉴잉글랜드의 지배지역의 당시 추정인구는 25만명 정도였다. 이러한 식민지 인구는

연안부에 집중하여 내륙부의 식민지는 적었기 때문에 애팔래치아 산맥을 경계로 대부분의 유럽 이민자들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과 오대호의 남쪽 등 대륙의 내륙부에 정착한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역은 현지의 인디언 부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의 상인들은 이 지역으로 침투했다.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을 위해 조직망을 확립하여 많은 현지 인디언들을 제압하고 기독교도로 포섭했다.

스페인인의 인구는 약 1,500명 정도로 적었지만 그들이 선교한 인디언 인구는 2만명에 달하였다.

 

1699년에 프랑스인 탐험가는 미시시피 강 하구를 발견하고 그 부근의 몰파 요새에 작은 식민지를 확립했다. 그 후 이들은

내륙부로 향하는 통상로를 장악한 후 영국과 동맹을 체결했던 치카소족의 천적이었던 큰 부족인 촉토족과 우호관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선주민들의 대부분은 초기 탐험가와 상인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같은 유럽대륙의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프랑스인의 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도달은 캐롤라이나 식민지가 확립하고 있던 기존의 내륙통상 및 스페인의 영유권 주장을

위협하여 세 강대국 사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프랑스 및 스페인과 그 동맹국(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은 막 끝이 난 대동맹전쟁의

대립 당사국이기도 했다.

 

사반나 강 남부의 연안에 위치한 캐롤라이나 식민지와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상반된 영유권 주장은 로마 카톨릭의 스페인과

프로테스탄트의 영국이라는 종교적인 대립과 증오에도 불을 붙였다. 북부에서의 대립은 영토문제에 더하여 강한 경제적 요소를

내포했다.

 

뉴펀들랜드섬은 세인트 존스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측과 파라다이스를 거점으로 하는 프랑스측으로 나뉘어 양자 모두 몇개의

작은 상설 식민지를 소유했다. 이 섬은 또, 유럽에서 온 어부들에 의해 이용되어 많은 계절적인 식민지도 존재했다. 이러한 식민지에

영구거주한 이민자는 영국인이 2,000명 남짓, 프랑스인이 1,000명 남짓이었지만 보다 많은 계절적 방문자들이 늘어났다.

 

이들 이민자들은 그랜드뱅크의 어장을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여 현재의 뉴 브룬스빅 주 및 노바스코시아 주 전체를 포함한

아카디아와 현재의 메인 주를 포함한 메사추세츠만 직할식민지에서 온 어부들도 그랜드뱅크의 어장을 이용했다. 누벨 프랑스와

메사추세츠만 직할식민지와의 사이에서 국경선도 당시 불명확했다.

 

이미 이것은 대동맹전쟁에 수반한 윌리엄 왕 전쟁에서 대립상태가 되어 현재의 메인 주 캐스틴 부근에 위치한 페네푸스콧 만의

프랑스인 식민지에서도 페네푸스콧과 퀘벡 강의 영토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다. 세인트 로렌스 강, 메사추세츠의 주된 연안부의

식민지 및 뉴욕 사이의 경계지방은 당시 주인이던 아베나키족과 일로코이족같은 현지 인디언이 지배하여 이전 분쟁에서 영국 및

프랑스 쌍방이 원정에 이용했던 허드슨강과 샴플레인 호수를 잇는 회랑도 현지 주민의 지배하에 있었다.

 

인디언의 위협은 점염병과 더불어 앞서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인해 얼마간 잠잠했지만 인디언들은 식민지 지역 외에서는

큰 위협이었다. 루퍼트 랜드로 알려진 허드슨만 유역은 앤 여왕 전쟁에서는 거의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1680년대에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 기업간의 경쟁에 의해 많은 논쟁의 장면은 있었지만 1697년의 레이스웨이크 조약으로 허드슨만은 단 하나의 거류소를

제외한 모든 곳이 프랑스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1709년에 유일한 거류소였던 온타리오 주의 포트 올버니가 프랑스에게 공격당한 포트 올버니 전투가 유일한 중요사건이었다.

허드슨만 회사는 레이스웨이크 조약에 의해 그 지역이 반환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어서 앤 여왕 전후 전후교섭에 의해

그 영역의 반환을 요구하는 로비활동에 성공했다.

 

당시 북아메리카의 군사기술은 유럽처럼 발달하지는 못했다. 앤 여왕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세인트 오거스틴, 보스턴, 퀘벡 및

세인트 존스 등의 식민지엔 석조 구조물의 요새도 없어 포트 로얄 요새는 전쟁초기에서야 완성되었다. 몇 군데의 경계지역 마을은

목책으로 수비했지만 대다수는 총을 소지했기에 2층 구조의 통나무집에서 아래로 발포하여 대응하는 구조였다.

 

유럽인은 최대 사거리가 91m(100야드)의 활공식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지만 최대 사거리의 절반을 넘어설 경우 명중률은 낮았다.

일부 이민자들은 아직도 창을 장비하였고, 인디언들은 유럽인에게서 받은 무기 외에도 토마호크와 활 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했었다. 일부 이민자들은 캐논포같은 대포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유일한 효과적인 무기였다.

 

영국에서의 이민자들은 일반적으로 민병대로 조직되어 뉴펀들랜드에서는 몇 개의 소규모 군사조직이었다. 프랑스인 이민자들도

민병을 조직했지만 그들은 라 마린 식민지군으로 불리는 상비대를 보유했다. 이 군대는 일부 경험많은 사관들에 의하여 구성되어

프랑스 본국에서 보내진 신병들이 배속되었다.

 

그 인원은 500~1,200명 가량으로 그들은 중요한 인구집중지역을 중심으로 누벨 프랑스에 배치되었다.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수백명의 정규군에 의해 수비되었는데 스페인은 그들의 영토 내에서 인디언들을 제압한 후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이 방침은 파괴적인 결과를 거두어 전쟁 전에 플로리다는 8,000명의 인디언 인구를 포함했지만 전쟁초기에 영국의

습격으로 인해 인디언 인구는 200명까지 감소했었다.

 

 

앤 여왕 전쟁

 

 

18세기에 접어들며 영국 및 프랑스의 유력한 이민자들은 미시시피 강이 장래 발전과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

각각 경쟁적으로 다른 자의 활동을 방해하는 계획이 세워졌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탐험가였던 피에르 르 모앙 디베르빌은

캐롤라인 프로젝트라는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현지주민과의 관계를 쌓고 그 관계를 활용해 영국인을 쫒아낸 후 활동영역을

연안지대로 한정하는 계획을 전개했다.

 

그는 1670년에 로벨 가브리엘 드 라 사르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된 미시시피 강 하구를 다시 재발견하고 1699년에 모르파 요새를

만들었다. 이 거점과 1702년에 만들어진 모빌에서 디베르빌은 현지의 촉토족, 치카소족, 나체즈족 등 여러 부족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

 

캐롤라이나 식민지에서 영국상인과 탐험가는 1670년 이후 미시시피 강 유역에 널리 퍼진 아메리카의 남동지역 전체에 상당한

통상망을 확립했다. 플로리다에 있던 스페인인을 고려하지 않았던 이 계획에 1700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지사였던 조셉 브레이크와 1702년에 조셉의 뒤를 이은 제임스 무어는 프랑스 및 스페인의 권익을 희생하여 남방 및 서방의

영국식민지 확대전망을 표명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702년 1월에 디베르빌은 애팔래치족이 무장한다는 권고를 받고 스페인에 접근하여 영국과

그 동맹부족에게 사자를 보냈다. 스페인은 8월에 팬서콜라를 출발해 캐롤라이나 변경의 집산지로 향한 프란시스코 로모 데

울리자의 지휘하에 원정을 계획했다. 영국은 원정대의 사전 경고를 받고 플린트 강에 수비대를 조직하였지만 플린트강 전투에서

스페인인이 주도한 인디언 500명에게 살해당하거나 붙잡혔다.

 

정식으로 교전통지가 보내지자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무어 지사는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대해 군을 조직하여 지도했다.

1702년의 세인트 오거스틴 포위전에서 500명의 영국인 병사 및 민병은 300명의 인디언과 함께 세인트 오거스틴 마을을 점령한 후

방화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중요 요새를 탈환하지 못한 채 쿠바의 나바나에서 보내어진 스페인 함대가 도착하기 전 철수했다.

 

1706년에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아바나에서 보내져 온 스페인 및 프랑스 혼성부대에 의해 찰스턴을 공격받았지만 격퇴에 성공했다.

애팔래치족과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템크아족은 1704년의 애팔래치 학살로 알려진 무어에 의한 영국 원정대의 습격으로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이 습격에서 살아남은 소수만이 사반나 강으로 이주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1707년의 팬서콜라 포위전, 1709년의 모빌 전투 등을 이어나가 여러 인디언 부족들을 제압했다. 한편 1703년에

알렉산드르 르누프 드 라 발리에르 드 보바싱은 몇 명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및 500명의 인디언을 이끌고 뉴잉글랜드 식민지인

웰즈에서 팔머스를 공격했다.

 

이들은 160명 이상의 이주민을 살해하고 포로로 만들어 데려갔다. 1704년 2월에 장 바티스트 하텔 드 루빌은 250명의 인디언 및

50명으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거느리고 메사추세츠만 직할식민지의 디어필드를 공격했다. 이들은 거류지를 파괴하고 많은 이민자를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 후에 협상을 통한 포로교환에 이용했다.

 

뉴잉글랜드의 이민자들은 프랑스의 습격에 대해 효과적인 대항을 할 수 없었기에 그 보복으로 아카디아에 원정을 단행했다.

인디언 전사였던 벤자민 처치에 의해 인솔된 원정대는 그랜드 플레 및 시그네크트, 그 외 프랑스계 식민자들을 습격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습격대로 보복하자 지도자들은 협상에 나서 싸움은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이것은 원천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 채 포로교환 수준에만 머물렀다.

 

1705년 5월에 메사추세츠 지사인 조셉 더들리는 포트 로얄을 빼앗기 위해 원정을 계획했다. 존 마치가 이끄는 1,600명의 영국군은

요새를 포위했지만 빼앗지는 못하여 공방끝에 8월에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대응하여 프랑스는 뉴햄프셔 식민지를 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인디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여 대신 메시추세츠의 하버 힐을 습격하는 것으로 끝났다.

 

1709년에 누벨 프랑스의 지사였던 필립 드 리고 드 보들류는 보스턴 북부영역의 3분의 2는 프랑스와 인디언의 습격에 의해 방치되었다는

보고를 본국에 올렸다. 뉴잉글랜드의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프랑스인 및 인디언들은 약속을 어기고 포로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이에 1710년 9월에 프란시스코 니콜슨이 이끄는 3,600명의 영국군 및 식민지군은 일주일 간의 공방끝에 포트 로얄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아카디아 반도에서 프랑스의 통치는 종료되고 말았다. 한편 누벨 프랑스의 핵심지대였던 캐나다에 있던 프랑스인들은

뉴욕 식민지에 대한 공격에는 반대했다. 누벨 프랑스는 1701년에 일로코이족과 화평했기에 영국과 일로코이족을 자극해 다시 싸움을

벌이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뉴욕 식민지의 영국인들과 인디언들도 캐나다와 중요한 모피무역이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기에 누벨 프랑스의 공격에 반대입장이었다.

뉴욕 식민지의 올버니에서 인디언들의 대변자였던 피터 스카일러는 일로코이 연방에게 누벨 프랑스와의 전쟁에 관심을 가지라고

획책했지만 이에 반대한 일로코이족은 앤 여왕 전쟁에 중립을 선언했다.

 

1709년에 얼마간 재정적으로 지원을 영국 본토의 앤 여왕으로 받았던 프란시스코 니콜슨 및 사무엘 벤치는 누벨 프랑스에 대한

공격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샴플레인 호수를 경유하여 몬트리올로 육로를 통해 공격하는 것과 퀘벡을 해군에 의한 포격공격도 포함했다.

육로로 이동한 공격대는 샴플레인 호수 남부에 도달했지만 해군에 의한 퀘벡공격은 예정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해군에 의한 지원이

없자 철수하였다.

 

일로코이 연방은 영국군에게 얼마간 지원을 약속하긴 했지만 원정이 실패하자 지원을 철회했다. 이 실패 후 니콜슨과 스카일러는

영국 본토에 대해 북아메리카 전쟁에 대한 관심환기를 위하여 인디언 대표단을 런던으로 보냈다. 인디언 대표단은 런던에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켜 앤 여왕은 직접 배알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니콜슨과 스카일러의 노력으로 인해 1710년에 앤 여왕의 지원을 받은 니콜슨은 포트 로얄의 점령에 성공했다. 니콜슨은 이 성공을

내 걸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1711년에 퀘벡으로의 재공격을 위한 지원을 약속받아냈다. 1711년의 공격계획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육로와 해로 양편의 공격을 필요로 했었는데 이는 실패로 끝났다.

 

호벤든 워커 제독이 이끄는 15척의 전열함 및 5천명의 군대를 실은 수송함이 보스턴에 도착했지만 이 인원은 당시 보스턴의 식민지

인구와 맞먹을 정도여서 전쟁준비와 물자제공 능력이 빈약한 식민지 정부에게 큰 중압이었다. 7월말에 퀘벡으로 출항한 원정함대는

세인트 로렌스 만에 입항했지만 안개 속에서 몇 척이 하구 연안의 암초에 부딫치며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700명의 수병들을 상실하자 워커 제독은 원정을 중지했다. 한편 니콜슨은 육로로 몬트리올을 향해 출발했지만 워커 함대가

조난당한 소식을 듣고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 원정당시 일로코이족은 영국과 함께 싸우기 위해 수백명의 전사를 제공했지만 프랑스측에도

원정 소식을 알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취하였다.

 

결국 1712년에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는 정전을 선언하여 이듬 해에 화평조약이 체결되었다. 1713년의 유트레히트 조약에 의해

영국은 아카디아(영국에 의해 노바스코시아로 개명), 뉴펀들랜드 섬의 주권, 허드슨 만 지역 및 카리브해에 떠 있는 세인트

크리스토퍼 섬의 군도들을 획득했다.

 

프랑스는 일로코이 연방에 대한 영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내륙부의 인디언들과 무역에 대해 모든 나라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케이프 브랜튼 섬을 포함한 세인트 로렌스 만의 모든 섬들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뉴펀들랜드 섬의 북부연안에서

건어물을 포함한 어업권을 획득했다.

 

스페인령 플로리다는 앤 여왕 전쟁에서 손실한 경제적 피해와 인구감소를 되돌릴 수 없어 후에 1763년의 파리 조약에 의하여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도 양국 본토에서 보내져 온 군의 유지와 늘어난 이민자 및 거듭된 전쟁의

피해복구로 엄청난 지출이 발생해 큰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왔다.

 

한편 프랑스인들은 유트레히트 조약의 통상조건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이 원거리의 인디언들과 교역하는 것을 방해하여

일로코이 연방의 영지에 나이아가라 요새를 건립했다. 멕시코만 연안의 프랑스계 식민지는 계속 성장하여 1718년에는 뉴올리언스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또 프랑스는 스페인 통치하의 텍사스 및 플로리다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스의 교역망은 멕시코만으로

주로 수로를 통해 대륙으로 침투했다. 영국 및 스페인의 충돌을 조장한 후 오하이오 강 계곡을 따라 미시시피 강의 분기점까지 교역망을

늘린 프랑스는 영국의 교역망 및 애팔래치아 산맥을 횡단하는 영국 식민지와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서로 모순된 교역망 주장은 결국 1754년의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된다.